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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백화점 D백화점 지하에 아이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동민이 뭔가 하고 다가가니 동화구연을 할 예정인 듯 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한 젊은 여자가 올라와 동화를 구연하기 시작했다.
"옛날옛날에 흥부와 그의 형 놀부가 살았어요. 놀부는 너무너무 심술궂어서……."
동민은 갑자기 회상에 빠져들었다. 흥부와 놀부, 그 단어에 그는 이제는 없는 동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제비다리라도 잘라먹을 셈이냐?"
동민은 크게 소리쳤다. 그 날 홍민은 또다시 누군가에게 용돈을 모두 털어 버리고 온 것이었다. 더욱 더 속터지는 건 그것이 노름도 아니고 적선이라는 것이었다. 홍민은 한참만에 이해하곤 피식 웃었다.
"그건 놀부 얘기 아닙니까? 제가 아니라 형님 얘기지요."
"그럼 넌 박덩어리를 기다리겠단 거군. 아니면 놀부가 다리를 부러뜨린 제비를 기다리나?"
"형님, 흥부가 먼저 제비를 만났고 흥부에게 제비가 찾아왔을 뿐입니다. 흥부는 제비를 기다린 적이 없어요. 놀부가 기다렸지."
"오오냐, 너는 제비가 알아서 날아오면 제비다리를 잘도 고쳐주겠지. 그런데 말이다 적선은 네 돈으로 하는 거다. 네가 네 힘으로 벌어서 말이야!"
"형님 왜 이러십니까. 저도 노력하고 있는 건 알잖아요."
"뭐? 노력? 웃기지 말아! 네놈이 벼룩시장하나 제대로 뒤적거리는 걸 못 봤어."
정말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홍민은 항상 빈둥거리고 있었다. 항상 보는 벼룩시장에는 밑줄도 하나 안 그어져 있었고 대개는 가져온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주로 그것을 뒤적이는 것은 보다못한 동민이었다.
"하기야, 네놈 싹수는 어릴 적부터 노랬지. 그래 나도 안다고 네 대가리가 번쩍하니 싹싹 돌아가는 건. 그래서 중학교때 전교1등도 했겠지."
"형님 또 그 얘기우?"
홍민이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는 태도였고 그럴 만도 했다. 동민은 홍민의 머리에 어렸을 적부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 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홍민이 그 많은 가족을 데리고 동민에게 얹혀 사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냐, 또 그 얘기다. 그런데 네 놈 어쨌냐. 그 다음 년도엔 400등 가량이 떨어지더니 또 그 다음 해는 전교에서 꼴찌를 다퉜지. 그래놓고 다음 해엔 또 전교3등이었던가? 노력을 좆털만큼도 안 해서 그렇지 네 놈 대가리는 정말 좆나게 잘 돌아간다 그거야!"
동민은 화가 나 욕까지 내뱉으며 말했다. 그러나 홍민은 전혀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욕설에 조금 움찔했을 뿐,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몸이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아 음악을 흥얼거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네 놈 공부시키려고 그 비싼 과외도 서너 개씩 하고 했지만 과외 선생은 네가 어떻게 입을 놀렸는지 몰라도 질려서 떠나버렸지. 네 놈이 미술에 흥미 있던 것 기억하고 미술학원에 과외 시키니 역시 빠져나와버렸지. 그러면서 웃긴 건 네놈이 양아치에 끼어서 떠돌지도 못하고 범생이에 끼어서 성공하지도 못한 인생이란 거야. 네놈은 예나 지금이나 주변인에 불과하다 그 얘기야."
"형님, 저도 가끔씩 돈 벌어 드리잖아요."
동민은 기가 막혔다. 한참을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만 치다가 기어코 홍민의 멱살을 잡았다.
"혹시 네 놈 그걸로 네 모든 행동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 놈이 가끔씩 끄적인 글이 잡지에 투고되면 한 오십 정도 오지? 근데 그걸로 뭘 할 수 있다고 보냐. 돈버는 능력은 없는 주제에 그저 빠구리 뜨는 능력만 넘쳐서 네 아이가 몇이냐? 셋도 아니고 넷도 아니고 무려 여섯이다! 걔네 까지 먹여 살리려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있는거냐?"
