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새겨주시고,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진정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1-5, 10,11절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신 하나님은 다시 두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과 같이(1,4절), 처음 판에 쓴(2절), 처음 것과 같은(3절) 등의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시 약속의 땅을 차지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과 사명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사역과 중보 사역을 통해 우리 죄를 씻으시고 새로운 삶,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6-9절 대제사장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절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출 32:21-24). 마땅히 심판받아야 했지만, 하나님은 아론의 죄를 용서하시고 아론의 가문이 계속해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비록 아론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아론의 후손들에게 친히 기업이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론의 죄를 압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가 우리 일탈과 불순종보다 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죄의 자리에서 빨리 회개하며 일어납시다.
12-16절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바꿔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청종하는 것이 행복의 열쇠입니다. 일 반 사회에서도 법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듯, 하나님이 주신 모든 명령과 규칙은 우리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순종하기 부담스럽고 버거운 말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것임을 믿고 힘껏 순종한다면,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7-22절 하나님처럼 자비롭고 정의롭게 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길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방법입니다. 불의에 굴복하고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어떤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을까요? (매일성경, 2024.01/02, p.76-77, 행복의 조건, 신명기 10:1-22에서 인용).
①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새겨주시고,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진정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신 하나님은 다시 두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과 같이(1,4절), 처음 판에 쓴(2절), 처음 것과 같은(3절) 등의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시 약속의 땅을 차지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과 사명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사역과 중보 사역을 통해 우리 죄를 씻으시고 새로운 삶,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② 대제사장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절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출 32:21-24). 마땅히 심판받아야 했지만, 하나님은 아론의 죄를 용서하시고 아론의 가문이 계속해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비록 아론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아론의 후손들에게 친히 기업이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론의 죄를 압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가 우리 일탈과 불순종보다 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죄의 자리에서 빨리 회개하며 일어납시다.
③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바꿔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청종하는 것이 행복의 열쇠입니다. 일 반 사회에서도 법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듯, 하나님이 주신 모든 명령과 규칙은 우리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순종하기 부담스럽고 버거운 말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것임을 믿고 힘껏 순종한다면,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④ 하나님처럼 자비롭고 정의롭게 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길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방법입니다. 불의에 굴복하고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어떤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