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의 절정에서 피어나는 꽃 / 이경철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그리움의 절정에서 피어나는 꽃 / 이경철
너와 나 그리움의, 절정에서 피어나는 꽃, 꽃 시편들
(이경철(문학평론가,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강남에 있는 도서관 가는 길 도로변 화단에 노란 별 같은 영춘화가 피어나 오들오들 떨며 눈을 맞고 있네요. 한 소녀가 빨간 핸드폰을 그 꽃에 갖다 대고 있습니다.
핸드폰 카메라에 담기 위한 모습이 꽃과 속삭이며 통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꽃아, 춥지 않니. 어느 먼 별에서 아직은 추운 이곳까지 왔어”라고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는 눈보라가 시야를 뿌옇게 가리고, 꽃은 노랗게 피어있고 해서 그 꽃과 대화를 나누는 소녀를 보는 순간 아연 서울 도심은 우주적 공간으로 확대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박두진 시인의 시 「꽃」이 떠올랐습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精寂)//
펼치면 일렁이는/사랑의/ 호심(湖心)아
이제 봄을 환영하며 맞는다는 영춘화(迎春花)를 시작으로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꽃 등이 피며 봄꽃 천지가 될 것입니다. 봄꽃이 지면 여름꽃이 또 그렇게 피었다 지겠지요. 그러고 나면 가을꽃 간절한 목숨이 하늘거릴 것이고요.
봄을 맞아 우리 시인이 꽃을 바라보며 쓴, 아니 꽃이 써준 ‘꽃 시’를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꽃을 바라보기만 해도 누구든 시인이 된다는 이 좋은 봄날에 독자 여러분의 시 창작 의욕도 ‘꽃 시’가 북돋워 주기를 바라면서요. 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순간순간의 절정입니다.
우주 어느 한 모퉁이에서 생겨나서 자라고 서로 맺어지며 살아가다 마침내는 스러져가는 모든 생명의 순간순간 간절한 몸짓입니다. 꽃은 나와 남, 나와 나 아닌 그 모든 것을 그 간절함의 절정에서 맺어주게 하는 의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중략)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독자는 물론 시인도 가장 좋아하는 시로 꼽힌 김춘수 시인의 「꽃」입니다. 김 시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04년 11월 말 쓸쓸한 가을날이었습니다.
그때 김 시인은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며칠째 의식을 잃고 산소마스크로 연명하고 있었지요. 그런 김 시인의 마지막 병실에서 본, 시가 「꽃」이기도 합니다. 응급실이지만 간호사가 이 김 시인의 쾌유를 빌며 곱게 써 병상 앞에 걸어놓았더군요.
사람과 사람 사이이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사이이든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에게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할 때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있는 대타(對他: pour_soi)적 존재니까요. 이렇듯 나 아닌 것을 향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가장 간절하면서도 아름답게 드러내 주는 것이 꽃 아닐까요.
해서 꽃은 사랑입니다.
인간은 물론 우주 만물, 사랑의 지극한 표현이 꽃입니다.
살며 사랑하며 헤어지며 죽어가는 그 모든 순간의 기쁨과 슬픔, 그 절정에는 항상 꽃이 같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부터 지금까지 문학은 물론 미술, 음악 등 모든 예술이 이러한 꽃을 쓰고 그리고 노래해오고 있습니다. 그중 삶의 절정, 한순간을 포착해내는 장르 특성상 시에서는 꽃보다도 더 간절한 꽃이 더 많이 피고 지고 있습니다.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우리한테 전해 내려오는 시 중 가장 오래된 꽃시 「헌화가(獻花歌)」입니다. 신라 성덕왕 때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가던 수로부인이 천길 벼랑 위에 활짝 핀 꽃을 쳐다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자 소를 끌고 지나치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향가(鄕歌)라고 『삼국유사』는 전합니다.
수로부인은 동해의 용과 뭇 귀신도 홀려서 납치해갈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동양의 비너스였죠. 그래서 비록 소나 끌고 가는 초라한 행색, 그것도 노인 주제에 죽음을 무릅쓰고 천길 벼랑을 기어올라 꽃을 꺾어다 바치며 사랑을 호소했을까요. 이렇듯 예부터 꽃은 간절한 사랑의 건넴이고 표현이었습니다.
