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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남북한 해군함정, 서해상에서 교전
15일 남북 해군 함정간 교전이 발생, 연
평도 인근 서해상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합참은15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영
해를 침범하는 북한 경비정 을 우리 고속
정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어뢰정의 공격을
받고 즉각 응사, 북어뢰정1척이 치명타를
입고 한계선 북측으로 퇴각 했다고 발표했
다.
합참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25분께 북
경비정 2척이 한계선을 넘어 영해를 침
범,해군 고속정이 출동해 충돌 공격으로
남하를 저지하자 갑 자기 어뢰정 3척이
나타나 수류탄 공격을 감행해왔다.
해군은 40㎜ 함포 등으로 즉각 응사하면
서 양측은 10분간 교전을 벌 였으며 북한
어뢰정1척에 우리함정에서 발사한 포탄
이 명중,침몰직전 까지 갔으나 나머지
어뢰정 2척이 이를 예인해 북측으로
도주했다.
교전 과정에서 우리 고속정 한척도 북한
어뢰정이 발사한 27㎜ 함포 에 선체를
맞아 일부 파손됐으며 고속정 정장과
대원 등 2명이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 유엔(UN) 본부 공연 갖는
평균 65세 아마추어 ‘청춘합창단’
평균 65세 남녀로 구성된 ‘청춘합창단’이 다음 달 15일 뉴욕 유엔(UN) 본부에서 공연을 펼친다. 48명 단원이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교관들 앞에서 ‘그리운 금강산’ ‘아리랑’ 등 한민족의 정서를 담은 노래들을 불러 통일의 염원을 전하게 된다. 유엔 본부에서의 합창 공연은 이번 청춘합창단이 처음이라고 한다. 청춘합창단은 4년 전 KBS 예능 ‘남자의 자격’에서 오디션을 통해 결성된 모임이다.
단장인 권대욱(64) 아코르앰배서더 코리아 사장, 그리고 김원택(64) 홍익대 교수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직을 떠난 은퇴자거나 주부이다. 다들 아마추어지만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실력자’들이다. 대부분 6·25 전후(前後)에 태어나 곤궁한 시대에 가족을 돌보려고 평생 동분서주했고, 은퇴를 맞았다. 권 단장은 “노래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인생의 의미를 되찾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방송 녹화가 끝나고 합창단은 해체됐었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재창단을 결의했다. 청춘합창단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서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유엔 공연을 추진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총무인 이만덕(60)씨는 “함께 모여 노래 부르는 것에 그치지 말고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으게 됐다”고 했다. 주제는 ‘통일’이었다. 노래를 통해 통일의 염원을 전하자는 것. 이들보다 앞선 세대는 고령이어서 활동이 어렵고, 젊은 세대는 통일에 무관심한 편이다. 통일을 위해 노래 부를 가장 적합한 층이 바로 청춘합창단 세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무대에서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각국 외교관이 모인 유엔 본부야말로 세계를 향해 통일에 대한 한국인의 염원을 전할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죠.”
단원들 스스로 유엔 본부 얘기를 꺼냈지만 막상 추진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엔 본부 측은 올해가 UN 창설 70주년이어서 대관(貸館) 자체가 어렵고, 통일을 주제로 공연하겠다니 난처해했다고 한다. 북한도 UN 회원국이다. 권 단장은 “하지만 올해는 우리에겐 분단 70주년인 해”라고 했다. 오준 주 유엔대표부 대사가 발 벗고 나서 교섭을 도왔다. 유엔 측은 60대가 주축인 이들의 열정과 실력을 높이 샀다.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인 6월 15일에 맞춰 공연이 잡혔다.
단원들은 매주 두 차례 과천시민회관에 모여 연습했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와서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지난해엔 그룹 ‘부활’과 함께 KBS ‘불후의 명곡’에도 출연해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우승했다.
