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숫기도 없는 25살 총각 시절 그때 어설픈 나의 첫사랑 이야길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때 젊은 시절 왜 그렇게 소심 하였는지 순진 했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세월를 보냈습니다.
서울에서 대구로 발령을 받고 하숙 생활를 할때 이야기 입니다.
25살 그 나이에 연애 한번 못하고 참 고독 하고 외롭고 쓸쓸한 순진하고 성실한 애숭이 공무원 시절 이야기가 됩니다.
하긴 그시절 월급도 쥐꼬리 만큼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월급 타서 하숙비 주고 나면 주머니엔 무일푼, 언제 나들이 가고
외식하고 극장가고 연애 하고 그 흘러간 시절를 생각 하면 조금은 속상 하기도 합니다.
그때 내가 하숙 하든 동네는 대구 변두리 침산동 입니다.
그 동네, 비가 오는 날에는 땅이 질고 그때 하는말 아내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는 50년 전 이야기, 서울도 그때
변두리는 수돗물이 시간제 공급 이였고 참 우리나라가 가난한, 그러나 열심히 살아 가든 시절 이였습니다.
잘 살아 보자고 노래 하든 그때 였습니다.
일요일엔 돈이 주머니에 없으니 하숙집에서 가까운 금호강으로 산책을 하거나 어설픈 낚시대 가지고 고기 잡이를 해
보았으나 고기는 몇시간 흘러 보내도 잡기는 커녕 입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함께 한 하숙생 총각은 곧잘 붕어를
낚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별로 재미도 없고 취미도 없는 외롭운 생활로 아까운 젊음을 흘러 보냈습니다.
그때 나의 하숙집은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한분과 아저씨가 않계시는 아주머니 내또래 놀고 있는 큰아들 상고에
다니는 막내아들 그 사이에 시집 안간 세번째 따님 모두 다섯 식구에 총각 하숙생인 나 낯선 동지 일곱분이 한 집에
살았습니다.
주인공인 하숙집의 딸은 아주 미녀는 아니였지만 밉지도 않는 순수하고도 수더분한 점잖고 고운 처녀 아가씨 였습니다.
지금이야 심심하고 쓸쓸 하다면냐 꽃다운 장난말도 주고 걸고 실없는말 잡 소리도 하였으리라...
나만 그렇게 혼자 속마음으로 말도 붙이고 이야기도 하고 싶었을까요? 가난한 짝사랑 데이트를 생각 했을까요?
난 그처녀 이름도 모른다. 다만 성만 서씨라는 것을 처녀를 통해서가 아니고 그집 문패에 그의 오빠이름 때문이다.
참 오래된 이야기, 그것도 이름하여 첫사랑 이야기를 늘그막에 할려니 어느일이 먼저 인지 지난 세월의 일기는 잘 기억
되지 않으나 그 사건 사실 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다니는사무실은 하숙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경북도청에
파견 근무 할때 일이 됩니다.어느 단풍든 가을날 아마도 9월 , 아니 10월초 인지도 모른다.
아침 출근길은 맑았다. 가을 하늘은 높고 구름 몇조각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그런 날씨 조금은 흐르기도 했었다.
9시에 출근 6시에 퇴근 점심은 언제나 값싼 구내 식당에서 해결 했었다. 하긴 돈이 있다 하여도 그땐 청사 가까이에
식당도 없었어지만 가난한 주머니로 외식은 한번도 생각 해 본적이 없었다.
그날 퇴근 무렵 이였다. 퇴근 시간은 6시 아마도 5시부터 비가 오기 시작 했나보다. 6시가 되어도 비는 계속 내렸고
우산도 없으니 비가 언제 그칠지는 모르나 그칠때 까지 그냥 사무실에서 막연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7시쯤 되니 비가 덜오고 그치는것 같아 집을 향해 사무실를 나섰다.
그때 사무실 가까이 에는 가정집도 건물도 없었다. 청사는 산 비탈 언덕에 위취해 있었고 퇴근길은 내리막 비탈길를
돌아 큰개울 긴 다리를 건너서 그 제방 둑길를 따라 걸어 가던지 골목길로 걸어오면 하숙집에 다다를수 있다.
사무실을 나서 내리막길을 꺽어 돌아 포장 안된 가늘게 부서진 모래 자갈 깔린 후미진 비탈길에 언제 부터 그자리에
기다리고 있었는지 손엔 우산과 장화 얼굴은 차가운 비온뒤 날씨에 조금은 파란듯 걸어도 쌀쌀한 날씨...
