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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주석 ♡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전기(傳記)이다. 마가는 주로 로마 사람들에게 읽게 하고자 기록하였으며 최초로 알려진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다. 마가는 사건에 대해서 주해 없이 간단 명료하게 전한다. 또한 간접화법 보다는 직접화법을 많이 사용했으며(막4:39, 막5:8, 막9:12, 막6:23, 막9:25, 막12:16 등) 다른 복음서들의 과거형보다는 현재형이 많이 사용되었다(막1:40, 막2:3, 막11:1, 막14:43 등). 이런 이유로 이야기 전체가 급박하게 전개된다. 이런 관계로 "곧, 직접, 바로, 즉시(eujqevw")"란 부사가 41회나 사용된 반면 마태복음은 5회 누가복음(눅6:49)은 1회, 요한복음(요13:30, 32, 19:34)은 3회만 나타난다. 마가가 사용한 헬라어는 팔레스타인 용어인 아람어를 직역해 놓은 것 같은 흔적이 있고 또한 아람어를 그대로 인용하여 번역한 곳도 있다(막5:41, 막7:34, 막14:36, 막15:34).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이방인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성전 청결 사건(막11:17)과 미래의 복음선교(막13:10, 막14:9)와 연결시켜 알 수 있다. 아울러 마가복음은 인명이 자세히 기록되고 예수님에 관한 사건은 매우 생생하며 사실적으로 기록한다(막1:22, 27, 막3:5, 막6:30, 막14:33 등).
1:1-2 표제
1절 !Ihsou' 예수(마1:21 참고) 그리스도 Cristou'(크리스마)는 "기름, 기름부음"의 crivw에서 파생한 단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말한다. 복음 eujaggelivou(유앙겔리온) 마16:15 참고하라. 시작 !Arch;(아르케)인데 이 말은 "태초, 본질"을 뜻한다. 마가는 그 시작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으로 말함으로 자신의 책이 아닌 예수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1:2-8 세례 요한의 사역
마3:1-12, 눅3:1-20 비교하라. 2절 네 길을 예비하리라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이사야40:3절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씀이 예언되었음을 상기시켜 예수 그리스도 뿐만이 아니라 이미 그의 앞에 오게될 세례 요한도 예언되어 하나님의 예비 된 계획에 의해서 시작됨은 말한다. 구약성경이 신약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성취이다(마5:17). 3절 광야 ejn th'/ ejrhvmw/(엔테-에레-모) 헤브론과 사해 사이에 있는 거친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헨드릭슨은 바벨론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있는 시리아 사막을 가리킨다고 했다. 소리 fwnh(포-네-)는 세례요한이 예수에 대해서 전하는 생명의 소리를 말한다. 첩경 trivbou"(트리부스) "바퀴자국, 흔적, 길"을 뜻하며 잘 밟아서 평탄해진 길을 말한다. 원어의 이 단어는 세례요한의 사역에 관한 곳에서만 나타난다(마3:3, 눅3:4). 6절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이는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다닐 때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사생활이 없음을 보여주며 먹는 것과 입는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외치는 자의 사역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7절 신들메를 풀기도 lu'sai to;n iJmavnta(루-사이 론 히만타) 신발의 끈을 뜻한다. 신 끈을 푸는 일은 노예(奴隸)가 하던 일이었다.
1:8-15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마3:13-17, 눅3:21, 요1:32-34 비교하라. 요한은 죄 없으신 예수를 알아보았다. 8절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몇 가지로 이해되고 있다. 첫째, 그의 겸손을 나타내 보이심이요 둘째, 누구든지 죄 사함으로 깨끗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요, 셋째, 앞으로 불 성령이 임할 것을 말씀함이다. 이런 예수의 모범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마3:5-6). 10-11절 신학자 아란콜은 이 구절은 신약에 있어서 가장 "삼위 일체적"인 구절이다. 성령과 성부가 함께 여기에서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를 하신 것처럼, 인간의 가슴속에 재창조의 새 역사를 시작하는 바로 이 순간에 삼위 하나님이 똑같이 역사 하는 것은 지극히 어울리는 일이다. 여기 요단강의 뚝 에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또 하시고 성령은 또 물위를 운행하신다.라고 하였다. 마태복음(마4장)과 달리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시험장면이 13절에만 언급되어있다. 13절 들짐승 qhrivwn(데-리온-)을 말함으로 이 지역이 황량한 광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산돼지, 여우, 이리, 표범 등이 있다. 14절 마가는 갑자기 세례요한의 일을 간단히 기록한다. 이는 세례요한이 헤롯의 부도덕을 책망한 후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고, 바로 이 사건이후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세례요한까지 구약선지자의 활동이 마쳐지고 이제 예수로부터 신약 시대를 여는 출발점을 알리고 있다.
1:16-28 4명의 제자를 부르심
마4:18-22, 눅5:1-11 비교하라.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제자들을 부르는데서 시작하신다. 처음으로 부른 네 명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던 베드로, 안드레,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셔서 야고보와 형제 요한을 부르셨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이들을 데리고 그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에 충실히 그리고 특별한 곳이 없는 평범한 어부들을 부르셨다. 이것은 누구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17절 따라 오너라 Deu'te(듀-테)는 [자! 오라]는 뜻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 부르심에 응함으로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도 같은 의미의 부르심이다. 21-28절 그리고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신다. 25절 잠잠하고 Fimwvqhti(휘모-데-티) "입에 자갈을 물리다"는 뜻으로 귀신은 24절에서 자신들을 멸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34절).
1:29-39 베드로의 장모와 병자를 고침
마8:14-15, 눅4:38-39 비교하라. 29-31절은 제자들의 가정생활을 희미하게나마 전달해 준다. 베드로의 부인은 후에 남편과 함께 선교여행에 동행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 9:5에서 바울은 이점을 특별히 언급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인식하리만큼 자신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기록한 곳이 없다. 이곳은 제자들의 가정 문제가 나타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도 특별히 기록하고자 한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32절 저물어 해 질 때에 Oyiva"(옵시오스) 당시 유대인의 날짜 계산은 해가 지면 다음날이 되었다(마14:25 주석을 보라). 이곳에서는 안식일이 지나 다음날이 되므로 병자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데려오니 e[feron(에훼론) 계속하여 그칠 사이 없이 데려왔다는 뜻이다. 수많은 병자들이 메웠고 예수님은 새벽이 되어서야 귀신을 쫓아내신 것으로 마치셨다.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당부하셨다(마5:44, 마6:5, 마14:23, 마21:13, 마24:20, 마26:42, 막6:46, 막9:29 막11:25, 눅1:10, 눅5:16, 눅6:12, 눅11:1, 눅20:47, 눅22:45).
1:40-45 문둥병을 고침
마8:16-17, 눅4:40-41 비교하라. 여러 병자들이 있었지만 마가는 문둥병자의 고침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문둥병 자는 사회적인 외면과 동시에 아무나 접근하기 어려운 옮겨지는 더러운 병으로 인식되어 왔었기 때문일 것이다. 40절 그러나 이 문둥병 자는 이러한 소외됨을 뿌리치고 예수께서 라면 자신의 병을 고쳐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나아온 것이 분명하다. 이 병자는 간구 하여 parakalw'n(파라칼론) "기도하다, 요구하다, 부탁하다"의 뜻이 있다. 이 말은 요14:16의 "보혜사"란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kaqarivsai(카다리사이) "깨끗케 하다, 정결케 하다"란 뜻으로 고쳐준다는 의미보다는 깨끗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민망히 여기시며 그의 징그러운 몸에 손 데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증거하라 eij" martuvrion(에이스 말투리온) 병 고침 받은 사실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 보증을 얻지 못하면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레14:1-34).
