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특별한 날.
아이들의 현장 체험 학습의 인솔이 아닌 우리들의 현장체험학습(연수)를 가는 날.
어린 시절,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린 소풍을 가던 그런 설레임과 기대를 안고 청주를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을 알게 된지 20년쯤 되었나.
우연히도 서점에 갔다가 그분이 쓰신 책을 사게 되었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었다.
운보의 크나 큰 불굴의 의지와 우향과의 애틋한 사랑과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했었다.
그때부터 난 그분의 팬이 되었고 내 스스로 나약해진다고 느낄 때는 그분의 그림에서 힘을 얻곤 했었다.
한참 박공예에 빠져 집안이 온통 박 천지였을 때는 그분과 우향 박래현님의 그림을 참 많이도 복사해서 작품을 했었는데...
언제나 그분의 그림에 크게 자리하는 산에서 그분이 극복해야 했던 장애를 느꼈고
동시에 그분의 산처럼 거대했던 의지를 공감할 수 있어서 그분의 그림을 참 많이도 좋아했었다.
또 하나 그분의 그림엔 늘 맑은 소리가 있었다.
당신은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도 그림에 등장하는 소년은 늘 피리를 불고 있었다.
아마도 그 분은 그 소년의 피리 소리를 늘 마음으로 들으셨으리라.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우향의 목소리를 또 사랑하는 아들 딸의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셨던 것처럼.
그분의 그림을 화집이나 영상이 아닌 진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겐 정말 좋은 기회였다.
아담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리고 자연과 어우러진 운보의 집.
관람 코스를 운보의 작품위주로 잡았다.
먼저 들어간 곳은 운보갤러리.
품격있는 인테리어와 운보의 작품들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주로 판화작품으로 청록의 산수이지만, 기법적인 면에서 바보산수의 장식적인 톤이 자연스럽게 변주된 것들이었다.
앉아서 품격있는 차향과 함께 작품들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아쉬움 속에 발길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눈앞에 조경이 훌륭한 고풍스런 한옥이 들어온다.
운보가 생전에 기거하시면서 작품을 하셨던 곳
이곳에 오실 때는 이미 우향을 잃고 혼자이셨으니 얼마나 허전하셨을까.
운보 김기창 화백님의 작업실인듯 보이는 방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생전에 쓰시던 붓과 물감들이 휘어진 채 그대로
그분의 작품하시던 그 순간들을 이어오고 있었다.
마음이 한없이 벅차올랐다.
그분의 작품하시던 그 고집스럽고 열정적이던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정면에 크게 걸려 있는 영정에 인사를 드리고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우향과 함께 행복하시라는 기도와 함께
그곳을 나와 본격적으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으로 갔다.
미술관 앞에는
장애의 비극을 한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생전의 고집스럽고 그러면서도 여유롭고 거대한 산 같은 느낌과 모습으로 앉아계셨다.
그동안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분의 작품들.
한국 미술사에 길이 남을 그분의 작품들.
그분의 분신들이 그분의 한 많은 삶을 끌어안은채
한국미술사의 과정 과정들을 묵음으로 말하며
그렇게 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활화산 같은 대담한 필치.
그분의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창조적인 에너지로 인한 다양한 경향의 창출.
자신이 처한 장애와 환경을 극복해 가는 불굴의 의지.
한국 미술의 전통성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현대적인 재해석.
자연주의 사상.
대범성과 해학적 성정들은
바로 그분이었다.
미술관을 나오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많은 느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것인가.
운보를 좋아하고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분의 먹물 한자락에는 언제나 무지개 같은 눈물이 젖어있기 때문이다.
장애우들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헌신했던 그분.
크신 사랑을 실천한 그분은 장애우들의 별이었다.
미술관 입구에 있는 그분의 말씀이 가슴에 여운으로 남는다.
소리를 들을수 없었기에 더 몰입해서 작품을 할 수 있었으나
사랑하는 아내 우향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어서,
아들 딸들의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못내 안타까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