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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張勉, 1899년~1966년) 부통령
장면(張勉, 1899년 8월 28일 ~ 1966년 6월 4일)은 대한민국의 종교인, 교육자이자, 외교관, 정치가이며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인물이다. 장면 내각은 대한민국 제2공화국 참고
초대 주미한국대사, 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4대 부통령, 7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서울출생이며 정치적 고향은 인천이다. 한국근현대사 부분에서 제2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로 축출된 인물 정도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사실 제2공화국 활동은 그의 활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종교는 가톨릭이며, 아호는 운석(雲石)이고, 자는 지태(志兑), 세례명은 요한(John)이다.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가 장면의 3남이다.
1999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에 추서되었다.
민주당계 인사 중에 보수진영에서도 인정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세련된 신사였으나 정치적인 결단력이 부족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선인 천주교인들을 총괄해 일제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를 지냈으며, 김구 선생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 목록에까지 오른 적이 있어 친일파라는 의혹도 존재한다.
조선 말기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남인계 몰락 양반 출신으로 8대조 때에 경상북도를 떠나 평안남도에 정착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대한제국 말기에 세무관리로 진출하면서 다시 한성으로 올라왔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의 외할아버지 황성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 루시아 내외는 인천에 집이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인천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장면은 태중교인으로 어려서부터 순종하는 태도가 배인 생활을 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2대 국무총리가 되고도 어머니에게 무릎 꿇고 빌 정도로 순종이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과 결혼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를 거쳐 인천공립심상소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후, 1914년 조선총독부 농림학교에 진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농림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 장기빈이 이웃 천주교 신자와 사돈을 맺기로 하고 혼사를 추진, 17세에 2년 연하의 김옥윤과 결혼했다. 이후 장면은 한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아내에게만 집중했다고 한다.
미국 유학과 귀국
그러나 모자 쓰고 칼 차고 호령하는 일본인 관료가 되는 꿈도 없었고, 더구나 그의 조용한 성격상 소질도 맞지 않았기에 그는 YMCA에서 운영하는 영어학원에 진학했다.잠깐, YMCA는 개신교 단체인데...!
YMCA 청년회 영어학원을 2년간 공부하고 YMCA 학원 재학 중, 용산예수성심신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학생으로 이중생활을 했다. 용산예수성심신학교의 제자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유명한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였다.
그 뒤 미국으로 유학하여 메리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맨해턴 칼리지에 진학했다.
졸업과 선교 활동
1925년 미국 맨해턴 칼리지를 졸업했고 당시 한국인 대표 자격으로 교황청을 방문한 뒤 귀국하여 메리놀 선교회를 도와 천주교 평양교구 개척을 도왔다.
이후 장면은 평양교구 개척을 위해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하고,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 평양성당에서 평신도 대표로 선교활동과 성당 사무를 보는 데 투신했다. 그 밖에 메리놀 선교회의 한국어 강사를 겸임하며 메리놀 선교회 및 외국인 천주교 신부들의 통역을 맡으며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훗날에는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가톨릭 입문서의 한국어 편역을 하기도 했다.
교육 활동
그 뒤 성실성을 인정받아 천주교 재단의 추천으로 일제강점기에 동성상업고등학교 서무주임, 동성상고 교장, 혜화동성당 부설 유치원 원장, 계성국민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동성상고 교장으로 있을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인 시학관을 쫓아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교육청에서 지도를 나왔을 때, 당시 동성상고 학생이었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 때 장면은 김수환을 교장실로 호출했고 뺨을 후려쳤다. 맞는 말을 했는데 왜 때렸냐면 만약 저 상황에서 장면이 저런 제스쳐를 안 했다면 김수환은 나중에 곤욕을 치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일본 유학 장학생을 선발할 때는 김수환을 1등으로 추천해서 보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사람을 아끼는 안목이 있었다는 평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해방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를 개최했고, 민주의원 의원, 과도입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이때 미군정과 한국인 대표의 통역 역할을 한 것도 그의 입신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 1950년 6월 25일, 주미대사 장면과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이 긴급 유엔 안보리 회의장 로비에서 만남을 가졌다.
