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사상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노자의 도
"천지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음양의 두 기가 서로 작용하여 조화로운 기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노자가 주장하고 있는 도란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근원과 법칙임을 알 수 있다.
도는 기(물질)이면서 리(법칙)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만물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가 만물을 발생한다고 했을 때 도는 혼성된 물의 존재이다.
그래서 "혼돈 가운데 이루어진 무엇이 있으니 그것은 천지에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도는 만물을 떠나 있는 일종의 절대적 '리'이다.
상도(常道), 즉 영원불변하는 도라 불린다.
영원불변하는 도는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있으므로 형상이 없다.
그래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뒤섞여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도는 어떠한 성질을 가질까?
첫째,
도는 이름이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그러한 도(常道)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도를 무한한 것으로 어떠한 규정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계가 있는 명칭으로 이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논어』에서 발견되고 있는 도란 무엇인가?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공자가 강조한 인과 예는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도는 참된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둘째,
도는 공평무사하다.
노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도로 변화시키면서 도의 성질을 객관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고,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한다.
"천지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는 아무데나 버리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도가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함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도는 허정(虛靜)하다.
"도는 텅비어 있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도는 공허한 것이어서 영원히 충만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도는 또한 고요히 머물러 있다."
만물은 모두 장대하게 생장하지만 최후에는 모두 그것들이 본원인 도로 돌아간다.
이것을 두고 만물이 근원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데 결국 고요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자의 덕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덕론이란 만물의 본성을 토론하는 것이다.
노자는 우주의 본원인 도가 만물에 깃들여 만물의 본성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만물의 본성은 곧 도의 덕성이다.
노자가 말한 '덕'은 '자연'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하다',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욕망도, 행위도 없는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노자의 윤리론
노자는 최고의 인격을 갖춘 성인은 우주의 본원인 도의 덕성을 체현하고 무위자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한 도덕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가. 갓난아이와 같이 유약(柔弱)하라.
"덕성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자는 마치 처음 태어난 갓난아기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아직 남녀의 성교도 모르는데 고추는 서 있다.
최고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단단한 것으로 변한다.
초목도 자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세고 강한 것은 죽음에 속하는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에 속하는 무리이다.
따라서 무력이 강하면 오히려 적을 이길 수 없고 , 나무도 억세면 결국 생명을 마치고 만다.
그러니 강하고 큰 것은 결국 아래에 깔리게 마련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로 오르게 마련이다."
가. 돈후하고 질박해야지 경박하거나 겉치레를 꾸며서는 안된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게 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있게 되었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있게 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있게 되었다.
예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엷어서 나타난 것이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재앙의 시작이다.
근거도 없이 하는 억측은 도의 겉치레에 지나지 않으니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따라서 대장부는 돈후함으로 처신하지 경박함으로 처신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진실함으로 처신하지 겉치레로 처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박함과 겉치레를 버리고 돈후함과 질박함을 취한다."
따라서 그는 성인이라면 겉으로는 비록 남루한 옷을 결쳤을 망정 안으로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은 듯하다고 하였다.
나. 겸허히 아래에 처해야지 교만하거나 우쭐대서는 안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강이나 바닷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곳에 잘 처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분명하지 못한 것이며, 자기가 식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총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를 뽐내는 것은 도리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니 후왕(侯王)은 스스로를 '외롭고(孤)', '부족하며(寡)', '좋지 못한(不善)' 사람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뿌리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최고의 영예는 도리어 영예가 아니다.
옥같이 귀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돌같이 굳세기를 바라지 않는다."
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겸손하게 아래에 처한다고 표시하여 영원히 자신의 겸허한 미덕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 사심과 욕망을 줄여야 한다.
"욕심이 많은 것보다 죄악이 큰 것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해악이 큰 것이 없으며, 얻겠다는 탐욕보다 죄의 근심이 큰 것은 없다.
만족할 줄 알아 그치는 사람만이 영원히 만족한다."
"성인은 사사로이 자신의 것을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많게 된다."
노자가 사심이 없음을 사심에 있음에 도달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한 것은 아지곧 사심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 원칙은 결코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는'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있는' 그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라.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선한 사람도 그를 선하게 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나는 그를 선하게 하니, 이것은 덕이 선하기 때문이요, 신실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고, 신실치 못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니 이는 덕이 신실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란 '선이 결핌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도는 선과 악을 갈라서 악을 박멸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