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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오면 남도 바다 망망대해 홀로 기다리는
섬에 봄오는 길목찻아 떠나는 인연들 따라
여수의 끝자락 개도에 다녀왔다.
질투의 뜻을 말하면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른 지닌다고 한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을 질투심이 많은 사람 이라면 먼저 모자라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질투란 상당히 흥미롭고 감정적인 주제이고 문제이다. 질투심은 다른 여러가지 상황은 촉발시키는 역활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진부하고 일상적인 현상이다. 흔히 분노지수가 높다는 것은 질투심이 라는 경고등이 켜지는 특정시점은 누구나 가진다. 그것을 깨닫고 의식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이다.그것이 오래전부터 인간이 가지는 것이 크면 클수록
질투심이란 어떤 형태이든 나타나는 것이다.
제자백가 시절도 질투란 학문이나 경쟁이나
어떻게 든지 나타낸다는 것이다. 공자나 장자나 노자나 맹자도 비판으로 학파를 질투하고 내세우는 이유는 단지 내세우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철학이나 선지자나
반론은 당연한 질투가 바탕이다.
질투심은 자기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가장 고백하기 싫은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이기심이나 무심함, 공격성에 대한 비난시 질투한다는 말을 듣거나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낫다고 느낀다. 지신들의 행동이나 사고를 설명하면서 그 동기가 질투심이 었다고 하는 이는 거의다 없다는 것이다.그러멘서 다른사람이 한 행동은 질투심이라고 거리낌 없이 질투로 대신힌다.
질투심은 반드시 버려야하는 수치스러운 감정 이라고 하지만 일상에 존재하며, 정치적 혹은 사회적 담화 속에서 흔하게 등장 하는 일상이다. 개인과 집단, 각종기관, 특정정당들의 관계는 물론이고 형제자매, 부모자식, 부부, 동료 물론 지나기는 인파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이에도 가까이 세련된 모습에 표정관리가 안되는 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린아이 조차 같이 노는 아이들에게서 질투는 자유롭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도 부모에게 밀리면 견디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질투를 가진다. 새옷이나 머리핀 하나에도 느끼는 마음은 어찌할 수없다. 주된 동기는 단하나 주관적인 인상에 의한 손해를 본다는 뒤처진 경우이다. 질투란 나보다 더한 많은 것을 가졌거나 그럴수 있는 사람에 대한 불만, 열등감, 분노가 뒤섞인 미묘한 것으로 위장한다. 질투심의 뜻은 ' 타인이 잘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불쾌감에서 증오까지 이르는 마음' 이라 정의한다. 사람들은 누구에게서 질투심이 강하다는 말을
듣기를 싫어하고 방어한다. 질투심이 많은 사람은 음흉하고 교활하며 증오심에 불타오릂뿐 아니라 편협하고 고루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조지 포스트는 "우리들은 죄의식이나 수치심, 비뚤어진 자부심은 믈론, 심지어 탐욕 스러웠던 순간들 까지도 우리 자신의 에고 Ego에 상처를 입히지 않어면서 시인할 수 있다. "라고 하고
"하지만 악의적인 질투심, 그것만은 사회적으로 결코 수용도, 정당화되지 못한다" 라고 한다. 질투심은 사회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인가?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지닌 질투심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큰 모욕감이 "넌 지금 질투하고 있는거야" 이다. 이말은 사헹선고나 마찬가지이다. 상대가 질투심 을 느낀다고 비난하는 방식이 달갑지 않은 논쟁을 미연에 차단하는 데 효과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질투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성격장애를 지녔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질투는 자신의 이름을 더립히며, 부도덕적인 사람으로 이용한다.반대로 다른 사람들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위이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 장자편에 나오는 공자는 항상 그렇게 이용된다.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경쟁 사회에서는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고 나를 질투하게 만드는 것은 괜찮은 일이디. 살아가면서 질투심이 어떤 형태로든 느끼는 감정이다. 당연히 이런 감정은 미치는 파장이 다를뿐 크기는 각자의 마음이다. 질투의 유빌동기는 구체적 대상은
특정한 물건, 재능, 성격 같은 것들이다.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과 간절히 원하는 부분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의 분석은 그곳에서 중시되는 가치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중시한다. 부와 명성, 미모, 학식등은 일반적 통용되는 가치이고, 두각을 나타내는 선망의 대상이고 질투를 부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물질주의 현대에서는 끊임없이 광고나 미디어로 질투의 투쟁장으로 만드는 세상이다. 신분을 상징하는 소유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질투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욕망은 전혀 다른것들을 원할뿐이지 다르게 느낄뿐이다. 미횬자는 커플에게서, 학문하는 사람은 지식에게서,
종교인들은 타종교에서, 하다못해 배고픈 사람은 누군가 밥먹는 모습에서, 피곤한 사람은 어디서 편히 쉬는 사람에게서 질투의 대상이 되지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의 무언가를 질투하기 마련이다.
