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입력2025.03.31 10:07 수정2025.04.04 08:48
[arte]황영미의 프롬나드 인 시네마
영화 '피카소: 명작 스캔들 (La banda Picasso)'
가난했던 청년 피카소의 순수한 열정과 친구들과의 골든 에이지
'모나리자 도난 사건' 관련 용의자로 지목된 '파블로 피카소'
실화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내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에 대해서는 누구나 조금은 안다고 생각한다. 큐비즘을 확립한 화가, 화려한 여성 편력 등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영화를 통해 본 피카소는 예상했던 면과 다른 모습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의 열정적 삶도 보다 더 핍진하게 알 수 있다.
그는 1881년에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나, 청년 시절부터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파리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활동했다. 피카소는 “굳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어”라고 말하면서 장 콕토(Jean Cocteau)나 막스 자코브(Max Jacob),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같은 문학가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고,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소설이나 인용문 등에서 중요한 부분을 잘 이해했다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지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활용했다고 한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피카소 삶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는 제임스 아이보리가 감독하고 앤소니 홉킨스가 노년의 파블로 피카소를 연기한 <피카소>(1996)다. 이 영화는 피카소의 다양했던 여성 편력과 ‘게르니카’ 등의 후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피카소가 남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와 도기의 제작에 열중하던 시기까지를 다룬다.
또다른 영화는 페르난도 콜로모가 각본과 감독을 한 2012년작 <피카소: 명작스캔들>이다. 이 영화는 피카소의 그림 특성으로 볼 때 어둡고 우울한 초기 청색시대를 지나 파리에서의 분홍시대가 열리는 시기를 다룬다. 영화는 이 시기 피카소가 교류했던 사람들과 피카소의 그림들을 깨알 같이 등장시켜 알고 보면 더 재미가 있다.
예술계의 유명인물들과 피카소의 관계
<피카소: 명작스캔들>은 오프닝과 엔딩이 수미상관되고, 가운데에 그 이전의 파블로 피카소의 젊은 시절을 다룬다. 오프닝은 1911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난 ‘모나리자 도난 사건’ 관련 용의자 중 한명으로 파블로 피카소(이냐시오 마테오스)가 지목돼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 사건이 등장한다. 이 사건은 근거무근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피카소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한다. 실화 기반이지만 과장된 연출과 상상력을 더해 코미디 요소를 강화해 심각한 사건을 유머러스하게 다뤘다.
영화 '피카소: 명작 스캔들 (La banda Picasso)' (2012)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는 다시 몇 년 전 파리의 한 전시실로 되돌아가서 전개된다. 피카소는 그 시절 친구인 마놀로 위그(조르디 빌체스), 기욤 아폴리네르(피에르 베네지트), 막스 자코브(리오넬 아벨란스키)등과 함께 전시장에서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토니 걸티어)가 그린 ‘푸른 모자의 여인’을 바라본다. 그 그림이 거투르드 스타인(크리스티나 토마)에게 500프랑(한화 30만원 정도)에 팔렸다고 하는 앙리 피에르(토마스 존네트)의 말을 듣고, 친구들은 이상한 그림을 산 것에 대해 “미친 거 아냐?”며 놀라워한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에게 말한다. 거투르드 스타인이 피카소의 ‘곡예사’는 더 비싸게 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친구들은 피카소에게 거투르드 스타인 초상화를 무료로 그려주면서 다른 작품도 팔자는 궁리를 한다.
‘푸른 모자를 쓴 여인’은 앙리 마티스가 자신의 아내를 그린 것이다. 젊은 시절 마티스는 자신의 아내 아멜리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얼굴을 푸른색과 여러 색으로 얼룩덜룩하게 칠했다. 평론가들은 이를 야수같다고 놀라워하며 조롱했고, 여기서 야수파란 말이 탄생한 것이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Femme au chapeau)> (1905), SFMOMA 소장. / 그림출처. ©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당대 미술 시장을 주도했던 거투르드 스타인이 마티스의 이 문제작을 구입하면서 미술계는 마티스에게 시선이 모아졌고, 마티스는 하루 아침에 무명화가에서 성공한 예술가가 됐다. 마티스 미술관은 니스에 있다. 거투르드 스타인은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 나잇 인 파리>(2012)에서도 뛰어난 예술가들을 알아보고 키우는 큰 손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피카소가 몽마르뜨 근처의 작업실을 친구들과 함께 사용하면서 1907년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리던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친구인 조각가 마놀로 위그가 아뜰리에 입구에 도착하자 문 앞에는 ‘시인을 만나다’(rendez des poètes)라고 쓰여 있다. 원래 피카소의 작업실 이름은 ‘바토 라브와르’(Bateau-Lavoir, 세탁선)라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시인 친구들과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던 시절로 보인다. 문 안쪽에는 피카소가 당시에 그렸던 ‘곡예사’가 걸려 있다.
그들이 뚱녀라고 놀리면서도 기다리던 거투르드 스타인이 때마침 초상화를 그려달라면서 미국인 연인 앨리스 토클라스(에스터 톰파)와 함께 작업실을 찾아오게 된다. 그 장면에서도 피카소의 ‘곡예사’ 시리즈 작품이 장면화된다. 피카소는 ‘곡예사와 어릿광대’, ‘곡예사와 원숭이 가족’ 등 곡예사 연작을 그렸고 영화 속에 연작 중 100호 크기의 한 점과 조그만 액자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등장한다.
