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1: 11 주 안에는 - 고전 11: 13 스스로 판단하라.
고전 11: 11 주 안에는 -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
이제까지 바울은 창조 질서를 통해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며, 예배시에도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주 안에서 서로 하나인 것을 밝힘으로 여자의 지위에 대해 변호하고 있다.
1]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렌'(*)은 앞서 진술된 내용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이다.
비록 본질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순결과 복종을 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이다.
2]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1) 주 안에는
여기서 '주'(*, 퀴리오)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Godet). 왜냐하면 12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에게 복종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 갈 5: 6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엡 1: 7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 갈 3: 28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이제까지 논증한 여자의 순종성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3]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본 절은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감을 말하고 있다.
남녀는 이처럼 지위적, 역할적 차이가 있지만,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며 실상 상호의존적이다.
고전 11: 12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가르'(*, '왜냐하면')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본 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하나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한다. 아담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출생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주 안에서 구원 얻은 남녀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 9).
1]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에게서'(*, 에크 투 안드로스)에서 '에크'는 '...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 사물의 기원과 근원을 표시한다.
본문은 여자의 기원이 남자임을 말한다. 이것은 8절의 반복으로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었음을 상기시킨다.
* 창 2: 21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말미암아'는 헬라어 '디아'(*)로서 본 절은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사람의 '일반적인 출생 과정'을 말하고 있다(Morris).
이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에크) 태어났고,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디아) 태어났다고 하는 구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과 질서를 바울이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바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본 절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서로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3]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여기서 '...에게서' 역시 '에크'(*)라는 의미로서 기원과 원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과정 속에서 창조되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남자와 여자 두 존재의 기원은 결국 하나님이다(창 1, 2장).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동등하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
고전 11: 13 스스로 판단하라. -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
1]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바울은 이제까지 여자가 하나님께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논증을 마친 후, 이런 논증들이 틀렸는가를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판단하라고 권면한다.
자유의지
(1) 정의
자유의지란 어떠한 외부적 영향 없이 인간 스스로가 구원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2) 역사적 논쟁
①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② 에라스무스와 루터
③ 알미너스와 칼빈
(3) 자유의지와 현대 신학
현대 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욱 높이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아름답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성경은
1) 인간의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며
2)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3) 오직 하나님에게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며
4) 성경만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가르친다.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정하는 것에 의해서 보다도 그들이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 더욱 결속되어 있다.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긍정하는 것은 간단히 요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 동기, 성격, 자유와 같은 중요한 용어들의 정의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며, 이것들은 모두 광범위한 사상적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자유주의자들은 선택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능력을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인간의 책임의 개념을 강조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격과 일치하는 선택의 능력과 성격에서 "흘러나오는 "동기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성격의 형성과 동기의 능력을 강조한다. 자유에 대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 전지. 전능 그리고 죄와 은혜의 개념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의 개념, 특히 예지와 예정의 개념과 함께 생각할 때에 의지의 독립에 관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모든 인간적 사건들을 예시할 수 있다면 또는 만일 모든 행동들이 하나의 무한한 행동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결정은 어떤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하고 중요한가? 이러한 문제들은 교회를 볼 때에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신학적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 중에서 최초의 가장 결정적인 것은 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펠라기우스(활동기 400-420?) 사이에 일어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하기를 아담은 타락 이전에 죄를 짓지 않을 수 둘 다 가지고 있었지만 후자(posse peccare)를 선택하여 전자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이 본래의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회복될 수 있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배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의 문제를 야기 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은혜는 저항을 받지 않으며 모든 것을 선행한다. 즉 하나님의 행위 자체가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며,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저항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과 꼭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입장은 루터(1483-1546년)와 칼빈(1509-64년)이 취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예정론의 개념에 의해서 복잡하게 되었고 예정운명론(foreordination)의 한 단면이 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 예정하셨다면, 아담이 타락 이전에 선택할 수 있었던 자유까지도 거론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이 선택까지도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결론을 인정하지 않고 다소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주장한 신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펠라기유스, 몰리나(1535-1600년, 알미니우스(1560-1609년), 웨슬리(1703-1791년) 같은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자유의지의 옹호들은 예정론 교리를 반박하고 재해석했다.
심리학 (특히, 프로이드 주의)과 실존주의의 두 현대 지적 운동은 현대의 개신교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심리학은 성격에 결정적인 것으로 의지의 속박에 관한 현상을 탐구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실존주의는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장 폴 싸르뜨르 사용되었다. 실존주의는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장 폴싸르뜨르(1905-1980년)의 경우에 있어는 프로이드의 결정론을 엄격하게 비판했다. 신학자들은 인간실존의 본질을 규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 철학을 사용한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문제는 아직도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한국 컴프터 선교회)
2]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마땅하냐'(*, 프레폰)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이제까지 논증한 것의 적절성과 타당성에 대한 것으로 당연히 수건을 써야 한다는 호소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 절에서 여자는 긴 머리를 가지거나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이 말하고 있다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