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꽃향기가 가득하다.
거실 가장자리에서 다소곳이 없는 듯 숨을 죽여 살던 유두화와 군자란이 꽃 봉을 이루는가 싶더니 이내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으로 꽃을 피웠다.
손길을 자주 주며 정성을 많이 쏟는 난에 비해 늘 의붓자식처럼 홀대를 받던 것들인데 보란 듯 찬란한 아름다움을 피워낸 감격이 마냥 나를 감동시키고 들뜨게 한다. 그것도 둘이서 함께 펼친 눈부심과 향기 높음은 그동안 나의 행위에 대한 자책감마저 불러일으켜 그냥 바라보는 것조차 부끄럽고 미안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뒤편 아파트에서 지금의 아파트로 옮겨온 것이 지난 해 8월이었으니 아마 9개월쯤 된 것 같다. 그땐 제법 이사들을 많이 오고 가는 때였는데, 바로 옆집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사람들도 좋고, 또 같은 신앙인들이어서 금방 친해졌었는데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서운함이 유별났다.
그런데 짐이 다 내려갔는데 복도에 나무가 심겨진 화분 하나가 남겨져 있지 않은가. 소리쳐서 화분 하나가 남았다고 했더니 그냥 버리고 간다는 것이다. 가느다란 두 개의 가지가 양팔을 벌리듯 하고 있는, 시골 냇가에나 있음직한 나무인데 물도 안 주었는지 흙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 돌처럼 굳어 있고, 그나마 잎마다엔 허연 뜨물 같은 것이 묻어 있어 전혀 볼품이 없었다.
헌데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서 목욕탕으로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 흙을 파다 더 채우고 이파리를 닦아준 후 약도 뿌려서 우리 집에 함께 살 준비를 해 주었다. 그러나 나무의 이름도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냥 화분을 옆 구석에 놓아둔 채 어쩌다 생각나면 물이나 주는 정도로 관심을 가져 주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다.
난에 물을 주려는데 그 옆 구석의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이파리나 닦아주어야겠다고 들여다보니, 내가 관심도 주지 않았던 사이에 새로운 이파리들이 많이 나서 싱싱해져 있고, 가지에는 작은 꽃봉오리들까지 맺혀 있었다. 그리고는 며칠이 지난 후부터 조금씩 조금씩 꽃 봉을 여는가 싶더니 앙징스런 연분홍의 작고 이쁜 꽃들을 피워냈다. 한 겨울의 눈 속에서 매화를 보는 것처럼,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여인네의 옷매무새를 연상케 하는 꽃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제서야 한갓 나무로만 알았던 꽃나무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유두화라 했다.
유두화! 이름에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꽃 모양을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특별히 이름에 걸맞다는 느낌을 주는 모양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동안 유두화는 소외 받는 아픔을 꽃을 피워 내는 일념으로 삭이고 이겨냈는지 모른다. 마치 진주를 머금은 진주조개 마냥 외로움과 분노와 슬픔까지도 하늘을 여는 정성으로 키우고 가꿔, 그래 이렇게 눈물같이 정갈한 꽃을 피워냈나 보다. 맑고 아름다운 꽃을 보는 나의 눈에 유두화가 슬픔에 배인 아름다움으로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다.
군자란도 그랬다.
군자란은 꽤 오래 전 동네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신 것인데 생긴 것도 투박스럽고, 모양도 별로여서 그냥 복도에 놔둔 채 애착 같은 것도 없이 집에 있는 것이라 가끔씩 물이나 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보니 포기의 가슴을 열고 가슴으로부터 하나의 큰 꽃대가 솟아나고는 그 꽃대로부터 다시 여러 개의 작은 꽃대가 올라와서 그 꽃대마다 꽃 봉을 맺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는 먼저 올라온 맨 가운데 있는 두 개의 꽃 봉이 꽃을 피웠다.