"컥, 커헉, 놓, 놓고 얘기……."
"옛날부터 그랬지. 네 놈이 고등학교에 공부하는 척하곤 자러갈때 나는 일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부터 나섰지. 넌 몰라, 공돌이의 그 생활을. 2차대전때 독일의 아우, 아우슈 뭐지? 어쨌든 거기서 일하던 유태인과 비교해도 그렇게 나을게 없을 거라고. 가끔씩 기계를 잘못 다뤄서 팔이 잘려서 나가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그 기분이 어쨌는지 알아? 피는 속일 수 없다고 애초에 나는 고등학교를 갔으면 인문계학생이었어. 글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이 어지간했지. 그런데 그것을 다 포기했다."
동민은 그제야 홍민의 멱살을 풀어줬다. 동민은 조용히 속으로 '너 때문에…….'란 말을 삼켰다. 홍민은 한참을 쿨럭거리고 기침을 했다. 동민은 잠깐 말을 멈추고 어릴 적을 생각했다.
'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존재하기엔 썩은 물이다. 하지만 홍민, 너는 가능성이 있다. 너는 세상에서 빛을 내야한다. 성공하고, 성공해서, 이 썩은 물에 빛을 비춰라. 너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다.'
그 시절 동민은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항상 어머니의 압박이 들어왔고 이런 생각 없이는 버틸 수 없었다. 그런 가정에서의 압력과 공돌이의 생활은 너무 힘겨웠다.
"네가 웬일이냐, 혹시 잘린 게냐?"
동민이 집으로 찾아갔을 때 어머니가 퉁명스레 내뱉은 소리였다. 동민은 그때부터 자신이 어쩌면 이 여자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아들에 대한 정이, 그리고 장남의 위치가 이토록 낮을 수가 없었다.
"홍민이가 가출했다면서요……. 학력고사가 몇 일 남았다고……."
"넌 신경 꺼라. 다 내가 찾아볼 거다."
어머니는 차갑게 답했다. 결국 동민은 어쩔 수 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홍민은 돌아왔고 학력고사를 마쳤다. 홍민은 1년 전 모의고사에서는 2%까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력고사는 망치고 말았다. 홍민은 2류 대학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홍민은 동민의 집에서 묶게 되었다.
"난 네가 나보다 능력이 있다는 걸 안다. 비록 2류대학을 나왔지만 그 능력은 1류대학에 입학하기에도 충분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본 나보다야 낫다. 너도 이제 슬슬 짝도 찾아야하지 않겠냐. 그러려면 둘이 살 집도 필요하고 말이다."
홍민이 동민의 집에서 묶은 지 6년이 될 때 즈음 동민은 말했다. 아내의 압박으로 말했지만 내심 동민은 아내의 재촉에 고마워했다. 동민이 아내를 가진지 3년째 되어감에도 동민은 아이를 갖지 못했다. 병원에서도 찾아낼 수 없었던 문제는 굉장히 가까운데 있었다. 바로 홍민이었다. 홍민을 시골집으로 보내려고도 자취를 하게도 해봤지만 결국에는 동민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만날 집안에서 노는 눈치 없는 홍민을 두고 둘이 마음놓고 몸을 맞댈 수는 없었다.
"형님회사는 안 되겠습니까?"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기술공에서 벗어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다. 그냥 벼룩시장 같은 거나 좀 진지하게 뒤져봐라. 전화도 해보고 발로도 뛰고."
홍민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몇 개월 후, 홍민은 정말로 색싯감을 구해왔다.
"네놈이 그렇게 색시를 구해왔던건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지. 아직까지도 의문이야. 만날 방에 쳐 박혀 컴퓨터와 티비나 하던 네 놈이 언제 그 여자를 사귀었는지 말이야. 솔직히 말이야 난 의문정도가 아니라 의심이 가."
