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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사탄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
사탄은 요즘 들어서 "행위구원론"과 "신율법주의"를 통해서 복음의 탈을 쓴 늑대의 형상으로 한국 교회를 잠식하고 있다.
일반적인 이단 스타일은 예수님의 복음을 부인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단에도 빠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웬만큼 신앙이 잘 정립된 자들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진짜 복음의 탈을 완벽히 쓴 가짜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다.
그런 자들은 더러운 귀신이 들린 자들이라서 목사로서의 가치가 없으며 이단적 교리로 미혹하는 세력들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리스도인이 행위를 똑바로 잘 하자는 취지는 절대 나빠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깊이 잘 연구해보면 그것이 교묘하게 미련한 자들을 미혹시키는 사탄의 극악한 흉계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제대로 믿는 자라면 불신자들이나 이단교인들보다는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그럴듯한 말로 회유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행위구원론을 정당화 시키려는 흉악한 마귀를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예수님을 어떤 방향으로 믿어야 하는지 그 토대를 세우지 못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정작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창조하여 화를 자초하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부터 세상은 어느 시점에나 예외없이 부패와 죄악에 물들어왔다.
요즘 들어서 말세이기 때문에 세상이 더 타락한 것이 절대 아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와 계셨을 시대에도 인간들은 도덕적으로 지극히 더러웠고 음행하기를 밥먹듯 하였다.
어느 시대이든지 인간은 죄의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흔히 자기 관점에서 죄를 짓지 않으면 당당하고 용기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으며, 스스로 지옥불의 길로 달음박질하여 뛰어가는 태도일 뿐이다.
복음의 요점은 오직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만 받아들여야 한다.
-로마서 10장 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디도서 3장 4~5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즉 위에 말씀을 보면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에베소서 2장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선물을 진짜 선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없는 자는 예수를 영접한 자가 아닐 것이며, 사탄이 계속 사고방식을 좌우하는 자에 불과하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을 정말로 믿지 못하는 성도들은 무엇일까?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흔히 삼위일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은 모두 동일하시고 그 지위가 같은 것이지만
저마다의 역할은 약간씩 다르다.
인간은 누구나 각 가정에서와 학교에서와 직장에서 각각 다른 호칭과 역할로서 존재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지 각 상황이 다르다고 하여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도 그런 맥락에서 결국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이 하나님과 같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요한복음 10장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역할을 생각해 봤을 때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오신 게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죄인에게라야 쓸데 있는 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을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건강해져서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생기고
그로인해 스스로 건강해질 수 있어서 예수님이 더이상 필요 없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의 생각은 지옥불로 내팽개쳐질 위험한 생각이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다 필요하다. 아직 영접하지 아니한 자에게도 필요하고 영접한 자에게도 계속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끊임없이 계속 죄를 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심판자 또는 벌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면서 경외함을 넘어선 두려움을 갖기 십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도 자비를 베푸셨다.
아담과 하와에게 벌주려고 찾아오신 것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들을 멸망받도록 방치하진 않으신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 걸쳐 나와있는 율법, 율례 등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어길 시에 어떻게 하겠다는 추가적 코멘트로 인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마치 인간에게 지옥으로 협박하는 분으로서 느낀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그러한 착각은 인간을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함은 물론이고, 지옥불로 확실히 가게 만드는 실수인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덫이나 규율로 여겨 크나큰 짐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주님의 은혜를 느낄 줄 모르는 '영적 장애인'이자 '율법의 종'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권면과 가르침을 '협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복음이 없는 것이며
행위의 잘하고 못함을 떠나 이미 그 믿음 자체가 형식적이라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행위(실천)가 부족한 믿음을 형식적이고 무늬만 크리스찬인 것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큰 착각이며, 사실은 지옥을 지나치게 두려워 한다든지 죄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행위로의 '의'로써 자기 차원에서 만족감과 용기를 형성하려는 태도야말로 헛된 신앙인의 표본인 것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을 진짜 영접한 적도 없는 불쌍한 자들이며, 교회라는 곳을 단지 율법을 배우는 공간으로만 여기며
스스로 십일조와 교회봉사 등 표면적 실천만 확실히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착각에 빠져 있다.