'질투할 가치가 있다' 는 것은 상당한 칭찬이라 한다. 산을 다닌지 흔히 반평생이라 하지만 어느듯 평생이 되어버렸다. 학창시절 우연히 아버지따라 속리산을 다녀오고 고등학교 등산부에 들어가서 산을 다닌 인연이 평생의 놀이가 되었다. 물론 그땐 질투보다 존경의 대상인 선배들의 장비나 의복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어니 그땐 체력이나 어디든지 데리고 가고 따라 갈수 있는 기회가 최우선이었다. 지리산이나 적설등반이라도 따라 갔다오면 최고 였어니 말이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많아지니 산도 전문적인 위치는 어렵고 먹고사는 일에 빠지고 산에 대한 질투나 누구를 동경하지는 않았지만 어느닐, 산악자전거에 빠지고, 자전거로 세계일주하는 인터넷 은 과히 신세계 였다. 직장 퇴직을 앞두고 어려운 일에 도달하여 탈출구로 중국을 6개월 자전거여행을 디녀오고 나서 자전거를 접었다. 질투의 대상을 부러워하기에는 나 자신의 능력이 우선이 되어야했다. 처음으로 체력이 나이가 우선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물론, 그때도 산을 다니는 중에 어디를 가는데 누구의 뒤를 따라가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은 어느듯, 신도 내려갈 시점의 시간이다. 선배들이나 산을 일찍 떠난 분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는 착각이 무섭게 다가온다. 산길에서 누군가가 잎질러가는 것은 질투보다 산길을 오늘도 갈수있다는 즐거운 낭민이 있다고 허울아닌 허울을 즐긴다. 지신의 소유물이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싶어하면 비로소 그것들이
가치있는 것처럼 느낄것이다. 승자는 타인의 질투심을 통해 더 큰 승자가 된다. 누구를 존경하고 따라하는 것도 정상을 가는 길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는 물건, 자기와 비슷한 목적을 가진사람에게 질투라는 것을 가진다. 어딘지 모르게 자기와 비슷한 점이 있는 대상과 비교하는 것이다. 흔히 시공간이나 사회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곳에 있는 사람이 주는 질투심이 문제이다. 미국의 머스크나 중동의 석유재벌을 진지하게 부러워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훨씬 자주 만나는 친구나 자기와 신분이 비슷한 사람,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 옆집에 사는 이웃사람이다. 본인이 봉급이나 돈을 많이 번다는 것보다 비교대상이 되는 사람의 변화이다. 나보다 나은 집이나 의복이나 생활 자체의 변화를 비교하는 생리이다. 요새는 계급사회가 없다고 하지만
부모의 직업이나 사는 곳에 따라 신분의 상승은 더하다. 같은 정당의 의원들도 누가 먼저 높은 자리에 오르는가가 질투의 대상이다. 결국은 불리한 위치의 조건에서 하는 경쟁의 결과에 성공을 하지 못하는 질투는 사회의 일부가 되어있다. 우리는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다른직업, 더큰차, 더 좋은집에서 사는 사람에게서 질투심을 가지는 것은 나보다 낫고 행복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서 받는 질투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빈부의 치이나 명예나 각자의 능력이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누구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큰 금액이나 크나큰 주택이나 어여쁜 배우자를 두는 사람들의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가로움을 즐기는 육체노동자나 일당받고
시긴을 편하게 보내는 것을 부러워하는 엄청난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무언가를 성취한 대가로 얼마나 큰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는지는 실제로 아는이가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상대를 질투하면서 불쾌한 감정으로 자신을 몰아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누구도 시키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결정이라는 것이다.