동민은 회상에서 깨어나 말했다. 홍민은 아직까지도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크허, 크흠. 혀, 형님. 어쨌거나 어머니도 형님도 우리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네가 10년이 넘도록 우리 집에서 기생할 것을 알았다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부탁드리잖습니까. 아파트 한 채만 사주십시오."
순간 홍민은 코를 움켜쥐었다. 꽉 쥐어진 동민의 주먹이 그의 코를 강타한 것이다.
"야이 미친 새끼야. 아파트 한 채가 껌값이냐? 내가 왜 너한테 몇 억이나 되는 목돈을 줘야하냐. 네가 취직을 해야 할 거 아니냐. 예전에 네가 말했지. 내 회사에 취직시켜달라고. 그 때는 내가 말단 직원에 불과해서 못 도와줬지. 하지만 2년 전에 내 회사를 가지게 되었을 때 너에게 도움을 부탁하니 넌 어떻게 말했냐. 그딴 공장에는 취직하긴 싫다고 했지!"
"말이야 바르지 않습니까. 누우면 공장 입구서부터 깊숙한 곳까지 닿을 것만 같던 그 곳이잖아요."
"닥쳐, 내가 고생해서 얻어낸 공장이야. 지금은 꽤나 번듯하게 컸잖아."
홍민은 전혀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동민만이 열을 내고 있었다. 동민은 숨겨둔 통장을 찾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동민에게 건네었다.
"나가라. 아내랑 애들이랑 데리고."
"예?"
"나는 더 이상은 스트레스가 쌓여서 안 되겠다. 주객전도가 아주 심하게 느껴지고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남의 집 신세질 때는 조용히 밤을 지내라. 우린 너 때문에 신혼이고 뭐고 다 날렸지만 넌 제대로 보내더라. 그러니 여섯이나 나오지."
10년이 넘는 질긴 기생관계를 동민은 그렇게 끊어버렸다. 이후 아내가 돌아와서도 그런 방법을 나무랄 정도로 간단하게 끊은 것이다. 아내만을 집 안에 들인 동민은 한바탕 땀을 빼고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홍민은 처음에는 납득을 하지 않다가 결국 일주일 후에는 포기하고 떠났다. 어떤 연락처도 없이…….이때 이미 형제는 그들의 관계조차도 완전히 끊었는지도 모르겠다. 형제애를 잃은 기생자와 숙주의 운명은 기생관계가 끊어지며 완전히 관계가 끊어지니까 말이다.
일주일 후 동민이 공장에 갔을 때 공장은 마구 흔들렸다. 동민은 표정을 찡그리고 똑바로 보자 흔들림은 멎었다. 그러나 공장은 기울어져 있었다.
"이봐요. 우리 공장이 피사의 공장이 된거 같은데. 당신 눈에도 그렇게 보이오?"
"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지반이 허술한가."
경비병은 제법 아는 체를 하며 대답했다. 동민은 불안해졌다. 사실 공장 자체의 경영이 이미 흔들리고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방금 본 정도로 건물이 흔들린다면 머지 않아 건물은 쓰러질 것이다. 나도 회사도 그렇게 쓰러지게될까.'
물론 그 환상은 동민의 불안한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동민의 불안감은 예지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1년 후 회사는 불안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민은 집안의 모든 가구를 팔아가며 회사를 지키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회사는 그야말로 부도직전이었다. 그리고 희망은 찾아왔다. 동민은 회사를 경영한 8년 동안 처음으로 그런 규모의 거래를 해 보았다. 자신이 회사를 세울 때 든 돈과 맞먹는 거래였다. 그 인상 좋은 젊은 남자는 손이 컸다.
"이봐, 거기 빨리빨리 작업 돌려!"
"잠깐잠깐, 거기는 바꿔서 두라고!"