또한 멍청하고 우둔한 목사들은 단지 표면적으로 행위 실천만 잘하는 성도라면 무조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으로
설교하거나 그것이 구원의 길인 것인 양 믿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진정 거듭난 자라면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영안이 열려 있어야 마땅하다.
-요한복음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위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절대 인간이 지옥가길 바라지 않으시며 되도록이면 구원하시려 하신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회개할 기회도 주시고, 깨닫게 하는 지혜 또한 부여하신다.
우리는 흔히 칼빈이 "구원받은 자는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말 자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칼빈을 이단시하고
자유의지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칼빈 주장의 깊은 속뜻이나 취지를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이 더 무식하고 위험한 자들일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예수를 믿게 된 계기라든지 신앙생활로 발을 들여놓게 된 일련의 사건들, 과정들을 돌이켜본다면
내 의지로 잘해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셔서 그렇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각 사람의 앞날은 물론이고 세상의 앞날, 결말까지 다 아신다.
따라서 누가 구원받을 것이지 누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인지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만약 그걸 모르신다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 아닐 것이고, 우리가 굳이 믿어야 할 존재도 아닐 것이다.
사울왕의 결말을 하나님은 다 아셨을 것이고,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예수님은 미리 예언하였다.
베드로가 자신을 세차례 씩이나 부인할 것도 오래전부터 이미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주시긴 하셨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거듭난 자라면 인간의 '자유의지'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안다.
칼빈의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의 근성이 없어질 수는 없으므로 예수를 믿은 후에도 죄 자체를 전혀 안 지을 수는 없다.
예수님은 자기를 영접한 자가 그 이후 남은 여생에서 또 어떤 죄를 범할지 다 알고 계신다.
따라서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심은 엄밀히 말해서 앞으로 지을 죄까지 미리 사해주신 것이다.
귀신도 앞날을 예측하는 법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한 인간의 미래를 예측 못하실까?
구원받을 자와 지옥에 갈 자가 결정됐다는 말 자체가 조금 거부감 느껴지긴 하지만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볼 때
사람의 앞날을 미리 아시는 것과 그 사람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이 결국은 같은 뜻이다.
다만 우리가 그런 논리를 빌미삼아 '전도'를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인간은 누가 구원받을지 판단할 수 없으므로 그저 주님이 시키신대로 복음을 전파하면 그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시듯이 복음전파도 인간을 통해 하시므로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선택받을 자는 이미 결정돼 있지만 그런 자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가 직접 알 수는 없으므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한다.
물론 아래의 말씀을 본다면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위 말씀에 의하면 선택받은 자만 구원받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내 스스로 주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언뜻 보기에는 개인적 의지로 이룬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나의 결정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을 받되, 또 결국에는 나 자신의 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었음이 저절로 입에서 찬양으로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로마서 11장 6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10장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주님의 가르침과 명령하심대로 지키도록 노력하는 삶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행위가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를 손상시키거나 변질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주님이 제시하신 모든 율례라든지 행동강령 등은 예수를 믿어 거듭난 자들에게 해당되는 '덕목'이자 '도리'인 것이다.
즉 주님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조차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가 주님의 율법을 받아들여 주여 주여 외치면서 율법을 행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행동은
구원받는 데에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더러 지옥불로 떨어지는 명백한 실수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아무리 십일조를 많이 내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고, 불우이웃을 수없이 돕고, 전도를 아무리 잘 하더라도
반드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헛된 크리스찬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산상수훈의 내용도 하나하나 말씀하시는 가운데 지옥으로 일일이 협박하지 아니하셨고
주를 믿어 구원받은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함을 권면한 것으로 봐야 한다.
지옥이 두려워서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은 지금껏 예수를 헛 믿은 것이며, 그 마음에 복음이 상실된 자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싫어하고 멀리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죄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죄 자체가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위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예수님의 죄 사하심을 한낱 거짓말로 받아들이는
멸망받을 멍청한 신앙인일 뿐이다.
선행이든 죄악이든 행위는 행위일 뿐이다.
그 행위 자체가 인간을 천국으로 보내는 권세가 있거나 지옥으로 보내는 위력이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신앙생활좀 했다고 하는 크리스찬들이 그런 기본적 원리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울 뿐이다.