제사장
제사장 및 대제사장을 뜻하는 단어들 중에 히랍어의 iJerei'(히에류스), ajrcierevw"(아르키 이에류스)는 한가지의 경우만을 제외하고는 늘 구약의 유대의 제사장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단 한가지의 경우는 사도행전 14:13에서의 제사장이란 말인데 이 경우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지방에서 제우스 제의를 주관하는 이교도를 뜻하고 있다.) 유대교에서 제사장직은 레위지파 사람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직분으로 임명에 의해서 이루전 것은 아니며 혈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다만 대제사장의 경우에 신약시대 때 유대가 로마의 관할할 때 황제나 총독이 제사장 중에서 임명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께 대한 신학적으로 그의 사역을 다루며 언급하고 있다(히7:5, 20-23, 히9:6, 히10:11). 요한계시록에서도 이 단어가 나타나는데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일컬어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라고 불려진다(계1:6, 계5:10). 베드로전서 2:9에서는 구체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구약의 출애굽기 19장 6절을 연결하고 있다. "제사장"이란 단어는 구약 700회 이상, 신약 80회 이상 나타나는데 경우에 따라서 수식어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heK(코헨)인데 이 용어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된 용어는 아니다. 애굽의 제사장들(창41:45, 50, 46:20, 47:26), 블레셋의 제사장들(삼상6:2), 다곤의 제사장들(삼상5:5) 등에도 사용되었다. 제사장 제도는 일반적으로 어느 곳에나 있었던 것이다.
o 제사장의 계급
1. 대 제사장 : 1년에 한번 지성소에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특권이 있었다. 또한 신약시대에는 산헤드린 의장을 겸임했다. A.D.1세기 중에는 유대인의 왕은 없었으므로 그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로마와 이스라엘 백성간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판(막14:53, 60-64)과 사도들의 제판(행4:6, 5:17, 21, 27), 스데반의 제판(행7:1), 바울에 대한 제판(행23:2-5)을 관장했던 자도 대제사장이었다.
2. 성전의 두목(the Captain of the Tempel) : 대제사장 차기 후보로 대제사장 다음으로 높은 서열이었다. 대제사장을돕고 산헤드린회원이며 성전 경내에서 수석자리를 차지했다(행 4:1, 5:24, 26).
3. 수석 제사장들 : 신약성경에서 64회이상 요세푸스와 탈무드에서는 자주 대제사장이라는 용어가 복수인 (아르키에레이스)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어가 대제사장과 전직대제사장, 아니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특권층 가문에 속한 제사장을 가르킨 것으로 생각해 왔다.
4. 일반 제사장들 : 제사장 귀족 계층에 비해 일반 제사장들의 수는 굉장히 많았다. 신학자 예레미야스는 예수 시대에 이들의 수를 18,000명 정도가 있었다고 본다. 이들은 24반열로 나누어서 각 반열은 1년에 두 번 일주일씩 매일의 성전희생제사를 수행하였다(눅 1:5).
5. 레위인들 : 제사장 교계제의 밑에 층에는 레위인들이 1만 가량 있었고 24반열로 나뉘었다. 이들은 성전의 음악 및 다양한 형태의 봉사자들이었다(참고 눅10:32, 요1:19).
레위기의 제사장에 관한 규정
구약성서의 613 계명 중에서 149-284 제사장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이 계명 외에도 사실상 제사에 관한 규정 등 많은 부분이 제사장과 관련이 있는 계명들이다.
제 149 계명 / 제사장은 머리를 풀어서는 안 된다(30일 이상 머리를 계속 기르는 것을 금지).
제 150 계명 /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도 안 된다(레 10:6).
제 151 계명 / 제사장은 성전(성소)에서 일하는 동안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레 10:7).
제 152 계명 / 제사장은 성전(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레 10:9, 11).
제 263 계명 / 제사장이 주검을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제 264 계명 / 그러나 가족의 주검은 만질 수 있다(레 21:1-4).
제 265 계명 / 주검을 만져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의적인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부터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다(레 21:6; 22:7)
제 266 계명 /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15).
제 266 계명 / 제사장은 부정한 여자와 결혼해도 안된다(레 21:7).
제 266 계명 /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제 269 계명 /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레 21:8).
제 270 계명 /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제 271 계명 / 대제사장은 가족의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레 21:11).
제 272 계명 /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 한다(레 21:13).
제 273 계명 / 대제사장은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레 21:14).
제 274 계명 / 대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 된다(레 21:14).
제 275 계명 / 아론의 후손 가운데 몸에 (영구적인) 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다(레 21:17).
제 276 계명 / 일시적인 흠이 있는 제사장도 그것이 날 때까지는 제사 드리는 일을 할 수가 없다(레 21:17).
제 277 계명 /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레 21:23).
제 278 계명 /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수 없다(레 22:2).
제 279 계명 / 그는 성물(聖物)을 먹을 수 없다(레 22:4).
제 280 계명 / 제사장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0).
제 281 계명 / 제사장이 데리고 있는 나그네나 품꾼도 성물을 먹을 수가 없다(레 22:10).
제 282 계명 / 할례 받지 않은 제사장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0).
제 283 계명 / 제사장의 딸이더라도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간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2). - 그러나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간 제사장의 딸이 이혼을 하거나 과부가 된 경우에는 "테루마"(제사장을 위해 바치게 되어 있는 수확물의 2%)를 먹을 수 있게 하였다.
제 284 계명 / "테벨"(tevel)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22:16). - 테벨이란 히브리어로 '좋지 않다'는 의미로, 십일조나, 제사장을 위해 바치게 되어 있는 "테루마"를 따로 떼어놓지 않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의미이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A.D. 6년-66년)
이름 임기 A.D. 임명자
안나스(Annas) 혹은 아나노스(Ananos) 6-14 총독 구레뇨(Quirinius)
이스마엘(Ishmael), 파비의 아들(son of Phabi) 14-25 총독 그라투스(Gratus)
엘르아잘(Eleazar), 아나노스의 아들(son of Ananos)
시몬(Simon), 카미도스의 아들(son of Kamithos)
요셉(Joseph) 혹은 가야바(Caiaphas)
요나단(Jonathan), 아나노스의 아들(son of Ananos) 37년 이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
데오빌로(Theophilos), 아나노스의 아들(son of Ananos)
시몬 칸데라스(Simon Kantheras) 38-44 아그립바(Agrippa I) 1세
맛디아스(Matthias)
엘리오네오스(Elionaeos)
요셉 카메이(Joseph Camei) 45-48 칼시스의 헤롯(Herd of Chalcis)
아나니오스 네베데오스(Ananios Nebedaeos)
요나단(Jonatan) 48-66 아그립바(Agrippa II) 2세
이스마엘(Ishmael), 파비의 아들(son of Phabi)
요셉 카비(Joseph Cabi)
아나노스(Ananos)
예수 담네오스(Jesus Damneos)
예수(Jesus), 가말리엘의 아들(son of Gamaliel)
맛디아스(Matthias), 데오빌로의 아들(son of Theophilos)
산헤드린(Sanhedrin)
산헤드린이라는 말은 의회를 뜻하는 헬라어 쉬네드리온의 아람어적 형태로서 유대교의 종교적 통치 기구로 A.D. 70년에 유대 나라가 멸망되기까지 종교 생활과 정치생활을 통괄했었다. 그 기원은 불확실하다. 랍비들은 주장하기를, 그것은 모세를 보좌했던 칠십인 장로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나(출24:1), 출애굽 시대로부터 어떤 조직된 의회가 계속 존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바사제국 시대에는 에스라서에 장로가 언급되어 있으며(스5:9, 6:7, 14, 10:8), 느헤미야 때에는 백성의 지도자들(한글개역 성경에는 '방백들')이 사회의 제반 사항을 다스렸던 것 같다(느 2:16;11:1). 조직된 기구로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나온 것은 안티오쿠스 대제(Antiochus the Great)시대이다(B.C. 223-187년). 그 회원들은 나이와 재산에 근거해서 선정되었으며 대제사장이 그 의장이었다. 마카비(Maccabean)혁명 이후에는 제사장들이 새로이 권력을 장악했다. B.C. 63년에 폼페이(Pompey)가 등극하자 유대인의 영토는 다섯 개의 쉬네드리아로 나뉘었는데, 그 중에 수도인 예루살렘의 쉬네드리온이 유대 정치의 주도적인 단체가 되었다. 산헤드린의 회원 자격은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닌 사람에게 국한되었으며 평생 회원이었다. 그 재판권의 한계는 유대인에 국한되었다. 예수님도 이 산헤드린 앞에 끌려 가셨었고(마26:59), 사도들도 산헤드린에서 신문을 받았다(행4:15-18, 행22:30, 행23:1). 산헤드린은 율법의 해석에 관계된 사건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결단을 내렸으며, 형사 사건의 경우에는 신약시대 로마의 통치하에서는 총독의 동의 하에 처형했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의 제반사항에 대해서는 자문회(諮問會)의 역할을 했으며 유대 민족이 실질적인 독립을 하지 못한 때에는 일종의 중앙 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산헤드린에 대해서 랍비자료와 산헤드린에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개의 산헤드린이 있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두 개의 1) 산헤드린이란 대제사장이 중심으로 구성되어 민, 형사제판을 관할하는 정치기구(요세푸스의 기록) 2) 평신도인 바리새인으로 구성되며 종교생활의 여러 문제와 율법(Torah) 해석에 종사하는 종교기구(랍비자료)이다. 많은 유대 학자들은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2:1-11 중풍병자를 고침