질투심은 공감이나 이해심, 동정심과 같은 동지의식을 차단하고 불가피한 죄의식을 만든다는 것이다. 상대가 주는 도움 이나 지원은 자신이 더 작아지는 듯한 고통으로 내 모는 것이라 한다. 다른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다는 순수한 이론을 앞세위지만 모든일은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누가 다른 사람의 질투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항상 질투는 각자가 만드는 것을 각자가 일뿐이다.
많은 문제가 있어서 고통받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이세상에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빚더미나 두려움도 부러워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항상 잘 지낼수는 없다. 모든 사람의 성공들은 마치 쉽게 얻은 것처럼 질투 아닌 질투의 마음으로 보지만 사실은 고생끝에 얻은 것이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 대간 종주나 지맥길을 종주하는 것을 무심코 듣지만 완주하는 이들은 족자살자 산을 넘는 이들 뿐이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들미 얻은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결과를 얻기위해 그들이 치룬 대가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정주영 회장이나 이병철 회장도 어려운 생사의 결단으로 이룬 것들 이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대재벌의 회장이라는 것뿐이다. 모두 이루기 위해 원칙을 정해놓고 인내하고 노력하고 결정하는 피 마르는 순간을 이겨내는 것을 부러워 하지는 않는다. 이들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부러워 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질투심보다는 자민심이 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내가 낫고, 좋고, 부유하고, 유명하기에 시실은 만족한다.
그러나, 질투심과 마찬가지로 자만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수 없다. 특히 누군가 자꾸만 실파해서 내가 누리는 자유를 부러워 한다면, 질투한다면, 그의 질투심은 갈증을 해소시키는 원동력이 될지 모른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한다는자신은 잘했는데 다른 사람은 모자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은 말로 디할수 없는 만족감으로 나타난다.
타인은 타인을 하나의 사건이나 이미지로 기억하고, 거기에는 그 자신이 없다. 그저 누군가로 부터 의미 지어진 형상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우연적 사건에 불과하다. 그 역시 타인과 사물을 그렇게 기억한다. 인긴은 태어나면서 이미 연명된다. 이세게에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어져 규정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세계라는 무대위에서 각자의 배역에 최신 을 다하여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 역활에 맹목적인 연기속에서 자신의 의식이 존재를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환속에서 허덕이는지 모른다. "존재자는 결코 다른 존재자를 정당화 할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창조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존이 본질에 항상 앞서가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고 틀린 것은 각자의 생각이고 본질일 뿐이다. 실존하는 세계에서 각자의 연기를 하지말고 살아가는 이유를 깨달아야 한다. 질투는 타인에게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나 이미지 일뿐이다. 현재만이 실재할 뿐이다. 바로 이순간 자신이 긍정을 만들면 긍정이 되고, 부정을 만들면 부정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의 본질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결정 난다. 다만 그것 뿐이다. 그때는 그때의 실천이 또 필요하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
아름답게 감상하면 그 뿐이다. 산꾼이니까.
세계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 날마다 새로울 뿐이다. 영남 알프스를 그리 오래 자주 가지만 같은 산을 본적은 한번도 없다.
마치 어항속의 값비싼 물고기를 바라보고 부러워한적이 있을까? 현대는 수족관의 열대어 처럼 사는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남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마치 자신을 에워싼 질투심에 가득찬 눈빛들을 바라보고 즐기면서 으스대려는 것이 삶의 전부인 연예인이 된것 같은 착각을 하고 다니는 이들의 세상이다.
이름난 명품백에 값비싼 시계나 보석에 남들과 다른 족속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질투를 마치 미개한 하층민의 불만으로 느끼는 쾌감을 원하는 이들이 상류층이 된듯이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다른이유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동등해 질수 없을 정도로 뒤쳐져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비판하거나 방해하지 못하고, 거드름을 피우거나 오히혀 타인의 불쾌감을 유발하고 공격의 대상을 관심을 끌기위해 허풍을 떨고 위기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 질투의 대상이 되고싶은 충동때문에 종종 자신의 가치를 외모와 지위, 재산등으로 판단하려고 하지만, 이런사림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남들이 자신보다 멋지거나, 더 나은 지위나, 능력이 뛰어나면 감정이 폭발한다. 타인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사람일수록 질투심에 사로 잡힌다.