주미 한국 전권공사를 역임한 바 있었으며, 바로 현지에서 제1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 주미 대사로 있을 때 한국전쟁 터지자 미국 국무부와 UN을 오가며 남한에 파병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한국이 한국전쟁 때 미군과 UN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에는 그의 숨은 공로도 있었던 셈.
2대 총리 시절
그 공로로 이승만은 그를 총리로 내정했고 귀국 후 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야당 국회의원들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눈에 찍히고 말았다.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곽상훈의 중재로 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됐다.
부통령 시절
1956년 이승만 측근인 이기붕을 누르고 대한민국 4대 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부통령을 지냈다. 당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기붕은 병약한 데다 권력에 욕심이 많았고,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문제가 많았다."라고 말한다. "장면은 성격이 온순한 편이며,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 표를 주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장면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용공이나 친일 성향이 있다면서 장면 지지 친일용공설을 주장했다.
『한편으로 대통령에 나를 선출하고 부통령엔 반대당인 민주당 장면을 선출한 사실만 보아도 그렇고 친일용공의 표수가 그렇게 많이 나왔다는 사실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민심의 소재를 측정하기다 곤란하다.』
- 이승만, 경향신문. 1956. 5. 27
국민들보고 아에 친일파이자 용공이라고 주장했던 것.
그 후 이기붕을 이긴 것이 자유당 세력의 눈밖에 나서 그야말로 암살당할 뻔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때 괴한의 총격을 맞아 왼손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던 것(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천주교 계열 신문이었던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저격범들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내부 소행인 것처럼 조작하려다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장면은 대인배같이 선처를 호소하여 감형을 주선했다. 이에 감화된 피고인 중에는 뒤에 천주교 신자가 되거나 목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국무총리에 재선되다
1960년에 다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3.15 부정선거로 낙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뜻에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대한민국 최초로 의원 내각제를 시행하여 국무총리가 되었다. 민주당 신파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려 했던 대통령 윤보선과 사이가 껄끄러웠다.
총리 시절 장면은 이름처럼(勉 근면할 면) 매우 근면한 성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했고 밤늦게야 일을 끝마쳤다고 한다. 덕분에 아랫사람들은 죽어나갔다고 한다... 나중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도 장면 내각에 의해 세워졌다.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전문가 여럿이 모여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초기 단계의 몇몇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5.16 군사 정변 전후
5.16 군사정변을 진압하고 있다는 육군참모 총장의 보고를 받고선 정부주요 인사들과 함께 총리 관저에서 2시간 가량 머물며 장도영의 사후 대처 보고를 기다렸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은 바로 앞에 있다고 연락 해놓고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고 총리관저 인근에서 총격이 벌어지자 우선 피신하시라는 함께 있던 국방부 장관 등의 부탁에 총리관저에 직통 연락망을 구축한 뒤 마지못해 차를 타고 새벽 4시 30분 총리관저를 떠났다. 이후 미국 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에 아내와 자녀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5월 17일 새벽 6시경에 홀로 가르멜 수녀원에 피신해 외부상황을 실시간으로 주시하며 외부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6일에는 마셜그린이 성명을 냈다는 사실을 입수하고선 감사전화를 보냈으며 자신은 안전하니 유엔군 사령관이 take charge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17일에는 아침에 프랑스 대사로 추정되는 이가 장면의 편지를 직접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건내주었고, 17일 오후에는 장면과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가 전화를 주고받았다. 18일 오전에는 장면이 직접 총리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취했으며 결국 정오무렵에는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그러나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미 육군참모총장을 설득해 5.16. 진압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둔 상태였고, 이에 미국은 장면과 연락을 주고받았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핑계로 사태를 방관하게 된다.
