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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활용’ ‘언론 조작’
특이한 성향의 정치인이야 어느 사회에나 존재 하지만 그가 소수로 그치냐, 아니면 세를 넓혀 주류가 되느냐에 따라 사회의 위험도가 달라진다. 오늘의 일본 사회는 프랑스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한 이상기류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시하라의 문제 발언을 몇 개 더 살펴보자. 1999년 9월 그는 도립 중증 심신장애인 시설을 시찰한 후 “저런 사람들한테도 인격이 있는가” 하고 소감 같지 않은 소감을 말했다. ‘아사히신문’ 기자가 이를 용기 있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후 이 기자는 ‘이시하라 왕국’인 도쿄도청에서 조직적인 ‘왕따’를 당했다.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한 이시하라 지사를 비판하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2000년 4월 현역 지사로는 처음으로 육상자위대 제1사단 기념행사장에 참석한 그는 ‘제3국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불법 입국한 제3국인, 외국인이 매우 흉악한 범죄를 반복하고 있다. 도쿄의 범죄 형태는 과거와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커다란 재해가 일어나면 대단한 소요사태마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에 대처하려면 경찰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때에 여러분에게 출동을 부탁해 업무를 수행하게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원래 ‘제3국인’이란 표현은 1945년 종전 후 미 극동군사령부가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출신자를, 연합국 국민도 아니고 적대국 국민도 아닌 존재로 지칭하며 쓴 표현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를 일본인도, 외국인(흔히 서양인)도 아닌 사람이란 뜻의 차별적 용어로 사용했다. 그의 발언은 관동대지진 당시 출동한 군대가 자경단과 경찰의 조선인 학살극에 동참한 비극을 되새기게 한다.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한 데 대해 자성할 법도 하건만, 이시하라는 엉뚱하게도 교토통신 기자가 ‘불법 입국한’이란 구절을 빼고 보도한 것만 물고늘어졌다.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논란을 봉쇄하기 위해 언론에 싸움을 건 것. 이렇듯 논점을 흐리는 그의 수법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이시하라는 이 밖에도 도쿄도 재정개혁을 명분으로 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세제 신설, 도내를 통행하는 디젤차의 배기가스 규제, 새로운 도쿄도 은행 설립 구상, 도쿄도가 재정을 지원하는 대학들을 ‘수도 도쿄대학’으로 통폐합하는 등 금융·교육·교통을 가리지 않고 온갖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 이렇게 설쳐대는 이시하라 지사 앞에서 출입기자들은 모두 주눅이 들어 있다고 한다. 작은 매체 기자들은 “죄송합니다만…” 하며 질문을 시작할 정도다.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시하라 지사가 ‘막말’로 창피를 주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생리를 잘 아는 노회한 정치인이 젊은 기자들을 주무르고 있는 셈이다. 대학 시절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면서 미디어의 힘을 실감한 그는 차츰 언론 활용에 눈을 떴고 40여년이 흐른 지금은 언론 조작 단계까지 진화한 것 같다. 돌출 발언은 TV 카메라의 조명, 카메라 플래시, 찰칵하는 셔터 소리에 중독된 이의 생명 연장을 위한 단막극 같다. ‘이시하라 발언록’ 도쿄 시내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신주쿠역 근처에 일본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초(歌舞伎町)가 있다. 신주쿠역에서 가부키초와 반대 방향으로 10여분 걸어가면 40층이 넘는 빌딩군(群)이 나타난다. 고층빌딩 숲에서도 특이한 외관 때문에 눈에 확 띄는 건물이 있다. 쌍둥이 빌딩 형태로 우뚝 솟은 지상 48층, 높이 243m의 도쿄도청 본청 건물이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모델로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설계가 단케 겐조가 설계한 것이다. 건물이 완공된 것은 일본 경제의 기세가 세계를 뒤덮던 1991년 4월이다. 19만여명의 직원, 연간 예산 7조엔(약 70조원)을 집행하는 도쿄도지사. 웬만한 나라의 전체 경제 규모를 능가한다. ‘도쿄공화국’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이시하라는 1999년 4월에 취임해 4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에 성공, 2003년 4월부터 2기째를 보내고 있다. 도쿄도 청사 6층 기자실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이시하라 지사의 정례 기자회견이 열린다. 공식 출입기자는 23개 언론사 150여명이다. 질문은 도쿄도 문제를 벗어나 일본 정국, 미·일 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뤄진다. 이시하라 지사는 티가 들어간 것처럼 눈을 껌벅거리며 하나하나 답한다. 그걸 즐기는 것 같다.