문제는 단원 48명에 팀닥터 2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의 공연 비용이었다. 경제계 인맥이 넓은 권 단장이 기업체 후원을 받았고, 소셜펀딩을 통해 개인 후원자도 모았다. 포털사이트에 취지를 올려 네티즌들로부터 1만원씩 후원금을 받았는데, 이렇게 모은 돈만 7000만원이 넘었다.
“공연에 앞서 우리의 뜻을 담은 연설을 할 계획입니다. 감성적 관점에서 통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에게 통일은 생존이 걸린 절실한 문제예요.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도 중요하고요. 젊은 세대에게 왜 어른들이 저 고생해가며 태평양을 건너갔는지 한번 생각해보게 하고 싶어요.”(권대욱)
▶2015년 ‘라스베이거스 대통령’
커크 커코리언 별세
세계적인 카지노 재벌이자 기업 투자자인 커크 커코리언(98) MGM그룹 창립자 겸 트라신다 CEO가 15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캘리포니아의 가난한 아르메니아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난 커코리언은 열여섯 살 때 학교를 중퇴해 아마추어 복싱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군용기를 조종했던 경험을 살려 1947년 소형 전세기 운항으로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 MGM그랜드 호텔·카지노를 만들고 라스베이거스를 상징하는 호화 리조트로 키워냈다. 이 여세를 몰아 ‘미라지’ ‘벨라지오’ 등 대형 호텔·카지노를 잇따라 인수하면서 라스베이거스를 대표하는 거물이 됐다. 라스베이거스가 단순한 도박의 도시가 아닌 가족 휴양지로 성장하는 데 공헌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커코리언은 기업 인수·매각 전문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970년대 웨스턴항공 주식 17%를 사들인 것을 시작으로 활발하게 투자했다. 1980년대 MGM영화사는 인수·매각을 세 차례 반복하며 차익을 챙겼고, 파산 직전의 크라이슬러 주식을 매집해 경영이 정상화되자 되팔아 이득을 본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타계 직전까지 기업 인수 전문 회사인 트라신다의 CEO를 맡아왔다.
▶2015년 병무청 첫 여성 국장 탄생
▶2009년 예멘서 납치된 봉사활동
엄영선씨 피살
엄영선씨의 예멘 거주 당시 사진
2009년 6월 12일 예멘 북부 사다에서 납치된 한국인 엄영선(여·34)씨를 포함한 외국인 9명 모두가 납치 3일 만인 15일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은 15일 오전 사다지역 동부의 엘 나수르 마을 인근 산악지대에서 목동들에 의해 발견됐으며, 처음 발견된 여성 3명의 시신은 독일인 간호사 2명와 엄씨의 시신으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AFP통신과 DPA통신은 "7명은 숨졌지만 어린이 2명은 살아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외교부는 15일 밤 "피살자 중 1명의 시신이 옷과 체격 등으로 볼 때 한국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시신들은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테러 집단인 알 카에다 예멘 지부의 은신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다 동부 산악 마을 엘 나수르 인근에서 발견됐으며, 발견 당시 얼굴 등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누가 이들을 살해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지 부족 지도자들은 알 카에다의 소행이라고 외신에 말했다. 희생자들은 한국인 엄씨와, 독일인 부부 및 자녀 3명, 독일인 여성 2명, 영국인 남성 1명이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국제 의료봉사 단체인 '월드와이드 서비스'를 도와 현지에서 봉사활동을 했으며, 지난 12일 오후 4시쯤 인근의 와디(wadi·물이 없는 계곡)로 나들이를 갔다가 연락이 끊겼다.
