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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73
4월22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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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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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sz48jklL9Jc?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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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없이 부드러운 하느님>
같이 생활하던 아이들이 ‘초대형 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보호자 신분으로 법정에 나가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정말이지 특별한 가정법원 재판장님을 만났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사건들을 처리해야 하는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그분의 모습은 재판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의 ‘멘토’, 따뜻한 동반자, 자상한 선생님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얽히고설킨 아이들의 복잡한 가족관계에 대해서 이것 저 것 물어봐주고,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 특기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이번에 훈방되면 이렇게 저렇게 한번 노력해보라며 자상하게 타일러주고... 그 재판장님의 따스하고 정겨운 모습에 감동받지 않은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분의 자상한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에게 주어진 최우선적인 지상과제는 단죄나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하느님 상은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끝도 없는 인간들의 배신과 거듭된 죄,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정해진 율법 조항에 의거해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이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단죄가 아니라 구원!”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메시아께서는 이 땅위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심판하실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권한은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용서와 자비,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을 향해 기쁜 얼굴로 다가서는 이들에게는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끝끝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멀리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빛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죄와 심판의 도마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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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nj2laOF3IP0
<절실해야 구원자다>
1912년 4월 14일, 세계 최대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1만 6천 톤의 거대한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2노트의 속력으로 북대서양을 항해 중 빙산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 배에는 구명대가 승객수의 반 밖에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무려 1,517명이나 되었습니다.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인 죠 하퍼씨는 시카고의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바다 위에 떠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비장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물 위에 떠 있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면서 그는 같은 형편인 한 젊은이에게로 헤엄쳐 갔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아니요!”
파도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습니다. 수 분 후에 다시 그들이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하퍼 씨가 좀 큰 소리로 또 물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였나?”
“아직 못 했습니다.”
이때 큰 파도가 하퍼씨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원받았나?” 하는 음성은 파도 소리에 실려 계속 젊은이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에, 그 젊은이는 뉴욕의 한 교회에서 신앙 체험담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죤 하퍼씨가 구원한 마지막 사람입니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 에너지를 사용한 존 하퍼씨는 무엇이 그렇게 절실했던 것일까요? 그에게는 자신과 이웃의 구원이 마지막 숨보다 더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런 절실함이 없다면 구원은 의미를 잃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잠깐이나마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께 무언가라도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오히려 내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라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점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심장을 쥐어짜는 불안함이 자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안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성체조배를 한 시간 정도 하고 나면 그 불안함이 잠깐은 사라졌습니다.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불안하니 더 불안해졌습니다. 몇 달, 몇 년을 그런 상태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차리라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제 심장이 예수님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제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두 달 이상을 성체를 영하거나 기도를 하지 못하는데도 이전과 차이가 없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아직은 완전하게 구원자가 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구원자는 생명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절벽에서 나뭇가지 하나 잡고 있다면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끝까지 그 나무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실하지 않다면 그분은 아직 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원죄의 영향으로 태어나 구원에서 제외된 상태였습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일어나는데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밝은 빛으로 그 빛이 절실한 오징어들이 올라와 잡히듯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그분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아직 나에게 구원자가 아닙니다.