마9:1-8, 눅5:17-26 비교하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셨다. 이 동네는 나사렛에서 이사를 한 후 예수의 두 번째 고향이 된 곳이다(마9:1은 가버나움을 본 동네라고 함, 눅4:31 참고). 예수님은 집에 계셨지만 벌써 소문은 꼬리를 물었고 많은 병자들이 또 모여들었다. 팔레스타인의 집은 매우 공개적이었다. 집 주인이 일부러 사생활을 원치 않는 한 언제나 문은 열려있었으며 누구든지 들어오라는 공개 초대장과도 같다. 본문의 집과 같은 초라한 집에는 앞마당이 없었으며 문을 열면 곧 길 거리였다. 2절 도 lovgon(로곤)은 "lovgo""(로고스)에서 유래된 말로 "말씀"을 뜻한다. 한글개역성경에서 번역된 도(道)는 "진리, 참"을 의미하지만(한글 성경이 최초로 번역될 당시의 한국 정서에서 도라는 말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번역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4절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이것을 아람어의 오역이 아닌가 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서민이 살던 집들은 지붕 위에 나뭇가지를 깔고 진흙과 나뭇잎을 섞어 덮었으므로 뜯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지붕은 다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병을 고치고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절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데리고온 사람과 중풍병자를 합하여 다섯 사람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믿음 pivstin(피스틴)은 하나님의 신실 성에 대한 예수님의 신적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뜻한다. 사함을 받았느니라 ajfevwntai;(아페온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판결을 취소하다, 면죄, 풀어주었다"의 뜻으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선언이다(눅5:20, 23, 눅7:47, 48, 요20:23, 요일2:12). 예수님의 진정한 목적은 전도하기 위함이었다(마1:38). 그러나 가버나움에서 몰려온 병자들을 외면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병 고침 역시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로서의 표적이기도 했다(눅7:22, 마8::17). 6-7절 예수께 반대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서기관들이었다.
서기관 grammatei'"(그람마테이스)
처음에 이들의 직무는 매매증서와 같은 법적 문서의 책임을 맡고(렘26:26, 렘32:15-16), 또한 왕궁에 특실을 가진 공무원의 역할을 했다(왕하18:18, 렙36:12). 그러나 바벨론 포로 후기에 율법의 전문적 연구자요, 해설자요, 교사들로 역할이 달라졌다. 이들은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것을 연구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교육하였고 그들의 생도들이 자신들이 가르침 받은 것을 받아들이고, 보수를 받지 않고 전수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산헤드린 가운데서 율법의 치리를 맡은 재판관으로 활약하였다. 율법은 주로 제사 의식에 관한 규정이므로 초기의 서기관들은 스가랴처럼 서기관겸 제사장이기도 했다(슥7:12). 그러나 신구약 중간시기에 율법과 회당장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자 세속적인(비전문적인) 성경학자 계급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의 일은 율법을 세밀하게 해석하여 그 안에 담긴 뜻을 해명해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 법적인 결정 사항들을 후대에 전수시키는 것이었다. 그 후에 서기관들은 성경 본문을 조심스럽게 보존하는 책임도 부가적으로 갖고 있었다. 헬레니즘의 위협이 점점 더 고조되자, 서기관들은 열렬한 율법 수호자들이 되었고 그에 따라서 백성들에게 더욱 인기가 있었고 그만큼 더 많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평은 그들이 랍비 즉 "나의 선생님"이라고 불리운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대개의 경우 단지 이론을 위한 교사였다(마15:1-9, 마23:2-4, 막12:39-40, 눅15:2). 이들은 세례요한에게 세밀한 반대 질문을 던지던 종교재판관들이었다(요1:19, 눅5:17).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병 고침과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뿌리까지 파헤치는 날카로움을 보였다. 그들의 생각은 어찌 보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은 정당한 것이나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때부터 예수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상당한 고민에 빠져있는 자들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막12:34). 7절 참람하도다 blasfhmiva"(블라스페미아스)는 "중상, 비방, 악담"의 뜻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비방하거나, 욕하거나, 지껄인다는 말이다. 10절 인자(人子) uiJo;" tou' ajnqrwvpou(휘오스 투 안트로푸)로 사람의 자손을 말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친히 이 말을 즐겨 사용하신다(마태복음 30번, 마가복음 14번, 누가복음 25번, 요한복음 12번). 그것은 우리와 같은 육체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의 아들로서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2:13-17 세리 레위를 부르심
마9:9-13, 눅5:27-32 비교하라. 마태로 알려진(마9:9) 레위는 세금 징수원으로 갈릴리에 살면서 백성의 증오 대상인 에돔사람 헤롯왕의 앞잡이였다(눅23:6-7). 이런 이유 때문에 정통 유대사회로부터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이런 사람을 제자 삼으신 예수께서는 그의 반대자들로부터 또 하나의 질투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마11:19).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알고 계실 예수께서는 마태를 부르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셨다. 16절 예수님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변명하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2:18-22 금식에 대한 교훈
마9:14-17, 눅5:33-39 비교하라. 18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이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 것인지를 물었다. 주님의 제자 중 정확한 숫자는 없으며 몇 명은 세례요한의 제자였다(요1:35-37). 질문자는 "왜 세례요한을 따라다닐 때는 금식을 했는데" 당신을 따라 다니면서 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정결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금식은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금식하고 있는지라 h\san...nhsteuvonte"(에산...네스튜온데스) 미완료 과거형으로 [금식하곤 하였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유대인은 一週에 제2일과 제5일을 금식 일로 정하고 지키고 있었다. 이때가 아마 유대인의 정례금식일 이었던 모양이다.
바리새인(Pharisees)
히브리어 myvwrp(파루심), 헬라어 Farisaivwn(파리사이오이) 이 단어는 "분리하다"(to separate)란 뜻의 히브리어 vrp(파라쉬) "구별된 자, 분리하는 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통 유대주의자로부터 언제부터인가 분리되어 이렇게 불러지게 된 것 같다. 바리새인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란 B.C.162년 알키미우스(Alcimus)가 세력을 잡자, 유다 마카비우스(Judas Macabeus)를 떠나서 하시딤(Hasidim)이라는 무저항 단체가 되어 헌신적으로 유대교를 준수했던 자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세푸스(Josephus)는 바리새인들을 B.C.135-104년에 힐카누스(Hyrcanus)를 버리고 가서 율법(Mishna)을 곧이 곧대로 지키기로 맹세한 하베림(Haberim)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의 동생이 바리새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a)의 통치 밑에서 산헤드린에 가입하여 정치를 주관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안티파터(Antiqater)의 친(親) 로마 정책을 지지했으며, 헤롯 대왕은 이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던 폴리오(Plollio) 랍비, 그리고 사메아스(Sameas) 랍비와 협력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회당과 학교를 장악했고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의 신조는 에쎈파의 숙명론과 사두개파의 자유선택적 입장의 중간 노선이었다. 그들은 즉은 자의 부활과 천사와 내세의 상벌을 믿었고(행23:8), 예수님처럼(눅20:37) 오경을 인용하여 지지를 구했다(예, 민18:28). 그들은 특히 서기관들의 전승을 존중했으며 그것들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사두개인들은 변화를 무시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실제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귀신 쫓는 일을 행하기도 했다(눅11:19). 또 그들이 십일조를 바치고 금식하는 일(월, 목요일)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었다(눅18:9-1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간음에 대해서는 사형집행을 했다.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B.C.50년경의 솔로몬의 시편(Psalms of solomon)에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 경건한 자들(바리새인들)과 죄인들을 대조시켜 놓았으며, 하스몬 가(家)(Hasmonaeans)를 비난하고 폼페이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찬양하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정경인 '열 두 족장의 언약'(Testament of the Twelve Patriarchs;약 B.C.120년)에는 메시야가 벧리알(Beliar)을 속박해 버리고 사람들을 심판하고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의 대립점들은 다음과 같다. (1)바리새인들의 전승으로 인해 율법이 무효화되었다(막7:12). (2)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엄격히 지킨 나머지 안식일에 치료도 못하게 제한했다(마12:12). (3)사람을 더럽히는 것과 도덕적으로 거듭남(막7:18-23). (4)선행과 상급(눅17:10). (5)위선(마23:13). (6)이방인에 대한 전도와 출교(눅7:36-50). (7)바리새인들의 겸손치 못함(눅18:9-14).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깊은 영적인 교훈을 그들과 함께 나누신 적이 있었으며(눅10:27 28), 니고데모와 같은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지지하기도 했다. 바리새인들은 보통 서기관들(마5:20)과 사두개인(마16:1) 즉 헤롯당(마22:15)들과 합세하여 예수님께 대항했다.
