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征歌(북정가)입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ㅡ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ㅡ 두만강의 물은 말에 먹여 다하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ㅡ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화롭게)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ㅡ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이것인데 유자광이라는 간신배가 平을 得(얻을 득)으로 바꾸어놓고서 모함하니,
得을 넣어 해석하면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 되어서 역적의 시가 된 것이라 한다.
미평국의 國이 본디 天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미평국으로 알려져 있다.
남이의 시 원문을 보기 전에는 미평국인지, 미평천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천이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7언절구는 보통 둘째, 넷째 구의 마지막에 운이 같은 글자를 쓴다.
하지만, 첫째 구의 마지막에 운이 같은 글자를 쓸 수도 있다.
http://blog.naver.com/sukbongcho/10085158022
좀더 살펴 보자.
남이 장군(南怡 將軍)
분야무속신앙 > 무신정의조선 전기의 무신(武臣)으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자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되는 장군신의 하나. 17세 때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 ?~1467)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예종 때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함.
내용남이 장군(1441∼1468)이 비범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억울하게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남이 장군 신앙의 전승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 된다. 비록 후대에 와서 신원(伸寃)이 되긴 하였지만 그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민중의 억울한 심정은 그를 신격화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역사 인식은 민간신앙과 구비전승물을 통해 표출된다. 이를 토대로 남이 장군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이한 출생을 하다
2. 원조자의 도움으로 수련을 하다
3. 신이한 행적을 남기다
4. 원귀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다.
구비설화에 나타난 남이 장군은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출생에서부터 완전한 신성성(神聖性)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네의 혼이 환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네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요구하는 부정적 존재이다. 수련 과정에서도 그의 불완전한 상태는 해소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지네의 원혼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수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비 차림의 길손[客]이 남이를 데리고 가서 글과 무예를 가르쳤는데 수년 후 선비의 방에 비수를 든 사람이 나타나 선비의 가슴을 찔렀다고 한다. 비수를 든 사람이 바로 남이 장군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신에게 신이한 능력을 지니도록 가르쳐 준 스승에게조차 칼을 겨누는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귀신을 알아보고 퇴치하는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또한 천명(天命)을 어기는 것이 되거나 결과적으로 구원자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으로 묘사된다. 신부를 죽이려고 하는 손각시를 퇴치하지만 사실 그 신부는 이미 천명을 다한 사람이었거나 귀신을 퇴치하고 살아남은 처녀가 남이 장군에게 자신의 여생을 바치겠다고 하지만 남이 장군이 이를 냉정하게 뿌리쳐 결국 처녀가 자결하게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운명론적 결과로 그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도리어 민중의 변혁에 대한 강한 욕구의 표명이 된다. 남이 장군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를 향해 숭배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모순이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야기를 통해서는 그들의 영웅을 죽인 지배층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그를 신격화하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나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민중의 역설적 저항의식의 표명을 나타낸다.
이처럼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식은 남이 장군의 신격화에 관여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또 이것은 중부 지역 무속에서 최영(崔瑩, 1316~1388) 등을 비롯한 원한 깊은 장군을 신으로 받드는 맥락과 일치한다. 즉 생전의 위대한 업적이나 충정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억울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현상은 비단 남이 장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시에 원한 깊은 귀신을 모셔서 위해야만 살아 있는 자들에게 탈이 생기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금기의식도 남이 장군의 신격화에 반영되어 있다. 또 민간에서는 남이 장군이 잡귀를 쫓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생전에 위엄 있는 장군이었다는 점에서 잡귀를 쫓을 수 있는 주력(呪力)이 있다는 믿음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남이 장군은 주로 서울 용산구에서 동제(洞祭)의대상신으로 모셔진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남이장군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이다. 이것은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106번지에 있는 남이장군사당에서 열리는 제의로, 1999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남이장군사당은 대지 294㎡에 건평 33㎡이며 크기는 3칸으로 한와(韓瓦)이다. 사당은 당 입구 전면에 있다. 이곳에 사당을 세운 이유는 남이 장군이 용산에서 병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화(慘禍)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사당은 원효로 2가에 위치한 거제산 당고개에 있었으며, 100여 년 전에 장군이 현몽해 현 위치로 옮겼다고도 한다. 당 내부에는 남이장군상을 비롯해 최영장군상, 부군대감내외상, 정추정씨내외상, 산신령상, 토지신상, 천신대감상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본 정보는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신앙사전에서 제공합니다. | 집필 오세길(동의과학대학)[참고문헌]
김태곤, 동신당, 민속원, 1999.
