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1)
한힘 심현섭
인류가 야생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들어오는 데는 몇 가지 표징이 보이는 데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장례문화이다. 보통의 동물의 세계에서는 함께 하던 다른 동료가 죽으면 별다른 감정 없이 그대로 지나친다. 영장류에서 약간은 동료의 죽음을 의식하는 듯 머뭇거리며 마치 슬픔을 나타내는 듯 보이지만 그것뿐이다. 인간 역시 오랜 야생의 시대를 거치면서 동료의 죽음을 보고 강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죽은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고 부패되거나 다른 짐승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 가족이나 동료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고 죽은 자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아주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증가해 왔을 것이다. 증가해온 정도를 낱낱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시기부터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표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흙이나 나뭇가지 등으로 시신을 덮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작은 돌로 쌓아올렸다. 땅을 파서 흙 속에 묻기도 하였는데 당시의 도구 상황으로 봐서는 깊이 판다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모두는 우리가 오늘날 확인할 수 없이 다 사라져버렸다.
고고학적으로 인류의 장례문화의 흔적은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시작한다. 네안데르탈인은 약 10만 년 전에 생존했던 초기 인류인데 죽은 자들을 매장할 때,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함께 묻어준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 뒤 시신을 묻고 그 위에 바위 돌로 덮어놓는 양식이 나타나는 데 시기적인 차이는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000년,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발견되고 있다. 돌을 고여서 그 위에 편평한 돌을 얹어놓았다고 해서 일명 고인돌(지석묘; 支石墓, dolmen)이라고 한다. 한국은 제주도와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되며, 중국은 요동반도 일대와 길림성, 절강성에 분포한다. 일본에서는 규슈 북서부에 고인돌이 세워졌다. 인도네시아, 인도, 러시아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된다.
한국의 고인돌은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 미송리식 토기(美松里型土器)와 함께 고조선의 영역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이용된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에 해당되며,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호남지방의 2만여 기를 비롯하여 약 4만 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는 세계 모든 고인돌 수의 절반가량에 해당된다.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및 인천 강화의 고인돌들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평양,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고인돌이 세워진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11세기 이후로부터 철기 시대 이전의 기원전 3세기까지의 시기에 집중되며, 요동 지방은 그보다 앞선다.(자료 인용)
고인돌은 고대시대에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몇 가지 유물 중에도 확연하게 들어난 독특한 유물이다. 어찌 보면 자연석과 거의 비슷한 바위 하나가 옛 시절의 이야기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탐방을 마치고 곧바로 익산에서 고창으로 향했다. 고창에는 약 30년 전에도 고인돌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마을 야산 산자락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서 자연석인지 고인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시골집 뒤, 장독대 바로 옆에 커다란 탁자식 고인돌을 본 기억이 있다. 이번에 고인돌 유적지구를 다시 방문해보니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고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관리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인공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입구에는 박물관을 만들어서 고인돌 아래에서 발굴된 유물전시는 물론이고 고인돌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 이 사진은 공원화하기 이전의 사진이다. 장독대는 바로 옆에 있는데 사진에서 빠져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장독대 옆에 있던 커다란 탁자식 고인돌을 찾았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농로를 따라 가니 야트막한 언덕 위에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는 낯익은 고인돌을 만났다. 장독대도 농가도 다 사라지고 주변을 공원화해서 큰 고인돌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전망대까지 마련해 놓았다. 입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이런 관심과 정성이 유네스코로 하여금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게 만든 것이었다. 세계유산 지정 조건에는 현지에서 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려는 지속가능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고인돌은 마을 안에 있는 큰 바위 돌 정도로 예사롭게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다 학자들에 의해 그것이 자연석이 아닌 고대인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또 그러려니 했다. 고인돌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이다. 2000년 유네스코에서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자 폭발적인 관심과 관광열기를 불러왔다. 어려서부터 별 생각 없이 바위 위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두드려도 보면서 단지 바위로만 여겼던 돌들이 문화유산이라니, 그것도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창 고인돌유적의 큰 특징은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접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며 고인돌 분포가 조밀하고 거석화 된 고인돌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고인돌이 놓이는 장소로는 평지, 구릉, 산기슭 등에 입지하는데 주로 덮개돌을 구하기 쉬운 바위나 암벽이 있는 산 주위나 강가에 많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인력이 요구된다. 우선 그 만한 노동력이 있어야 하고 그 만한 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정착한 농경사회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험결과, 1톤의 돌을 1마일(1.6km) 운반하는 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 데는 약 2백 명 가량의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체적인 축조연대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 청동기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에 고창이나 화순에 이와 같이 많은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생성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농경인들이 집중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만큼 농경시대로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룬 지역이었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바위에서 채석을 해야 하고, 그것을 적정 위치까지 운반해야 하고, 또한 상당한 높이로 끌어올려 놓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당시로서는 발전된 기술과 풍부한 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청동기 시대에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월등하게 발전한 선진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후세에 백제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융성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오래전부터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발전된 지역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만든다.
고인돌 탐방을 마치고 고창읍성 아래 한옥마을 숙소로 찾아왔다. 고창군에서 계획적으로 한옥 십여 채를 만들어서 관광용 숙소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고풍스런 맛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외관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내부는 현대식 설비를 갖춘 호텔급 숙소라 할만하다. 자고로 고창 땅에 와서는 풍천에서 나는 장어를 구어 먹으면서 복분자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이 주당들의 불문율이 된 지 오래 되었다. 선운사 들어가는 길에 줄을 선 풍천장어집들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숙소 근방 고창읍내에 있는 풍천장어집을 찾았다. 지난해 잠실여고에서 33년 동안 역사를 교육하다 정년퇴직하고 이번 탐방길에 동행하게 된 동생과 함께 복분자 술을 나누며 역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고창의 봄밤(春夜)은 두 사람의 취기와 함께 그렇게 깊어 갔다.
첫댓글 선생님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을
읽을 때 많은 역사공부가 되었고
스스로 여행하는듯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아름답고 편안한 글 감사드립니다.
오월의 하늘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에날 부부에날
우리들의 가정의날 라일락 꽃도 피고 캬네션 꽃도 활짝피는
사랑이 가득한 우리 울타리안
모두모두 만남이 사랑으로
건강과 행복으로 애정으로 복 주머니를 채우세요..
울님 감사합니다
오월을
아주
해
피
하
게
고인돌을 봐도 그냥 '고인돌이구나'하고 지나곤 마는데
깊이 있는 글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멋진 휴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