인간은 참으로 멍청하게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또다시 새롭게 율법 아래로 들어가버리려 한다.
예수님의 죄 사하는 권세를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도 안 믿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마땅히 살인과 간음죄도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임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예언이나 방언을 하는 등 신비주의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착각은 사탄이 자신들에게 준 능력임을 모르고 자신들이 진짜 기독교라고 부르짓고 있을 뿐이다.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대부분의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거나 이단대책위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았으면 마땅히 회개하여야 함에도
그러기는 커녕 끝끝내 자신들만이 진짜 오리지널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놈들의 결말은 뻔한 것이다.
그런 교회가 아무리 3년만에 2000명, 5년만에 6000명으로 부흥되더라도 그것은 사탄의 역사일 뿐이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위 말씀은 절대로 죄인을 두둔하거나 죄를 정당화 시키기 위한 취지가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사실일 뿐이다.
실제로 봤을 때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인간은 그 누구도 없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명제에 대해서 그것의 반대되는 경우의 논리를 들면서 따지거나 반박하려는 심리가 있는데
어떤 명제이건 그 자체가 진리라는 전제로 존재한다면 그것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 그만이냐며 반발하기도 하는데
그 말씀 자체에 행위는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 없는 이상 그 말씀은 그 자체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내려오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목적이 인간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편히
죄짓게 하려는 목적은 아닌 것이다.
마음놓고 죄를 짓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친놈일 것이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로마서 6장 1~2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정말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는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예수님을 위해서도 무엇인가 노력해야 한다.
은혜를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심보는 신앙적 양심이 결여된 태도이다.
다만, 우리가 지옥불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억지로 강제적으로 하는 신앙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가정부'와 '엄마'를 비유로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정부와 엄마는 하는 일이 똑같다. 빨래,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을 한다.
집안일을 신앙적 '행위'에 비유한다면 가정부는 그것을 율법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는 경우에 속하는 것이며,
엄마는 그것을 율법이 아닌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도리로 받아들이며 하는 경우에 속한다.
가정부는 자신의 일이 급여를 받는 댓가라고 생각하여 율법적으로 집안일을 완벽히 처리하려 노력한다.
반면 엄마가 하는 집안일은 댓가성과 관계가 없으며 오직 가족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비록 가정부가 표면적으로 집안일 자체는 엄마보다 더 깔끔하고 꼼꼼하게 처리한다고 할지언정 과연 가정부가
그집 식구들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역시 가정부보다는 엄마의 경우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차라리 행위에 다소 흠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정말 영접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면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율법주의를 통해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기 위해서 발버둥하고 투쟁하면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우리가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떤 정신나간 또라이 목사는
"마음으로 간음한 죄도 회개치 않으면 지옥불로 떨어진다."라든지 "습관적으로 가볍게 짓는 죄로도 지옥간다."라며
크리스찬들의 '구원의 확신'자체를 빼앗아 가려고 하고 있다.
그런 태도로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라 멍청이에 또라이에 사기꾼에 불과한 '사탄의 하수인'이다.
돌로 쳐도 아까울 것 없는 마귀자식이자 능지처참으로 다스려도 상관없는 개새끼인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술 한모금 입에 대는 것도 지옥불로 떨어지는 행위가 되는 것인가?
그렇게 따지면.... 부부라면 누구든지 몇번쯤 할 수 있는 부부싸움을 해도 지옥을 가는 것인가?
원수를 진짜 사랑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
사흘을 굶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남의 집 담장좀 넘었기로니 그걸로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인가?
내 속옷까지 벗어서 남에게 주지 못한 크리스천들은 지옥불로 떨어질 것인가?
호기심으로 야동을 몇번 가볍게 본 적 있는 사람들도 그 행위로 말미암아 지옥불로 떨어지는 것인가?
죄에 타협해서는 절대 안되지만 위와 같이 극단적으로 행위적인 면 각각을 구체적으로 지옥과 극단적으로 연관시켜
'행위구원론'이나 '신율법주의'를 창조하는 것은 지극히 불건전하고 이단성 있는 행태이다.