초기 소위 소장파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던 쿠데타 세력은 수천명에 불과했으나 서울 중심으로 포섭하여 새벽에 총리집무실, 청와대, 서울시장실, 방송국, 육군본부 등 주요기관에 잠입하고 관련 주요인물을 체포 또는 연금한 뒤 1군 등 자신들의 토벌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일부 부대를 중간 장교들이 높으신 분들을 습격해서 체포하는 형식으로 장악한 정도였기 때문에 선전했다 한들 정부를 무너뜨리지 않아 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때문에 대통령인 윤보선을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장면을 놓친 것은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굉장히 큰 위험이었다. 이때 주한미군 사령관인 C.B 매그루더는 자신의 허락 없이 함부로 군을 움직인 것은 물론이요, 하극상의 극치인 쿠데타까지 일으킨 박정희와 그 일당들에 대해 격노했으며 요청만 들어오면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반란군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그루더의 설득에도 윤보선은 쿠데타 진압을 거절하였고 미국 정부가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자 군을 움직이지 못하였고, 5월 17일 미 국무부는 장면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지도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며 공식적인 개입 거절을 발표하였다. 이를 전달받은 장면은 5월 18일 오후 가르멜 수녀원을 나왔다.
후일로 장면은 자신이 38시간동안 수녀원에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1966년 부활절 아침 명동성모병원에서 같이 입원해있는 대학생 정대철에게 "박정희 뒤에 최경록장군이 있고 자네[정대철을 보고한 말]부친 정일형박사가 있었던 걸 알았네. 그래서 무척당황했고 나가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도 들고"라고 설명했다.
장면의 수행원 중 하나가 필사적으로 장면을 찾다가 쿠데타 당일 밤에 장면을 차에 태우고 도망쳤던 운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수행원의 애타는 질문에도 끝까지 장면이 있는 곳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바람에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역으로 보면 당연하다. 수행원들이 박정희 편에 매수되었거나, 협박당해서 장면을 찾으러 다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의 운전수 및 기타 노동 등을 하는 사람은 보안을 중요시한다.
그 사이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이끌고 쿠데타 지지 시위를 하며 점차 반란군의 입지는 탄탄해져 갔고, 결국 이틀 뒤인 5월 18일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 수도원에서 나와 내각 총사퇴 서류에 서명하고 하야를 선언하며 5.16 군사정변은 성공하고 말았다. 군의 정치 불개입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란세력에 동조하길 거부했고 진압을 준비하다가 윤보선에 의해 부하들에게 지도부의 진압 중지 명령이 내려져 실행치 못하고 체포당한 1군 사령관 이한림처럼 쿠데타를 막으려던 움직임은 실패하였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이주당 사건이라는 반쿠데타 사건의 배후 인물이라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3번이나 징역 선고를 받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병이 악화되어 명동성모병원에 입원, 박정희 정권은 장면이 타계 1달 전에 정치 정화법 대상에서 해제시켰다. 그 뒤 1966년 6월 4일, (장면은)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사후
사후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용상골의 가톨릭 혜화교회 부설 가톨릭 공원묘지에 묻혔다. 의정부시 축석고개에서 포천시 소흘읍내, 흔히 송우리라고 부르는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가구단지들이 있고, 길 옆에 표지판이 있다.
정치적으로 김대중, 이철승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의 대부가 바로 장면이기도 하다.
가족으로 동생인 서양화가 장발이름처럼 긴 머리가 아니다(서울대학교 미대 초대 학장)과 아들인 서강대학교 장진 교수, 천주교 춘천교구장을 지낸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가 있다.
1998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최규하와 함께 그가 건국훈장 중에서도 제일 1등급인 대한민국장의 자격이 있는지 논란이 많다. 최규하의 대한민국장도 대통령 재임 당시에 수여한 것이다.(...) 정권 넘겨준 공로? 때문에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의도가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당시 주미 한국대사로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낸 외교활동 공로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009년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 가톨릭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됐다. 한국 천주교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분적 협력을 했다는 사유로 친일파라고 분류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부분적으로 있고, 장면을 은사로 존경하던 김대중(토마스 모어)전 대통령과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도 생전에 이건 너무 심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반민특위의 기본이 된 김승학의 친일 관련 문서에서는 그를 안 좋게 묘사했다.반민특위 살생부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라고......참고로 장면을 '친일파'라 평가하며 그 점을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한 게 이승만과 자유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