동민의 바쁘고도 즐거운 몇 달이 흘렀고 동민은 계약을 마치게되었다. 그리고 그때 동민에게 쥐어진 돈은 직원들 월급을 돌리고 공장을 보수하고도 거액이 남을 정도였다. 거래를 마치고 술에 취한 채 집까지 걸어오던 동민에게 한 어린 거지가 보였다.
'홍민은 항상 이들에게 적선했다고 했지. 양복이며 시계며, 몇 천만 원씩 하는 것들을 이 더러운 것들에게 퍼주었지. 착한 놈이었어.'
동민은 그 거지에게 수표를 떨어뜨렸다. 거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동민을 바라보더니 다리를 감싸쥐고 연신 인사를 해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단 말 밖에 못하고 머리를 땅에 박는 그 아이를 보고 동민은 표정을 찡그렸다. 동민은 아이를 뿌리치고 집으로 계속 걸었다. 갑자기 동민의 걸음은 무거워졌다. 동민은 안녕히 집에 도착했고 편안히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신의 장난이었을지 그의 그 거래는 사기였다. 동민은 공장을 팔아 넘겼지만 여전히 십억 빚이 남아있었다. 동민이 공장이 망해 가는 가운데서도 절대로 팔지 않았던 고급 승용차와 7억을 호가하던 집마저 팔았지만 빚은 정도이상으로 컸다. 그렇게 1년여를 방황하고 있을 때 홍민이 나타났다.
홍민은 동민이 일하던 골프장에 메르세데스와 함께 나타났다. 홍민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사람 잘 못 봤습니다."
"에이, 형님 왜 그러세요."
동민의 부정은 통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 때 동민이 입고 입던 옷은 캐디나 강사들의 옷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남겨둔 명품의 이름을 가진 옷의 하나였다.
"형님, 잘 지내십니까? 전 어쨌든 잘 지냅니다. 제 방식 대로요."
"어어, 그래……. 이제 백수는 아닌가보구나."
"으음, 여러 가지 건들고 있습니다. 주로 투자 쪽으로요."
홍민은 부동산과 주식에 손을 대고 있다고 했다. 동민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그 정도의 목돈이 이렇게 금방 생길 린 없었다.
"돈이 어디서 나서?"
"흐음, 잠시만 귀 좀."
동민은 마지못해 귀를 갖다댔다.
"로또입니다. 일등이요."
"뭐?"
동민이 큰 소리로 놀라움을 표현하자 홍민이 한번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동민을 바라봤다.
"쉬, 쉿. 드라마나 소설이 거짓말만 하는 건 아니군요. 이런 반응이라니."
"어떻게…?"
"음, 운이 좋았죠. 사실 어떤 사람한테 돈을 좀 줬는데 하는 말이 '어이, 고마워. 이렇게 큰돈이라니. 내가 어제 돼지꿈을 꾸더니 이런 일을 다 겪는군. 내 이렇게 돈을 받았지만 아직도 꿈의 효과는 남은 듯하이. 어제 가장 큰 돼지 한 마리 배에 531242던가 하는 숫자가 적혀있더라구. 막 반짝거리며 빛이 나는데 이거 혹시 로또번호 아인 긴지……. 어차피 나는 평소에도 운이 없고 내가 로또를 사러 가면 사람들이 무시해. 그러니까 자네가 그 번호로 로또 하나 사봐. 당첨되면 나 좀 주고. 나는 만날 여기 있으니까.'라는 거예요. 그래서 10장을 사서 531240부터 531249까지 다 찍어봤죠. 1등이랑 3등 당첨이더라고요."
홍민은 동화를 구연하듯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그때의 상황을 재현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지의 이야기는 물론 로또 자체의 이야기를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홍민이 거지에게 돈을 줬다는 것뿐이었다.
"형님은 여전히 옛날같이 지내시나요."
"어어, 그래……. 난 잘 지낸다. 로또 당첨돼서 투기하는 너보다야 당당하게……."
"형님, 투기라니요. 부동산은 저도 인정하지만 주식은 단순히 차익 노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고요."
"미안하다."