우리가 율법을 존중해야 함은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함이다.
-로마서 7장-
7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이 세상이 워낙 죄악이 판치는 세상이다보니 정말로 죄에 무감각해져서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서 죄의 죄됨을 알기 위해서 율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죄 자체는 마귀적 속성을 가진 것이므로 예수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죄를 거부하고 멀리해야 한다.
가랑비도 한참을 맞으면 옷이 흠뻑 젖는 것처럼 죄라는 것도 자꾸 짓다보면 무감각해지고 확대될 수 있다.
죄 자체가 거듭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건 아니지만 죄로 인해 영혼을 팔아버리는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예수님의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기 위해서 죄는 멀리해야 하는 것이 옳다.
자식이 잘못하면 그 부모가 욕먹는 법이고, 제자가 잘못하면 그 스승이 욕먹는 법이다.
하물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도 모자랄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처럼 죄를 일삼는다면 하나님께 은혜가 될까?
꼭 지옥을 동기부여로 하지 않더라도 왜 정말로 죄와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행위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모름지기 관계를 맺었다 함은 그 관계맺은 사람을 노엽게 하기보다는 기쁘고 행복하게 해줘야 함을 의미한다.
가령, 결혼해서 부부관계인 사람들끼리는 서로 대화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각자에게 어떻게 해줘야 행복해하는지 알아내서 그것을 실천한다면 평화로운 가정이 유지된다.
자식들도 자기 부모한테 어떻게 효도해야 할지를 연구하여 그것을 실천한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부모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말 것이며,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율례와 도를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며,
그 관계를 정말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 예수님과 관계를 맺은 자의 입장에서 그분들의 명령을 무시하고 죄의 길로 간다는 게 옳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완벽한 의인으로 완성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로마서 7장 18, 24, 25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렇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죄의 속성을 근본적으로 이어받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아무리 겉으로는 선을 행한다고 할지언정 속마음으로까지 진짜 의인이거나 성인군자가 될 수는 없다.
솔직히 표면적으로도 100% 완벽하게 모든 선을 행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로마서 7장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로마서 7장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사도바울은 그저 겸손한 척이나 하려고 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위 말씀들은 진짜 사실이며 사도바울같은 위대한 사도라 할지라도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위 말씀을 우리는 은혜롭게 받아들이면서도 또 결국에는 다시 율법의 노예로 빠지는 우를 범하곤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5:20)
위 성경구절에만 극단적으로 얽매이고 집착하면서 편향적인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탄이 시키는 짓이다.
실제로 사탄은 성경 말씀을 재료로 하여 신앙인들을 미혹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그러나 위에서 주장하는 '의'도 결국은 예수를 믿지 않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의 자체가 없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 자들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율법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다.
물론 야고보서의 말씀들은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 몇가지를 보면
2장 22절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장 24절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즉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의 상호간에 조화를 강조한 것이지 행위를 믿음보다 위에 올려놓지 않은 것이다.
야고보서가 원래 지식으로 율법만 잘 아는 유대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서신임을 감안했을 때 유대인들에게
행함이 결여된 지식적 믿음을 경계하도록 하는 취지에서 야고보서는 쓰여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더라도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취지이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 보면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라고 되어 있는데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즉 아브라함의 행위는 후세 사람들인 우리들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사람앞에서 의롭다고 증명할 수 있는
의미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은 그 행위가 대단함으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각 신앙인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이 있다.
그 믿음의 분량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아브라함처럼 외아들 이삭을 바칠 정도의 대단한 행위만을 강요한다면
그리고 그것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이 기대에 못미쳤을 때 멸망시키고 지옥불로 던져버리려고 그러신 건 아니었다.
-갈라디아서 3장 10~11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만약 복음이라는 것이 율법에 대한 100% 순종을 전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소식이라면?
그것은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닌 '나쁜 소식'일 것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되어야 당연한 것인데 도리어 율법이라는 덫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닌 것이다.
마태복음 6장 28~29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 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그 말을 극단적으로 액면 그대로 편향된 시각으로 받아들이면 이단으로 빠질 수 있다.