2:23-28 안식일에 대한 교훈
마12:1-8, 눅6:1-5 비교하라. 제자들은 두 가지 근거에서 안식일에 일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첫째는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 이삭을 뽑은 것이요, 둘째 근거는 손바닥에 놓고 추수를 했다는 것이다(눅6:1). 바리새인의 눈에도 밀 이삭을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아니했다. 이 사건은 전혀 무의식중에 제자들에게서 일어났고 비슷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님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랍비학파의 섬세함 속에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모르며 평민을 멸시하고 저주했는지를 안다(요7:49). 주님까지도 무식한 랍비로서 의심을 받았다(요7:15). 이런 문제들은 종교적으로 스승의 문하에서 훈련을 받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 이런 무지함이 제자들에게서 드러나자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수에 대해서 그 자체에만 언급해서 말씀하지는 않으신다. 원론적인 안식일 문제를 총체적으로 접근하신다. 이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안식일의 그 목적 자체는 잊고 있었으며 갖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데 급급해 있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하심으로 이 문제에 관한 종지부를 찍으신다. 26절 진설병 a[rtou"(알토스) 성전의 성소에 드린 떡으로서 12개의 떡을 6개씩 2번 상위에 놓여졌는데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바꾸고 오래된 것은 제사장이 이를 먹던 것이었다. 열 두 개의 떡은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여 여호와 앞에 드린 것이었다. 제사장이 어 떡을 먹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을 의미하는 것이다(삼상21:6, 대하4:19, 마12:4, 눅6:4).
3:1-12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심
마12:9-14, 눅6:6-11 비교하라.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침으로 그들의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당에 들어가셔서 손이 마르는 병(팔이 서서히 말라 감으로써 발육이 중지되고 오그라드는 중풍 병의 일종)자를 고쳐주셨다. 이들이 먼저 예수께 묻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먼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말씀하심으로 미리 입을 막으셨다. 이런 연고로 그들은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했다. 5절 완악함 pwrwvsei(포로세이) "무감각한, 굳어짐, 어리석음, 어두움, 잔인함"의 뜻으로 뼈 위에 살이 굳어진 것 같은 현상을 말한다. 근심하사 sullupouvmeno"(순루푸-메노스)는 "슬퍼하다, 함께 생각하다"의 뜻으로 그들의 도덕적인 무감각과 완악함, 율법에 얽매어 올바로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슬프고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온유와 겸손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예수를 어떻게 죽일꼬 의논하는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이두매, 두로, 시돈 등지에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로 갈릴리의 바닷가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예수가 편히 말씀을 전하실 만큼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준비하도록 하시고 그 위에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 별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지만 배를 준비하고 등대 하는 일에는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셨을 것이다.
3:13-19 예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
마10:1-4, 눅6:12-16 비교하라. 여기저기서 따라온 제자들의 이름을 거명 하시면서 12명의 제자를 세우셨다. 이미 따라다닌 제자들이지만 하나의 임직식과 같은 공식적인 선언을 의미한다. 14절 세우셨으니 ejpoivhsen는 poievw(포이에오)에서 나온말로 "만들다, 산출하다, 형성하다, 제조하다, 완수하다, 행하다"는 뜻이 있다. 마가복음서 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제자들의 이름이 훨씬 사랑스런 개인들의 아람어 별명들이 기록되어 있다. 시몬은 아람어로 게바, 즉 베드로가 되었으며 반석의 의미가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성질이 급한 형제로서 그들에겐 보아너게, 즉 천둥과 번개,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붙었다. 18절 다대오는 레배우스(Lebbaeus)와 동일 인물로 추측하고 있다. 가나안인 시몬은 열심당원, 극단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눅6:15). 또한 가룟(이스카롯:lscariot)도 칼잡이라는 의미로 헬라어와 라틴어의 합성어 시카리오타스(Sikariotes)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퀘리요스(Qeriyoth:마을 인지 특정한 장소인지 모른다.)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12제자들은 예수의 집권으로 선택되었고 이들은 부름에 응답하였다(요6:37). 이들은 선택한 목적을 14-15절에서 1)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2) 전도하기 위해서 3) 하나님의 능력의 권세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12제자의 명단은 마태복음 10:2-4, 누가복음 6:14-16, 사도행전 1:13에서도 나타난다).
3:20-35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예수의 친족들
마12:22-32, 눅11:14-23 비교하라. 20절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마가는 예수께서 얼마나 바쁘신 지를 긴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21절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 얼마나 이해가 안 되는 일인가?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상당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1절 붙들려 나오니 krath'sai(크라테-사이) [때에 따라서는 억지로라도 힘을 써서 붙잡으려고]의 뜻 친속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지만,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문 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불렀다는 점(31절)은 바로 이들이었다는 확증을 갖게 한다. 예수의 행동은 집과 직업을 버리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그들의 생각에) 다니는 것은 미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동생들도 공생애 중에는 그를 믿지 않았다(요7:5).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 중 몇 명이 교회에 가입하였다(행1:14). 마리아는 31절에서 또 한번 혈연적인 모자관계를 가지고 주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게 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는 예수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친속이라는 이유로 예수를 미쳤다(문자 적으로는 "제 정신을 잃었다")고 단정하고 무력으로라도 끌어내려고 월권을 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가족사건 중간에 공교롭게도 22절 예루살렘부터 쫓아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예수께 대항했다. 예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장 중요한 설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을 때 또 예수를 불러내려고 하였다. 이들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21절의 생각에서 변함이 없었다. 이들의 생각에는 이제 미친 짓을 그만하고 나오기를 청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친속들을 빗대어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 마태복음 성령훼방 참고. 훼방은 악한 생각이요, 하나님의 대적으로 사단에게서 나왔으니(마15:19, 막7:22, 골3:8, 딤전6:4, 계2:9, 계16:11), 곧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된다.
4:1-9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13:1-9, 눅8:4-8 비교하라. 마가복음 4장에서는 몇 가지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 비유장"이라고 하여 7가지의 비유가 질서 정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겨자씨 비유만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등불과 등경의 비유, 씨가 자라는 비유, 겨자씨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 등불과 등경의 비유는 비유적인 면도 있지만 직설적인 교훈의 뜻도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비유 중에서도 아주 잘 알려진 비유이며 비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원문 헬라어 성경에는 3절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Akouvete. ijdou; ejxh'lqen oJ speivrwn spei'rai.)라고 하는데 영어 KJV(제임스) 역에는 "어떤(a)" 씨뿌리는 자가 씨뿌리러 나갔다고 했지만, 헬라어 원문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면 [들어라!, 보라 그(the) 씨뿌리는 자가 나가서]라고 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가깝다. 원문에는 들어라(!Akouvete) 다음에 보라(ijdou)는 미완료 중간태 단어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영어의 "a" 와 "the"의 차이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지금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주변에는 씨뿌리는 자가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시면서 설교하시는 것이다. 씨 뿌리는 것을 보시면서도 예사롭게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아주 심오한 진리를 들어 있다고 보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는 거둘 것을 예상하고 뿌리고 있으며 또한 그 씨뿌리는 자세에는 진실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을 보면서 그 씨앗이 떨어져서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 여러 가지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에서는 씨를 뿌릴 때에 바구니 같은 그릇에 씨를 담아 가지고 손으로 쥐고 흩어 뿌리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좀 게으른 사람은 씨앗이 담긴 자루에 구멍을 내고 노새나 나귀의 등에 싣고 다니면서 그 구멍으로 줄줄 나오게 하여 씨를 뿌리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씨앗을 낭비하기 쉽기 때문에 손으로 뿌렸을 것이다. 씨를 뿌릴 때에 바람이 날려 꼭 밭에만 떨어지지 않고, 다른 여러 곳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성지의 밭은 길고 이랑이 좁았습니다. 그리고 밭과 밭 사이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어서 마치 포장도로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여기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 있다면 새들이 쉽게 볼 수 있었고, 새들은 곧 바로 날아와서 쪼아먹고 말았다. 어떤 씨앗은 흙이 얇은 돌 짝 밭에 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땅은 팔레스타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데 한 10cm정도 흙이 덮여 있고, 속에는 석회암 층이 있어 농사짓지 못하는 밭들이 있었다. 이런 땅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곧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덤불은 밭으로 일구지 못한 잡초가 자리잡은 거친 땅을 말한다.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혹 30배, 혹 60배 혹 100배의 결실을 내었다. 14절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는 씨앗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씨앗 속에 있는 생명력처럼 말씀을 통하여 새 생명이 주어지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요, 그의 종들로(제자들과 오늘날의 모든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말씀"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마가복음에는 "말씀"으로 표현했다.