질투심 뿐아니라 질투의 대상이 되는것 역시 양날의 검처럼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질투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성서에서 카인은 동생 아벨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이 더 높게 평가하자 질투심에 동생을 살해한다. 성서에는 '이웃집과 여자와 가축 노예등을 탐하지 말라' 고 하지만 동기는 질투심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이 분노와 현혹, 질투심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질투심은 영혼의 빈곤함의 표시라 한다. 이슬람교 에서는 진정한 종교는 신자들로 하여금 '질투심이야 말로 에고가 지닌 가장 나쁜 성격중 하나이며, 모든 죄악의 어머니' 라고 한다. 질투란 마치 인류역사 전체를 통해 물려받은 심리적 유산이라 철학자 융은 말한다. 질투심이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능력이 길러진다고 프로이드는 말한다.
하얀 질투심과 검은 질투심을 레오 몬타나 심리학자는 검은 질투심은 비생산적인 감정적 흥분을 의미하고, 하얀 질투심은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만드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보다 질투심이 더 많다는 속설은 근거가 없다. 질투심에 반응하는 방식에 차이가 날뿐이다. 남자는 미래의 가능성이나 지위에, 여자는 젊음이나 맨션에 느끼는 경우가 많다. 질투심이 커질수록 실제로 느끼는 고통도 커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약한 마음은 질투의 대상이 피해를 입어면 크면 클수록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질투의 대상이 실패하는 모습으로 일종의 보상심리를 느끼는 것이다. 질투심은 더욱더 소유욕으로 커져간다는 무서운 정신적 고통이다. 성숙은 질투심을 버리는 공부이다.
질투는 본능이라는 것이다. 수백년 전 부터 철학, 회화, 시, 신화, 심리학에서 질투는 나타난다. 동물들도 질투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질투가 진화의 중요한 요소라는 확신을 갖는 학자들이 있다. 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보엠은 질투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는 강력한 충동 이라는 것이다. 모든 질투에 선행하는 비교는 뇌가 강자와 약자를 인식하도록 돕는다고 한다. 인간이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면 개인적 발전을 위한 어떤 기준치를 찻지도 못한다고 한다. 질투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스스로를 부족하다 자책하지 말어야 하나? 질투는 부끄러워 하고,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감정이라 종교적이나 사회 모든 관습에따라
늘 붙어다니는 공포, 슬픔, 분노처럼 다루기 어려운 본능으로 보는 것인지 모른다. 질투심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자체가 우리의
일부를 부정해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갈등중 하나이다. 질투도 우리의 감정중 하나의 동전양면 같은 것이라 살면서 강화하거나 약화 될수도 있는지 모른다. 소속감과 개별성의 감정이 질투를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우린 다른 소속이나 다른 타인들에게서 느끼는 질투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비교할수 있는 소속된 사람이나 개별적으로 친한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사고의 행동 유형들은 삶의 초반에 이미 형성된다고 한다.
가족이나 이웃환경에서 이미 습관처럼 가지는 사고의 결과인지 모른다. 질투가 강한성격은 어릴때 잘못된 교육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삶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배운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어릴때부터 부모나 이웃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압박 때문에 자신의 관심이나 즐거움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 기대치를 위해 사는 것도 문제이다. 어릴때부터 누구와 비교하는 말버릇이나, 만지지마, 저리가 내가 할께, 이런 점수는? 등의 말로 매도하는 것은 질투심을 심는 하나의 비수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받고 소중한 사람이고 무엇이든 할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우선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보기보다 예민하고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취하는 태도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뿐 아니라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신경 조직에서 다른 조직으로 전달되는 자극은 자신이 그순간 느끼는 것을 함께 전달한다. 질투심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스치듯 일어나 의식에서 감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난다.
질투의 유발인지는 전혀 다른 뜻밖의 것으로 나티니는 경우가 많다. 친구의 전화 한통화,
동료의 어떤행동, 이웃의 즐거운 눈인사, 상사의 작은 행동등 직접적으로 질투심을 느끼지 못하다 기분이 다운되고 갑자기 모든
것에 예민해지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먼저 나타난다. 질투하게 되면 일단은 스트레스 가 나타나는 혈압상승, 호흡이 빠르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네랄린이 분출된다는 것이다.