빨간 꽃 속에 금빛의 꽃술이 금관인 양 빛났다. 꽃 봉을 세어 보니 모두 열두 개나 된다. 이제 두 개가 피었으니 아직도 열 개가 더 필텐데 열 두개가 모두 피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것 같다.
그 볼품없고 투박한 것에서 이처럼 곱고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피어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걱정이 따라 붙는다. 다른 꽃이 피었을 때엔 먼저 핀 이 꽃들은 시들어버릴 테니 열 두 개의 꽃 봉이 함께 어우러지는 장관을 보기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꽃에 대해 잘 아는 동료에게 얘기를 했더니 군자란은 꽃을 피우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며 몹시 부러워하면서 몇 가지 주의사항까지 일러준다.
며칠간을 나는 집을 나설 때 꽃을 확인하고 또 귀가하면 맨 먼저 꽃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먼저 핀 두 송이의 꽃도 여러 날을 잘 견뎌주었고, 이윽고 열 두 송이 모두가 피어 빵빠레를 울렸다.
내가 그래도 조금의 시간을 얻을 수 있는 주일 오후,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군자란의 만개한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 꽃 봉을 많이 맺혀 놓고도 미처 활짝 꽃으로 피워 올리지 못하고 말거나, 솟아오르는 힘이 약해 서로 엉킨 채 피지도 못하고 꽃 봉으로만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는 군자란!
그런 군자란이 열 두 송이가 함께 활짝 피어 내게 기쁨을 선물 한 것에 대하여 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보고 싶었다.
나는 원래 화려한 꽃들은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아니 특별히 꽃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할 여유도 없었지만 어쩌다 지나치며 마주치는 들꽃 같은 것들에 오히려 유난스레 애착을 느끼곤 하는 나이다. 그런 면에서 꽃이 핀 군자란과 유두화는 어쩌면 그런 들꽃 같은 인상으로 내게 다가 왔었는지 모른다.
활짝 핀 군자란과 유두화를 창가로 옮겼다. 실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새롭다. 블라인드를 젖혀 본다. 12층인 우리 집 페어글라스의 큰 창 쪽으로 저만치의 대모산이 성큼 다가오더니 군자란과 유두화를 감싸고 한 폭 풍경화로 서 버린다.
꽃이 핀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의 차이가 이렇게 분위기를 크게 다르게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군자란의 꽃대는 곧 잘라내 줘야 한단다. 만약 그냥 놔두면 구실도 못할 꽃대가 양분을 모두 흡수해 버려 결국 군자란을 살아 남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한 번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한갓 풀꽃조차도 이처럼 온 생명을 다 기울인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내 모습이 움츠러드는 것 같다.
대나무가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우는데 한 번 꽃을 피우고 나면 그 대나무는 말라죽는다던 얘기가 생각난다.
자연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던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지금 만물의 영장이라는 체신도 못 지키고 군자란과 유두화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있다. 피어 있는 꽃송이들이 더욱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길게 숨을 들이쉬어 본다. 유두화와 군자란의 향기가 어떤 것인지 정학히 감별할 수는 없으나 저들로 인해 집안 가득 차있을 향기 속에 내가 있는 것이 한없이 기분 좋고 자랑스러운 생각까지도 든다. 어쩌면 저 꽃들에게는 사람보다도 더 많은 아픔과 슬픔이 배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삶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 나름의 그 간난의 세월 동안 참고 지켜온 장함을 피어난 꽃만 보고 어찌 다 어림이나 할 수 있으리요만 나는 내일이나 모래쯤엔 저 군자란의 꽃대를 밑둥부터 도려내야만 한다.
물론 하루라도 더 두고싶다는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할지도 모든다. 그러나 다음 번에 더 고운 꽃을 피워내게 하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마음이 피어 있는 꽃을 보는 내 가슴을 더욱 아리게 한다.
허나 나는 믿는다. 비록 한 번 핀 꽃은 시들게 마련이고 만개했던 유두화가 져버리고 군자란의 꽃대마저 잘려 나가 그 장하고 고운 모습들이 사라진다 해도 한 번 피었던 꽃은 나의 가슴속에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선 언제까지고 활짝 피어있는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방안은 늘 그들의 향기로 가득할 것만 같다.
