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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에 대한 모독
이 홍사
양말
갈치 조림을 안주로 술을 마시면서 선배와 양말에 관해서 얘기했다. 감정 기복이 심한 나는 기분이 별로다. 별것도 아닌 일에 부아가 나 있었다.
양말 얘기부터 하자.
지금은 소주 한 병값이면 양말 다섯 켤레를 산다. 시대가 좋아졌다. 내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사오십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양말이 귀했다. 물론 여름에는 양말을 신는 아이가 없었다. 겨울에만 양말을 신는데 그것도 설빔으로 양말 한 켤레를 받아서 일 년을 버티던 시절이 있었다. 구멍이 나서 꿰매서 신는 건 보통이요. 사흘이고 나흘이고 빨지 않아서 양말이 뻣뻣하게 굳어서 부러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당시에는 나일론 양말이었다. 겨울에 개울에서 얼음을 지치다가 빠져서 개울 둑에 모닥불을 놓고 양말을 말리다가 태워 먹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일이 생기면 보통 아이들은 애가 타서 울었다. 보통 시골 아이들은 양말이 한 켤레뿐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저녁에 빨아서 아침에 신는다. 좀 덜 말라서 꿉꿉해도 신고 돌아다니다 보면 마른다.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우리 집은 그래도 밥을 굶는 집이 아니었는데도 양말에 대서서 그 정도였으니 더 가난한 집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에 양말에 원이 져서 지금도 양말을 나는 양말을 신을 때마다 당시의 생각을 한다.
“이 양반은 무슨 양말에 대한 욕심이 이리 많아?”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며 아내는 서랍 가득 들어있는 양말 중에서 목이 늘어진 양말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버릴 게 얼마나 많은지 골라낸 양말이 쓰레기봉투에 가득 찼다. 그래도 서랍에는 양말이 반이나 남아 있었다.
“어릴 때 양말에 원이 져서 그래.”
시장통 순댓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 바로 옆의 양말 가게 들른다. 아내는 집에 많다고 양말을 사지 않는다. 양말이 너무 싸서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주 한 병값이면 다섯 켤레를 살 수 있는 게 너무 신기하다. 그 옛날 양말 한 켤레에 목을 매었는데. 심지어 아버지의 양말 중에서 목이 긴 양말은 구멍이 나서 버릴 지경이 되면 양말은 발 부분은 가위로 잘라내고 목 부분을 자루처럼 꿰매서 신기도 했다.
갈치 조림에 소주를 곁들이며 그렇게 곤궁한 시절의 양말에 관해서 얘기하는데 듣고 있던 선배가 딴지를 걸었다.
“이 인간 보소! 그대가 사람이야?”
젓가락으로 갈치의 속살을 발라내던 선배의 말이었다.
“그래요. 사람이 아니고 인간입니다.”
갈치를 뒤적이다 말고 선배의 말에 그렇게 맞받아치면서 인간과 사람의 차이를 생각했다. 선배가 먹은 앙심이 있어서 한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인간과 사람의 차이는 뭐죠?”
괜히 목청을 높이다 말고 물었다. 선배는 얼른 대답을 못 하고 갈치의 속살을 우물거렸다. 사람이라 하면 인간과 다른 게 도덕성, 양심, 범절, 뭐 그런 게 떠오른다. 그런 걸 따지면 인간과 사람은 동격이 될 수 없다.
선배가 시비를 건 건 갈치의 가시 때문이었다. 갈치를 제대로 발라내면 씹을 게 없다. 그래서 나는 칼치를 뼈까지 꼭꼭 씹는다. 내가 갈치의 지느러미 부분의 가시를 꼭꼭 씹어서 먹는 걸 보고 시비를 걸었다.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하던 양말 이야기는 건성으로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시를 발라내지.”
“갈치 가시를 발라내면 뭐가 먹을 게 있어요? 그건 칼치에 대한 모독이에요.”
매일 만나는 선배다. 날이면 날마다 만난다. 만나야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편해서다. 서로가 청탁할 일도 없고 눈치를 볼 일도 없다. 그냥 같이 오로지 술을 마시기 위해서 만난다. 선배는 말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가 있다고. 그래서 매일 저녁 답이면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갈치에 대한 모독.
모독이라고 하자. 갈치를 대충 젓가락으로 발라먹고 버리는 일은 분명 갈치에 대한 모독이다. 알뜰살뜰 잘 발라서 먹어주는 게 갈치에 대한 예우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난하게 자란 나는 그게 버릇이 되었다.
