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을 배출한 프랑스 개신교회는 16세기에 두 개의 암초에 부딪처 종교개혁의 성공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가톨릭 국가의 늪에서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는 30년 종교전쟁의 피 흘림이다(1618-1648년).
종교전쟁은 16세기 후반에 8차례에 걸친 신,구교간의 분쟁으로 20만 명이 죽는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경험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1572년 파리에서 성 바돌로매 대학살 당시 무려 3천 명의 개신교회 리더들이 희생당했다.
그리고 르네상스와 인본주의이다(데카르트와 볼테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같은 시기에 일어나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 알려진 근대 철학의 아버지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그 뒤를 이어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근본 원리를 확립한 관용 정신의 볼테르는 신본주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인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양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지만 이원론 또는 무신론을 믿은 것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저들의 인본주의 철학을 용서할 수 없었고 <핑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같대다'라든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그처럼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던 철저한 신본주의 신앙인 철학자도 있었다.
◆ 프랑스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피에르 발도(Pierre Valdo. 1173)
그는 로마 교황청의 교권화에 반발하다가 화형당했다.
그는 사제의 독신주의, 성례, 십자가상,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유아 세례 등에 반대했다.
자끄 르페브르 데따브르(Jacques Lefevere d'Etaples)
그는 마르틴 루터(1517년)보다 9년 앞선 1508년 파리대학의 성서원전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시편 주석과 바울 서신 주석을 작성하여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성서를 번역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 연옥, 성자 숭배가 아니라 복음에서 발견했으며 구원은 관습과 의식과 절차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진리를 설파했다.
그는 최초의 종교개혁자였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 중에 장 칼뱅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과 같은 기욤 파렐 (Guillaume Farel)도 있었다.
개혁교회와 낭트 칙령(1598년)
낭트 칙령(Edit de Nantes)은 앙리 4세가 1598년 4월 13일 선포한 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로써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낭트 칙령의 폐지(1685년)
루이 14세는 가톨릭만을 국교로 인정함으로써 절대 왕정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자 1685년 10월 18일 '풍텐블로' 칙령(Eilt de Fontaineblcau)을 내려 낭트 칙령을 폐지하였다.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위그노들(개신교인)은 신변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많은 신앙인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1685년에서 1689년 사이에 해외로 이주한 위 그노는 20만 명에서 30만 명에 달한다.
종교의 관용론(1789년)
루이 16세의 관용(Tolerance) 칙령에 의해 개신교인과 유대인에게도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 후 1789년 인권선언에서는 신앙의 자유와 함께 공식적으로 백 년간의 종교 핍박은 막을 내린다, 1905년에는 정교 분리가 입법화되었으며 1909년 프랑스 기독교 총연맹(FPF)이 창립된다.
1945년 복음주의의 새 물결
1930년 르이브르(e Havro)에서 더글라스 스콧(Douglas scott) 목사의 오순절교회 부흥 운동이 평범한 카페에서 시작된다. 그의 구원과 치유의 설교,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1,000명이 세례 받으며 5년 안에 르아브르에 3개의 개신 교회가 세워지고, 2차대전 전까지 40여 개 교회로 증가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복음주의 교회는 프랑스 개신교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2,300개 이상 교회).
노르망디 상륙 이후의 충격
미국 기독교인들이 프랑스 개신교의 열악함에 충격을 받으면서 유럽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1952년, Lamorlaye).
Greater Europe Mission 운동은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전도 본부의 사역이다. 그 결과 1950년대 교회개척 사역이 추진(Mision Team)되었으며 1946년 빌리 그레이엄 첫 복음집회(저녁은 Youth for Christ), 그 이후 1954, 1963, 1986년 집회를 통하여 복음의 확산이 일어났다. 현재 600명 정도 미국 선교사들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중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개신교단 루터-개혁교회가 통합되다(2013년)
두 교단은 남쪽 리옹에서 열린 공동총회에서 통합을 선언하고 '프랑스연합개신교회(EPUF)'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통합교단인 EPUF는 프랑스 전역의 960개 예배처소와 500명의 목회자, 40만여 성도를 아우르게 된 것이다.
개혁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때 칼뱅주의를 추 종한 위그노의 후손이다. 위그노는 1562년 위그노 전쟁과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 등으로 박해를 당하고 수십 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개혁교회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개신교단으로, 동부 몽벨리야르와 독일 접경 알자스로렌을 제외한 프랑스 전 역에 교회가 있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회는 16세기 몽벨리야르를 중심으로 생겨나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현재 대부분 몽벨리야르와 일드 프랑스 주에 분포돼 있다. 두 교단의 통합 논의는 1960년대에 시작됐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다가 2007년부터 접점을 찾았다.
프랑스에서 기독교란?
지금도 프랑스에서 기독교란 천주교를 말하며, 교회란 천주교회의 성당을 의미한다. 16세기 종교개혁 기간 중에는 국민의 46%가 개신교인이었던 화려한 역사를 경험했지만 오랜 종교전쟁과 수많은 박해와 그리고 르네상스를 겪으면서 20세기 말까지 개신교는 2%에 활과한 극소수로 약해졌다.
1905년 정교 분리가 입법화되기까지 오랜 기간 신, 구교간 갈등의 골이 해소되면서 다시 인본주의 사상인 합리주의와 세속화란 늪으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서 복음주의 성향의 영적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개신교회는 약간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7년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인들이 매주 예배 드리는 인구는 2백 만을 나타내고 있으며 1990년대 15%에 비하면 매우 다행스러운 현상이다(프랑스 총인구 6500만의 3.1%). 여기에 반하여 가톨릭은 87%이며 이들 중 매주 미사 참여자는 6% 이하일 뿐이다.
2013년 프랑스 개신교의 대표적인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의 통합은 프랑스 개신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염원하는 노력이며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
▶이극범 목사의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2)…머리말과 목차 : https://www.newsnr.net/15769
▶파리장로교회를 30여 년간 섬긴 이극범 목사의 역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 김삼환 목사와 주철기 전 주프랑스대사 추천사 : https://www.newsnr.net/1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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