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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 상국 노소재(노수신)가 석가산에 십청정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찬 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 또한 푸르나 십청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
◉ 상국 노소재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
인생 70이 드물다면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가정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가 대구 부사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과 하양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 김취문이고, 하양 현령은 사문 민호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 명월루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 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를 현판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
◉ 고려 때에 이규보와 진화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에 이른바,
“이정언ㆍ진한림의 쌍운에 주필(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이 편찬한 《필원잡기》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 극일과 중 탄연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빈궁과 영달,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을 부러워하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
◉ 세조는 선위를 노산(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이라고 하니, 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ㆍ유응부ㆍ김질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 정창손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과 대신 김종서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에 신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 남효온이 편찬한 《육신전》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하고 필법이 고묘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에 장원하여 영총이 지극하고 명망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성주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하였다.
◉ 과장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의 아들인 이정빈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하여 시관에게 경서를 강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상)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심정)는 양천현 동북쪽에 있는 공암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이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하였다. 또 사문 장옥은 서문을 4. 6변려체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이라 칭찬하며 등왕각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한양성 서쪽에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십리나 되는 긴 강은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깊은 물에 달려든 듯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강우가 낯을 스치니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하였다. 이 밖에도 경구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ㆍ《강호기문》ㆍ《유양잡조》ㆍ《시인옥설》ㆍ《학림옥로》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의 《파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과 우리나라에서는 서거정의 《태평한화》ㆍ《필원잡기》ㆍ《동인시화》, 이육(리륙)의 《청파극담》, 성현의 《용재총화》, 조신의 《소문쇄록》, 김정국의 《사재척언》, 송세림의 《어면순》, 어숙권의 《패관잡기》, 권응인의 《송계만록》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은 발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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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경(沈守慶)]
시대: 조선 초기~중기
출생-사망: 1516 ~ 1599
분야: 서예
직업: 문신,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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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초기~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조부는 좌의정 심정(沈貞), 부친은 직제학 심사손(沈思遜)이다.
- 마포구 아현동에 거주했다.
- 1546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정언이 된 후 호조좌랑 · 이조정랑 ·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555년 홍문관 직제학으로 특진했으며 이어 강원도 관찰사와 승지를 지냈다.
- 1559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고, 1562년 경기도 관찰사에 보임되었다. 이때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의 이장과정에 대한 인책으로 파직당했다가, 얼마 후 서용되어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이후 대사헌 · 평안도 관찰사 · 대사성 · 형조참판을 지냈다.
- 선조 즉위 후 함경 감사와 부총관을 역임한 후 1574년 2월 7일부터 11월 28일까지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형조 판서로 전임했다가 1583년 전천(專擅)으로 탄핵받아 물러난 이이(李珥)의 뒤를 이어 병조 판서가 되었다.
- 정여립 옥사(鄭汝立獄事) 직후인 1590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심수경,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로하기 때문에 임금을 호종하지 못하고 충청도 내포(內浦)로 피난하였다가 마침 그 지역에 의병이 결성되자 우두머리로 추대되고 조정으로부터 도체찰사로 임명된 후 다시 충청도 지역의 의병을 총괄하는 건의대장(建義大將)으로 직함이 바뀌었다. 이때 각처에 분산된 의병을 규합, 수만 명의 의병으로 한두 곳의 왜병소굴을 공격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호응이 적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난중에 정릉(靖陵)이 왜군에 의해 파헤쳐져 시신이 노출되고 옥체(玉體) 여부를 판별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자 기구대신(耆舊大臣)으로 전고(典故)에 밝다 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어 이를 봉심(奉審) · 수습하였고, 왜란이 끝난 뒤 83세의 고령으로 치사(致仕)한 후 과천으로 은거하였다. 50년이 넘는 벼슬살이를 통해 몸가짐을 근약(謹約)하고 청빈하게 한데다 자질이 영민하고 옛 제도에 밝으며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원한을 사지 않음으로써 조부 심정(沈貞)이 사림에 지은 죄를 덮어버리게 하였다고 평해졌다. 75세와 81세 때에 비첩(婢妾)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여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시문을 모은 『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과 『청천당견한잡록(聽天堂遣閒雜錄)』이 있는데, 특히 유한잡록에는 「동호(東湖) 독서당기(讀書堂記)」가 있어 오늘날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독서당의 규모를 알려준다. 행서체로 쓰여진 심수경의 간찰에 나타난 글씨는 획이 온화하며 행간을 잘 맞추어 글자의 크기를 고르게 했으며, 진나라 왕희지의 필법에 심취한 것이 특징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심수경 [沈守慶]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