‘겨울왕국 2’에서 안나가 동굴에 갇혀서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올라프가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가리켜도 큰 의욕이 없습니다. 그냥 동굴에 주저앉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발씩 그 빛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동굴을 빠져나옵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그런 빛이어야 합니다. 내가 한 발짝 걸을 힘만 남아있다면 그 방향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무엇이 밟히는지도 모르는 캄캄한 굴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한 달을 굶은 사람이 음식을 바라는 것처럼, 사막에서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이 오아시스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물속에서 숨을 못 쉰 사람이 찾는 공기처럼, 그렇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면 비로소 그분의 이름을 믿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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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6-21 :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시작도 끝도 없이 불사하시고 무한하신 지존께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은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체 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로마 3,23)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 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를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장님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들이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20절) 사람들은 진리가 자신들을 비출 때에는 사랑하지만 진리가 자신을 꾸짖을 때는 진리를 미워한다. 그들은 사기를 당하기는 싫어하지만 속이는 기술을 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악행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제나 악행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하는 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약한 자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악행에 빠진 채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드러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서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아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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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전례력에 따른 오늘의 말씀들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숙제를 제시합니다. 독서에서 보면 감옥에 갇힌 사도들이 하느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탈옥의 기적 속에서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날이 밝자 사도들은 성전에 들어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지만 다시 붙잡힙니다. 사도들은 또 다른 기적 같은 탈출을 기대하였을지 모르나, 박해의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던 예수님처럼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어둠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나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을 진리의 빛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빛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빛 속에서 참되게 살아간다는 것은 믿음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빛에 더 가까워지고,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드러내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악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하나뿐인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빛을 비추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선을 행하여 어둠의 조각조차도 빛으로 물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빛 속에서 살면서도 어둠과 싸워야 하기에 그리스도인은 늘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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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 뜻을 이루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일’에 적용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구원의 길’도 모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도 몰라서 방황하던 인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같습니다.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할 때의 모습이든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굶주릴 때의 모습이든지 간에, 집을 떠나 있는 그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길을 몰라서 방황하고 있던 인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집을 떠나 있는 작은아들을 타이르고 회개시켜서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일입니다. (타이르고 회개시키는 과정에서 꾸짖고 혼내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벌을 주는 일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가 많았는데, 그것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것은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그 생활에 만족해서 그런 고집을 부리든지,아니면 굶주리면서도 아버지한테 혼나는 것이 무서워서 고집을 부리든지 간에, 어떻든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그를 위해 준비해 놓은 잔치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리고 아버지 집의 ‘밖에서’ 버림받은 모습으로 지내는 것을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의 ‘안’에는 참된 안식과 평화와 행복이 있는데, ‘밖’에는 절망과 고독과 후회만 있습니다. 그런데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비유를 보면, 큰아들이 그렇게 ‘밖에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구원과 멸망(심판)뿐인가?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는 없는가? 답은 “없다.”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밖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구원도 아니고 멸망(심판)도 아닌 제3의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일이 됩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이 말씀에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라는 말씀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한 것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루카 15,12-13)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방종한 생활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라는 말을,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또는, 아버지가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났다.”, 즉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떠났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안 계시는 곳은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있어도,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나를 보고 계시고, 또 내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라는 말은, “자기 인생을 낭비하였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생활과 방종한 생활을 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고, 심판과 멸망을 향해서 걸어가는 일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작은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었던 큰아들의 모습에(루카 15,24-28)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성실하게 일했지만,그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었고, 그는 성실하게 일한 것이 아니라, 불만을 품은 채로, 화를 내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화가 나 있었고, 아버지와 동생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동생처럼 마음대로 살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화는 ‘악’입니다.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치는 ‘빛’입니다. 