위 말씀을 액면 그대로 지켜지도록 하려면 남자들은 모두 예외없이 거세를 해야만 할 것이다.
아니면 여자를 아예 볼 수 없는 깊은 산속이라든지 절에 들어가서 평생을 도를 닦으며 지내야만 할 것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것도 모자라서 살인죄까지 이중으로 저질렀지만
그는 눈을 빼버리거나 거세를 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께 용서받았고 천국에 들어간 주의 신실한 종이었다.
예수님이 결코 우리에게 실천 불가능한 율례를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모두 다 지키기에는 솔직히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런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그만큼 깨달으라는 것이다.
자기 '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죄에 빠져서는 안되지만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듯이 죄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결과적으로 선을 이룰 때가 있다.
설령 우리가 죄에 빠져 있는 세월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 허송세월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태복음 5장 18~19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즉 위의 말씀에 근거하면 율법을 완벽히 다 지키지 못한 경우라도 구원받아 천국은 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을 모두 존중하고 지켜 행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천국에서 더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요한1서 5장 17절-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위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일일이 사소한 죄에까지 두려워 공포에 떨면서 신앙생활을 할 필요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어도 아담의 후손으로 죄의 근성 자체는 물려받은 것이다.
순간 방심하면 얼마든지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인데 그로인해 지옥불로 떨어진다면 천국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도 있는데, 우리가 짓는 죄를 일일이 메모장에다가 기록을 해놓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허구한 날 자책하면서 부르짓으며 못난척 하는게 하나님 앞에 보기 좋을까?
이미 용서를 받고도 지옥불 신세가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탄이 심어주는 마음이다.
-갈라디아서 5장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정말로 영접해서 예수님의 고마움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선량한 백성들을 사탄은 노리고 있다.
사탄이 자꾸 걱정과 근심을 심어주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갈라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자기를 믿고 영접했을 때 그 이후 죄를 짓지 않을거라 믿어서 보혈의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다.
주의 백성들이 은혜 안에 거하면서도 끊임없이 또 죄를 지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를 구체적으로 지옥과 연관시켜서 공포심을 유발하는 행위는 사탄이 꾸며내는 흉계이다.
그럴듯한 행위구원론은 어디까지나 사탄이 사탕발림으로 믿음 약한 자들을 미혹하는 도구일 뿐이다.
행위구원론이나 신율법주의에 빠진 성도들은 흔히 타인을 정죄하거나 배척하기를 즐긴다.
가령,
나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십일조 꼬박 내는데 저놈은 십일조를 안내니까 난 천국가고 저놈은 지옥가야 한다,
나는 아무리 정욕이 있어도 절제하며 참는데 저놈은 음행을 일삼으니까 저놈은 반드시 지옥가야 해,
나는 아무리 게을르고 용기없어도 열심히 전도하기를 힘쓰는데 저놈은 전도도 안하니까 지옥불로 떨어져야 해.
즉 상대적인 관점에서 남들보다 행위가 나으면 본인은 남들과는 뭔가 달라야 하고, 좀더 혜택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식의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런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자는 행위로의 '의'에 빠져 버린 한심한 작태를 저지르는 것에 불과하다.
본인이 정말로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례들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면
굳이 남들을 원망하거나 정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본인도 원래 죄 짓고 좀더 편히 살고 싶었지만 지옥이 두렵다보니 그렇게는 못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살다보니
상대적으로 타인의 삶이 거슬리고 시샘하게 되면서 결국 그들을 원망하고 싶은 심리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는 신앙인의 태도일까?
상당수 크리스찬들의 큰 착각 중 하나는 자신들이 술,담배를 하지 않고 간음죄 등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든지
십일조 등의 헌금이나 주일성수, 교회봉사 등을 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중이라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결국 아직까지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현재진행형"임을 뜻하는데 그것은 정녕 큰 이단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전까지가 구원에 이르는 여정이고, 영접한 이후는 또 영접 이후의 여정이 준비돼 있다.