그리고 ‘아비뇽의 여인들’도 등장한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에게 거투르드 스타인의 초상화를 천천히 그리라고 하면서 다른 작품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작품을 살 때까지 초상화를 완성하지 말라고까지 조언한다.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은 어떻게든 스타인을 이용해서 작품을 팔려고 하는 가난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인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뉴욕 현대 미술관 소장. / 그림출처. © The Museum of Modern Art
파블로 피카소 <곡예사 가족(Family of Saltimbanques)> (1905) / 그림출처. © National Gallery of Art
드디어 완성된 거투르드 스타인의 초상화가 전시되던 날, 앙리 마티스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피카소가 그린 스타인의 초상화를 보면서 피카소에게 약간 거들먹거리는 인물로 등장한다. 마티스는 골동품상에서 찾은 아프리카 유물 조각상을 가져와 피카소에게 잠깐 보게 하고는 도로 달라고 해서 돈이 많은 거투르드 스타인의 남동생에게 선물한다.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피카소는 당황한다. 당시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했는데, 원시적인 아프리카 조각에 당시 파리 화단의 예술가들은 심취했다고 한다. 피카소 역시 아프리카나 페니키아 조각에 심취했고, 단순하고 강렬한 표현에 힘입어 큐비즘을 탄생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렸던 ‘아비뇽의 여인들’은 프랑스 아비뇽이 아니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창가를 말한다고 하는데, 그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얼굴을 구상하는 데도 아프리카 조각상의 단순하고 투박한 외형 표현을 참고했다고 한다.
야수파(또는 포비즘)로서 대담하고 거친 붓놀림으로 선명한 색조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던 조지 브라크(스탠리 웨버)도 1907년 피카소와 친구가 되면서부터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데 주력한다. 그는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로서 프랑스 화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조지 브라크와 같이 전시회에 왔던 매력적인 마리 로랑생(루이즈 몽놋)을 피카소는 아폴리네르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들은 곧바로 연인 사이가 된다. 마리 역시 입체파의 일원으로서 파리 전위 예술의 중요한 인물이 된다.
피카소는 키도 작고 촌스러운 편이었지만, 아름다운 첫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라파엘르 아고구에)를 만나 그녀를 모델로 많이 그렸다. 그녀와는 7년간 사귀면서 60여 점의 초상화를 그렸으나 헤어지게 된다. 이후 피카소는 결혼을 했던 정식부인 올가 외에 수많은 여인들과 열정을 불태웠다. 영화에는 피카소와 관련된 유명인들이 등장해 20세기 초 프랑스가 골든 에이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피카소: 명작 스캔들 (La banda Picasso)' (2012)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피카소: 명작 스캔들 (La banda Picasso)' (2012)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모나리자’ 도난 사건과 얽힌 이야기
아폴리네르의 친구였다가 피카소 친구가 된 바론(알렉시스 미할릭)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페니키아 조각상을 훔친 후 피카소에게 판다.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피카소는 그 조각상을 산 뒤 많은 영감을 받는다. 이후 1911년 8월 22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사라진다. 피카소와 친구들은 바론이 훔친 것 아니냐고 의심하지만, 아폴리네르는 단호히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파리 경시청은 루브르 박물관을 폐관하고, 프랑스 국경을 봉쇄했다. 프랑스 정부와 신문사들은 현상금을 걸었다. 수많은 제보가 쏟아졌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모나리자 추적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유력한 용의자 두 명이 체포됐다. 피카소와 아폴리네르였다.
같은해 8월 29일. 신문사 ‘파리-주르날’에 자신을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이라고 밝힌 한 절도범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친 조각상을 보내왔다. ‘이냐스 도르므상’은 아폴리네르가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아폴리네르는 ‘도르므상 남작이라고 서명한 도둑과 접촉해 장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됐고, 경찰은 그에게 훔친 조각상을 구입한 화가의 이름을 밝히라고 추궁했다. 자신과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경찰에 시달릴 것을 염려한 아폴리네르는 결국 친구인 피카소의 이름을 댔다.
두 사람은 대질심문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피카소는 아폴리네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자 피카소는 풀려났고, 경찰은 아폴리네르를 감금하게 된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는 일주일간 상떼 감옥에 수감됐다고 한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이 일은 아폴리네르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고 한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피카소는 비겁하게 경찰에게 아폴리네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이후 피카소와 아폴리네르와의 사이도 멀어졌다. 마리 로랑생과도 더욱 멀어졌다고 한다.
영화 '피카소: 명작 스캔들 (La banda Picasso)' (2012)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피카소: 명작 스캔들 (La banda Picasso)' (2012)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영화적 평가
이 영화는 무성영화에서 주로 쓰이던 장면전환 기법인 화면이 동그랗게 작아졌다가 사라지고 다시 커지면서 장면이 전환되는 마스킹 기법을 사용해 코믹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또한 의상, 세트 디자인, 촬영 기법 등에서 20세기 초 파리의 분위기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또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삶의 감성을 캐릭터를 통해 잘 표현했다.
이 영화는 스페인 최고의 카메라맨 중 한 명으로 오랜 경력을 지닌 호세 루이스 알카인이 촬영했다. 시대극의 분위기를 잘 구현해서 찍었다. 스페인 출신 감독 페르난도 콜로모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부족하지만 다양한 장르에서 영화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제작했다.
영화 <피카소: 명작 스캔들>은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한 삶과 초년기의 어려움에 범죄 사건을 접목시켜 만든 코믹한 예술 영화다. 청년 피카소가 관계를 맺었던 많은 예술인들을 잘 그려내 역사시대극으로서 손색이 없다. 이 영화를 통해 청년기 피카소의 고민과 상황을 알 수 있다.
1996년작 <피카소>가 노년이 된 피카소의 여성편력을 앤소니 홉킨스의 명연기로 풀어냈다면, 이 영화는 당대 화단의 화려한 예술적 분위기와 예술인으로서의 피카소를 다채롭게 표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황영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