큰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안 들어간 것은, 그 ‘빛’을 미워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고, 또 자신의 마음속의 악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작은아들은 회개하고 ‘밖에서 안으로’ 돌아왔지만, 큰아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그냥 ‘밖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밖으로’ 쫓아낸 적이 없는데도 그가 그렇게 ‘밖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심판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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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복음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 방식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시어 악인들을 처벌하시고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만드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메시아,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심판자를 기다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머무는 곳입니다.(요한 8,44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드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요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악’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과 그에 속한 사람은 죽음의 심판을 받습니다.(요한 8,23-2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로 세상의 악에 대한 결정적 승리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기에(1요한 4,6 참조), 거짓을 일삼는 악의 세력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을 이겨 내는 사람으로서 용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미워하는 사람들과 이웃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고 덮어 줄 은총을 받았습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과 용서는 부활의 능력이 가져다 주는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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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고원일 안드레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빛의 자녀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부활을 기뻐하며 우리가 받은 부활의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부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기쁨을 나눠야 하는데 스스로가 그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나눌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 속에서 이야기하자면 기쁨과 평화를 찾지 못하고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으로, 회개하는 죄인에 대하여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부활 하셨고 그 부활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는 시기가 바로 부활 시기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축복과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활을 살아야합니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 시켜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빛의 자녀로 살게 되고 믿지 않으면 어둠 속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의무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실천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열심히 잘 지키고 기도생활도 충실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표현하며, 스스로도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빛 속에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런 신앙의 삶 속에서 얼마나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 입니다.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할 사람에게 화해하지 못하며 그냥 기도 속에서 생각으로 극기로 이겨내는 모습이라면 그 생활을 진정 빛 속에 살아가는 삶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실천입니다. 스스로 문제들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속에서 모든 것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에 힘이 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실천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은총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문제들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지켜오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좀 위험한 신앙일 수 있습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속에서 기쁨이 되어야 하고 그 기쁨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나눔과 사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기뻐하며 함께 알렐루야를 외치면서도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를 찾지 못하고 외형적인 알렐루야만을 외칠 때 진정 주님의 부활은 내 마음속에 머물 수 없으며, 그 결과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이웃에게 나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빛의 자녀로 초대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어둠을 좋아하고 자신을 들어내기 보다는 남들을 통하여 이득만을 챙기려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들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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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빛과 어두움의 대조는 요한복음 저자가 복음서 처음부터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반대로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때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면서 온통 빛으로 가득한 삶이란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어두운 인생만 있으란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다 보면 회색 지대도 필요하고,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순간도 필요하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구원의 빛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죽음을 물리쳐 이겼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들과는 달리 복음서 시작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고백하고, 그분이 바로 인류의 빛으로 오시어 어두움과 죽음을 이겨 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이 두려워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대사제와 사두가이파들의 어두움과 반대로, 감옥에 갇혔어도 천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에 나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빛의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씀처럼, 지금 내가 회색 지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내 안의 어두움을 이겨 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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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3월 27일입니다. 비가 내리는 바티칸 광장의 밤이었습니다. 텅 빈 광장에 홀로 교황님께서 제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이를 위해서,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는 이를 위해서, 의사와 간호사, 자원봉사자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마르코 복음 4장 35절에서 41절의 말씀으로 강론하셨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 배가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겁이 나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말하였고, 곧 돌풍이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돌풍을 잠재우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교황님은 강론 중에 3가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배’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같이 노를 저어야 합니다. 분열과 갈등은 배를 가라앉게 할 것입니다. 비난과 원망은 배를 가라앉게 할 것입니다. 함께 연대하고, 함께 고민하며,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진단키트도 나누고, 방호복도 나누고, 치료방법도 나누면 됩니다. 밖에서 보면 지구는 아주 작은 별입니다. 어둠 속에 빛나는 푸른 별입니다. 우리는 외롭고, 작은 별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돌풍’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했습니다. 