4:10-20 비유의 목적에 대해 설명
비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parabolai'"(파라볼레)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곁으로"라는 말과 "던진다"라는 말이 합해져서 생긴 말이다. 한 물건을 다른 물건 곁에 두고 비교하므로 그 물건을 정확히 아는 방법이 "파라볼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잘 알려진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하는 것이다. 비유를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다. 11절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첫째, 비유라는 것은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함이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주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을 잘 들어 이해할 수 있어야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어렵게 설명하므로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까운 시간 낭비요, 헛된 일을 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이 전혀 경험하지도 못하고 알아들을 수 없었던 진리의 말씀을 그들이 쉽게 경험한 것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비유의 목적이라고 할 것이다.
두 번째, 잘 알게 하기 위한 것과 동시에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것은 예수께 빌미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2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이사야 6:9-10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는 충실하게 인용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은 조금 요약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는 아주 쉽게 완화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당시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완악 했던지, 종래 회개하지 않고 바벨론에게 포로 되어 잡혀갈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이 믿기까지 이스라엘의 임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본문이다.
4:21-25 등불의 비유
마5:15, 마10:26, 눅8:16-17 비교하라.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타인의 등불은 방구석에, 즉 벽에 등대가 붙어있었다. 이 등불을 luvcno"(뤼크노스) 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이 등불을 예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주 쉽게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현재에 우리가 어렵게 이해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문화와 또 과거의(예수님 때) 문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의 등 받침은 진흙으로 만들어 졌는데 말(斗)로 덮으면 불은 꺼진다. 작고 대부분 창문이 없으며, 굴뚝조차 없는 단칸방 농가에서는 이런 불끄는 방법이 흔히 사용되었다. 불어서 끄면 연기와 냄새가 생기고, 경유에 따라서는 불티에 의해 불이 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등불을 다시 끄지 않는다. 현재도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흔히 밤새도록 켜 둔다.
첫째, 이 비유는 제자들에게 주셨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산상에서 팔 복을 말씀하신 후에 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라는 말씀에서 연결하고 있다. 빛은 이제부터 비추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복음의 빛이다. 이 빛을 말(斗)로 덮어서 끄거나 빛을 잘 빛 출 수 없는 평상아래 둘 수 없다. 많은 사람에게 비추기 위해서 밝혀진 것이다. 이제 제자들에게 빛의 사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 말씀하셨다. 이 빛을 제자들에게도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 대해서도 켜서 비취는 등불(요 5:35)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엄중히 말하면 세례요한의 빛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필요한 등불이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등불은 이제 다시는 꺼지지 않는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된 것이다.
둘째, 이 비유는 불신자에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1장을 모두 참고하라. 여기서 보면 예수께서 눅11:14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귀신 바알세불을 힘입어 고쳤다고 했다. 예수께서는 이 완악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눅11:29)라고 죽음에 대해 십자가의 표적을 말씀하신다.
4:26-34 성장 비유 두 가지
여기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충해서 설명하는 의미도 있지만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27절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어느새 씨가 자라는데 이것은 무조건 자란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에 보호하심과 은혜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이다(벧후3:18). 29절 곧 낫을 대나니 이것은 알곡이 되면 추수를 한다는 종말의 암시이다. 마지막 때는 알곡은 거둬지고 쭉정이와 가라지는 불살라질 것이다(마3:12, 마13:30). 31-32절의 작은 mikrovteron(미크론테론)겨자씨 한 알의 성장은 신앙의 성장을, 하나님의 나라 성장을 뜻한다. 겨자씨의 성장(요12:24), 가루 속의 누룩(마13:33)은 천국 복음의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것의 성장을 의미한다.
4:35-41 풍랑을 잔잔케 하심
마8:23-27, 눅8:22-25 비교하라. 예수님의 일정은 예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예정된 일을 처리하시는 것보다도 더 바쁘게 움직이셔야 했고 돌발적인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일정은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피곤하게 했다. 제자들과 더불어 어둘 때에 배에 오르셨다. 잠시지만 예수께서는 단잠에 드셨다. 지중해 바다는 해면보다 200m나 낮고 주위에는 그와 반대로 높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광풍이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도 겁을 먹고 우리의 죽게 된것을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매우 풍랑이 거세게 불어온 것이 틀림없다. 39절 바람을 꾸짖으시며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보이지 않는 귀신에게 명령을 내리셨던 일은 있었지만 자연을 향해 명령을 내리신 일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신적 권능을 모두 가지고 계심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 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에게 40절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다.41절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41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ejfobhvqhsan fovbon mevgan)이다.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40절 무서워하느냐 deiloiv(데일로이) "겁난, 믿음 없는, 비겁한"의 뜻으로 이와는 다른 "공경하며,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것이다(사66:2, 5, 렘44:10, 잠28:14, 빌2:12).
5:1-20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마8:28-34, 눅26:39 비교하라. 1절 거라사인의 지방 갈릴리바다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장군들이 팔레스타인에 건설한 10개 도시인 데가볼리에 속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헬라 문화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곳이다. 이곳은 호반의 일부로 석회암 동굴이 많이 있었으며 그 중의 많은 동굴이 시체를 넣는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2절 더러운 ajkaqavrtw/(아카달토-) "음탕한, 불순한"의 뜻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죄란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9절 군대 levgen(레기온)는 당시의 로마 군대의 한 단위를 생각할 수 있는데 4000-600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많은 수의 귀신이 저에게 들어가 있음을 말한다. 이런 연고로 그는 힘이 세고 쇠사슬로도 메어 놓을 수 가 없었던 것이다. 15절 옷을 입고 iJmatismevnon(히마테스메몬) 눅7:27 이 사람은 귀신들린 동안 오래 동안 의복을 입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정신이 온전히 돌아와 옷을 입은 것이다.
5:21-43 회당장 야이로 딸과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
마9:18-26, 눅8:40-56 예수께서 바닷가에 계실 때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가 주님께 나왔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사역 중심지중의 하나인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의 주관자이었는데 그에게 열두 살 된 딸이 있었다. 그의 딸은 어려서부터 심한 병에 걸려 몹시 앓고있어 근심이 많았다. 그는 예수께 이 딸을 고쳐줄 것을 부탁한다. 이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기 위해서 길을 가는 도중에 많은 병자가 모여들었고 혈루증 여인도 있었다. 혈루증은 혈관 조직이 약해서 혈관의 틈을 통해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가리킨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날 것 같은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그의 병은 나았으며 예수께서는 즉시 이 사실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다. 이 여인은 예수께 사실을 고백하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는 축복의 말씀을 받았다. 많은 병자들이 모여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길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 때 그의 집에서 딸이 그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예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전하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만을 데리고 빨리 길을 재촉 하셨고 사람들은 이미 죽은 딸 때문에 울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딸이 잔다하시니 사람들은 비웃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41절 달리다굼 Taliqa kou'mi(탈리다 쿰-)은 아람이며 Taliqa(소녀), kou'mi(일어나라)하시니 소녀는 일어나 곧 걸었다. 걸었다는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의 병도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아람어를 사용하신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이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사용되던 언어이었다.