거기에 하숙집 따님 Miss 서가 나를위해 우산과 장화를 들고 있었다.
난 우산을 받고 장화를 신고 큰소리로 고맙단 말도 감사하단 인사도 모기 소리 만큼, 그냥 웃기만 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둘은 걸었다. 그것도 나란히도 아닌 난 앞서고 그는 역시 아무 말없이 수더분한 모습 그대로 뒤따라
집으로 왔다. 그렇게 가을이 오고 단풍이 들어도 어디 가잔말도 함께 나들이 한적도 없었다.
총각 시절 그냥 그렇게 아무일이 없어도 세월은 갔었고 겨울이 가고 봄은 왔었다.
봄, 이듬해 새봄이 와도 우리에겐 그냥 그렇게 아무 이야기도 없었고 마주 보고 윙크를 주고 받고 웃는 일도 없었다.
많은 어느날도 그 처녀가 내앞을 지날 때면 그냥 그에 얼굴 보다, 돌아 가는 뒷태를 보고 또 한번 더 보면서 마음속 깊이
호감을 가졌고 사랑 같은 연정을 느끼면서 마음속에 품고만 지냈었다.
그렇게 봄이 다 가는 어느날 난 큰 마음을 먹고 주인 아주머니에게 따님과 함께 극장엘 가자고 했다.
극장을 가자고 해도 그아주머니도 따님도 나도 택시는 생각도 없었고 버스를 탔다. 그래도 아무 말도 없었다.
하긴 그때는 버스를 타도 복잡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변두리 하지만 중앙통 극장까지 15-6분거리...
극장표 3장을 샀다. 사면 생각해 본다 . 극장에서야 난 중앙 자리가 아니고 끝 자리겠지만 그 "미스 서" 자리가 중간
이면 그와 나와 옷깃이라도 스치고 잘하면 손이라도 만질 수 있겠지 그것은 생각뿐 그 엄마는 먼저 중간 자리에 앉고
나와 미스서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앉아 그렇게 극장은 파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러고도 또 세월은 흘렀다. 그때 나의 일상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책을 보거나 하숙생 동기가 틀어 주는 교향곡을 듣고
그때 나는 "드볼작의 신세계" "베토벤의 월광"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처음으로 듣고 소품도 익히고 교향곡이 4악장
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가 일요일이면 또 금호강으로 산책을 하고 고기도 못 잡고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 온다.
그렇게 대구로 온지도 2년반 그 집 하숙생 생활도 3년째로 접어 들었다.
그때도 봄이 였나 보다. 극장엘 가자고 아주머니에게 따님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둘이만 하지도 않고 그 아주머니가 전
같이 따라 나섰고 극장에서는 둘이 합석이 아니고 그가 중간에 앉아 우린 따로 앉아 옷깃을 쓰치지도 못하고 영화만
보다가 시간을 보냈고 그날도 그렇게 집으로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 오면서 생각에 잠겼었다. 다신 극장에 가잔 말을 않는다고... 집가까이에는 초라한 작은 극장도 있었다.
그때 저녁 오후 시간이 되면 극장에서 최희준의 하숙생이 흘러 나왔고 유행 따라 누구나 부르곤 했었다.
이제 하숙 생활도 3년이 되었을때 나는 다시 서울로 발령을 받고 그 하숙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그집을 떠나면서도 사랑하고 싶은 연정을 품은 나는 그 처녀를 바로 보고 웃음 한번 주지도 못하면서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 하고 3년전에 오든 그길로 다시 서울로 향 했다.
이제 늘그막에 옛 추억을 그것도 첫사랑의 이야길 지금에야 다시 생각 하는 이유는 그때 대구 그 하숙집을 떠날 때가
아마도 8월 지금쯤이고 지금은 집에서 머물고 옛 노래 하숙생을 들으면서... 인생은 나그네길... 미련을 두지말자..
이젠 할머니 되어 있을 그때 미스서요,그땐 사랑한다, 감사하단 말 한디 드리지 못 하였지만 그래도 늘 마음속에 담고 있는
옛 그날를 그리면서 오늘 님을 만나면 고개 숙여 참 그땐 고마웠고 감사 했으며 사랑 했었노라고..
이제 마음속의 나의 그도 인생 황혼 부디 남은 인생 건강 하시길, 오늘도 생각은 ... 무지 감사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