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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웠던 1976년 겨울이야기 - 2편
그해 겨울이 유난히 춥기도 해서 그랬고,
건축자재 배달일이 유난히 힘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더 힘든 것은 사람들과의 부딪침이었다
억세고 거친 미장이들과의 밀당
질기고 경우없는 사람들과의 수금싸움
막무가내인 사람들과의 부딪침이 정말 힘들었다
아무리 물건을 많이 팔고 배달까지 완료해도
수금을 하지 못하면 꽝이었다.
장사는 돈을 받아야 끝이 난다.
이 경험은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배달된 자재의 갯수를 줄여서 값을 깎으려는 사람들
줄줄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않는 도둑놈 심뽀의 미장이들
젊은이들이라고 무시하고 깔보는 어른들
하루하루가 사건의 연속이었고 치열한 생존경쟁이었다
공사가 다 끝나고 났는데 자재갯수를 막무가내로 줄인다
그만큼 값을 깎겠다는 심뽀다
이미 시멘트로 마감을 한 뒤라 갯수확인은 할 수 없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어느 억세게 생긴 아줌마가 그랬었다
집안 하수도 공사를 하느라고 노깡을 꽤 여러개 가져갔는데
가격도 깎고, 갯수도 줄여서 얘기하고는 돈을 집어 던지고 가려고 했다
나랑 동생이 가로막고 나섰다. 한번 더 잘 기억해 보시라고...
자기가 맞다며 계속 꽥꽥거렸다
둘이서 곡괭이를 들고 나섰다. 그 아줌마네 집으로 갔다.
공사한 마당 시멘트 마감을 다 부수고 갯수를 세겠다고 했다
동생이 곡괭이로 마당을 한번 찍었다. 두 번째 곡괭이질을 하려는데...
기겁을 하며 바로 값도 깎지않고 갯수도 원래대로 돈을 내놨다
상처난 마당을 보며 두고두고 속이 쓰렸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가 또 있었다. 좀 비싼 건축자재였다.
이미 마감이 끝났는데, 갯수를 속이는 미장이가 있었다
우리 동네로 온지 얼마 안 된 신참 미장이였는데
목소리도 괄괄하고, 떡대도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여하튼 조금 거칠고 험악한 인상이었다
동네 미장이들한테도 미운털이 박힌 아주 못된 사내였다
계속 헛소리를 하길래 공사장 앞의 전봇대를 두발장수로 날라서 걷어찼다
내 동생은 태권도 유단자고 나는 합기도 유단자다
전봇대의 꽤 높은 부분을 걷어차는 모습을 보고 쫄았는지 돈을 다 내놨다
다음 날 형사들이 우리집으로 들이닥쳤다
동생과 내가 남부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리고 철창 안에 갇혔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나부터 아침에 취조가 시작됐다
성명, 본적, 주소, 직업, 나이, 그런게 취조의 시작인 줄 그 때 알았다
내가 학생이라고 하니 어느 대학이냐고 물었다
어디어디라고 얘기했다. 취조하던 형사가 잠시 자리를 떴다
조금 있다가 점잖게 생긴 분이 나타나더니
나에게 담배를 한 대 권했다.
괜찮다고 사양했으나 걱정말고 한 대 피우라고 하면서
자기도 나랑 같은 대학 법과대학 출신이라고 하였다
고시에 몇 번 실패하고 경찰로 들어와 요모양 요꼴로 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초지종을 묻고 나더니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다시 철창에 갇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우릴 고소한 미장이가 나타났다
법대 출신 선배라고 했던 양반이 자신의 방으로 미장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형제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 미장이한테 뭐라고 회유를 했는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다시 잘 지내보자고 하면서...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 선배님이 그러셨다. 다시는 이런 데 올 일은 만들지 말라고...
성질 죽이고 참으며 살라고 하셨다. 잘못하면 콩밥 먹는다고...