양종승, 한국무속신 고찰, 몽골학 4, 한국몽골학회, 1996.
남이장군설화
유형
작품
조선 전기의 무신 남이에 관한 설화. 비범한 능력을 가졌으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명장 남이에 관한 인물전설이다.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청야만집 靑野?輯≫·≪대동기문 大東奇聞≫에 문헌 자료가 전해지고 있으며, 구전설화도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문헌 자료는 순수설화라기보다 여러 문집에 소재하여 있는 남이에 관한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서, 모두 같은 내용이다. 특기할 것은 ≪연려실기술≫ 중 ≪국조기사 國朝記事≫의 자료를 인용한 남이의 혼인 과정은 현재 구전되는 설화와 같은 것으로 보아, 민간 전승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이장군설화>를 정리하면 출생·혼인·입공·죽음의 4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각 편이 모두 남이는 짐승의 원혼이 환생한 것이라고 한다. 인신공희(人身供犧)를 받는 거대한 지네 또는 뱀이 그 폐해를 없애려 한 어느 이인에 의하여 퇴치된 뒤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비범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몇 차례 스승 또는 아버지인 이인을 해치려는 시도 끝에 원한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혼인에 관한 내용은 구전이나 문헌설화나 같은데, 모두 남이의 비범성을 보여 준다.
남이가 어렸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따라갔더니 권람(權擥)의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집 낭자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므로,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허락해 주었다.
남이가 들어가니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았던 귀신이 곧 달아나고 낭자가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나오니 낭자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자 남이는 자기가 본 바를 이야기하고, 약으로 치료하였다. 이 일로 남이는 권람의 사위가 되었다.
입공 부분에는 제주도 정벌과 두만강 정벌로 요동 700리 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이야기된다. 제주도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허구이지만, 설화에서는 제주도 정벌 때 남이에게 죽은 제주도 여왕의 원혼이 남이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이라는 각 편도 더러 있다.
남이의 죽음은, 그가 읊은 시의 글귀가 그에게 쫓겨간 분을 바른 여귀 또는 제주도 여왕이라는 여귀의 장난에 의하여 임금에게 ‘미평국(未平國)’이 ‘미득국(未得國)’으로 잘못 읽혀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4단계는 모두 원혼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실제로 남이는 의산위(宜山尉) 휘(暉) 의 아들이고 태종의 외손이라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설화에서는 그같은 신분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남이의 죽음을 억울한 것으로 인식해 온 설화 향유층의 동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는 향유층은 그것을 원귀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설화의 향유층은 남이를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세계의 횡포로 좌절당하는 민중적 영웅으로 이해하고,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 설화 유형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유형은 인물의 실제 행적과 상관없이 향유층에 의하여 민간 영웅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자료이다. 뒤에 민간 신앙에서 ‘남이장군신’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어져 오기도 한다.
대동기문中남이장군설화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靑野?輯」
「大東奇聞」
「옛날이야기선집 5」(임석재, 교학사, 1971)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20여년전 춘천 남이섬 에 있는 남이장군 묘를 구경 한적이
있는데 그게 가묘 였다는 거예요. 역모를 꾀한자는 사형후 묘를 만들지못하게
했다는 세조의 정책 때문이라는데 현재 경기도 화성군에 있는 묘가 진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