창을 통해 들어온 밝은 빛을 받아 꽃들의 모습이 한껏 환한 모습이다.
그 모습만큼 향기가 방안 가득하게 차 오르는 것 같다.
불혹을 한참이나 넘겨 버린 나의 삶인데 나는 언제쯤이나 이런 향기가 가득하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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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 그대로
어렸을 적에 나는 제사 상에 올리기 위해 밤을 치시는 어른들을 보았다. 모양 나게 깎여진 밤을 보고 나도 그렇게 깎아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어리다고는 해도 내가 깎은 밤은 할아버지께서 깎아 놓으신 밤에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삐뚤고 볼품도 없었다. 더구나 서툰 솜씨다 보니 살을 다 깎아버려 남겨진 밤톨은 처음의 반도 안 되게 줄어 있곤 했다. 그러나 불혹의 나이를 지나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을 수 없는 지점에 와 있으면서도 할아버지처럼 맵시나게 밤을 깎을 자신이 없다.
그뿐인가 나는 그림도 못 그린다. 보고 그리는 그림뿐 아니라 어느 곳의 간단한 약도를 그리라 해도 제대로 그려 내지 못한다. 그리는 것, 만드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운동이나 노래 등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그런 '나'이고 보니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잘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끈기도 없고 금방 싫증을 내곤하는 나의 성격은 무엇 하나 진득하게 끝을 맺는 게 없다. 시작은 비교적 잘 하면서도 이내 도중 하차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방향을 바꿔 버린다. 그것이 나요, 나의 모습이다. 그런 내가 글을 쓴다니 어찌 글이라고 제대로 되겠는가. 하지만 이것만은 그렇게 호락호락 지고 싶지 않으니 모를 일이다.
글을 쓰는데도 어떤 이는 쓰면서 앓고, 어떤 이는 쓰면서 앓고, 또 어떤 이는 미리 앓고 나야 글이 써진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다. 펜을 못 잡으면 몇 날이고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다가 어느 날 불현듯 쓰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면 단숨에 짧은 글 한 편 쯤은 끝내 놓는다. 그런 다음 그것을 없는 듯 두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글을 꺼내어 읽어보고는 넣고, 보태고, 고치기를 하여 이름을 붙이고 출생 신고를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대개 초고에서 크게 가감되거나 수정되는 것이 별로 없다. 문장과 문맥이 이상한 부분만을 바로 잡을 뿐 처음 글을 별로 고치지 않는다. 상이 잡혀 바로 써 나간 그것은 곧 가장 자연스러운 한 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도 고놈 아주 잘 생겼구나 하고 쏙 마음에 들어 본 적은 별로 없다. 늘 아쉬움이고, 늘 부끄러울 뿐이고, 늘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내게 보내지는 작품집들을 받으면 내 작품들을 생각하며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고, 어엿하게 가꾸고 키워 시집 장가 잘도 보내지는 한 권, 한 권의 책들에 한껏 찬사와 부러움을 보낸다. 그렇기에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내게 보내지는 책들은 꼭 읽어보고 축하와 고마움의 글을 보낸다. 대개 곧바로 보내지만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병이 도지면 마음의 환절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숙제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고통, 아픔, 기다림의 산고에 얼마나 큰 위로나 격려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마는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욱 빚진 마음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창작! 나는 창작이란 말에서 늘 두려움을 느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내 주제를 생각할 때 내게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 그 자체가 마치 분만실의 산모 같은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 손가락이 하나 더 있거나 모자라지 않을까, 눈과 귀는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는가 하는 식의 그런 염려와 불안이 아무리 크더라도 예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어머니의 본능적 소망을 억제할 수 없듯 내 작품의 분만도 그러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의 작품이 비록 내 맘에 들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조차 사랑한다. 다행히 이런 나의 글을 읽고도 좋았다고 말해 주는 이가 있으면 제 자식 이쁜 줄만 아는 팔푼이 부모가 되어 마냥 좋아도 한다. 그러나 누가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나는 나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대신 나는 독자에게 한 번 더 빚을 진 것임을 가슴에 새겨 둔다.