엄씨는 작년 8월부터 사다에 거주하면서 의료 봉사를 하는 한국인 의사들을 도와 이들 가족의 자녀 교육을 지원했으며, 오는 8월 귀국할 예정이었다. 사다에는 엄씨 외에도 한국인 의사 4명과 가족 등 모두 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2004년 남북, 군사분계선(DMZ)
지역의 모든 선전 도구 철거
15일 0시를 기해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MDL) 지역에서 모든 상호 비방과 선전·선동 활동이 전면 중단되며, 확성기·대형입간판 등 모든 선전수단이 8월 15일까지 서해안 섬과 한강 하구, 서부전선 지역부터 3단계로 나뉘어 제거된다. 남북은 지난 10~12일 개성시 자남산 여관에서 장성급 군사회담 실무대표회담을 열고 이같이 합의했다고 13일 밝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북측은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선전물도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며 “북측의 이행 여부를 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 양측은 비무장지대 일대에 설치된 선전 수단의 제거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기하는 데는 종교 시설물을 제외하곤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라! 북으로’ ‘반미구국’ 등 상대방을 향한 자기측 체제 선전이나 상대방이 비방·선동으로 인식하는 모든 확성기, 돌글씨, 입간판, 전광판, 전단, 선전그림, 선전구호 등을 없애기로 쉽게 합의됐다는 것.
주목할 만한 것은 김일성 국가주석 및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관련된 선전물도 제거해야 한다는 우리측 요구를 북측이 수용한 것. ‘21세기 태양 김정일장군 만세’ ‘주체조선 우리 장군 제일. 백두광명성’ ‘무적장군’ ‘천출명장’ 등 대형 입간판이나 돌에 새겨진 선전물도 없어지게 됐다.
군사분계선 남측 지역에 건립돼 있는 점등탑(크리스마스 트리), 불상, 석탑 등 종교 시설물은 양측이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가림막 설치 등의 방법으로 상대측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애기봉 점등탑(높이 30m) 등은 가림막을 설치하기엔 너무 커서 아예 제3의 장소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필요할 경우 3~5명의 검증단도 구성해 운영키로 했다.
▶1999년 남북한 해군함정,
서해상에서 교전
▶1996년 버스카드제 실시
▶1984년 한국-포르투갈 정상회담
▶1983년 한국형다목적 경비함진수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이전
개축공사. 구 중앙청서 기공
▶ 1977년 스페인 41년 만에 총선거, 민주중도연합이 승리
스페인 총선거가 1977년 6월 15일 41년 만에 실시돼 157개 정당, 6천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하원의원 350명과 상원의원 207명이 선출됐다. 스페인 내전을 거쳐 프랑코가 집권하기 전인 1936년 2월 총선거가 마지막이었다.
이 선거는 수아레스 정권하에 입법화된 정치개혁법에 따라 프랑코 체제의 유물인 1원제를 폐지하고 상하양원을 발족시키는 민주화로의 중요한 단계였다.
이번 선거는 사실상 수아레스 수상에 대한 신임투표였다. 선거결과 하원에서는 수아레스가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이 166석을, 사회노동자당이 118석을 차지했고, 공산당이 제3당으로 됐다.
▶1977년 주한미군 이네스트존
미사일 대대 해체
▶1962년 한국-파라과이, 국교수립
▶1960년 허정 제6대 국무총리 취임
▶1960년 제3차 개헌(내각책임제)
통과, 제2공화국 출범
1960년 6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제3차 개헌안이 출석의원 211명 중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국회에서 통과, 같은 날 공포됐다. 우리나라 최초 의원내각제의 화려하고도 힘겨운 시작이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한 기명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같은 해 3월 15일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연일 계속된 시위가가 4·19혁명으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 제1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제3차 개헌안에는 헌법상의 명목적인 양원제를 실질적으로 채택하는 내용과 국민의 기본권 강화,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출, 경찰의 중립, 헌법재판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명실상부한 민주헌법이자 자유헌법이었다.
국회는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윤보선을 선출하고, 장면 국무총리를 인준했다. 제5대 국회는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안,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안 등을 가결시켜 과거 부정척결의 노력을 보였으나, 여당인 민주당의 신·구파간 집권 분규와 대립, 원내교섭단체의 별도구성, 분당, 각종 데모의 속출로 정국 불안이 계속되다 이듬해 5월 16일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해산됐다.