일본을 대표하는 정론지 ‘아사히신문’마저 ‘이시하라 발언록’이란 고정 코너를 두고 매주 발언 내용을 발췌, 소개하고 있다. 도쿄 지역방송인 도쿄MX TV는 인터뷰를 생중계하고 다음날 재방송한다. 아사히신문 편집국 간부에게 “중요한 내용도 아닌데 박스 기사로 매주 중계하듯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독자들한테 인기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시하라 지사는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한반도 관련 기사를 자주 왜곡하는 ‘산케이신문’과 월간지 ‘제군(諸君)’ ‘정론(正論)’ ‘문예춘추’의 단골 필자다. 자위대의 군대화와 군사대국화를 골자로 하는 개헌론과 북핵위기를 앞세운 핵무장론까지 거론한다. 최근 그는 행정구역상 도쿄도에 속하는 남중국해상의 암초(일본은 섬이라고 주장) 오키노도리(沖の鳥)에 발전시설을 설치하고 어업활동을 지원하겠다고 말해 관심을 끌었다. 중국은 무슨 짓을 하냐며 발끈했다. 일본의 국수주의 세력들은 중국의 반발에 다시 일제히 들고일어났고 이시하라는 국수주의 세력의 중심인물로 더욱 부상했다. 이것이 전형적인 이시하라식 언론 플레이다. 일제 침략 실상을 축소, 은폐한 역사 교과서가 각급 학교에서 많이 채택되도록 하려는 국수주의 단체 소속 인사들은 이시하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실제로 그의 영향력 아래 올해 개교하는 한 도쿄도립고교가 역사 왜곡 교과서를 채택한 바 있다. 도쿄도의 각급 학교에 각종 행사 때국기인 ‘히노마루’ 게양, 국가인 ‘기미가요’ 제창을 강요한 것도 그다. 지난해 봄에는 국가를 제창할 때 학생들을 기립하도록 지시하지 않은 교사 248명을 징계처분하기도 했다. 교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전체주의 국가로 회귀하려는 듯한 분위기에 저항,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일이 시끄럽게 되자 아키히토 일왕조차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한마디할 정도였다. 외국인을 희생양으로 신주쿠 가부키초의 유흥가에는 중국, 필리핀, 태국, 한국 등 아시아 여성은 물론 나이지리아, 헝가리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거리 전체가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썰렁하다. “어젯밤 경찰이 싹 훑고 갔으니 취업비자가 없는 아가씨들이 무서워서 어떻게 나오겠어. 오늘 저녁은 어디 가도 아가씨들은 못 볼 거요.” 퇴폐업소가 아닌 선술집 여주인이 하는 말이다. 가부키초에 대한 경찰의 집중 단속은 이시하라 지사의 외국인 범죄 소탕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는 외국인 차별 의식이 유별나다. 절도, 강도 등 범죄가 증가하면서 도쿄 시민의 불만이 증가하자 그는 외국인 탓으로 돌렸다. 내셔널리스트들이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야마구치구미(山口組) 등 폭력단을 비롯한 구조적 부패는 손대지 않고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일본에 사는 외국인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인의 범죄 건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범죄 발생 전체를 외국인 탓으로 돌리려는 이시하라 지사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일본 식자들의 지적이다. 이시하라 지사는 강력한 불법체류 단속과 함께 적발 즉시 강제추방을 지시했다. 2004년 일본에서 추방된 불법체류 외국인은 전년도보다 1만여명 늘어난 5만여명이다. 대부분이 도쿄에서 올린 단속 실적이다. 이 과정에서 핍박받는 이는 힘없는 소수,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들뿐이다. 추방된 외국인의 60%가 20대 여성이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히토쓰바시대 재학중이던 1956년(24세) 소설 ‘태양의 계절’로 순수문학 분야 신진작가에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문단 권력의 꿀맛을 맛본 그에겐 더 큰 권력욕이 꿈틀거렸다. 그는 자민당 실력자를 찾아가 공천을 따냈고, 36세이던 1968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72년 중의원으로 옮겨 당선된 이시하라는 이듬해 자민당 소장파 의원들과 ‘청풍회(靑嵐會)’란 모임을 만들었다. 소속 의원은 31명. 이 무렵 그는 자민당의 ‘젊은 사자’로 불렸다. 국수주의자인 자민당 중진 나카소네 야스히로(1982년부터 5년간 총리를 지냄)의 비호 아래 한껏 기세를 올린 것이다. ‘외로운 늑대’ 하지만 정계가 어디 그렇게 녹녹한 곳인가. 당시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과격한 발언 때문에 그는 정계 주류가 되지 못하고 외로운 한 마리 늑대처럼 국회 안을 배회했다. 도쿄도지사 연임에 성공하고 승승장구하는 오늘날의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1999년 3월에는 무소속으로 도쿄도지사에 출마했다. 줄곧 자민당 의원으로 활동해온 그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에서도 그의 독특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아들인 자민당 소속 노부테루 중의원은 소속당 후보가 있음에도 무소속으로 출마한 부친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다. 부자관계란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명백한 해당(害黨)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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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따위 쓰레기를 지사로 뽑은 도쿄도민들도 머리속에 뇌가 들었는지 의심이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