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날라리 신자
/하태수
20대 초 반에 천주교 교리를 1년 가까이 직장 동료의 권유로 받았다.
헌데 이교육은그 당시 천주교를 믿기 보다는 그 당시 청년들의 봉사
활동 레지오 단원 영역이 남녀 짝 을 지어 조 편성을 하여 활동 하도
록 했다.
그당시 나의 짝은 미인이 었다.손도 잡아보고 싶고 살짝 만저보고
싶고 보둠어 앉고 싶어 아무턴 겁없이 끌떡 거릴때쯤 예쁜 아가씨
소녀의 기도 와 미 사포 쓰고 눈을 살포시 감고 있는 모습에 홀딱
빠져버렸던 시절이 있었다.
1차로 보통 6개월 성경공부 후에 암기위주로 시험을 쳐서 합격한
자에대하여 대부. 대모.를 세웠고 세례명을 받는날로 되어 있는데
나는 예쁜아가씨 첫인상(First impression)미소는 밤마다 꿈에
나타나 환장 할정도로 그아가씨 빙그래 미소 짓는모습이 좋아
그저 성당(천주교)에가면 싱글벙글 거리며 아가씨 치마자락의
펄럭 이는 소리가 하늘나라 천사님이 오신것 처럼 제정신이 없었다.
예수님 마리아님.하나님 하고는 해당무 행동 범주에 있는것처럼
죄의식 조차 느끼지못하면서 그저 마냥 성당에 미사포 쓴 천사가
좋아 졸졸 따라 다닐수 있는 생활 기간이 3년 이란 긴세월속에
짝사랑을 했다
머슴아 가 말한마디 못하고 끙끙 거리며 몇년간 유급된 예비신자
로써 세례을 받게된것이다 헌데 세월이 흘러 50년후에 특별한
체험들이 느껴져 오늘 글쓰기을 해본다.
이성당이란 곳은 한번 영세이후 세레명 을 받으면 호적이 달라붙어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부산에서 안강.경북.제주도.강원도 충북 전남 전북 충남 경남 서울
등등 저가 일부러 교적을 뛰어다닌 것도 않이다.예문을 들자면 서울
에서 경북 이라면 그지역 천주교에 사무장께 저 아무개XXX입니다
하면 자동적으로 교적이 옮겨 다닌다.그런 어느날 경북 대구지역
수녀님 께옵서 하태수님 오늘 1독서 어디에서 어디까지 하세요.
하면 저가 앞에 나가서 그 마이크앞에서 성경구절을 읽어 나가야만
했다.
헌데 한번도 해본 경험없이 이지방 저지방 공직생활속에서 성당에
솔직히 나가지 못했다.우선 경험이 없었다. 아가씨 궁둥이만 졸졸
따라 다니다가 시험칠때 수녀님께옵서 3년넘게 시험쳐도 떨어지니
예쁜 수녀님께옵서 하태수씨 정말 공부 못합니다,
라고 핀잔을 엄청 받았다.그래서 3년이라는 세월속의 이 멍청이 한데
사실 시험문제를 저한테는 미리유출 시켜 발표하라고 해도 나는 늘
빵점(똘아이 취급 당했음)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미사포 선 한여인을 죽도록 짝사랑만 한 멍청한 놈이 였다.
일반적인 우리네 삶속에서 중이 잿밥에 눈이 어두운데 무선 시험 공부
가 되겠습니까?말이 딱 맞는 말이다.그래서 나는 누가 가르쳐 준 신부.
수녀님도 없이 세월이 35년 후에 2번째 순환 근무쳐 경북 지방에서
그때 본 미사포 쓴 신자를 만나게 된다.
많은 세월 앞에 변해버린 미사포쓴 "할머님"은 성호긋는 모습을 보는
순간 처녀때 그 모습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 였다,
참으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거룩하고 신비스럽고 또 품위있게 느껴
지면서 특히.성호긋기는 카토릭에서 가장 기본적인 교리(성부 와 성자
와 성령(신)를 드러내주는 상징적 기도로 조용하고도 확실한 신앙선포
행위와 저을 알아 보는듯한 미소로 또 그녀 자신이 자기 남편과 자식들.
손자손녀들, 며느리들과 사위. 다른 가족들에게 나 한데 소개을 해
주었다,
오늘은 건화성최(健和誠最).<건강한 가족).(화목한 가정).(성실한생활)
(최선의 노력).를 보이시고 나한테 살며시 양해을 구하면서 소개을 하기
에 나는 더욱더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나는 평소에 자기 자신의 삶에 관한 성찰
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무엇이 참 진리인지 구해 본적도 없는
"엉털이 신자"였다.
왜냐구요! 우리 인간 앞에는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가 늘 병존
해 있는걸로 압니다만. xxx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명의 문화"를 택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자신의 독단과 욕심 때문에 "죽음 의 문화"를 택
하여 스스로 불행 을 자초하죠.
생명의 문화는 사랑, 나눔,검소 함과 절제 등이고 "죽음의 문화"는 미움,
전쟁, 과도한 욕심과 무절제 등이다.
전국적으로 싸돌아 다니며 먹고살기 위해서 직업의식 속에서 여기 저기
서 못된짓을 너무 많이 한자가 신부님께 그것도 한두 번도 안이고
고백성사 밥먹듯이 또 다른 성당에 가서 살알짝 고회성사 을 보고나서
면죄부를 받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젊은 "원조날라리"는 이제 늙어서 돋보기 끼고 "독서대"에 올라
갈수 없었다.이핑계 저핑계로 냉담자(冷淡者)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앗~!나의 이마엔 살아있는 십자가 가 약50年前 사제(司祭)로
부터 그려저 있었다.지우개로 세척제로도 손으로도 지울수도 없다,
이걸 우째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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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6월호/등재.(재20호)/수록(收錄)
첫댓글 그동안 별고 없으신지요
오늘 늙은 영감쟁이가 가리 늦게
또다시 "만학도" 생활 한답시고
여러분들께 자주 찾아뵙지 못하다가
오늘 이렇게 때늦은 인사를 합니다.
가끔 학문과정에 몰입 하다가도
언론에 발표된 것 있으면
시와 수필로 대신 인사차 안부
올리겠습니다
예술의 집 선생님들 가내 화평하십시오.
주인장님께 옵서도 가내 두루 평안하십시요
다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