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과정/강유선
요즘 아이들은 신축 아파트가 집값이 많이 오르니 부모님과 함께 이사를 다니는 일이 잦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삼십년 넘게 아침엔 태양의 정기를 느낄 수 있는 옥상과 '쪼로롱'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화단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스무살이 되서는 잠깐 고향을 떠나 살긴 했지만 지금 내려와 사는 걸 후회하진 않고 있다. 위장이 안 좋은 탓에 밥을 먹고 나면 화장실을 가는 건 예사였고 더위도 많이 타 탈진도 자주 했다. 그래서 포도를 깨끗이 씻어 껍질과 씨까지 다 먹어가며 건강관리를 했다. 원래 국에 있는 파, 마늘 이런 것은 안 먹었는데 감기를 빨리 나으려고 안 남겼다. 이때는 요리도 잘 못해 자주 맛없는 걸 먹었다. 맛있는 집밥이 너무 그리웠다. 흔히들 기회만 있다면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나는 너무 아파 놔가지고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요즘은 결혼하려고 신혼집을 알아보는데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을 구하러 다니진 않고 있다. 왜냐하면 간호도 받지 못했던 얘전 기억에 몸서리가 쳐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꿈은 이사를 참 많이 다녔다. 어릴 땐 동시 통역사, 환경운동가, 커서는 동화작가. 어려서 영어로 쫑알거리는 걸 참 좋아했다. 원서를 외웠고 다른 나라 문화를 알아가 재밌었다. 그러다 입시 영어 공부를 하며 흥미가 뚝 떨어졌다. 자연스레 이중 언어를 구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고등학교 때는 막연히 상경 계열에 진학해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사십에 그만 두게 되는 곳을 뭐 할려고 들어가려고 하냐며 채근하셨다. 마침 부모님 가게에 공립 유치원 선생님, 장학사, 어린이집 원장님 등 유아교육 계열 분들이 많이 오셔서 나라에서 많이 뽑을 거라고 귀띔해 주셨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아교육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졸업반이 되서 임용 공부를 하는데 내가 이걸 왜 준비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안전사고도 너무 걱정 돼 막판에 집중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일하면서는 성대결절이 와 미련없이 그만뒀다. 계속 긴장을 놓지 않고 아이들을 돌봐야 되는 게 많이 힘들었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순간 방심하면 다쳤다. 점점 내 자신이 메말라가는 것 같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선 한동안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될지 잘 모르기도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대기업 취직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 전공으로는 잘 뽑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신한생명에 찾아가 정규직 관리자가 되고 싶다며 일하게 해주라고 했다. 원래는 나이가 적어 안 되는데 젊은 애가 패기 있다며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매달 열건 씩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지점장이 발탁 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눈물을 훔치며 그만두었다. 이제는 '회사랑 인연은 아닌가보구나.'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엔 여행이나 많이 다닐려고 비교적 시간 사용이 자유롭다고 하는 유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구몬선생님을 해봤다. 그런데 말하다가 목소리가 안 나왔다. 이년 가량 일하다가 정리했다. 서른살도 되어가고 '이제는 내가 뭘하고 살아야 좋을까?' 진지하게 내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글 쓰고 그림 그릴 때 행복하니 동화작가가 되야 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지금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정시퇴근하는 직장이었다. 학교 행정실 직원, 병무청, 우체국 등 업무가 과중하지 않고 벌이가 안정적인 곳들이 추려졌다. 많이 모으진 못했지만 저축한 돈으로 시험 준비를 했다. '그래, 이거다.'라는 생각으로 공공도서관을 다녔다. 도서관 총무부에서 일하는 선생님들도 뵐 수가 있었다. 교육행정직 공무원이니 오며가며 어떻게 일을 하는지 대충은 볼 수가 있었다. 9시도 채 안 되서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했다. 거의 내가 있는 시간만큼 업무를 했다.
얘기할 기회가 있어서 들었는데 야근수당도 안 나온다고 했다. 솔직히 사무직은 내키진 않았는데 이 정도로 고생할 줄은 몰랐다. 마음이 식어 영 집중을 못 했다. 공무원은 다 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만두고 알바를 했는데 연차에 휴가에 정시퇴근에 추가근무수당까지 주는 내게 딱 좋은 곳에 들어가게 됐다. 여기서 돈도 많이 모으고 지금의 남자친구도 만나고 한동안은 즐거웠다. 엘지 헬로비전이었는데 방송, 인터넷을 판매했다. 하지만 가치있는 일을 좀 하고 싶었고 영업 조직이 그렇듯이 너무 결과만 쪼아대니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집에 와서 피곤해서 자고 업무의 결이 내 성향과는 많이 달라 여기도 정신적인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책 읽으며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고민해 보았다. 친구가 영어를 가르치며 여행작가를 하고 있었다. 나도 따라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교육엔 회의를 좀 느껴 선뜻 일을 벌리기 쉽지 않았다. 내 경험을 고려해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다. 마침 논술이 생각났다.
지금 삼년째 하고 있는데 후회하진 않고 있다. 매일 아이들이랑 놀고 먹고 책의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글도 봐주며 너무 재밌게 지내고 있다. 마음도 읽을 수 있어 동화의 소재도 많이 수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나중에 내 꿈이 또 이사갈 수 있는 여지야 있겠지만 정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 십년 간 남동생에게 용돈 받아 쓰고 아빠께는 왜 갈수록 못나지냐는 말을 듣고 집에서는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애로 취급받긴 했는데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어 지난 설움이 다 씻겨졌다. 이제는 지금 만나는 사람과 평생 행복하게 살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졌다. 나의 크고 가장 간절한 바람이다. 실한 열매를 맺을려면 매서운 바람이 꽃을 떨어뜨려야 하나보다.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묵묵히 지켜봐 준 엄마가 계셔 견딜 수 있었다. 속으론 많이 답답하셨을텐데 겉으로 티를 안 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더이상 걱정 끼치지 않게 직업 바꾸지 않고 최선을 다할려고 한다. 키운 보람을 꼭 느끼실 수 있게 말이다.
첫댓글 교수님, 너무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젊은 시기에 많은 생각과 경험을 하셨네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듯이 앞으로의 삶에 좋은 자양분이 되겠네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사를 많이 다녔네요. 그래도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서 다행입니다.
이사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와! 정말 부지런히 사셨네요. 노력한 만큼 꼭 좋은 성과가 있을거예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발 그래야 될텐데.. 노력없이 이뤄지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열심히 살아봐야겠어요.
선생님을 통해 요즘 청년들의 삶을 엿보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시니 이미 부모님은 보람을 느끼셨을 것 같군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선생님
젊은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나중에는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로 후회한다고 하잖아요.
도전하는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이직 못 한 친구들도 종종 있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게 부럽데요.
선생님. 항상 응원해요. 저도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끈기가 없어서 망설여져요. 학습지 교사도 힘들어 보이고 그냥 다 힘들어보여요. 샘은 논술학원 운영하시는 거 대단하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엄마 일이 제일 힘들죠.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용기 있네요. 꿈을 꾸는 데 그치지 않고 뛰어드는 모습이 좋아요.
불나방이 될지언정 즐거운 일에 투자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