갈치.
갈치라고 하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억센 경상도 발음으로 칼치라고 해야지 갈치가 떠오르고 구미가 당긴다. 어제는 갈치 조림이 어떠냐고 붇는 밥식이 식당, 누님의 발음을 기어이 칼치로 고쳐 놓았다. 그 발음으로 인해서 전화로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다. 그래서 오늘은 기어이 갈치 조림이 안주가 되어 식탁에 올라왔다.
하얀 속살이 맛깔스럽게 보였다. 갈치는 조림을 해도 속살이 좋고 구이를 해도 마찬가지다. 마주 앉은 선배는 갈치의 속살을 발라내고, 나는 칼치를 꼭꼭 씹었다. 한 냄비에 든 안주는 같지만, 명칭이 다르고 또 술이 따로다.
안주는 같아도 술은 각자의 취향대로 마신다. 선배는 건강을 생각해서 막걸리를 고집하고 나는 소주를 마신다. 선배는 막걸리가 술 중에서 가장 덜 해롭다는 라는 지론을 가지고 막걸리만 고집한다. 술은 모두가 해로운데 그중에서 막걸리가 가장 덜 해롭단다. 나는 술의 종류보다 마시는 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막걸리를 취하도록 마시는 것보다 소주를 적당히 마시는 게 낫지 않은가? 술은 권하는 맛에 마신다고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권하는 일이 없다. 알아서 마신다. 상대의 잔을 채워주는 일도 없다. 자기 술은 자기가 따라서 마신다.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재미로 술을 마시느냐고 묻지만, 모르는 소리다. 권해서 취하면 상대에게 부담이 생겨 자주 만날 수가 없다. 선배와 나는 매일 만난다. 서로 부담이 없기 때문일 거다. 우리에게 이차란 없다. 기분으로 마시는 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배는 가끔 나랑 마시고 또 다른 데 약속이 생기면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시는 모양이다. 그렇게 마셔도 막걸리가 덜 해로운가?
매일 저녁, 술을 마시지만 나는 절대로 취하는 일이 없는데 선배는 가끔 취한다.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서 갈치 먹은 것을 토하면 그것도 갈치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다. 그렇게 귀한 갈치를 먹고 토하다니, 그건 말이 안 된다.
선배를 만나러 저녁 답에 슬며시 나오면 아내는 묻는다.
“또 그놈의 술 마시러 가요?”
“모름지기 사람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오래 건강하게 살아.”
뒤에서 날아오는 무시한다. 아내는 분명 눈을 흘길 것인데 나는 보지 않는다.
갈치를 영어로 밸트피쉬라고 한다. 허리띠 물고기가 되는 셈인데 정말 고기의 이름을 짓는데 성의가 없다. 나는 그 말을 전주의 어느 주막에서 들었다. 전주에 가면 유명한 식당들이 몇 군데 있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얼마를 받고 나오는 안주를 보면 한 상 가득히 나온다.
무슨 막걸리 안주가 이렇게 많아?
굵은 소금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주도 돈을 받느냐고 물으니 전주의 친구는 공짜라고 했다. 일삼아서 헤아려보니 안주 접시가 스물한 개였다. 놀라웠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시키니 남은 안주가 있는데도 추가로 열두 가지 안주가 나왔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주에는 그렇게 파는 식당이 몇 군데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모든 말을 영어로 하는, 상당히 재치가 넘치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재미로 손님이 뭘 청하면 영어로 말을 한단다. 안주 중에서 칼치 한 도막이 나왔는데 아삭아삭 씹어 먹고 경상도 사투리로 한 도막 더 달라고 하니까. 오, 벨트퓌쉬라고 하면서 접시를 가져가서 한 도막을 담아왔다. 벨트피쉬? 할머니가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갈치는 영어로 벨트피쉬였다. 할머니는 콩글리쉬를 한 게 아니었다. 영어는 이름을 짓는데 고심을 하지도 않고 참으로 성의가 없다. 갈치를 허리띠 물고기라고 부르다니, 성의가 없지만 한 번 들으면 평생 잊지 못할 이름이다.