뭔가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다. 동민은 치욕스러웠다. 그리고 서러웠다. 몇 년 동안 일군 회사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나름대로 상류사회에서 진짜 밑바닥으로 떨어져서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이 홍민과 비교되었다. 신은 노력하는 자를 무시한다. 노력하는 자는 노력으로서 일굴 뿐 신은 돕지 않는다. 신은 운이 좋은 사람을 돕는다. 신이 돕기에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운이 좋은 사람을 돕는다.
"그럼 형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일 있으면 이리로 찾아오세요. 86층인데 고소공포증은 없으시죠?"
홍민이 잠깐 어딘가와 통화를 하고 하는 소리였다. 홍민이 순간 그려서 넘겨준 약도에 동민은 또다시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가 넘겨준 명함이야 별 대단한 것이 없었다. 어떤 직업인지도 안 쓰여있고 홍민의 이름과 전화번호 정도가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집의 약도는 상당했다. 86층이란 홍민의 말대로 역시나 노른자위 땅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였다.
"웃기지 마라. 너따위 벼락부자 녀석의 도움은 필요 없다."
홍민은 돌아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형님, 그 말 웬만하면 고치지 마십시오. 저도 형님 말씀에 부응해 형님에게 어지간하면 도움 안 드리렵니다. 그리고요. 옛날 집 앞에는 요즘도 사람이 있는 듯 하더이다."
홍민은 모두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지는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완전히 달리 차갑게 굳어있었다. 웃음이 섞인 듯 했지만 냉소는 말을 더 차갑게 할 뿐이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나고 동민은 홍민을 찾아갔다.
"아니, 형님이 웬일이시우. 이 못난 동생 집에 방문을 다 하고. 구박이라도 하시려구요?"
홍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동민에겐 그 미소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 미소는 동민에게도 낯익은 미소였다. 몇몇 사업가들이 동민에게 지었던 경멸 어린 미소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동민은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구박은 무슨……. 집이 참 크구나."
"예전 형님 살던 집이 57평이던가? 이 집은 93평이라던거 같더만요."
"햐, 그거 참 넓네."
동민은 울컥 목이 메어왔다. 성공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파산의 그 순간이 떠오르고 말았다. 동민은 터져나올 것 같은 감정을 자제하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홍민이 동민의 턱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칠 때까지 동민은 아랫입술을 꽉 물고 있었다. 그러나 동민은 그 쓰라릴 고통도 뜨거울 피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요즘 건조해서……입술이 텄어"
"그렇군요. 요즘은 실내서만 있다보니 몰랐습니다. 아니 그런데 무슨 일이시우, 형님."
"그게 말이지. 여기서 말하긴 그런데……."
"그냥 여기서 말할 수 없수? 형님도 바쁠 텐데."
홍민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이제껏 홍민과 동민은 문을 사이에 두고 얘기하고 있었다.
"아니,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다니까…….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크흠, 뭐 그럽시다. 형님이 만진다고 닳는 집도 아니고."
홍민은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태도로 다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동민은 자신의 그런 처지를 비관했다. 홍민은 한 눈에 보기에도 동민을 무시하고 있었다. 동민은 속이 뒤틀려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을 겨우 참고 있었다. 홍민은 동민이 집을 훑어보는 것조차 기분 나쁘게 여기는 듯 했기에 동민은 고개를 숙이고 홍민을 따라갔다. 동민은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느낌을 받았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홍민과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싼 소파였지만 동민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은 것 같았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영화에서 보았던 취조실의 갓 씌운 백열등처럼 느껴졌다. 홍민이 내 뱉은 한 마디 역시 딱딱하게 굳어있어 동민은 신문이라도 받는 느낌이었다.
"이제 말해보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애들은 다 어디 갔냐?"
"셋째부터는 유학 갔고 나머지들도 다 바빠서요."
"그나저나 집이 정말 좋구나. 저 프로젝…"
"딴 소리 말고 본론부터 말하쇼. 바쁘니까."
