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
‘단 한 번의 제사’
‘자기’를 살아가신 예수님
동물들은 우울로 자살까지 이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인간만이 우울이라는 현상을 겪는 동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은 여러 가지 경로와 이유로 발생하는 ‘마음 현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우울한 사람은 자기 존재감이 낮으며 가치감, 유능감 등 여러 측면에서 자신과 관련된 감정들이 부정적이다. 어떤 감정은 의식의 표면에 나타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정서도 있지만, 보다 핵심에 해당하는 부정적 감정은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억압되어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특별한 노력과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엉뚱한 결론에 이르기 쉬운 ‘마음’이다. 어떤 이유로든 ‘우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 그리고 느낌’의 소산이다.
‘우울’이 위험한 까닭은 동기를 약하게 하고 의미와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게 한다는 점이다. 동기가 약하고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무감각해질 때, 사람은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무력감에 빠지면서 인간 특유의 낙천성과 열정을 상실하게 된다. 우울은 우리를 ‘불신앙’으로 빠져들게 하는 악의 늪과 같은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울로 인하여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생명이 생명으로서의 활력을 잃으면 더는 생명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우울은 생명의 활기를 죽이는 ‘독’과 같다. 우울한 사람은 ‘하느님을 잃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울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가 보다. 적지 않은 우울한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것으로 고통이 끝날까? 사람들은 ‘죽음이 어찌 됐든 휴식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새로운 시작’을 통해 인간은 ‘완성(성숙)’으로 확장되어 간다.
어떤 종교, 어느 문화에서도 ‘죽음’을 그냥 ‘죽음’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죽음을 그냥 죽음으로 보지 않은데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의식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자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우리가 우울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런 ‘자의식’ 때문이다.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내고 문화 안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동물인 셈이다.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것들을 경험한다. 자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사는 존재다. 자기를 세상에 투입하고, 자기를 세상에 방출하여 외부세계와 접촉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세상에 투입하고 던져 외부세계와 접촉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산다는 것은 자기를 세상에 던져야 하는데, 그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자기를 온전히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루카 16,31)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0,11-12) 구약시대의 사제들은 ‘제물을 바치는 직무’를 수행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다.’ 직무 수행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제물이요,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는 것’은 직무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제 율법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는 그 완성을 향하여 거침없이 나아가신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7. 공동번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8. 공동번역) ‘제물을 바치는 직무’ 수행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의 제사’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라 ‘사랑’인 것이다.
선과 악이 양극단을 이루듯이, ‘자기 사랑’과 ‘나르시스’는 양극단을 이룬다. ‘자기’를 살아가는 것과 ‘자기’를 욕망하는 것이 양극단을 이룬다. 자존감과 자존심이 양극단을 이루고, 열등감과 우월감이 또 그렇다. 진실과 껍데기가 추의 양 끝을 차지하고 있듯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에겐 어려운 과제다. 자본주의적 세속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만하면 잘 사는 것 아닌가?’ 하며 자족(自足)한다. ‘인생이 뭐 특별한 것이 있나?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면 그만 아닌가?’ 하며 애써 회피한다. 그래서 회피할 수 있었고 평안히 눈감을 수 있었을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다. 나의 죽음은 나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매우 배타적인 것 같다. 나의 죽음 앞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의지할 수 있을까? 죽음은 우리가 ‘단독자’임을 다시금 환기해준다. 우리가 ‘단독자’라는 것은, 우리는 언젠가 ‘자기 앞에 서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자기를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직면하신다. 직면하셨기에 당신 자신을 사셨고, 그것이 당신의 제사를 통해 드러난다. 십자가의 제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한다. ‘직무를 수행’하는 율법의 시대는 끝났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각자’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자 개념이다. ‘나’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자, ‘나’의 삶은 ‘그냥’ 뜨내기나 어중이떠중이처럼 스쳐 지나가는 삶이 아니다. ‘자각’이 결정지을 것이다. 자기를 ‘자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과 자기의식 속에서 ‘자기를 살아가는 사람’은 전혀 다른 존재다. 누군가의 옷을 입고, 누군가를 흉내 내며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나라,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마르 13,28) 하신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다니 12,3)
우리는 자기를 피해 에둘러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이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을 가든 거기에 또 ‘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피해 어디를 간들 거기에서 또 ‘나’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