이제 구원받은 자의 자격으로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위치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더라도 그 이후 행적에 따라 계속해서 구원 여부가 결정되지 않고 가변적으로 되는 것이 진리라면
구약시대랑 다를 것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2장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이유를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진짜 거듭날 수 있는 첫걸음임을 꼭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그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마귀의 자식일 뿐이고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우상숭배자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는지 그 진짜 이유를 모르고 그저 무턱대고 율법에만 얽매여 종노릇 하려는 행동은
정말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행위를 통해 스스로 자랑할 것을 만들어 놓으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흔히 불교의 스님들이 그토록 고행과 수양을 반복하면서 행위적으로 죄짓지 않으려 노력하려고 하는 심리라든지
불신자들 중에서도 스스로 죄없다 여기면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의로워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찬들도 예수님의 은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행위에 의지한다면 그들과 다를 게 없다.
-누가복음 7장 36~50절-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
.
.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미 구원받았다고 선언하셨다.
그 여자가 당장 죽을 것도 아니고 아직 더 살아갈 세월이 남았음에도 미리 구원받은 자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 여자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지 그 이후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물론 그 여인이 예수님께 했던 행동도 일종의 행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여인이 앞으로의 남은 삶에서 전혀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그 행동만으로 율법의 의를 100% 이루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누가복음 19장 9절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라고 하셨다.
삭개오의 참회와 더불어 행위로의 변화도 물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그 진실된 마음을 보시고는
이제부터 구원받은 자라고 친히 선언하셨다.
그 이후부터 하는 행적들을 보고 천국보낼지 지옥보낼지 결정할거라고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영접한 이후에도 따로 행위(행적)을 통해서
그 행위라는 관문을 통해 구원의 길로 계속해서 가야된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변질된 복음이다.
마귀가 가장 원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이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허우적대거나 방황하길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예수님의 죄 사하시는 권세와 긍휼하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되, 행위를 통해서 열매를 풍성히 맺고 하나님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끈 크리스찬들은
천국에서 크다함을 인정받고 상급을 받게 될 것으로 알면 된다.
엄밀히 말해서 단지 부끄러운 구원만 받는 게 능사가 아니라 영원히 거할 천국이니만큼 우리는 상급을 받는 것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방향이고 그로인해 행위 실천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율례와 행동강령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의 자녀로서의 도리, 덕목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지옥에 갈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유보다도 더 당연히 은혜안에 있으므로 더욱 율례를 은혜로 여기며
기쁜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인간에게 지옥으로 협박하고 야단치는 분도 아닐 뿐더러 스트레스를 주려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에 감동해 기뻐하며 살길 원하신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계속 율법의 행위에 얽매여 전혀 기쁘지도 않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죄와 싸우면서
천국에 갈지 못갈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걱정만 하다가 죽는 인생..... 과연 바람직한가?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오셨는데도 정작 한국교회는 의인만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리고 교회는 율법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까지 맹목적으로 율법의 사수를 강요하는 데 그치고 있다.
단지 불신자들과 달리 술을 안 먹고 담배를 안 피우니까, 십일조도 내고 선행도 하고 음행은 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구원받는 거라며 스스로 만족감에 취하고 안심하는 사고방식은 지옥불로 향하게 하는 병폐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이 진짜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복음 자체에 실제로는 관심이 없다.
기독교를 단지 행위를 훌륭하게 만든다든지 의인을 배출해내는 '보약'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정말 큰 문제이다.
복음에 대해서 그런식으로 착각하고 넘어가는 것은 주님을 제대로 영접하지 않은 큰 실수임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 4장 12절-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위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가 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을 판단할 자격은 없다.
설사 판단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판단은 정확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강도도 구원받았으며,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이 버림받지 않았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님이 진짜 구원시키길 원하는 자의 표상은 무엇일까?
본인의 행위의 '의'에 스스로 감동하며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 여기는 의로운 사람일까?
그보다는 다소 죄가 있더라도 겸손으로 주께 용서를 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사람일까?
아마도 전자가 아닌 후자일 것이다.
-요한1서 1장 8~10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치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위 말씀에서 보듯이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생각은 매우 불손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율법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그만큼 타인을 정죄하면서 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죄 없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법인데
바로 그러한 마음이야말로 마귀가 부추기는 극악한 행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든지 또한 명령받은 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지옥불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일까?