홍민은 말을 끊고 다그쳤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얘기에 들어가려 한 동민은 이제 이 소파가 불에 달군 철 소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는 없었다. 홍민에게 붙지 않는다면 판자촌으로 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그러도록 하지. 나와 아내가 여기서 사면 안 될까?"
동민이 힘겹게 내뱉은 한마디를 홍민의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가볍게 덮었다. 홍민은 기묘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런 일이었습니까, 형님. 그렇게 힘드세요? 그러고 보니 형님 살이 많이 빠지셨네."
"아니, 이건 요즘 웰빙열풍이더라고……. 그것 때문에 일부러 살을 뺀 거야. 비만은 안 좋으니까."
홍민은 즐거운 듯 계속 웃었다. 그러나 홍민의 그 웃음소리는 동민의 속을 헤집어 찔러댔다. 동민은 심장이 억죄어오는 느낌까지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형님 빚 있으시죠? 빚쟁이들 피해 도망 다니실 정도의……."
"……."
"얼맙니까? 3억?"
"3억 6천……."
애초에 동민은 빚을 갚아달란 얘기도 할 작정이었다. 아니 사실 그럴 작정이었다. 그러나 한바탕 홍민의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울리고 난 후 홍민의 입에서 빚에 대한 얘기를 듣자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지독한 치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3억 6천이라…….일단 한 2억만 갚아드리지요."
"고맙다, 고마워! 돈 버는 데로 갚으마."
동민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듯 허리를 연신 숙였다. 예전의 그였다면 절대 못 할 행동이었다.
"그리고…형님, 우리 집에선 안되겠는데요."
"뭐? 그럼 난 어디서 살라는 거냐."
"살 거라면 예전에 살던 그 집에서 사는 게 낫지 않겠수?"
"응? 무슨 말이냐?"
"지금 우리 집에서 사는 것보단 예전 살던 그 집에서 사는 게 낫지 않겠냔 거죠. 그 집을 혹시 몰라서 사뒀거든요. 놀리고 있었는데 잘 됐네요."
동민은 예전에 살던 그 집을 떠올렸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쉬었던 그 집, 그러나 몇 달 전 빨간딱지가 여기저기 붙었으며 빚쟁이들 덕분에 피해 다녀야 하는 집. 아직까지 그 집은 위험했다.
"그곳은…위험해. 빚쟁이들이 아직도 찾아올 거야."
"걱정 마십시오. 까짓 다 갚아드리죠."
"저, 정말이냐! 고맙다! 고마워!"
홍민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동민이라면 화를 내도 여러 번 냈겠지만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나중에는 상하는 자존심보다 고마움이 컸기에 동민은 화를 내지 못했다. 홍민이 절을 하라고 했다면 절까지 했을지도 몰랐다.
"대신……."
갑자기 홍민이 깍지를 끼고 지지한 표정을 지었다. 동민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감격에 찬 표정은 사라지고 불안에 찬 표정이 나타났다.
"다신 직접 우리 집을 찾아오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순간 동민의 들떴던 감정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동민은 '뭐야! 형제관계를 끊겠다는 거야? 내가 부끄러워서? 거지같고 밸도 없어 보여서!'라 외쳤지만 속으로 외쳤을 뿐이었다. 입안을 우물거림도 없이 속에서만 끓을 뿐이었다.
"뭐? 그건 어렵지 않다만…왜?"
"저야 벼락부자지만 투자로 그 재산을 10배 이상 늘렸지요. 그 과정에서 상류사회로 편입을 했다 그겁니다. 형님은 그런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악착같이 그 코딱지 만한 공장에만 매달렸기에 잘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이쪽 사회로의 편입은 저에겐 굉장히 큰 의미가 있거든요. 그런데 형님의 지금 꼴을 보세요. 이런 꼴의 형님이 저희 집 왔다갔다하는 걸 그들에게 보이면 전 상당히 곤란합니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쏟아냈다. 동민은 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데로 말을 내뱉었다.