내 작품에 대하여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독자에겐 더 감사하고 싶다.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는 내 모습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 스스럼없이 보여 주는 것이 나로서는 독자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시냇물에 떠가는 작은 종이배.
감동이란 꼭 크고 웅장한 것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리라. 삶에 따라서 또 자라온 환경이나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전해지는 감동의 폭이나 울림이나 높낮이도 제각기 다를 수 있듯 나의 경우도 작고 하찮은 것에서 오히려 곧잘 흥분하고 감동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혀를 차며 비통해 하거나 분해하는 것에선 오히려 담담해져서 주위의 눈치를 살펴야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나의 성격을 대범하지 못하고 소심하다고들 얘기하는가 하면, 사실은 흐트러짐 투성이요, 실수 투성인데도 절대적으로 깔끔하기를 원하는 완벽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어느 것 하나 채우지 못하는 부족함이기에 나는 늘 완전한 것에 배고파했고, 그 허기를 채우고 싶은 욕심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그렇게 비쳐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의 성격과 생각들이 내 내면을 채우고 있는 속에서 나의 수필은 태어난다.
남들처럼 돋보이는 청자나 백자의 우아함보다는 질항아리, 뚝배기처럼 부담 없이 편하게 막 사용되는 그릇과 같은 수필. 된장, 간장 항아리가 되기도 하고, 쓰다가 금이라도 가면 그 때엔 철사띠로 허리를 동이고 마른 곡식 담는 통이 되던 내 어린 날의 질항아리들. 그리고 불길을 떠나와도 한참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 뚝배기의 그 투박한 정겨움처럼 나의 수필은 요즘 것 보단 옛것에, 서구적인 것 보단 옛 우리의 것 쪽에 더 마음을 둔다.
그래서 나의 수필은 늘 내 주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내용도, 세계적인 견문에서 오는 경이로움이나 새로움도 내 수필 속에선 찾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수필을 도란도란, 들릴락 말락, 둘이서만 얘기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빨리 안자고 뭐 하느냐'는 호통 속에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온 밤을 숨죽여 킥킥대며 즐거웠던, 어쩌다 친구와 함께 자던 어린 날의 한 밤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소중하여 가슴과 가슴으로 따스하고 끈끈하게 이어지는 정의 물줄기가 끊이지 않고 잘잘 흘러내리는 그런 가슴의 이야기라 하고 싶다.
낮은 목소리로 읽어 가다 보면 그냥 따스함이 온몸에 배이는 그런 수필, 그래서 나의 수필 작업은 그렇게 목소리 낮추기로부터 시작하여 새벽 이슬처럼 투명한 색깔로 살아나길 원한다. 그러면서 내 내밀한 곳으로부터 솟아오른 고요와 은은한 정의 빛살이 창호지 문의 작은 구멍을 통과하듯 그런 작은 감동을 주는 정의 수필이고 싶다.
정적인 수필이란 아무리 많은 내용이나 새로운 지식을 끌어온다 해도 사람의 가슴속에 스며들고 젖어드는 것이 아니고는 참 수필일 수 없다는 나의 고집스러운 생각은 잘못된 것일까.
누가 수필을 여기(餘記)라 했던가. 수필은 어느 장르의 글보다도 심혼이 깃든 글이 아닌가. 거울에 비쳐진 모습보다도 밝은 달밤 맑은 물에 비친 모습처럼 눈부시지 않으면서도 운치와 정이 배인 글, 수필은 결국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되 물 속에 비치는 모습처럼 은은하게 보여주는 것이요, 내 나름의 고집스러움을 지켜 그러한 나의 모습을 통해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아주 작게나마 따스함을 주고자 하는 마음의 선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나의 수필 작업은 내게도 읽는 이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