당시에 누구랑 그곳에 갔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전주의 친구는 기억이 나는데 같이 간이는 누구인지 기억이 없다. 아무튼, 그런 식당은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손님이 모여든다. 앞에 앉은 누구는 갈치를 가시를 발라내고 먹고 나는 칼치 구이는 뼈까지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갈치와 칼치의 차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칼치를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내륙지방 농촌에서는 갈치가 그 만큼 귀했다. 잘 먹어야지 일 년에 한두 번이었다. 할아버지 생신날이나 명절이었다. 칼치 구이는 언감생심이고 칼치 조림을 하면 무를 듬뿍 넣어서 그 무를 먹으며 칼치의 맛을 느껴야 했다. 어쩌다 건더기가 걸리는 날에는 가시까지 꼭꼭 씹어 먹었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 먹은 것도 할아버지께서 갈치를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증조부님 제사를 모시고, 다음날이 할아버지 생신이었다. 그날이면 나는 식전에 마을을 돌았다.
재학이 할아버지요, 할부지 생신이라고 아침 자시러 오시래요. 또 다른 집에 가서는 호야 할아버지요 할아버지..... 똑 같은 말을 하면 마을을 다녔다. 그날 아침이면 노인들 여남은 명이 사랑채에서 아침을 자셨다. 그 상에는 꼭 칼치가 등장했다. 갈치가 아닌 칼치.
할아버지는 따로 사셨다.
아버지께서 장손이었는데 할아버지와 따로 산 이유는 할머니가 둘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로 가셔서 담배 농사를 대대적으로 지으셨단다. 할머니는 고향에서 살림을 돌보고 혼자 가셨는데 돌아오실 때는 새로운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오셨다.
그런 이유로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돌아오셔서 한집에 살지 못하고 면 소재지인 장터에 살림을 나셨다.
얘야 돈은 평생 그렇게 벌리는 게 아니란다. 벌릴 때 관리를 잘해야 한다.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남긴 말씀이다.
중국 사람들은 백 원이 있으면 십 원짜리 장사를 시작한다. 할아버지께 들은 말씀이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하면 아홉 번을 망해도 괜찮단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은 십 원이 있으면 빚을 끌어다가 백 원짜리 장사를 시작한다면서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조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주에서 담배 농사를 지으시면서 돈을 못 번 게 아니었다. 굉장한 부농이었던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선 고향에 돌아오셔서 가난한 선비로 말년을 보내셨다. 만주에서 돈을 벌어서 당신의 동생과 매제에게 고향으로 가져가서 어느 땅을 사라고 지시하셨는데 배달 사고가 났다. 한두 번 그런 게 아니었다. 번번이 노름판을 기웃거린 종조부에 의해서 배달 사고가 났는데 당시에는 그건 당장 알 길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의 자금을 대어주다가 수사망이 좁혀오자. 땅을 버리고 새로운 할머니를 데리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사라던 땅은 아직 남의 땅이었고 보낸 돈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장터에서 가난하지만 기품있게 사셨다.
할아버지는 장터에서 이발소를 하셨다. 이발소를 차린 돈은 만주에서 입고 오신 외투의 내피를 팔아서 차리셨다고 들었다. 그 내피가 바로 호피였다. 당시에는 호랑이 가죽이 중고로 거래가 되던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장에 가시면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칼치를 사 드리고 오시곤 했다. 아버지도 넉넉한 게 아닌데 꼭 그렇게 하며 장에 왔다고 보고를 하셨다. 물론 할아버지께서 칼치를 사 자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건 아닌데 꼭 칼치를 사 드리고 오시는 것이었다.
얘야 너그 시아부지 칼치 사 드리고 왔나?
장에 갔다가 오시는 어머니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물으셨다. 그렇게 갈치를 사 드리면 새로운 할머니와 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옛말에 딸이 정말 귀하거든 첩으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첩은 시종일관 일은 하지 않고 사랑만 받는다는 말에서 기인한 말일 것이다. 할머니는 평생 질투나 시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서방님을 살려준 사람으로 생각하고 덤덤하셨다. 만주에서 돌아오실 당시 할머니 말씀으로는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요단강 건너간 할아버지를 살려서 데리고 온 사람이 새로운 할머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껜 실하고 굵은 갈치를 사 드리고 우리 집에는 값이 싼 꽁치를 사 오셨다. 그렇게 사 온 꽁치는 나물을 잔뜩 넣어서 찌개를 하거나 국을 끓였다. 식구가 여럿이어서 구이를 하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찌개를 하거나 국을 끓여도 군말이 없었는데 형은 달랐다. 위로 하나 있는 형은 비린내가 난다며 꽁치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내 입맛의 반은 형이 망쳐놓았다.
형이 그렇게 반찬 투정을 하면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얘는 잘 먹잖아?