우리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그릇된 신념으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벌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념, 세대, 사상, 종교, 지역, 학연으로 갈라져서 서로 비난하였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행위가 돌풍이 되어 우리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돌풍이 되어서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지금 아픈 이웃을 위해 손을 내밀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사재기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세 번째는 ‘닻과 키’입니다. 닻은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줍니다. 키는 배가 정해진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두려워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닻이시고, 우리의 키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약하고,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십시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인류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 몸의 지체들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해 주듯이 인류 공동체도 건강해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가진 것을 나눈다면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이고, 그것이 바로 표징이고,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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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잘 산다는 것>
요한 3,16-21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
굳이 드러내지도 않고
굳이 감추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세상에 사는 내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과
나와 세상에서 더불어 사는 이와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면
잘 사는 것이겠지
드러내야 할 것과
감추어야 할 것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드러내야 할 것은
드러내고 싶고
감추어야 할 것은
감추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진데
살아가면서
감추고 싶은 것보다
드러내고 싶은 것이
나날이 늘어난다면
잘 사는 것이겠지
드러내고 싶은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지 않아도
아무도 날 보아주지 않아도
나를 보내신 분만은
나를 보고 계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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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내일부터 미사가 재개된다는 소식을 많은 분들이 접하셨을 것입니다. 미사가 중지된 지 어느덧 약 50여일이 지난 뒤 들려오는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아직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종식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새로운 환자가 나타나고 있고 병상에 누워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해외의 많은 사람들이 위협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환자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사실, 많은 이들이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다는 소식들 안에서 저는 희망을 바라봅니다. 처음 바이러스에 대해 뉴스가 나오던 시기를 떠올려 봅니다. 중국에서 새로운 질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처음에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기하급수적으로 확진자가 발생함에 따라 이제 이 질병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질병 앞에서 우리 모두는 두려웠습니다. 이 두려움의 종류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 첫째는 타인에게 내가 전파할 수 있다는 두려움, 셋째는 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의 사회적 시선의 두려움 등입니다. 인간은 무력했고 바이러스는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의료진들의 헌신, 상대방에 대한 배려 안에서 우리는 지금 이 질병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인류는 결코 바이러스 앞에서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스페인 독감, 흑사병 등 많은 질병으로 인해 개개인은 고통 받고 목숨을 잃었을 지라도 ‘인류’ 자체는 이를 극복해 왔습니다. 이 질병은 위대한 인물 한 두 명의 힘으로만 극복된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의 지혜가 질병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원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소시민들의 소박한 헌신이 없었다면 질병의 극복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헌신, 배려, 성실한 희생정신과 돌봄이 결국 이 세상을 개선시켜 온 셈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빛”과 같은 행동이 있다면 반면 “어둠”과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있습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재기, 죽음의 위협을 기회삼아 일어나게 되는 여러 가지 악행들이 이러한 예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결코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인간은 결코 나약하지 않으며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기에 인간은 타인에게 헌신할 수 있고 가족을 돌볼 수 있으며 고요한 적막 가운데에서도 기도하며 서로에게 힘을 주게 됩니다. 부족하게나마 이렇게 인류가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 즉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빛으로 나아가는 이들이며 오늘 화답송의 말씀처럼 우리의 주님께서는 선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함부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반면 악한 행동을 하는 이에게는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어둠을 사랑하는 이들,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도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바로 그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유명한 그림을 앞에 두고도 그것의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충분한 손해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빛을 사랑하는 이의 행복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 자신을 단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들은 어두운 표정 안에서 시기와 질투, 미움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끝이 있는 법이며 우리 모두가 바이러스의 창궐 안에서 인식했듯이 결국 인간은 흙으로 와서 흙으로 가는 존재들입니다. 죽음 이후에 그저 한 줌의 가루가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더욱 더 큰 의지를 가지고 빛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으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제 미사 재개를 앞두고 있는 우리들은 지난 약 50여일의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다시금 돌아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랑을 얼마나 실천했습니까?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얼마나 기억하며 기도했습니까? 질병의 두려움으로 인해 타인을 의심하고 미워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러한 반성 안에서, 그동안 메말랐던 영성을 그리스도의 성체로 가득 채워나가며 앞으로 더욱 더 빛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아직까지는 조심스럽지만 분명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다시 이전의 일상생활로 돌아갈 날이 올 것입니다. 인류는 서로 사랑할 수 있기에, 그리고 희생할 수 있기에 위대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함은 하느님의 고귀한 사랑에서 옵니다. 이 사랑을 이제 다시 직접적으로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성당에서 모든 신자 분들과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시간을 기다립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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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890년, 프랑스 파리에 사는 한 노인에게 이웃에 사는 화가가 손수레 가득 수백 점의 그림을 싣고 찾아왔습니다. 이 화가는 노인에게 돈을 빌렸는데 도저히 갚지 못할 것 같다면서 자신의 그림을 수레에 담아 와서 빌린 돈 대신 그림을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이 그림이야 내게 짐만 될 거야. 도저히 받을 수 없네.”라면서 거절했습니다. 이 노인의 아내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수레라도 받아 놓지 그랬어요?” 이 화가의 이름은 여러분도 잘 아는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러나 지금 그의 작품 가격은 어마어마합니다.
