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메디컬 드라마 '닥터 킬데어'와 '쇼군'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 배우 리처드 체임벌린이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BBC가 30일(현지시간) 알렸다. '쇼군'과 '가시나무새들'의 배역들로 '미니 시리즈의 제왕'이란 타이틀을 얻었던 고인은 전날 밤 10시 15분쯤 하와이 오아후섬의 와이마날로에서 뇌졸중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다고 홍보 대리인 할란 볼이 확인했는데 아흔한 번째 생일을 몇 시간 앞두고서였다. 고인과 평생을 함께 한 동성 파트너 마틴 라벳은 성명을 통해 고인을 "대단하며 사랑스러운 영혼"이었다고 돌아봤다.
라벳은 이어 "우리의 사랑하는 리처드는 지금 천사들과 함께 있다. 그는 자유로우며 우리에 앞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날아올랐다"면서 "사랑은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사랑은 그의 날개 아래 있어 그를 다음 위대한 모험으로 들어올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인이 연기 경력에 큰 이정표를 만든 것은 1961년 '닥터 킬데어'의 주인공 제임스 킬데어 박사 배역을 따내면서였다. 1930년대와 40년대 유명한 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만든 이 시리즈는 수백만 시청자를 모아 고인을 가장 사랑받는 주연 배우이자 10대들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킬데어 박사 역으로 큰 인기를 얻어 1963년부터 1965년까지 3년 연속 잡지 포토플레이가 선정한 가장 인기 있는 남성 스타로 뽑혔다.
1980년대 제임스 클라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TV 미니시리즈 '쇼군'의 서양인 포로 역할과 '가시나무새들'의 사랑의 유혹에 빠진 가톨릭 신부 배역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호주 소설가 콜린 맥컬러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가시나무새들'은 미국 시청률 60%란 전무후무할 기록을 남기며 에미상 후보 지명을 16개 부문에서 받았다. 미국에서만 1억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은 이 드라마는 1988년 KBS 1TV로 방영돼 국내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 역할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생활은 대체로 말년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2003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회고록 'Shattered Love'에서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라벳과 30년 동안 함께 했는데 둘은 철저히 사생활을 베일 속에 뒀다. 회고록에서 그는 글래머 여배우들을 늘상 시사회에 에스코트했지만 자신의 동성애 취향이 알려져 경력에 먹칠을 할까봐 "끔찍히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 TV 가이드 인터뷰를 통해 "늘상 멋진 10대 소녀들이 쫓아다녔다. 일주일에 팬 레터를 1만 2000통 받았다. 그래서 난 약간은 포위당한 느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라벳과 챔벌레인은 2010년 헤어졌지만 가까이 지냈다.
1934년 3월 31일 캘리포니아주 비벌리 힐스에서 태어난 고인은 할리우드의 별들이 줄줄이 사는 동네가 아닌, 이른바 "윌셔 블러바드의 잘못된 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형제 가운데 둘째였는데 부친 찰스는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영업사원이었다. 나중에 부친은 알코올 치유 캠페인을 벌이는 Alcoholics Anonymous의 대표 인물이 돼 연사로 세계를 돌아다녔다. 모친 엘사는 집안일만 했다.
그는 포모나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어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간직했다. 할리우드의 출연 제의를 뿌리치고 미 육군에 자원해 주한미군으로 근무할 때 상사로 진급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뒤 연기 수업을 받고 여러 작은 TV 드라마 배역들을 맡다가 킬다레 박사 역할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세월이 흐른 뒤, 챔벌레인은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를 돌아봤다. 그는 부친의 "치명적인 냉소'와 감정을 상하게 하는 행동 때문에 "마체테(정글 칼)로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고인은 또 말년에 성적 정체성을 숨기지 않기로 결정한 데 대해 느꼈던 위안을 얘기하기도 했다.
'가시나무새들'과 '쇼군'으로 골든글로브 TV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닥터 킬데어'로 '최고 TV 스타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출연작으로 영화 '쿼터메인 2'(1986), '킹 솔로몬'(1985), '슬리퍼 앤 더 로즈'(1976), '삼총사'(1973), '사총사'(1974), TV 영화 '몬테 크리스토 백작'(1975), '저격자'(1988) 등이 있다. 199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사운드 오브 뮤직' 무대에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