6:1-6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
마13:53-58, 눅4:16-30 비교하라. 1절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가버나움을 떠나 나사렛(눅4:16)으로 가시는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나사렛까지는 하루쯤 걸리는 길이었다. 고향을 방문하는 목적은 가족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2절 이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에 놀랐다. 이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 권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가 자란 그 모습을 기억하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의 아들 이라고 말함으로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예수를 멸시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과부일 경우라도 남자(아버지)나 조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유대의 일반적인 전통인데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일종의 놀림이나 경멸을 뜻한다. 3절 배척한지라 ejskandalivzonto(에스칸달리존토)는 "함정에 빠지다, 덫에 걸리다, 죄를 짓게 하다"의 뜻으로(롬11:9, 롬14:13, 갈5:11, 벧전2:18, 렘6:21, 호4:5) 예수를 육적으로만 알고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들의 배척으로 5절에 보면 예수의 사역이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보다 덜 활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병을 고치거나 하나님의 일들을 행하실 의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마태복음 13:58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6:7-13 열두 제자를 파송
마19:1-14, 눅9:1-6 비교하라. 둘씩 둘씩 보내시며는 마가복음에서만 나타난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은 그들 증언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함과(민35:30, 신17:6, 마18:16, 고후13:1), 서로 격려와 도움을 주고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전4:9). 이러한 방법은 후에 선교의 관례가 되었다(행13:1-3, 행15:40, 행19:22). 8-9절 이들에게는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훈련이나 곤란을 겪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불필요한 짐과 대규모적인 준비로 여행을 지체해서는 안된 다는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병 고침)을 주시고 보내시기 때문에 그들을 맞이하는 집에서 유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러한 짐과 준비를 여행할 때마다 무책임하게 그냥 다녀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눅6:35-38에서는 오히려 여행 장비를 갖추도록 권하신다. 11절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유대인들에게는 이교도의 영역을 통과하는 여행을 한 후에는 유대 땅(성지)에 들어오기 전에 신과 옷에 뭇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이유는 이방인의 땅을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의 취지는 제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이방인의 땅과 같이 부정한 땅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악의나 분노를 나타내려는 말은 아니다.
6:14-29 헤롯의 공포
세례요한의 죽음과(마14:1-12, 눅9:7-9) 비교하라. 제자들이 전도하러 간 사이에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마가는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이 부분에 헤롯에 대한 이야기로 세상 사람들의 예수께 대한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 이 부분은 순서대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삽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헤롯왕은 헤롯 대왕(헤롯 1세)과 마리안느 사이에서 출생한 헤롯 안티파스(Antipas)를 가리키며(마14:1-7, 눅8:1-19, 눅8:3, 눅9:7, 눅13:31, 행4:27), 헤롯대왕(마2:1-19, 눅1:5)과 다른 인물이다. 그는 헤롯 대왕이 죽은 후, 16세의 어린 나이로 갈릴리와 베레아 전 지역의 분봉왕이 되어 주전 4년-주후 39년 동안 통치했다. 그는 엄밀히 말해서 왕이 아니라 분봉왕이었다(마14:1, 눅9:7). 그는 후에 로마에서 왕의 신분을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가가 그를 가리켜 왕이라고 한 것은 당시의 관습을 따른 것이나, 비아냥거리는 표현이다. 헤롯은 세례요한이 죄가 없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로 하여 악몽과도 같이 세례요한의 일을 거론하는 것이다.
6:30-44 오병이어의 기적
마14:13-21, 눅9:10-17, 요6:1-14 비교하라. 이 사건은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도여행의 성과를 저마다 신이 나서 예수께 고했다. 그리고 잠시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이제 늘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오고가는 모습을 바라본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며 자상한 어조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다. 34절 불쌍히 여기사 ejsplagcnivsqh(스플랑크니스테이스)는 "동정을 느끼다, 간절히 열망하다"의 뜻으로 마태복음 9:36에서는 민망히 여기사로 누가복음 15:20에서는 측은히 여겨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이들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외면하시기 어려웠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고 제자들은 방금 전도여행에서 돌아왔고 수많은 사람들은 모여들었는데 식사시간이 되었다. 그 누구도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을 준비하거나 이들 또한 모두 도시락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은 이러한 이들에게 각자 촌에 내려가서 식사를 해결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37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이나 필요했고 양식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고작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다. 그것도 제자들의 것은 아니었다. 요한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요6:8-9).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리떡은 밀가루가 아니라 보리 가루로 만든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가져오게 하셨다. 이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헌신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41절 축사하시고 eujlovghsen(율로게세)는 "찬미했다, 감사했다, 복을 빌었다"의 뜻이다. 주어 ejdivdou(에디두-)는 "주다, 발생하다"의 뜻으로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6:45-52 물위를 걸으심
마14:22-33, 요6:15-21 비교하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이 때는 밤 사경이었고 이미 어두워져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산에서 예수께서는 기도하고 계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바다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어려움을 당하신 것을 아셨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바다 위를 걸으셔서 다가가셨다. 이미 막4:35에 보면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일이 있었다.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놀랐고 예수께서는 50절 안심하라 Qarsei'te(달세이테)고 말하신다(마9:2, 22, 마14:27, 행27:22, 25).
6:53-56 많은 무리의 병을 고치심
게네사렛 땅에도 예수의 소문은 퍼졌고 많은 병자들이 나아왔다. 침상을 메고 나온 사람들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병 고침은 사람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능력이 합해져서 성함을 ejswv/zonto(에소-존토) "구원하다, 보호하다, 완전하게 만들다" 얻었다.
7:1-13 바리새인들과 유전에 대해 논쟁
1절 이들은 단순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일종의 특별한 감사 임무를 띠고 예수께 찾아온 자들이다. 이들이 볼 때 예수는 상당한 무리를 일으키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할 것에 대한 자체적인 감사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런 문제는 세속적인 통치자 헤롯도 관심이 있는 문제였다(막6:14). 이러한 조사반이 세례요한도 조사한 일이 있었으며(요1:19, 25), 예수께도 이전에 한번 왔었다(막3:32). 그 때는 바알세불 문제와 안식일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예수님과의 일전의 토론이 벌어졌었다. 물론 예수님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감을 했었다. 이러한 데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어떻게 하든 이제는 빌미를 잡아가야 했을 것이다. 이런 그들의 다급함과 옹졸한 생각은 예수님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제자들이 문제가 있다면 선생인 예수께 그 잘못을 돌릴 생각이었다. 이번에 꺼낸 문제는 율법 서에 직접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유전과 전통에서 생긴 의식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유대인의 탈무드가 된 미쉬나(Mishanh)와 게마라(Gemara)였다. 4절 물을 뿌리지 않으면 eja;n mh; baptivswntai(에안 메- 란티손-타이)은 "목욕하지 아니하면"이란 뜻도 있다. 이것은 실제 더러운 것을 씻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것이었다(히9:10).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8절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고 책망하셨다. 10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공경 Tivma(티마)는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모든 책임의 이행을 총칭하는 말이다. 11절 고르반 Korba'n(콜반-)은 "제물"이란 뜻으로 신께 드린 것. 이들은 부모에게 잘못을 계속해서 저지르면서도 신께 제물을 드렸다 고만 하면 모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리석은 구전의 한 실례이다(마15:5-6).
7:14-23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한 교훈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육체를 위하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서 나오는 온갖 나쁜 생각이다. 이 말은 현재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19절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kaqarivzwn pavnta ta; brwvmata)는 원어 적인 뜻은 [모든 식물을 깨끗이 하면서] 이다. 21절 도적질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 뿐 아니라 남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주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살인은 남을 죽이는 것 뿐 아니라 남을 미워하는 것도 포함된다(요일3:15).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
26절 헬라인 @Ellhniv"(헬레니스) 헬라의 종교를 믿고 시리아의 방언을 말하는 "훼니뵈니게"출생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의 물러나지 않는 간절함이 딸을 고칠 수 있었다.