이후로 그 미장이와는 거래를 완전히 끊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제대하기 전부터 쌓인 외상값이 꽤 되는 미장이가 있었다
동네에서도 아주 악질로 소문난 50대의 미장이였다
어머니가 몇 번씩 갔다가 헛탕을 치고 돌아 오시곤 하였다
한번은 돌아 오셔서 훌쩍거리시면서 넋두리를 하셨다
이 인간이 어머니를 약올리고 돈없다고 딱 잡아 떼더란다
그 날 공사대금을 수금했다는 소문을 듣고 갔던 거였는데 그랬다
한번쯤 단단히 손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집에 돈이 없었다. 굶어죽을 판이었다.
동생과 함께 가죽장갑을 낀 손에 칼을 하나씩 들고
어머니에게 정확한 집위치를 물어본 후 찾아갔다
가서 보니 식구들이 모여서 TV를 보고 있었다.
살이 디룩디룩한 미장이는 파자마 바람이었다.
동생과 함께 신발도 벗지않은 채로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서
장식장처럼 생긴 커다란 TV 상판 위에다 칼을 꽂았다
양쪽으로 한 개씩...
돈을 내 놓던지, 칼침을 맞을 것인지 결정하라고 했다
내가 맹호부대에서 제대한지 한 달도 안 됐다고 호통을 쳤다.
너 손 좀 봐주고 콩밥 먹겠다고 소릴 질렀다.
미장이네 식구들이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미장이 부인이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장롱문을 열었다
현찰로 한 푼도 깎이지 않고 다 받아들고 나왔다
그 시절엔 그랬다. 그래도 그렇게 어물쩡 넘어갔다.
요즘 같았으면 아마 콩밥을 먹어도 몇 번은 먹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 해 1976년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중노동을 한 탓에 몸이 많이 망가졌다
군대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이빨이 망가졌다.
뭔가 딱딱한 걸 씹었는데 이빨이 뭉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무슨 생선을 넣고 끓인 매운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그 부분이 쪽이 떨어져 나갔다
지금도 이빨 여기저기가 좋지않다.
그 때 그 시절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유난히 추웠던 1976년 겨울이 지나가고 1977년 봄이 됐다
동생과 나 둘이 다 등록을 하기가 힘들었다
학자금 융자를 신청하려고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그 때는 보증인을 네 사람이나 세워야 했다
매부한테 한 장, 어머니 외사촌동생인 아저씨에게 한 장,
두 장을 받고 더 이상은 받을 수 없었다
잘 사는 삼촌들도, 그 밖의 친척들도 다 거절하였다
동생이 내게 얘기했다. "형 내가 군대갈게"
그렇게 해서 동생이 마침 마감이 임박했던 의무경찰로 지원을 했다
이후 입대해서 마포경찰서로 발령을 받고 여의도 북측초소 경비를 섰다
나는 4학년으로 복학해서 남은 1년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다
졸업하기 전까진 그럭저럭이었으나, 졸업 후에 가게는 세를 주었다
마침 호경기 시절이라서 골라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전공을 살려서 종계 병아리를 생산해서 파는 원종계부화장에 들어갔다
내가 영업을 했었기 때문에 수당이 꽤 많았다
규모가 꽤 되는 종계장과 부화장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당시 삼성같은 대기업 대졸초임이 13만원쯤 하던 시절인데
내가 15만원을 받고 입사했고 1년만에 바로 20만원으로 올랐다
출장수당도 있었지만 호경기 시절이라서 고객들이 봉투를 내밀었다
자기들에게 우선적으로 종계병아리를 분양해 달라는 인사였다
병아리만 넣으면 돈이 되던 호시절이었다
경제발전으로 축산물소비가 엄청나게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술집에서 술 마신 후 자기가 계산하고 내 호주머니에 영수증을 찔러 주었다
회사에 접대비로 올리고 돈 타서 쓰라는 배려였다
당시 회사의 영업사원 다섯명 중 내가 유일한 총각이었다
서로 지방출장을 나가기 싫어했다
내가 더 자주 전국을 누비고 출장을 다녔다
회사에서는 일 열심히 한다고 오히려 좋아했다
종계장이 있는 나환자촌에도 무시로 드나들었다
헌인농장, 염광농원, 그 곳에도 종계업자 들이 많았다
이후 그곳의 양계장 들이 모두 가구공장내지 판매장으로 바뀌었다
1976년 겨울의 중노동에 비하면 그건 식은 죽 먹기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1년 남짓 열심히 일해서 식구들 먹고 살고, 저축한게 72만원쯤 됐을 때
79년 3월 환갑되시던 해 생일이 오기도 전에 아버님께서 돌아 가셨다
그 돈으로 평당 5만원이었던 한남공원의 묘지를 7평 장만했다
그리고 조의금 등을 보태 무사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삼촌들은 돈 없으면 화장시키라고 성화를 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바로 업계에서 제일 컸던 경쟁회사에서 스카웃제의가 왔다
당시에는 모두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게 상례였는데,
우리 집 누추한 모습을 직원들이 와서 다 보고 갔다.