우리몸은 오래전부터 질투심을 느끼면 신체가 위협받는 상황과 같이 싸우거나 도망을 가는 생존 본능을 느낀다는 것이다. 질투는 스트레스 로 심신에 악영향을 유발한다는 결과가 아니라도 그 자체만으로 해롭다고 한다. 심하면 밤늦게 까지 상대에 대한 설욕을 고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정신의학과 심리학과 내장기관의 반응은 모두가 뚜렷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질투심으로 끌려 다닐수록 심신은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나타난다는것이다.
질투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작은 방법이지만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으로 조화롭고 슬기롭게 즐거운 자신의 길을 가는 법을 알아야한다. 적어도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빨리 아는 산꾼의 지혜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질투는 자기인식을 위한 기회로 생각하면 우리의 진짜 소망과 욕구를 질투 뒤편에서 찻아야 한다. 삶은 계속 바뀌어 지는 것 뿐이다.
우리가 질투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사람은 없다. 모든 외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질투심을 느끼는 원인은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질투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고상함이라는 탈을 쓰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지불식간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선조는 기형적으로 군주가 되었지만 늘 질투심과 군자의 도리에 대하여 항상 자신을 높이는데 신하들을 의식했다고 한다. 정통성에서 뒤쳐진 선조는 항상 질투심으로 국정의 좌표로 수많은 신하들을 귀양이나 당파로 이용하다 결국은 임진왜란도 당파의결과로 크나큰 국란을 당하고 국민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신의주 까지 죽자살자 도망을 가서 여차하면 명나라에 나라까지 넘겨줄려고 한 최악의 군주이다. 질투심의 말로는 성웅 이 순신 장군을 국문한다는 명목으로 전투중에 잡아드리고 삼도 군민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는 장군을 시기 질투하다 전세가 위급하니 백의 종군이라는 죄인을 만들어 결국은 장군의 생사까지 좌우하는 못나고 못난 군주이다. 임진왜란 사이에도 몇번이고 군주의 자리를 내어놓는 최악의 연기로 국난을 이용하고 시기와 질투로 오래동안 군주의 자리를 차지한 최악의 조선왕이다.
왜란후에도 자기 말을 잘듣는 내시나 호위군에게 일급칭호를 내리고 홍의 장군 곽재우나 의병들을 천대하는 바보같은 짓을 하는 최악의 군주이다. 어릴때부터 질투와 시기의 세월로 자란 대군이라는 허울속에서
보낸 결괴인지 모른다. 지금도 이런 지도자가 국정에 관여하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질투란 높이 올라 갈수록 심하다는 것이다.
질투심은 특정 사고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가 생각방식에 따라 거의 반사적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짓는다. 그 평가를 바탕으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우리의 평가방법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의 경험, 가치체계, 습관의 결과물이다. 질투의 감정 역시 사실은 하나의 가치평가 라는 것이다. 개인 각자의 가치판단과 사고유형은 자신과 세계에 갖는 상에서 생겨나지만, 동시에 그것이 옳다는 점을 확인해 주는 역활을 한다. 사람은 각자 나름의 세계상이 존재한다. 사실 자신의 세계상을 갖지 않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는 세계와 사고유형은 부분적 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모든 결정은
각자의 세계상에 형성되고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경험의 결과가 앞으로 미래부분에도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 기초한 판단이 아닌, 우리가 그린 자아상과 세계상에 들어맞는 결론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경험도 자신이 가진 전제와 가치체계를 토대로 경험에 반영한다는 것이다. 우린 항상 자신의 세계에서 옳다는 것만 인식하고, 부합하는 것은 차단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사고가 해당되는 공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상황을 변화시킬수는 없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일어나는 일의 해석을 항상 바꿀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늘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선택을 해야한다. 우리의 뇌는 나이가 많이 들어도 변화를 원하고, 새로운 유형을 형성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늘 이용하는 신경세포는 굵어지고, 사용하지 않는 신경세포는 점점 소멸된다고 한다.
질투심의 신경은 좋은 곳이 아니면 버려야한다.
봄은 겨울을 항상 시기하고 질투하기에 꽃도 피우고 따스함으로 유혹하나
가슴에는 항상 시간을 질투하는 초조한 변화를 바라는 욕심 가득한 삶은 언제쯤 버릴까
아가! 질투는 엄마를 기다리면 되는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