에베소서 6장 1절~3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매순간 부모를 철저히 공경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래도 효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부모를 공경한다면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절대 시험치 말라는 말씀을 우리가 들었으나 위에 십일조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으로
시험해보라고까지 기록되어 있다.
물론, 복받을 생각으로 댓가를 바라면서 십일조나 헌금을 내는 의도는 잘못된 일이다.
종의 것은 곧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는 것은 칭찬받을 일도 아니고, 구원받는 댓가도 될 수 없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깨달아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이야말로 복된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저마다의 인간을 각자 특색있게 창조하셨고, 각자의 있는 그대로도 사랑하시길 즐겨하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식적으로 율법을 통해 스스로를 변조시키려 하고 있다.
율법으로 스스로를 디자인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율법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삶에서의 행복도 상실해버린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 성도들의 현주소이다.
구원받은 은혜로 행복하게 살 줄 모르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정말 선물로 받지 못하고 받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 속한 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식의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흉악한 이단 선지자들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얻어 멸망의 소굴로 갈 것이다.
자기 혼자서만 멸망하지 않고 다수의 성도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죄는 그 죄값이 더욱 클 것이다.
진짜 구원받은 자도 버림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행위구원론>과 <신율법주의>임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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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분명한것은 이곳에도 미혹의영이 있습니다..짧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그게 다인양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말하지요...일단 말이 많으면 의심해야됩니다..그만큼 포장을 하기위해서 말을 많이 하죠...착하고 선하게 빛과소금의 역할을 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 앞에선 도토리 키재기지요...그리고 성경을 포괄적으로 전체를 보는눈을 가져야합니다 ..몇구절만이 아닌...
행위로서 구원을 말한다면 틀렸습니다..의인은 없거든요...그러나 행위를 폐하자 한다면 그것역시 틀렸지요.행함이 없는믿음은 죽은것이니까요...귀신들도 믿고 뜨든다고....율법이 폐하여졌다 그러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게 아니고 완전케 하시려고 오셨으니까요..천지가 없어지기전에.일점일획도땅에 떨어지지않고.다 이루리라고...그러나 율법에 메여서 산다면 그 속에 진리가 없는겁니다..진리가 자유케 하기에...조금 어렵나요..진리안에서 율법이 지켜져야...
균형입니다 ..중용사상이라고 하지요...한면만 강조하면 안됩니다..오늘날 교회와 같지요...믿음만 강조하니 저들끼리만 잘먹고잘살자는식이죠..행함만 강조하면 천주교마냥으로 알맹이가 없죠..동전의앞면과뒷면 같이 행함과 믿음 동시에...
good............................
그리스도인에게 행위를 강조해야 함은 100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면 그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오류인 것입니다.
본인보다 상대적으로 행위가 못한 사람을 정죄하면서 본인은 '의'에 빠져 천국갈 자격 있다고 자부하는 사고방식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지 말아야 할 틀려먹은 근성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죄 사하심의 권세와 인간에 대한 긍휼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로인해 주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행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앙이지요.
그 행위의 핵심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연기념물님은 진정 거듭난 분이라고 생각하며, 이단이 활개치는 요즘 시대에 님같이 확실한 분별력을 가지신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든든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른 신앙인이 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아멘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지만 행함만 있는 신앙도 죽은 믿음이지요...믿는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함이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며, 행함으로 실천하는 자들은 믿음으로 인한 행함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하지만 이 둘은 결코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행위가 구원받을 수 있는 잣대라면 율법중에서 어느만큼까지 수준 이상으로 지켜야 천국갈 수준이고, 어느만큼 이하로 못지키면 지옥가는 수준인지 객관적 잣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성경에는 그런 내용 없습니다.
객관적 기준은 결국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느끼시는 대로만 존재한다고 봅니다.
내 기준으로 단지 이웃의 겉 행위만을 보고 판단을 하려는 것 자체가 복음에 무지한 행동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계명들이 있을지라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서 다 이루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그렇죠^^ 사람이 어찌 그 기준을 정할 수 있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하지만 내 믿음에 대하여는 자연스러운 행함이 뒤따르는지 점검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구원은 끝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가야 하는것이기에 매일매일 내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분들이 있긴 있나요? 저는 그렇게 설교하는사람도, 또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도 본적이 없는데....