그 말을 하는 어머니의 손가락은 나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앞에서 나는 밥그릇에 코를 박고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반찬 투정을 하면 복이 나간다. 할머니 말씀도 나의 입맛을 반은 버려 놓았다. 하여, 평생 반찬 투정을 모르고 자랐다. 사람들이 뭘 먹을 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한다. 못 먹는 게 딱 두 가지가 있는데 안 줘서 못 먹고 없어서 못 먹는 것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불행이다.
당시에는 갈치가 엄청스레 귀한 반찬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매일 가는 밥식이 식당 누님께 이야기하면 싱싱하고 굵고 실한 갈치가 당장 안주로 올라온다. 어제도 그랬다. 일을 마치고 가겠다고 했더니 누님은 뭘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칼치라고 했고 누님은 갈치라고 되물었다. 그 명칭으로 인해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지만, 오늘은 어김없이 칼치 조림이 올라왔다.
밥식이 식당은 저녁 여섯 시면 늘 선배와 둘이 만난다. 밥식이 식당에서 만난 지가 서너 달 되었다. 그 이전에는 선배와 그날그날 약속 장소를 정했다. 이제는 정화해서 ‘전과 동’이라고 하면 알아듣는다. 그전에는 하루는 송어를 먹으러 가고 하루는 통닭에 맥주를 마시고, 다른 날은 돼지국밥에 소주를 마시는, 비교적 싼 집에서 만났는데, 선배와 친한 밥식이 식당 누님이 동석한 적이 있었다. 물론 밥식이 식당이 문을 닫은 날이었다. 그날은 통닭을 먹다가 누님이 제안했다.
“이렇게 먹을 바에야 차라리 우리 집으로 와요. 여기서 먹는 통닭값만 내고, 내가 매일 다른 메뉴에 입맛에 맞추어 줄게.”
그렇게 제안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니다. 거절하면 죄를 짓는 일이다. 매일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나는 두 군데 전화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먼저 선배에게 전화해서 ‘전과 동’이라고 말을 하면 별일이 없으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여섯 시 밥식이 식당에서 만난다는 우리의 약속은 간단하며 명료하다. 선배부터 확인하고 밥식이 누님께 전화한다. 역시 ‘전과 동’이라고 하면 여섯 시에 가겠다는 뜻으로 알아듣는다. 밥식이 식당 누님은 나보다 아홉 살이 많은데 무슨 연유인지 혼자 살고 있다. 서울에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딸의 이야기는 좀체 꺼내지 않는다.
밥식이 누님의 얘기를 들어보면 부유한 집에서 귀한 딸로 자랐다. 우리가 양말이 귀했던 시절에 살았다고 해도 그 정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여자가 고등학교까지 나왔다면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 자랐음이 틀림이 없다. 손님이 뜸한 날이면 밥식이 누님이 자리에 앉아 술친구가 되어준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부모님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고 할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모양이다.
선배와 나, 그리고 밥식이 누님의 관계를 말하자면 식당의 손님과 주인, 그 이상이다.
오늘도 손님이 뜸해 누님이 술친구로 자리에 합석했다.
칼치와 갈치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칼치는 내가 먹는 것이다. 갈치는 감히 비싸서 내가 입을 대지 못하고 남이 먹는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다.
역시 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모양이다.
사건의 발단은 별것이 아니었다. 저녁에 술을 마시러 나오면 나는 승용차를 가져오지 않고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이 소도시는 지하철이 없고 시내버스가 서민의 발이다. 나는 매일 다섯 시 반 차를 탄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되어도 버스는 오지 않고 눈에 걸린 것이 개새끼를 안고 운전석에서 신호 대기를 하는 여편네가 눈에 들어왔다. 차창은 반쯤 열려 있었고 차창으로 대가리를 내민 개새끼가 나를 보고 짖었다. 개새끼를 안고 운전을 하는 여편네들을 보면 괜히 부아가 나는데 개새끼가 나를 보고 짖었으니, 그 개새끼 주둥이를 발로 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거기서 기분이 좀 상했는데, 버스를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고등학생들이 쓰는 용어가 귀에 거슬렸다.
쌩까지 마, 씹새야.
뜨끔했다. 듣기 거북했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용어는 귀에 거슬렸다.
쌩까지마, 졸라 썸탄다,
이런 말들은 그 뜻을 전혀 모르겠다.