▶1960년 일본 전학련 국회 난입
미일신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데모대가 국회의사당 난입을 시도해 경찰과 충돌, 여학생 1명이 사망했다. 참의원 제2통용문을 가득 메운 전학련 반주류파, 노조, 신극인 등의 데모대에 우익단체가 차로 돌진해 60여명을 부상케 했다. 한편 전학련 주류파 학생 8000명은 국회 남통용문에 집결해 구내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돌입을 저지하기 위한 경찰과 충돌이 발생해 데모대 선두에 있던 한 여학생이 사망했다. 첫 충돌이후 학생들은 돌입을 재시도, 약 4000명의 학생이 국회 국내로 들어갔다.결국 이날 저녁무렵부터 16일까지 일어난 충돌로 182명이 체포됐고 중상 43명을 포함해 589명이 부상했다.
▶1959년 미국 정찰기 동해서
소련기에 피격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
한국참전 16국 공동성명
▶1954년 아시아 민족반공연맹 창설
▶1952년 시아누크공,
캄보디아 정권 장악
▶1950년 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주한 미 수사기관의 고위직 고문을 유혹, 결혼해 살면서 고급정보를 빼내 자신의 애인인 남파 공산당 거물 이강국에게 계속 제공하다 검거된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이 1950년 6월 14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6월 15일 사형언도를 받고 곧 처형됐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수임은 11살 때 시집갔다가 2년이 못되어 서울로 도망쳤다. 김수임은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대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의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사교계로 진출한 후 경성제대 법과와 베를린대학 유학생 출신인 남로당원 이강국과 깊이 사랑하게 됐다.
이어 주한미군 수사기관의 고위직 고문과 결혼, 아들까지 낳았지만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미군에 관한 1급정보를 빼내 이강국에게 계속 제공하다가 국내 수사기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https://youtu.be/GWqJFM9KdzM
▶1949년 군인용담배 `화랑`제조
▶1948년 중국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 창간
▶1942년 아바나 승전연합대회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1942년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 출판
20세기 프랑스 소설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이라 면 단연 ‘이방인’이다. 프랑스 문학의 중심지인 파리도 아닌 식민지 알제리에서 문맹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청년 알베르 카뮈가 그 소설의 작가였다. ‘이방인’은 1942년 6월 15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해 1월 어느날 밤 카뮈는 각혈을 했다. 이미 왼쪽 폐가 결핵으로 손상됐고, 더 이상 그가 좋아하던 수영도 즐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그가 파리로 보낸 소설 ‘이방인’을 비롯해 철학적 에세이집 ‘시지프스의 신화’, 희곡 ‘칼리귤라’ 원고에 대한 답신을 기다려야 했다. 그중 ‘이방인’은 앙드레 말로의 추천을 받아 세상에 나왔다. 그 소설은 출간 즉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전시하에서 용지가 부족한 프랑스 신문들은 그 소설에 대한 서평을 실을 지면이 없었다.
카뮈에겐 ‘이방인’ 초판 한 권만 배달됐다. ‘이방인’은 부조리의 심연 앞에 선 인간을 그린 실존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다. ‘이방인’이 젊은 세대에 준 충격은 컸다.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삶 앞에 직면했지만, 그 삶과 쾌락을 사랑한다. 죽어야하는 운명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 카뮈의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합리성에 절망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정신적 도덕을 제시했고, 실존주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1950년대 전후 한국 지식인들은 카뮈를 읽으면서 황폐한 현실의 부조리를 견뎌낼 형이상학적 힘을 얻었다.
▶1940년 탤런트 최불암
(본명 최영한) 출생
▶1939년 경부선 대전-서울간 복선화
▶1934년 히틀러-무솔리니 첫 회담,
오스트리아 처리 논의
▶1922년 온들(Oundle) 학교를
재조직한 영국의 교육학자 샌더슨 사망
▶1920년 제네바서
제2회 국제노동회의
▶1919년 영국 존 알코크와 아더
브라운, 최초의 대서양무착륙비행성공
영국 조종사 존 알코크와 아더 브라운이 1919년 6월 15일 대서양 횡단 무착륙 비행에 성공했다. 그들은 개조된 비커스 비미 폭격기로 세인트 존스의 뉴펀들랜드를 출발한 뒤 평균시속 118m.p.h로 3,040킬로미터를 16시간 27분동안 비행해 안개가 낀 아일랜드 카운티 갈웨이의 클리프던에 착륙했다
뉴펀들랜드를 날아가고 있는 비커스 비미.
