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함의 감동적인 글은
세월이 흘러 흘러 갔어도
감동, 감동입니다.
무한한 감동을 주는 실화이오니
한가할 때 차분하게 느끼며 구독
하시기 바랍니다.
☆박목월님의 아내 얘기
1952년 6. 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 옷을 내밀고 아내는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속에서 진주가 생성되듯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성숙 하고 가치있는 삶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박동규(박목월의 아들)의 어머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
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께!''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 '
이라고 칭찬해 주시더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헌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 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서울대 명예교수 박동규 글
( 박목월 시인 아들)
첫댓글 몇번을 읽고 들어도
감동입니다
아름다운 글 💘
낭주님
행복한 하루되셔요.
첫 댓글을 가슴 따뜻하게 주셨네여.
큰 감사를 드립니다.
아름답고도 가슴 아린
눈물 맺히는 감동적인 글,
감사히 읽습니다.
삶의 행복은 사소한 일에 대한 감사로 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감사와 사랑 가득한 수요일 보내세요.
잘 주무셨나요.
이글 편집하느라 새벽
2~3시 잠을 설쳤더니
피곤하네여.
우리세대엔 카페가
잘못하면 건강의 독이 될수있어 조심한다면서
중독성이 있네여.
건강 유의 하세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렇게 큰 마음을 가지신 사모님.대단하셨내요 감히 따라 하기는 어렵지만 따라 하고 싶을 정도의 고운 마음을 가지셨네요. 이 아침에 참으로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박목월님도 미남인데
제자가 얼마나 맘에들었으면 처자식을
버리고 제주도로 갔을까?
죽을만큼 사랑을 안해봐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박목월 님 아내분 그런여자가
이세상에 있었다니
벅찬 감동이지요.~~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트롯대가 그바님!
박목월
잊혀졌던 고운 글
다시금 되새길수있어서
참 고맙습니다.
감동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목월 애인이 어케
생겼을까?
몇번을 읽어봐도
감동스러워 또 데리고
왔습니다. ㅎ
훌륭한 사모님 현모양처 시네요 글속에 마음과 생명이 숨쉬고 아무리 절절 하고 아름답게 포장 해도 불륜은 가시가 있는 사랑 아닌 불장난 입니다
캬~~~
댓글 명품입니다
감명깊게 읽고 또 읽고 지하철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잘하셨습니다. ㅎ
@낭주 읽다가 남들따라 쌍문에서 내렸어요
창동 내려야 하는댕ㅠㅠ
@갱자 제대로 즐독하셨네여
아주 아주 감사합니다.
박목월시인의 부인께서는 말 그대로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분이셨습니다.
수피님
다녀가셧네
마중인사가 늦었습니다.
뭔가 숙연해 지는글~
감명 깊게 읽었읍니다
힘들다 칭얼 대는 지금 우리네 현실이
그 시절에 비하면 복에 겨운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다녀가신 흔적에
감사드립니다.
감동..
뭉클,
참 좋은 📚글
가슴으로
끝까지 잘 읽고 갑니다
애쓰셨어요 낭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