다윤님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런식으로 설교하는 사람 있습니다.
큰믿음교회의 변승우 목사라는 흉악하고 틀려먹은 또라이가 있습니다.
그 사기꾼은 톨합측과 합동측, 순복음(기하성) 등 6개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받은 범죄자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교리가 '행위구원론'과 '신율법주의'입니다.
위에 올린 글의 취지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이단에 미혹되지 말자는 뜻이지 행위 자체를 무시하거나 거부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을 말하는것은 몰라서..혹은 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누구든지 나는 구원 받았다고 장담한다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구원은 이루어 가는겁니다...양과 염소의 비유(마 25장.32~ )에서 보듯 나는양이다 라고 할수있는사람이 있을까요..주께서 오른쪽에 서라시면 감사함으로서야지 난 오른쪽 할자가 있을까요...바울이 구원의 푯대를 잡았다고 했나요...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쫒아간다고 하지않았나요..누가 바울과 비교 될까요..그런바울도 내가 많은이를 구원하고 도리어 내가 버림을 당할까 두렵다고 하지않았나요..구원은 우리가 말하는건 짧은지식으로 모르고 하는거고요 오직 주께서 천국 하시면 ..무익한종이라고
만약 구원이 세뇌교육이라면 성경 또한 세뇌시키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세뇌와 확신을 구별 못하면 이단입니다.
우리가 부모와 자식 혈육간에는 자식이 부모한테 무엇인가 좀 잘못하더라도 부모한테 야단을 맞을 지언정
결국은 용서받고 그 부모의 자녀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자식이 몇가지 잘못했다고 해서 자식을 호적에서 지워버리고 집 밖으로 내쫒는 부모도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과 주님의 긍휼하심을 믿어야 진짜 믿음입니다.
그걸 부인하고 결국은 자기 스스로 본인의 자유의지로 행위를 잘해서 구원에 이르른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 못받습니다.
이루어가야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믿음의 성장이지요.
자식으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과 공으로 잘 키워져서 성장하였으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감사함을 알고 어떤식으로 효도할건지 노력하여 효도를 실천해나가는 것이 효심의 성장이듯이
우리도 주님을 영접한 순간 주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해서 거기서 끝나기보다는
믿음의 성장과 영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발전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교만함이라든지 행위로의 '의'가 포함된다면 그건 옳지 않다는 것이 윗글의 취지입니다.
율법(행위)만으로 이웃의 구원 여부를 판단치 말자는 취지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만함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일은 어차피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구원받음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화평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 또는 지옥을 가는 과정은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지만 주님을 영접해서 자녀가 되면 그순간부터
구원의 효력은 발생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죄인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생각이 어째서 교만한 것입니까?
진짜 교만한 자는 행위를 통한 의로써 구원받으려는 자들입니다.
감사할뿐이지요...오직 주님의권한을 침범하는거...준행자가 재판자 자리에 앉는 거지요...나의 할일만 열심히 성실히 하면 상은 그분께서 주시는건데 .구원은 은혜입니다.... 베리칩인가 그런것도 미혹되지 마시길...
아침부터 일찍와서 일한 자들이나 오후부터 뒤늦게 와서 일한 자들이나 똑같이 약속된 댓가를 주시는 주님.
그런 주님의 속성을 모르고 그저 율법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율법에 목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행위가 못한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마음은 곧 정죄로 이어지고, 자신은 행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 심리로 자연스럽게 접근됩니다.
그게 바로 사탄이 노리는 음흉한 흉계이지요.
그런 주도면밀한 사탄의 궤휼도 모르면서 그저 행위 잘하자는 게 무엇이 틀렸냐며 이단목회자를 두둔하고
신율법주의로 들어가는 세력들이 한심할 뿐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음에 평안이 깃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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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불신자들만도 못한, 불신자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것과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다른 부분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진짜 예수님이 아닌 우상으로서의 예수를 믿는 놈들이죠.
그런 자들이 행하는 십일조와 주일성수, 교회 봉사는 100% 헛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을 능멸하는 연극일 뿐입니다.
어차피 불교인들도 우상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다.
행위는 행위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