죽음은 다시 죽을 수 없음으로
영원하다.
이 지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을 위해 스스로
독배(毒杯)를 드는 연인들의
마지막 입맞춤같이
벚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와르르/무너져 내린다
종말을 거부하는 죽음의 의식(儀式)
정사(情事)의
미학
오세영 시인의 「벚꽃」 전문입니다.
어느 바람에 꽃눈보라 휘몰아치듯 와르르 지는 벚꽃을 바라보는 것은 황홀하면서도 무상(無常)한 아픔입니다. 지금은 떠난 사랑, 붙잡을 수 없었던 청춘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 시인의 벚꽃은 그 분분한 낙화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물으며 영원을 떠올리고 있군요. ‘죽음은 다시 죽을 수 없음으로 영원하다’며 영원과 죽음을 한 가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름다움의 절정’을 곧 낙화, 죽음, 영원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움의 절정에서의 ‘정사의 미학’같이 황홀한 소멸이라는 탐미주의의 절정에서 시인은 지는 꽃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중략)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입니다.
이 시도 낙화를 사랑의 결별, 나아가 청춘의 죽음으로 보고 있군요. 그러면서도 낙화를 이별이나 죽음 등 부정적 이미지를 넘어 ‘축복에 싸여/ 지금을 가야 할 때’라며 성숙하게 바라보고 있네요.
이 시는 특히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미국에서 쓸쓸히 운명한 이승만 대통령에 비유해 읽히곤 합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는 인간의 과욕을 자연의 섭리에 대비해 경계하는 시로도 보이지요.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조 영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시인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입니다.
이팔청춘 젊어서는 꽃 만나러 가는 바람 같은 설렘과 흥분도 아름답습니다.
봄에 피는 꽃들에는 그 꽃을 만나러 가는 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러나 여름의 끝물, 가을의 문턱에서 피는 꽃에는 어쩐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불어 가는 느낌이 듭니다. 만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는 소슬한 느낌이 듭니다.
이 시도 연꽃을 앞에 두고 헤어짐을 노래하고 있군요. 헤어지면서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라며 재회를 바라고 있는 시입니다. 그러면서 당신과의 만남이 연꽃 만나는 것보다, 당신은 연꽃보다 더 그윽하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고 있는 시입니다.
사랑하다 끝끝내 헤어질 수밖에 없어도 이런 이별이었으면 합니다. 그래 한세상 돌고 돌다 우주의 저쪽 세상,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고픈 마음을 윤회전생(輪迴轉生)의 불교에서 귀히 여기는 연꽃을 빌어 보여주고 있군요.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지역//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緯度//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指紋
- 박용래 시인의 시 「코스모스」 전문입니다.
가을의 전령사는 아무래도 코스모스지요. 아름다운 것들만 보면 펑펑 눈물 먼저 흘렸던 눈물의 시인이 모든 것이 비어 가는 슬픈 계절의 코스모스를 이렇게 읊고 있군요.
말을 최대한 아끼며 여백의 미를 살리고 있는 박 시인의 시를 흔히 여백의 시라 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다 말해버리면 추레해지니 여백으로 남겨 독자들의 가슴 속에 두고두고 되새겨보게 하기 위해서겠죠.
최첨단 스타일리스트이기도 한 박 시인은 이 시에서 한 낱말을 한 행으로 짧게 처리하며 여백을 남기고 있군요. 텅텅 비어 가는 허전한 계절을 짧은 행 나눔의 형태 시로 보여주기 위해서죠.
가을 햇살은 먼 알래스카 빙하에 내리쬐는 햇빛같이 투명해서 서럽습니다. 그런 햇빛 아래 코스모스는 그 햇살 나부끼는 대로 하늘하늘 여리게 하늘빛 닮아 에워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 참으로 순수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저 코스모스의 꽃 낯짝같이 하도 순수해 바라보기도 안쓰러웠던 얼굴이 있지 않았습니까. 투명한 햇살 아래 몸 둘 바 모르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는 먼 먼 그때 헤어진 안쓰러운 사랑의 얼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그 소녀의 지문으로 코스모스를 바라보고 있군요.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천상병 시인의 시 「들국화」 전문입니다.