난감했었는데 업계에서 선두주자인 회사에서 스카웃을 하겠다니
내가 먼저 찾아가 날 뽑아 달라고 할 판이었다.
바로 회사를 옮겼다.
아버님 돌아가시자 마자 회사를 옮기며 과장으로 승진해 봉급이 또 올랐다.
그 때까지 막혀있던 외국산 종계수입이 풀리며 내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나는 첫 번째 회사에서 국산 종계병아리만 전문으로 팔았다
그 것도 전국을 누비며 팔았다. 내가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아버님 돌아 가시고 영업과장으로 승진하여 회사를 옮긴 후
꼭 1년 만에 바로 아래 여동생을 시집 보냈다
부족하지만 성심성의껏 혼수를 장만해 보냈다
그러다 보니 군대갔던 남동생이 제대했다. 그리고 복학했다.
이번에는 학자금대출이 필요하지 않았다
1981년 9월에는 나도 결혼을 했다
그러다가 내 경력을 소문으로 들었던 미국의 유수한 동물약품회사에서
스카웃제의가 왔고, 봉급이 따따블로 늘어났다. 결혼 후 6개월 만이었다.
어머니께서 처덕이라고 하며 좋아하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두 번째 회사로 옮긴지 꼭 3년 만에 다시 회사를 옮긴 것이다
병아리장사에서 약장사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1982년 4월.
전 회사의 기획실 차장에서 마케팅 부장으로 올라섰다
내가 전공한 분야라서 별 어려움은 없었다
일단 큰 고객들이 같았고, 또 나를 많이 밀어 주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축산하면 양계였던 시절이다
그리고 내가 회사를 옮겼던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양돈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부산물이나 쌀뜨물, 잔반을 먹이던 소규모 부업양돈에서
배합사료로 돼지를 키우는 대규모 전업 양돈 시대가 도래했다
내가 팔았던 양돈용 동물약품 들이 날개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주 제품이 2년만에 1500여개 동물약품 중 판매1위를 달성했다
이후 3년 만에 양돈시장이 3배로 커졌다. 가장 큰 축종이 됐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세미나도 하고, 농장방문도 하고 그랬다
1976년 겨울의 중노동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제공한 포니2를 몰고 부지런히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휘파람을 불며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이후 실적이 좋아서 모기업인 인체약품부로 옮겨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교육훈련을 위해 1986년 미국 본사로 가서 근무하게 됐다
이런 저런 여러가지 대우가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그건 그리 흔하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아시아 쪽에선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미국 본사에서 미국에 유학한 외국인들을 채용한 후
훈련기간을 거쳐 해당지사로 보내는 일은 더러 있었지만...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에 더러 글로 써 올린 적이 있다
본사에 근무했던 시절 정면에 보이는 메인빌당 4층에 있었던 국제마케팅부서에서 일했다
이 때의 경험과 이력이 이후의 내 인생에 엄청나게 커다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렇게 운이 좋게 잘 풀려서, 이후 동생들도 다 시집, 장가 보내고
또 나도 별 어려움없이 지금까지 순탄하게 잘 살아오고 있다
모두 지하에 계신 아버님의 음덕과 주위분들의 후원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1편에 썼던 그 고난의 겨울, 몹씨 추웠던 1976년 겨울을
잘 견디고 이겨낸 덕분에 오늘날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추웠던 1976년 겨울이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구로동에 살았던 그 시절,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 넓은 구로시장을 돌아보며 물건도 사고, 구경도 하면서
또 1976년 그 추웠던 겨울을 생각하면서 심기일전하고는 했었다
시장에 가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새삼 마음을 다잡게 된다
결혼 후에 아들이 태어나고 커 가면서 종종 아들놈 손을 붙잡고
구로시장을 순회하고는 했었다. 그게 1986년까지 그랬다.