"뭐? 오냐, 이놈아. 네 놈이 드디어 그 사회로 들어갔구나. 어떠냐, 그들 사이에 있으니까 꿀리데? 니 눔 밸은 한번 꼬이면 나보다 심하게 꼬이는 밸인가 본데 그러면서 우리 집에선 어떻게 묶었냐. 그때는 내도 거 있었다. 그라구 그 눔들에게 꿀리지 않을라꾸 망해서 곧 죽어도 차하구 집은 안 팔았다. 먹을 거 아끼믄서도 말이다. 근데 그때 니한테 나간 돈이 얼마고? 그때 니 꼴은 우옛노? 그지 중서도 놀고 먹는 그지 아니었나. 내는 내 굶고도 니 안 내 쫓았다. 그 꼴에 배알이 꼬이도 니 쫓지는 않았다."
동민은 그렇게 말을 쏟아내고 씩씩거렸다. 군데군데 섞여있는 사투리는 그의 감정을 짐작케 했다. 그러나 홍민은 매몰찼다.
"걱정 마십시오. 굶도록 하진 않을 겁니다. 빚 갚을 돈이라면 지금도 드리고 이후에도 얼마씩 붙여드리죠."
아까보다도 더 기분 나쁜 말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순간 찬물세례라도 받은 듯 끓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3억6천만이라는 빚의 무게는 너무 컸다. 동민은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부를 갖고 상류사회의 말단 역이나마 해봤기에 지금의 생활이 익숙하지 못하고 괴로움은 물론 그 사회로의 회귀욕구가 너무나 컸다. 동민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깨물고 나서야 아까 상처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라림에 동민은 표정을 찡그렸다.
"얼마씩 붙여 줄 필요까진 없어. 일단 빚만 갚아 줘…그건 꼭 갚는다."
동민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꼬리를 붙였다. 홍민은 그것을 눈치챈 듯 했지만 능청을 떨었다.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제 좋은 게 뭡니까. 대신 아까 제 부탁은 들어주십시오."
"그래……."
"아, 깜빡했군요. 직접적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형제관계를 끊기로 한 거나 마찬가지니 혹시라도 만나게 될 때는 말도 좀 높임말로 해줬으면 합니다."
홍민은 전혀 거리낄게 없다는 말투였다.
"그럼 계좌만 알려주시고 가십시오."
홍민은 종이와 펜을 건네었다. 동민이 계좌를 적어 건네자, 홍민은 동민을 내쫓듯 현관으로 내몰았다. 그러며 두둑한 봉투를 건네었다.
"아차! 지금 옷 꼴이 말이 아닌데, 형님을 이렇게 보내면 안되죠."
홍민은 옷장에서 옷을 꺼내 동민에게 건네었다. 말할 것도 없이 명품 옷이었다. 동민은 거부했지만, 홍민은 그 옷을 입을 것을 강요했다. 어쩔 수 없이 동민은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동민의 낡은 옷은 홍민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럼 이동민씨 잘 가십시오."
"그래……."
동민이 바뀐 호칭에 흠칫하면서 무심결에 대답했다. 홍민이 흘겨보는 이유를 깨닫고 동민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니, 그, 네. 안녕히 계십시오."
동민은 그렇게 인사를 고치고 쫓기듯 나왔다. 동민이 문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소나기가 쏟아졌다.
갑자기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이야기의 끝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제야 동민도 회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씁쓸한 회상이었다.
"……그리고 많은 재물을 얻은 흥부와 흥부의 도움을 받고 용서를 빈 놀부는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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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꿈과 같이 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진 글.
떨어질만 했지요.
첫댓글 고전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구성한 패러디 작품이군요.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를 펼쳐보이고자 한 의도는 충분히 읽힙니다. 다만 아무리 현실을 비트는 풍자문학이라도 너무 허황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풍자를 하기로 마음먹고, 쓰고 있는데 제비를 대체할게 없더라고요. 결국 로또를 하긴 했지만, 너무 허황되고 동생의 큰 손은 제가보기에도 참 당황스럽습니다. 그러고보니 제 소설에 작위적인 부분이 꽤나 많은 모양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