그런 말을 내가 바로 옆에 있는데 스스럼없이 하는 걸 보면 내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기분이 상했지만 뭐라고 하지 않고 참았다. 나이가 들면 아는 게 많고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부족한 게 한둘이 아니다. 이럴 때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지? 잠시 고민을 했다. 괜한 일에 나서지 말자. 예전에 어느 보도에서 보았는데 여중생이 길에서 교복을 입은 채로 담배를 피우는 걸 보고 지나가는 아주머니 나무라다가 몸싸움이 벌어졌단다. 늙수그레한 아주머니가 여중생을 물리적으로 이길 리는 만무다. 물리적으로 싸우다가 손목에 금이 간 아주머니가 경찰에 신고해서 사건이 되었단다. 그런데 놀랄 일은 그 여중생의 아버지라는 새끼가 와서 남의 아이 길에서 담배를 피우던지 말든 뭔 상관이냐고 따졌단다. 그 기사를 보고 격분했고 그걸 기화로 나는 혈압약 몇 알을 더 먹기 시작했다.
졸라 썸타네!
인간 늙은 것이 노인인데, 노인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나에게 한 소리도 아닌데 기분이 좀 다운되었다. 저런 소리를 듣지 말라고 늙으면 귀가 어두워지는 것인가?
경로효친
그런 얘기는 쇠락한 종갓집의 가풍처럼 아이들 가슴에 담기지 못하고 외풍을 타고 너덜거리는 모양이다. 경로효친을 떠올리자 부아가 더 났다. 요즘 학교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나? 버스가 늦으면 시내에 나가서 밥식이 식당으로 가는 버스의 환승이 늦어진다. 개새끼를 끼고 있는 여편네에게 속이 터졌고, 아이들이 쓰는 언어에서 부아가 났고, 버스가 제시간에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그렇게 늦으면 환승 정류장에 가서 162번을 탈 수가 없다. 그 버스를 놓치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한다. 기분이 좀 상해서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니 또 부아가 났다. 버스는 만원인데 종점에서부터 타고 온 학생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종점 바로 위에 중학교가 있는데 하교할 시간이다. 학생들 모두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만 주물럭거리고 일어서는 놈이 없었다. 아직 덜 늙은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위안이 되는 것이고. 꼭 앉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서 있기도 민망한 나이다.
그렇게 부아가 났던 게 밥식이 누님이 던져놓은 눈치의 그물에 걸렸다. 표정 관리를 잘못하는 내 탓이다. 주방 일을 끝내고 합석한 누님이 내 잔에 소주를 채우며 물었다.
“왜 그렇게 똥 빼앗긴 똥개 표정이야?”
숨길 것도 없다. 욕보다 좋은 안줏거리가 어디 있으랴. 버스가 늦어서 부아가 났고, 개새끼 때문에 화가 났고, 개보다 못한 아이들 새끼들 때문이라고 경황을 설명했다.
“참 징하네. 그런 일에 화낼 시간이 어디 있어? 웃을 시간도 없는데.”
누님이 타박했다.
“마음 같아서는 귀싸대기 한 대씩 후려 패면 좋았으련만.”
정말 마음이 그랬다. 내 말을 들은 선배가 마시던 잔을 내려놓으며 토를 달았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고 있어? 노인 냄새가 풀풀 풍기는 꼰대라는 소리 들으려고.”
선배의 말에 또 부아가 돋았다.
“여보시오 형님! 시대가 바뀌어도 구두는 발에 신는 것이지.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사이 소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나의 주량은 소주 한 병이다. 더 이상 마시면 뒤탈이 난다. 소주 한 병을 비우면 나는 자리를 튼다. 선배와 누님이 술을 더 마시든 말든 나는 술자리 중간에 일어선다. 그런 나를 두고 선배는 회귀 본능이 강한 족속이라고 비꼰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런 족속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막 일어서려는 참인데 식당 문을 열고 중늙은이 세 명이 들어왔다. 손님이 들어오는 걸 보고 누님이 어서 오시라, 고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선배 혼자 두고 일어설 수가 없는 고약한 상황이 되었다.
“어라 이게 누구야? 갈치가 여기 웬일이야.”
들어오는 사람 중에서 하나가 보고 아는 척 인사를 던졌다. 갈치? 선배의 별명이 갈치였던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인데 얼른 보니 선배의 얼굴에서 갈치의 모습이 비쳤다. 매일 만나면서 그걸 왜 미처 못 보았을까? 그런데 인사가 어쩐지 다분히 시비조로 들렸다. 유들거리는 목소리 때문일까? 기분이 안 좋았는지 듣는 갈치. 아니, 선배의 안색이 변했다.
