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어음리 3745~3757번지 일대.
1653년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에 의하면 이곳은 ‘부면과원’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주 서쪽 40리에 있다. 유자 109조, 산귤 33주, 감자 6주, 새로 심은 과수 20주, 옻 67주, 닥나무 219주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과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양송남씨는 1960년경 산귤 3본이 고목으로 마을에 남아 있었고, 그 귤을 따 먹기도 하고, 과원 북쪽 돌담 옆에는 옻나무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제주 감귤의 진상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삼국시대인 476년 ‘탐라국이 백제에 방물(方物)을 바쳤다.’는 기록에서 ‘방물’ 중 감귤이 포함되었다면 제주는 삼국시대부터 감귤 재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감귤 진상은 1052년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 문종 6년에 ‘탐라국에서 해마다 공물로 바치는 귤[橘子(귤자)]의 양을 100포자로 정했다.’는 기록에서 비로소 제주의 특산물로 귤이 재배되고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로 접어들면 1412년(태종 12) 제주의 감귤 수백 그루를 전라도 순천 등지의 해안 고을로 옮겨 심게 한 기록이 전한다. 이 보다 앞서 1396년(태조 5) 태조 때에는 ‘제주에서 보냈다.’는 기록은 없지만 감자(柑子)를 모두 종묘에 올려 제례 지내도록 하는 기록이 전하며, 1413년(태종 13) 태종 때에는 ‘귤과 유자를 아울러 종묘에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1421년(세종 3) 세종 때에는 제주에서 진상하는 ‘감자, 유자, 동정귤, 유감, 청귤’ 등의 진상을 면제하라는 조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에는 제주도안무사에게 ‘제주 과원의 감귤류가 품질이 떨어지고 개인이 재배하는 감귤에 진상 명령이 내려지면서’ 잘못된 감귤 진상 관련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기도 하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목에 다양한 감귤 종류가 소개되어 있고, 이를 재배하기 위한 과원도 19곳이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어음1리에 해당하는 부면 과원 역시 이때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보다 170여년 뒤인 1653년(효종 4)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제주목에 22곳으 과원이 있고, 이 중 하나로 ‘부면 과원’이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부면 과원은 조선시대 모든 역사지에 등장한다. 과원 터에서는 오래된 기와편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된다.
참고
감귤에 대한 역사 기록
김부식,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 4월
정인지 등, ‘고려사’ 권7, 문종6년(1052) 3월
‘태조실록’ 태조 5년(1396) 3월 29일
‘태종실록’ 태종 12년(1412) 11월 21일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10월 12일
‘세종실록’ 세종 3년(1421) 1월 13일
‘세조실록’ 세조 1년(1455) 12월 25일
‘성종실록’ 성종 3년(1472) 1월 30일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토산, 성종 12년(1481)
김정, ‘제주풍토록’, 중종 16년(1521)
이원진, ‘탐라지’, 제주목 과원, 효종 4년(1653)
이형상, ‘남환박물’ 숙종 30년(1704)
이원조, ‘탐라지초본’, 제주목 과원
《작성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