7:31-37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는 "하늘을 우러러는" 기도의 자세를 말한다(막6:41, 요11:41, 요17:1). "탄식하시며" ejstevnaxen(스테나존) "불평하다, 묵도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안타까워 묵도하시며 또는 안타까워 잠시기도 하시고]라고 해도 된다. 에바다 Effaqa(엡하다)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열리다"라는 뜻이다. 이 말과 동시에 그는 보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러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지만 특별히 37절 심히 놀라 uJperperissw'"(휘펠페릿소스) "엄청나게, 너무 많이" 놀라고 있다.
8:1-10 사천 명을 먹이심
마15:32-39 비교하라. 어떤 신학자들은 이 사건이 막6:34-44의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비슷하여 마가가 한 사건에 대한 두 전승을 계승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은 비슷한 두 개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1절 그 즈음에 !En ejkeivnai" tai'" hJmevrai"(엔 에케이나이스 타이스 헤메라이스)는 문자 적으로 [그 날들에]를 말한다. 즉 앞의 사건,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소문이 자자하던 때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장소가 데가볼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항상 예수님의 기적사건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데서 출발한다(마9:36, 막6:34 참고하라). 2절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예수께서 병 고치는 기적과 말씀에 이들은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또한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은 그들이 가는 중에 기진 할 것을 염려하셨다.
8:11-21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탄식
마16:1-4, 마12:38-42, 눅11:29-32, 눅12:54-56, 요7:17 비교하라. 바리새인들과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시험하였는데 그 중에 한가지가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표적 shmei'on(세메이온)은 "상징, 기호, 기적"의 뜻으로 이들은 구약에서 있었던 만나(출16장), 태양과 달의 멈춤(수10:12-14), 갈멜산에서 내린 불(왕상18:30-40)과 같은 초자연적이며 우주적인 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표적 요구는 시험하여 peiravzonte"(페이라존테스) "유혹하다, 시험하다"의 뜻으로 예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런 요구에 12절 마음속에 tw'/ pneuvmati(토 퓨뉴마티) "영에, 마음깊이" 탄식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이들의 요구에 절대적인 거부를 분명히 하고있는 것이다. 진실로(아멘:ajmh;n)는 절대적으로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적용시키는 예수님의 용법이다. 15절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께서 사용하신 누룩에 대한 짧은 비유는 보이지 않는 침투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누룩자체는 성경에서 좋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음에 유의하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5:7에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했으며 누가복음 12:1에서는 "누룩"은 바리새인들의 의식과 연극으로 설명되었다. 마13:33에서 "천국비유 설명"때 누룩을 말씀하신 것은 누룩 자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누룩의 퍼지는 속성을 비유로 사용하신 것이다. 유대와 헬라에서는 누룩은 부패에 대한 은유였으며 특히 유대 랍비들에게는 악한 욕구와 인간의 나쁜 성향과 성질을 나타낸다. 16절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o{ti a[rtou"(호티 알튀스)는 o{ti(호티)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있다. 이 뜻은 "그러니까, 왜냐하면"이다. 다시 이 부분을 번역한다면 문장과는 부자연스럽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떡이 하나도 없는 걸]이라는 말이다.
8:22-26 벳세다의 소경을 고침
이 때에 소경의 눈을 뜨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벳세다는 베드로의 고향인데(요1:44) 이들은 육체적인 욕구만에 관심이 있던 차에 이 소경의 사건으로 육체적인 눈과 영안의 눈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은 눅7:21과 요9:1-7에도 있다.
8:27-38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난예언
빌립보로 가시면서 제자들과 처음에는 부담 없는 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핵심을 질문하고 나오신다. 사람들의 생각이 아직까지 예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음을 알고 계셨다. 헤롯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어쨌든 예수께서 "되살아난 요한"으로 보았고(막6:16), 또 다른 사람들은 요한에게 적용되었던 말3:1, 말4:5에 근거한 엘리야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마16:14). 물론 주님은 이 부분은 세례요한을 가리킨다고 하셨다(마17:13). 어떤 사람들은 수많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 넘었다. 처음으로 주를 바로 보고 제대로 말한 장본인이 된 것이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말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이 일을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입장을 왜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31절 예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하신다. 많은 고난이란 단순히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치욕적인 그들의 많은 놀림과 채찍 등을 말하는 것이다(막10:34, 막14:65, 요18:22). 베드로는 최초의 바른 신앙고백을 예수께 드렸지만 인간의 생각(사단이 준)으로 말하므로 예수께서 엄밀한 의미에서 베드로를 야단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단에게 꾸짖으신 것이다. 사단 Satana'(사타나) 이 말은 아람어 방언이다.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신 것은 아니며 다른 방언처럼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용어였을 것이다. 순수 헬라어는 "마귀"(디아블로스:diavbolov")이다(요6:70). 이 두 단어에 어떠한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며 동의어이다.
9:1-13 예수의 예언과 변형
마17:1-8, 눅9:28-36 비교하라. 1절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이 예언은 상당히 의견이 분분하다. 언 듯 보아 주의 재림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당시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다(참고 요21:23, 벧후3:4). 그리고 현재에도 주의 재림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은 주의 재림으로 생각하기 어렵고 다른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임박한 변화산상의 변형을 의미하거나 둘째, 십자가상의 죽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을 가리키든지(골2:15), 셋째, 성령 강림을 의미하든지, 넷째, 천국의 축복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이 중에서 제일 유력한 것은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이기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이 땅에 임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2절 엿새 후에는 창세기의 "엿새 후"를 연결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것은 무리한 방법이고 여기서는 단순히 한 주간이 지났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들은 7일이 일주일의 개념으로 정착했으나 당시의 유대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는 "팔일쯤 되어"라고 기록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일주일쯤 되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 주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는지에 대해서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편애에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꼭 설명을 해야한다면 주님의 주권 적인 선택이라는 것과 이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열심과 영적인 반응을 보임으로 선택했을 것이다(마8:29, 막5:37). 높은 산은 어느 산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초대 이후 16세기 경까지는 다볼산(Tabor)으로 이해하였으나 다볼산은 예수께서 계신 이곳으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고, 560m 밖에 안되어 높은 산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많은 학자들은 가이샤랴빌립보에서 가깝고 2743m 인 헬몬산(Hermon)으로 보고 있다. 4절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마태와 누가는(마17:3, 눅9:30)는 모세를 먼저 언급한 반면 마가는 엘리야를 먼저 언급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순서적으로 당연히 모세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인데, 마가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엘리야가 마치 모세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처럼 되어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를 대표하며 특히 예수님 전에 나타나는 선지자(말4:5-6)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나타나 w[fqh(오프데)는 "보다"라는 동사이다. 제자들은 분명히 눈으로 엘리야와 모세를 보고있음을 말한다. 6절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아마도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저자 마가는 그 때 그 장소에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에 의해서 이 말이 마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5절의 부분에서 베드로는 분명히 그 때 그 상황이 순간적으로 황홀해서 산을 내려가지 말고 그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초막 셋을 지으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적인 도취에 빠져 나온 말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마가나 혹 다른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있던 사건을 설명할 때 지금까지도 그 때 그 사건을 생각하면 흥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7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구름 속에서 난 소리는 모세나 엘리야의 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8절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금령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의 한시적인 것이다.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바로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사역기간을 단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9:14-32 벙어리를 고침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무리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귀신들려 말 못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20절 이 귀신은 예수를 보자마자 고꾸라져 거품을 흘렸다. 18절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oujk i[scusan 직역하면 [힘이 세지 못하였다]이다. 이 어린이 아버지는 23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와 28절 제자들도 물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29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기도 proseuch'/(프로슈케)는 "기도"로 같은 단어가 나타나는 곳은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마6:6), "기도할 때는 ... 믿고 구하라"(마21:22), "마음을 같이 하고 기도하기에 힘썼다"(행1:14),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만 했다"(행6:4). (참고 행10:31, 롬12:12, 고전7:5, 빌4:5, 골4:2) 32절 말씀 rJh'ma(레마)는 "증언된 말씀, 선포된 말씀"이고, 로고스(lovgo")는 사상적인 실현으로서의 말씀을 의미한다. 원어성경이 아닌 번역성경은 이 두 단어가 "말씀"으로 섞여서 나타난다. 레마는 신약성경에서 68개의 단어가 나오며 주요 성구는(마4:4, 마12:36, 마18:16, 막14:72, 눅1:37, 눅2:15, 눅18:34, 요3:34, 요6;68, 행2:14, 행10:22, 롬10:8, 히11:3 등)참고하라.