“일흔 밑자리 깔아둔 인간치고는 입이 거칠구만, 내가 갈치면 너는 호모에 변태야.”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누님은 음식 주문을 받지 못하고 심상찮은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였다. 선배의 말을 듣고, 아하! 그 사람이구나. 나는 단박에 누구인지 감을 잡았다. 비산동에 산다는 늙은 총각이다. 모태솔로! 수염이 허연 총각! 그 나이가 되도록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한 선배의 친구다. 얼굴은 처음 보지만, 말로는 여러 번 들었다. 성 소수자인지, 동성애자인지는 모르지만, 난과 분재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이다. 관심이 많은 것보다는 난과 분재를 키우는데 특별한 기술을 소유한 사람이다. 선배가 찍어서 날려주는 사진을 몇 번 보았는데 분재는 예술이었다. 난은 보는 눈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분재는 특별히 훌륭했다. 선배가 찍어서 보낸 사진 중에서 하도 예뻐서 분재 사진 하나는 저장을 해서 내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다.
“갈치가 갈치를 자시는구먼! 식인종과 다를 바가 없구만! 술이 넘어가나?”
역시 유들거리는 목소리였다.
알고 있다. 나는. 상세히 알고 있고. 둘의 사이가 나빠진 이유를. 보지는 못했지만, 순전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분재는 매일 적당량의 물을 주고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호모가 베트남 여행을 가게 되었단다. 기간은 일주일. 그동안 선배가 집을 맡았다. 매일 가서 난과 분재에 물을 주고 문단속을 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호모는 비산동의 낡은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랬다.
베트남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선배가 매일 그 집으로 출근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뜨락과 마당에 많은 분재 중에서 두 개가 없어졌단다. 다음날 가서 보니 대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이거 이상하다 싶어 살펴보니 빈 분재의 받침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선배는 어떤 분재인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그렇게 심리적 부담을 느끼던 중에, 설상가상 물을 주려고 호스를 끌고 다니다가 호스에 걸려 높은 항아리에 얹어둔 분재 화분이 떨어져서 박살이 났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뿌리에 붙은 흙까지 떨어져서 앙상한 뿌리만 남았다고 했다. 급한 김에 그 분재 그릇은 버리고 화원에 가서 비슷한 화분을 사서 다시 심고 물을 주었는데 그게 비실비실 마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참 난감하더라는 그 이야기는 들었다.
그날도 만나서 술자리에서 그 얘기를 들었는데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선배는 호모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호모가 비행기 사고라도 나서 돌아오지 못하면 다행이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모 변태가 여행에서 돌아왔던 날, 저녁도 나는 선배와 술을 마셨다. 그런 이유로 선배의 사정을 들을 수가 있었다.
호모는 돌아와서 마당과 뜨락에서 벌어진 일을 파악하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단다. 사라진 분재와 죽은 분재가 호모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아끼던 것이었단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는데, 대답 없이 현관으로 들어가 문을 난폭하게 잠구어 버렸다. 선배는 집안으로 따라 들어가서 변명하지 못하고 마당에서 서성거리는데 호모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집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집어던졌는지 파열음이 들리고, 불러도 대답이 없고 문을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단다.
선배는 난감하게 서 있다가 나를 만나러 나와서 그 집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전화해보세요.”
내 대답은 간단했지만, 깊이 생각하는 성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성격에 모가 난다는 호모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전화를 받지 않았단다. 그 분재 세 그루의 가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고 보상해주라고 내가 말했다. 선배가 그 일로 속을 태우는 게 안타까워서 한 말이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단다. 하긴 그 정도의 분재면 정해진 가격이 없다. 부르는 게 금이다. 어쩌면 그걸 금액으로 환산한다는 자체가 실례가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전화를 받지도 않고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오히려 선배가 부아가 난 모양이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그렇게 서로가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인데, 오늘 밥식이 식당에서 우연히 조우가 되었다.
“남은 밤잠을 못 자는데, 술이 넘어가나?”
“만나주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화를 못 이겼는지 선배가 발끈하면 일어서서 갈치가 든 냄비를 들었다가, 난폭하게 놓았다. 그 바람에 서로 눈치가 보여 젓가락을 보내지 못하던 갈치의 중간 토막 하나가 식당 바닥에 떨어졌다.
갈치에 대한 모독이다.
냉큼 일어서지 못하고 나는, 어느 갈치에 대한 모독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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