이 비행으로 많은 짐을 수송하는 비행기가 안개와 추위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오랫동안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 비행으로 두 조종사는 기사작위와 `데일리 메일`지로부터 상금 1만파운드를 수여받았다.
▶1917년 미국 방첩법 제정
▶1914년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출생
▶1911년 성균관 폐지하고 경학원 설치
▶1911년 IBM의 전신 CTR사 설립
▶1909년 부통감 화이황조 통감에 임명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
헤이그에서 개막(~10.18)
▶1902년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출생
▶ 1896년 일본 메이지산리쿠(明治三陸) 지진·쓰나미로 2만1915명 사망
▶ 1861년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 순직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1821∼1861) 신부가 경상도 지역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1861년 6월 15일 과로로 문경에서 순직했다. 시신은 제천의 배론성지에 묻혔다.
충청도 홍주 다락골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에 의해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으로 건너갔다. 마카오와 몽골에서 신학을 공부한 최양업이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1849년. 함께 떠났던 김대건보다 4년 뒤였다. 그러나 김대건(1821∼1846)이 짧고 치열하게 활동한 후 순교했기 때문에 최양업은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양업은 전국 5개도에 흩어져 있던 127여개의 교우촌(공소)을 순회하며 12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전교활동을 폈다. 극심한 핍박을 피해 신자들을 찾아다니던 최 신부는 결국 이날 식중독과 과로로 인한 장티푸스에 걸려 순직했다. 가톨릭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증거자’로 칭하는 대신, 쉼없는 전교활동을 편 최 신부를 ‘땀의 증거자’로 부른다.
그는 또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19통의 라틴어편지를 비롯해 순교자에 관한 자료수집, 성교요리문답 및 기도서 번역간행, 천주가사 저술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 1849년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 사망
▶ 1844년 찰스 굿이어, 고무가황법 발명
ㆍ자동차 등 교통수단 발전 원동력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히는 바퀴. 바퀴가 인류사를 이끌었다면 바퀴에 부착하는 타이어는 20세기의 발전을 가능케 한 발명품이다. 19세기 중반 자전거와 자동차가 탄생했지만 그때까지 바퀴는 무쇠나 나무가 전부였다. 영국의 수의사 던롭이 자전거 타기를 즐기던 아들을 위해 공기를 집어넣은 타이어를 1888년 발명하면서 타이어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세계 타이어업계 톱3를 휩쓰는 굿이어, 미쉐린 등이 바로 이 무렵 세워졌다.
타이어의 재료는 고무다.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고무의 탄성을 증가시키는 고무가황법을 발명하기 전까지 천연고무는 그저 지우개로만 쓰였을 뿐이다. 굿이어는 우연히 천연고무덩어리와 황을 혼합한 물질을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뜨렸다가 다음날 이 고무덩어리가 굉장한 탄성을 갖고 내구성도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황을 뜻하는 영어단어 vulcanization도 바로 로마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벌컨(Vulcan)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천연고무는 탄력성 고분자로 이뤄져 있어 적당히 힘을 가해 잡아 늘리면 늘어나고 힘을 멈추면 다시 본래 상태로 돌아간다. 여기에 황과 열이 더해지면 분자결합이 변하면서 탄성이 더욱 강해지는 것. 굿이어는 1844년 6월15일 고무가황법으로 특허를 받았다. 평생을 고무연구에 바쳤던 그는 질산으로 고무의 표면을 처리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그러나 굿이어는 살아생전 고무가황법 특허로 큰 부를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발명 덕에 자전거를 비롯해 자동차, 항공기 등 교통수단의 혁혁한 발전이 이뤄졌다. 반세기 후 미국의 사업가 프랭크 세이버링이 그의 이름을 기려 굿이어타이어앤드러버 컴퍼니를 설립하면서, 굿이어는 타이어의 대명사가 됐다.