1990년에 그의 작품 ‘가세 박사의 초상’이 8,250만 달러(한국 돈으로 약 980억)에 팔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이 작품의 가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쓸모없는 짐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때 그 그림을 받아들였다면 후손대대 큰 부를 누리면서 살게 되었겠지요. 지금 자신의 판단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판단이 나중에 큰 후회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늘 한 번 더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따르는데 갈등이 참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세상의 것들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돈도 생기지 않고, 명예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어떠할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혹시 하지 않았던 일들이 후회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의 지극함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께서 세상에 주신 대단히 귀한 선물입니다.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는 생명 자체, 곧 죽음을 쳐부술 수 있는 제일 유익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고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대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따르려고 하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행실을 따르지 못합니다. 빛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 세상 안에서는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로 나아가면서 빛이 아닌 어둠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선물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제는 후회를 만들어가는 삶이 아닌, 참 기쁨을 만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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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어느 카페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서 싸우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주먹이 왔다 갔다 하는 폭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견의 불일치로 심각한 말싸움을 하더군요.
그런데 의견의 일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지, 남자는 화를 내면서 일어나 나갔고 여자는 자신의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계속해서 울고 있었습니다. 사실 카페에서의 싸움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영국 레딩 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연인이 어느 장소에서 싸우느냐에 따라 이별할 확률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곳은 소음이 가득한 곳이라고 합니다. 소음으로 상대의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노랫소리와 사람들 말소리로 가득한 카페가 좋은 공간은 절대 되지 않습니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세상의 소음 속에서 주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만 같습니다. 침묵 안에서 잘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사랑의 주님을 이해하고 함께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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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구원의 믿음은 은총이자 선택이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사랑때문입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계속되는 부활축제시기 하느님의 사랑은 온누리에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진리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사랑도 끊임없이 주님 안에서 정화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성장이란 결국 주님 안에서 사랑의 성장입니다. 육신은 노쇠해가도 사랑은 계속 성장해가야 합니다.
그러니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사랑의 여정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배워야 하는 사랑이요 평생 사랑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삶의 영원한 롤모델로 삼아야 할 분이, 사랑의 여정에 평생 도반이 바로 사랑의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믿음도 구원도 행복도 은총이자 우리의 결단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살줄 몰라 불행이요 살줄 알면 행복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끊임없이 선택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드님 예수님을 믿음과 사랑으로 선택할 때 구원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믿음과 사랑으로 선택하지 않아 스스로 자초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심판은 내탓입니다. 결코 아무도, 심지어는 하느님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매일 평생 끊임없이 예수님을 선택해야 하는 믿음이자 구원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하여 저절로 나오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자 빛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빛이신 예수님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인 예수님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악에 눈이 멀어 빛속에서 어둠을 살아가는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니 스스로 자초한 화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자 빛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마음과 입으로 증언하는 삶이 빛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이자 진리의 여정, 빛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삶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여 닮아 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을 가둘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진리를 따라 살 때 빛의 삶이요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공영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바로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합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칩니다. 바로 어둠이 빛을, 거짓이 진리를,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음을 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말씀, 빛의 말씀, 생명의 말씀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우리의 생명이자 진리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사랑의 여정입니다. 과연 평생 도반이신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은 날로 깊어지고 있는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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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 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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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말씀은 성경에 담긴 구원 역사의 한 줄 요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믿는 이들을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죽음"에서 "구원"으로 옮겨 주십니다. 즉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
진리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지요(요한 14,6).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며 실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분의 존재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빛에서 나신 빛, 참 빛이십니다. 그분께는 어둠이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면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우리도 빛을 받아 빛에 흡수됩니다. 우리 안에 어둠은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
슬프게도 세상은 빛보다 어둠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어둠을 더 선호하지요. 말하자면 죄와 악, 미움과 증오, 차별과 소외, 이기심과 분열 쪽으로 더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지만, 여간 정신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들이 등장합니다.