9:33-50 겸손과 유혹에 대한 교훈
제자들은 방금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예언도 이해하지 못했고 심각하게 생각도 안한 분위기이다. 이들은 주님의 고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다. 주님은 이미 그들이 노중에서 어떤 말을 했는가를 알고 계신 분위기이다. 그러나 그 때 지적하지 않으시고 33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물었다. 이것은 이미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지친 제자들에게 더 이상 꾸중하지 않으시고 조용한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만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실 필요성이 있어서 제기하신 것이다. 33, 34절 쟁론 dielevcqhsan(디아로기조마이)는 "변론하다, 논쟁하다"의 뜻으로 이미 예수께서 이 말을 하고 계신 것 자체가 꾸중이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잠잠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이었는데 부끄러운 마음에서 일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일어난 것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산에 데리고 올라가신 일(막6:30)과 다른 제자들이 남아서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씨름하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평가에서 나온 문제일 것이다. 35절 열 두 제자를 불러서는 제자 모두 특별한 제자가 없음에 의미를 두고 있는 뜻이다. 누구든지 Ei[ ti"(에이 티스)는 "누구든지, 어떤"의 의미로 열 두 제자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에게든지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36절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여기서 이 어린이는 누구인지 여러 추측이 있으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 어린이를 세우신 목적은 마태는 겸손과 영접의 본보기로 삼기 위한 것(마18:4-5)으로 설명하고 마가와 누가(눅9:43)는 영접해야할 대상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린아이의 특성인 "순진함, 겸손, 단순성, 온유함, 소박함"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보호와 도움, 지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3절 영생 th;n zwh;n(텐-푸쉬켄-) "생명" 여기에는 정관사가 있는데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죄인들이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사의 선물이다(요3:16, 요일1:2, 9).
10:1 갈릴리에서 요단 강 건너편으로
1-9장까지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신 내용이고 10-15장까지는 유대 땅에서 하신 일들이 기록되었다. 이 두 사역사이에 누가복음 9장-18장 사이에 많은 사건들을 담고 있다(70문도 파송, 잃은 양 비유, 잃어버린 동전 비유, 잃은 아들 비유). 마태는 누가복음보다는 적지만 마가보다는 더 많은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유대주의 반항 운동의 심장부였다. 이것은 그 주위의 반 유대주의 백성들로 둘러 싸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3:1에 보면 명절날에 갈릴리 인들이 대 소동을 일으켜 빌라도가 보복을 한 장면이 있다. 또한 A.D. 70년에 일어난 반 로마운동에서도 로마인들이 갈릴리 인들을 쳐부수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라고 요세프스가 말했다.
10:2-12 결혼과 이혼
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시험할 목적으로 물었다. 질문의 의도 자체가 실제 무엇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지금까지 한 행동으로 보아서(안식일도 쉽게 범하고(막2:23), 그리고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일들(요8:1-11)을 연상하면서 이혼에 대한 문제를 상당히 느슨하게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은 고소할 제목을 또 하나 찾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대한 답변에는 제자들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마19:10). 3절 예수께서는 먼저 이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ejneteivlato(에네토일라토)로 "명하다, 위임하다"물었다. 4절 그런데 이들은 "고의적으로 허락하였다" !Epevtreyen(에페트렢센) "두루마리, 지혜의 책"으로 대답하였다. 이 말은 "율법(성경) 속에 명령된 것이 아니고 다른 책에 내려오는 임의의 입장"이라고 대답했다. 이미 이 질문으로 그들의 입장은 약화되었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왜 이혼에 관한 그런 입장을 취했는지를 설명하신다. 5절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라고 하심으로 원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명령이 아니요, 율법시대에 공개적인 간음과 결혼관계를 무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쉽게 이혼이 가능하도록 양보한 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모세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신다. 다른 율법들의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면 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9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하셨다.
10:13-16 어린이에게 축복하심
13, 14절 어린 아이들을 paidiva(파이디아) "어린아이들, 유아, 소년들"이기 때문에 마19:13 "어린 소자"인지 혹은 눅18:15의 "어린 아기" brevfh(브레페)인지 세 복음서의 기자가 다르게 전하기 때문에 몇 살 정도의 어린아이 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간혹 영어 성경의 "baby", "child"의 단어들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아이가 아니라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여러 명을 데리고 온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주 작은 아이부터 좀 큰 아이까지 있을 수 있고, 복음서 기자들이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나온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연령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14절 분히 여겨 hjganavkthsen(에-가낙테-센)는 "몹시 화를 내다"의 뜻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어린아이의 겸손을 본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함께 온 부모들의 사랑과 믿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5절 받들지 않는 mh; devxhtai(메 덱세타이) "영접하지 않는, 받아들이지 않는"의 뜻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면]이라고 볼 수 있지만 원어의 문맥상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처럼(예수께서 어린이를 영접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0:17-22 부자 청년을 가르침
마19:16-30, 눅18:18-30 17절 길에 나가실쌔는 10:10의 집에서 나갔을 때(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고)이다. 꿇어앉아 예수께 겸손을 보이는 것이다. 마태는 청년(마19:20, 22), 누가는 관원(눅18:18)이라고 적었고 세 기자 모두 부자라고 말한다. 종합해 볼 때 "부자 청년관원"이었다. 시세말로 돈이 많고, 직장이 분명한, 잘 나가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이 청년은 여기에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는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도 예수께 무릎을 꿇고 겸손한 태도로 묻고 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트집을 잡으려고 묻는 것하고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선한 ajgaqev(아가테) "선한, 좋은"의 뜻으로 도덕적 선을 의미하는 말이다. 선생님 Didavskale(디다스칼렙)은 "교사"를 뜻하며 랍비(rJabbi+)보다는 보편적인 선생으로 존경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유대의 랍비에 해당하는 존경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떳떳함과 자신감으로 꽉 차 있었다. 18절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이 말은 예수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의 문맥상 모호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싶게 번역한다면 [너는 지금 경솔한 태도로 나를 선하다고 부르고 있지만, 너는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지 못하다. 네가 선하다는 것에 깊이 생각하고 싶다면, 홀로 선하신 하나님과 또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생각하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19절의 계명을 말씀하셨고 이 청년은 20절에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서 레인은 그의 충동적 대답은 그가 율법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고, 그것을 완전히 성취했다고 확신함을 시사해 준다고 했다. 칼빈은 그는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기 의무를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하는 거짓된 확신을 자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이 철없는 청년을 보면서 21절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청년의 단순하면서 순진한 생각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이 청년은 결정적으로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함으로 22절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 이 청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사태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슬퍼하며 떠나간 이 청년에게 약간의 동정이 갈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10:23-31 올바른 물질 관
앞 절의 부자 청년의 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설명하신다. 이에 대한 비유로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다.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예루살렘 약대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으로 또는 예루살렘의 성문이 저녁이 되면 닫히는데 뒤의 쪽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쪽문은 약대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등의 설명이 있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낙타(kavmhlon)와 바늘(rJafivdo")"를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놀랐고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를 예수께 물었다. 27절 사람으로는 Para; ajnqrwvpoi"(파라 안드로포이스) "사람 편에서는, 인간으로 말미암아서는"이란 뜻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심으로 구원의 문제가 사람의 노력이나 행동으로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긴박한 대화는 계속되는데 베드로가 이번에도 또 나섰다. 28절 보소서 우리가는 돌아가 버린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말로 자신들을 과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엄중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부분은 단순한 강조 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막8:12에서도 설명한바 있지만 진실로는 !Amh;n(아멘)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장을 찍는 것과 같은 예수님 특유의 방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인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29-31절의 말씀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인 말씀에만 아멘 해야 되는 것이다.
10:32-45 수난에 대한 말씀
마20:17-19, 눅18:31-34 비교하라. 장차 당하실 수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또 한번 설명하신다. 이번이 세 번째이며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말씀하신 것까지 합하면 네 번째인 샘이다. 충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35절 이하, 눅18:34). 제자들은 왜 이토록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까? 엄밀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의 관심은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수난 받으실 것을 예언하시는데 이들은 장차 올 영광에만 관심이 있다. 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시면서 예수께서 받으실 고난을 함께 받을 수 있느냐고 하신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대답의 모두가 전혀 고난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