굿이어의 고무가황법은 중공업뿐 아니라 일상생활용품에도 적용됐다. 굿이어와 함께 고무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던 친구 히람 허친슨은 특허권을 사들여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러고는 1853년 프랑스 몽타르지에 연성고무회사를 세웠다. 인구의 90%가 전원생활을 하던 프랑스에서 고무장화를 팔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19세기 초 영국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웰링턴 부츠’ 스타일의 고무장화는 대박이 났고 이 회사는 훗날 에이글로 사명을 바꾸고 방수신발과 방수의류를 비롯해 아웃도어 용품 회사로 성장했다.
고무장화는 농부에서 군인까지 다양한 계층이 착용해왔지만, 수년 전부터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아이들이나 신는 신발이라는 고무장화에 대한 편견은 사라지고, 국내에서도 2~3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비오는 날이면 거리에서 화려한 색감의 고무장화를 신은 여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1843년 노르웨이 민족음악파를 창시한 작곡가 그리그 출생
▶ 1819년 해왕성을 발견한 영국의 천문학자 애덤스 출생
▶ 1389년 세르비아-오스만 제국간의 코소보 전투
1389년 6월 15일 세르비아의 코소보폴례(지빠귀들의 들판)에서 세르비아 왕자 라자르의 군대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1360-1389 재위)의 투르크 군대 사이에 이른바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다. 무라드는 비잔티움과 슬라브 제국의 내부 불안을 틈타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점령지를 넓히려는 목적하에 세르비아를 침범했다. 코소보까지 진격했으나 그곳에서 라자르 군대와 맞붙었다.
전쟁 초기에 세르비아 귀족 밀로슈 오빌리크가 투르크군 진영에 잠입, 무라드를 살해함으로 전세는 세르비아 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밀로슈는 탈영병으로 위장, 투르크 진영에 잠입한 후 술탄의 막사로 들어가 독묻은 단검으로 무라드 술탄을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 무라드의 아들 바예지드는 무라드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르비아군을 포위,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라자르를 체포, 처형했다. 패전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술탄 군대에서 군역을 질 것을 약속했다. 세르비아는 비록 패배했지만 코소보폴례의 장렬한 전투는 지금까지도 세르비아인들에게 영웅적인 민족 신화로 살아있다.
▶ 1381년 영국 농민반란군 지도자 와트 타일러 사망
▶ 1215년 영국 존 왕, 귀족들의 압력을 받고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승인
1215년 6월 15일, 무능한 영국의 존 왕이 템스강 남쪽 기슭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그와 갈등을 빚던 귀족들의 압력을 못이기고 이른바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을 승인했다.
봉건영주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받은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이 당시의 대헌장에는 조항을 표시하는 번호가 없었으나, 18세기 이래 63개조로 정리됐다. 오히려 이 당시의 대헌장은 철저하게 귀족에 위한 귀족을 위한 귀족의 문서였을 뿐이다. 이전과 특별히 다른 내용도 없었고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노와도 관련이 없었다. 단지 전해져 오던 봉건적인 모든 권리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귀족들이 져야 할 봉건적 부담의 제한과 교회의 자유, 도시 특권의 확인 등이 이 문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자유민들에게도 재판 청구권 등 극히 제한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흔히 이 당시의 대헌장을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보지만, 엄밀하게는 17세기 왕과 의회가 대립할 때 왕의 전제에 대항해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로 이용되면서이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없이 군역 대납금이나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헌장 제12조는 의회의 승인없이는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자유민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구금할 수 없다고 규정한 제39조는 보통법 재판소에서의 재판을 요구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https://youtu.be/fBZEwX_RRdc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