1976년부터 시작해서 1986년까지 10년은
내게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또 보람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이 참 고맙다. 그리고 대견하다.
내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너 참 잘 견디고 이겨냈다고...
너무 자화자찬을 했나? ^^*
그 추웠던 1976년 겨울이야기를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한다
재미없고 초라한 그 시절의 남루한 얘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첫댓글 고생끝에 낙이 있다고 하지요, 그시절에는 대부분 힘들게 살았고
중요한건 머리가 좋으셨다는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삶의 한 단면을 잘 읽었습니다.
입대 전까지 별 고생을 안 하다가
제대 후에 상황이 급변해서
상당히 당황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 시절에 중동으로 갔던 친구들도 많고
누구나 고생을 했던 시절입니다
다행이 사회에 나온 후에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솔님 이야기 잼나게 잘 봤습니다
그때 그시절 ᆢ 누구나 힘든 시기 였조
다행이 승승장구 호시절 속에서 살아오신
청솔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네 참 힝든 시기였습니다
겨우 25살때 이야기입니다
과분한 박수에 감사드립니다
'강한 자에게는 더 강해야 된다'는 생각에
동감합니다.
예전에 어음과 당좌수표가 거래대금으로
쓰일 때였죠.
수금 갔는데 6 개월짜리 어음을 주길래
가게 입구 앞을 봉고차로 가로 막아 버렸지요.
마지못해 2개월 수표로 바꿔 주더군요.
한창 젊었을 땐 여자라도 겁이 없었는데
요즘은 많이 죽었어요.
근데 인간쓰레기와는 거래하면 안된다는 사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지요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쁜 인간들이 더 많은 거 같습니다
내가 약하면 밟히지요
일단은 내가 강해져야 합니다
당시에 내게 못되게 굴었던 인간들
지금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요즘도 저는 분명하게 삽니다
아 이 사람은 아니다 싶으면
아예 상종하지 않습니다
똥은 피하고 보는게 상책입니다
감사합니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그말이 맞네요
지금의 편안함 옛일을 담담하게 자서전 비슷하게
말할수 있으니 행복 이겠지요 당당하게 자신있게 올바른 성격처럼
멋지십니다
고생끝이라기 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주위에서 도와주신 분들도 많았구요
많은 선후배님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길에서 돌아보니
꿈같은 세월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벌써 48년 전 일이 돼버렸습니다
인생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글도 잘 쓰고 호남형 영화배우 같습니다.
76년 그해 강원도 겨울이 영하 20도 내외 밤마다 할일없이 밤잠이 없는 말년 고참은 한밤중 깨워서 줄빳다...
누나들 모아준 거금 13만원
중대장이 빌려가서 ,타부대로 전출을 가버렸다
일등병 초짜가 간신히 묻고 물어서 영외거주자 주소를 알아서 중대장 집에 찾아 갔다.
내돈 안갚으면 사단 감찰부에 소원수리를 넣겠다는 그 한마디만 하고 뒤도 돌아보 지 않고 바로 나왔다.
며칠뒤 바로 돈을 돌려 받았다.
쥐도 위급하면 고양이를 문다든데
평소 겁도 많고 어리빵 하지만....
죽기를 각오하면 안될거 없더라
76년도에 군복무중이셨군요
네 그해 겨울이 참 추웠습니다
13만원이면 당시 큰 돈이지요
중대장이 나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