"밤"(사도 5,19)과 "감옥"(사도 5,18)은 어둠의 영역입니다. 또, 대사제와 동조자의 "시기심"(사도 5,17) 역시 어둠의 힘이지요. 반면 "주님의 천사"(사도 5,19), "이른 아침"(사도 5,21), "성전, 생명의 말씀"(사도 5,20)은 빛의 영역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라."(사도 5,20)
천사는 사도들을 풀어 주면서 멀리 도망가라거나 깊이 숨으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전 한가운데 서서 말씀을 전하라고 보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을 잡아 가둔 적대자들의 눈에 띄기 쉬운 곳으로 다시 보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탈옥이나 탈출이 아니라 복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원래 있어야 할 제자리인 빛으로 되돌아가 말씀을 선포합니다.
결국 사도들은 다시 적대자들에게 소환되지요. 어둠이 빛을 삼키려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도들은 아무리 큰 시련과 박해가 닥친다 해도 굴하지 않고 거듭거듭 빛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 안에 더 이상 어둠의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실존 안에도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요. 실존적 어둠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을 닮아보려 부족한 영혼을 일으켜 까치발을 드는 사이 어느새 우리에게 빛이 찾아올 것입니다. 백 번 어둠으로 고꾸라져도 백한 번째에 다시 일어나 빛을 향하면, 언젠가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우리 존재 자체가 빛과 하나될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이 말씀이 너무 추상적이고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아주 작고 소소한 일부터 구체적으로 하나씩만 해보아도 좋겠습니다. 세포에 속속들이 박힌 어둠을 떼어내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기 어려우니까요. 어둠에 무너지거나 자지러지지 않고 겸손하고 끈기 있게 빛을 향하는 사이 어느새 성큼 빛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자리할 것입니다. 빛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다 못해 우리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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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부활의 희망은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의 핵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의 핵심으로 본다. “우리가 만일 이승에서만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야말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가련할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은 현생에서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나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좌절할 때 나를 일으켜 세우시리라고 신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안젤름 그륀, 「희망」에서
♣진정한 희망은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죽음 앞에서도 굳건한 희망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지탱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환난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자신의 죽음 등 어떤 무엇으로도 파괴될 수 없는 우리 희망의 근거이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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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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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임과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나라 한반도, 우리의 강과 산과 바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참으로 신비로운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를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곧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심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이처럼,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 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심판 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오늘 하루 하느님 사랑에 ‘피앗’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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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 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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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하나의 빛>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구원의 빛, 부활의 빛을 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람의 움직임, 묵묵히 살아내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한지요.
진리를 논하지 않더라도 좋으신 주님을 품고
사는 모습은 빛이 나서 천사가 도와주고,
또 그 손길이 고마워 더 열심히 삽니다.
부족한 제게도 어떻게 하면 도울까
마음 써주는 천사의 손길이 고맙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지구의 날'로 제정한 지
50주년 되는 날입니다.
지구의 아픔은 우리의 잘못이요 아픔이죠
오늘 밤 8시 십분간 소등에 동참합시다!
대자연의 고마움을 깊이 느끼는 시간!
"하늘, 땅, 진리는 하나의 빛입니다."
( '우리 함께' 동참해요)
https://youtu.be/cPjqWEOka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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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되는 강렬한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영원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더 사랑하기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랑과 구원은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깊이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과
구원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믿는 행복입니다.
불안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랑은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우리 삶안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는 사랑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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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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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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