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alton H. Walker 장군
아들 Samuel Sims Walker 장군
월튼 워커 장군은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 벨턴에서 태어나 1912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제5보병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3기갑사단장(소장)으로 유럽 전선에 참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독일 롬멜의 제3군과 맞서 공훈을 세우고 중장으로 승진 하였다. 종전 후 1948년 일본 점령군인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6월30일 일본에 주둔 중인 미 제8군의 “제24 보병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에 따라 7월 13일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한반도로 파견되었다.
부임 후 미숙했던 장병들만으로 극도로 불리했던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은 죽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방어하라”고 부하들에게 강하게 명령했다. 이 명령에 대하여 미국에서도 반대여론이 일자 맥아더가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라는 말로 워커 중장을 옹호했다. 그는 증원군도 없는 상태에서 낙동강 전선 - 이른바 ‘워커라인’ 을 성공적으로 사수하여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만들고 전세 역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아들 샘 워커(Samuel Sims Walker )는 1925년 출생하여 1946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미국11 공수여단에 배속되어 일본에 주둔하다가 대위로 아버지 월튼 워커 사령관과 함께 주한 미국 제24 보병사단의 중대장으로 낙동강 방어전투에 참전하여 북한군과 직접 교전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을 수상하게 된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 장군은 아들의 훈장 수상을 축하해주기 위해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 의정부 남쪽 양주군 노해면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월튼 워커 중장이 서거 직후 그의 아들 샘 워터 대위는 도쿄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다.
다음은 아들 샘 워커의 증언이다. - 맥아더 사령관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더군요. ”워커 대위, 아버님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워커 장군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귀관에게 고 워커 장군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저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 보병 중대장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는 각하는 잘 아십니다.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서 악전 고투하고 있습니다. 저를 전선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때 문을 향해 걸어 나가시던 맥아더 장군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건 명령이야.” 저는 맥아더 장군을 이해합니다. 한 전선에서 사랑하는 부하와 그 아들을 한꺼번에 죽게 하기가 싫었을 겁니다. -
시신은 아들에 의해 수습되어 미국 본토로 운구되어 이듬해 1951년 1월 2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대장 계급이 추서되었다. 샘 워커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 후에 부대로 복귀하여 1년 간의 파병기간을 모두 채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직업군인으로 군에 계속 남아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 이렇게 크고 작은 전쟁에 참여한 샘 워커는 1977년에 당시 미국 육군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52세)에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로써 워커 부자는 미국 육군 역사상 유일하게 모두 대장 계급에 오른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 육군의 최연소 대장 진급자이며 전도가 유명하던 샘 워커 대장이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이었다.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불화로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주한 미군 참모장이던 실글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예편된 것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총장이나 NATO군 사령관으로 유력했던 아들 샘 워커 대장이 카터에게 반대하다가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뿐이 아니다. 1950년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지프차를 운전하던 한국군 운전병과 지프차와 부딪친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우리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고 가벼운 징역형을 받게 한 사실도 우리가 잊지 말아 야 한다. 그러나 2002년 같은 도로에서 훈련 중 한국 두 소녀를 과실로 죽게 한 미군 탱크 병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증오 저주하며 촛불을 켜 들고 미군 전체를 싸 잡아서 한국을 떠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