가을이 오고가는 길목에는 쑥부쟁이나 구절초 같은 들국화 등속이 지천으로 피어있습니다. 피어 하늘과 땅이, 너와 내가, 외로운 마음들이 순하게 겹쳐지고 싶은 가을의 맑고 외로운 정서를 온 우주에 하늘거리며 전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무욕(無慾)의 삶으로 우리 시대 순수의 전설이 된 천 시인의 이 시에서는 나와 들국화의 ‘외로운 마음이 순하게’ 겹쳐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너의 마음이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의 표현을 얻어내려 애쓰는 게 서정시의 요체고 그것은 곧 우리네 삶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리움일 것입니다.
“꽃잎이 바람에 밀리고 있다. 거리를 사이에 둔 사물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육체가 없는 물질이 머금고 있는 그늘진 외로움. 외로움의 극한에서 물질은 행동한다. 하르르 지는 꽃잎과 지구 사이에 서려 있는 아득한 그리움을 시는 본다. 그리움은 틀림없는 물질이다.”
허만하 시인의 시 「그리움은 물질이다―아이잭 뉴턴에게」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래전 문예지에 발표된 이 시를 보았을 때 “아! 그래요, 그래”라며 무릎 치며 감탄한 시입니다. 병리학자로서 치밀한 관찰과 이성으로 감성을 빚고 있는 시인이 쓴 이 시가 ‘그리움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구체적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지요.
모든 서정적인 느낌의 요체인 너와 나는 하나라는 ‘동일성의 시학’과 현재의 이 순간은 과거 추억과 미래 예감이 동시에 익어 터지는 찰나라는 ‘순간 성의 시학’이 일순 잡히는 듯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네 슬퍼서 아름다운 삶과 모든 예술의 핵인 그리움이 물질처럼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듯도 했습니다.
바람에 꽃잎이 하르르 하르르 날리고 있습니다. 나비도 꽃잎 같은 날개를 접었다 폈다하며 하염없이 날고 있고요. 그런 봄날 풍경을 바라보며 시인은 태초부터 현재진행형으로 우주를 낳고 있는 빅뱅(Big Bang)을 그리움으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어둠 속 한 점 빛에서 생겨났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뭔지 모를 것들이 인력(引力)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고밀도로 뭉치다 마침내 한 점 빛으로 폭발해 우주가 탄생했다는 게 빅뱅 이론이지요. 그때 그 빛줄기가 1백38억 광년을 나아가며 우리의 태양계와 은하계, 지구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별의 우주를 낳으며 무진장의 공간과 시간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캄캄한 어둠, 혼돈 속에서 형체도 없고, 하여 이름붙일 수도 없는 하염없이 외로운 것들이 서로 사무치게 끌어당기며 뭔가가 되고 싶은 기운(氣運), 그게 곧 그리움 아니겠습니까. 그 그리움이 한 점으로 모여 폭발해 빛이 되고 별이 되고 우리가 되고 꽃이 되어가고 있는 게죠.
그러니 그리움은 우주와 한 몸인 뭇 생령 각기의 생명이면서 또다시 하나가 되려는 힘, 바이텔러티 아니겠습니까. 지구와 꽃 사이의 인력(引力), 그리움에 의해 하르르 하르르 지는 꽃잎을 보며 그리움을 태초의 물질로 보고 있는 이 시 참 좋지요. 이성과 감성, 고전과 낭만의 교집합에서 피워 올린 절제된 서정 참 많은 것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하지요.
그런 그리움의 절정에서 꽃은 피고 또 하르르 하르르 지고 있는 꽃 봄입니다. 이런 좋은 봄날 길고 질긴 역병(疫病)에 움츠러들지만 말고 꽃구경도 하고 시도 감상하며 좋은 꽃 시 많이많이 썼으면 좋겠네요.
-------------------
이경철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미당 서정주 평전』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 등과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음. 현대불교문학상, 질마재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abkcl@hanmail.net
- 51호-2022년 다시올문학 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