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주의 언론인 터커 칼슨이 부친을 여의었다. 1970년대 웨스트 코스트 지역을 누비며 ABC 계열 방송국들의 논쟁적인 시사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던 리처드 칼슨이 숙환 끝에 지난 24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사실을 LA 타임스가 보수 논객이자 폭스 뉴스 진행자였던 아들이 엑스(X)에 올린 부고를 인용해 30일 전했다.
고인은 이 신문의 원고 담당 사환으로 출발해 기자로 많은 상을 받았다. KABC의 심층 취재기자로 LA의 TV 시청자들에게 낯익은 얼굴이며, 샌프란시스코의 KGO 방송과 샌디에이고의 KFMB 방송에서도 일했다.
KABC에서 일할 때 고인은 유가 폭등에 시달리는 가운데 세 바퀴로 달리는 전기 자동차를 개발한 성전환 여성 G 엘리자베스 카마이클의 몰락을 공격적으로 보도했다. 카마이클은 그 자동차를 개발한 적이 없어서 투자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칼슨은 보도 과정에 카마이클이 트랜스젠더라고 폭로했는데 이 일은 HBO 다큐멘터리 'The Lady and the Dale'(2021)에 소개됐는데 칼슨은 그의 정체를 드러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만약 리즈의 행동이 정상이라면, (연쇄살인마인) 제프리 다머도 정상이 된다"고 쏘아붙였다.
KFMB에서 일할 때도 성전환한 프로 테니스 선수 르네 리처즈가 라 홀라 대회 여자 단식 우승을 차지한 뒤 그녀의 성 정체성을 '아웃팅'(outing, 본인은 원하지 않는데,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강제로 밝혀지는 일)했다. 이 일이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에 환멸을 느낀다며 언론계를 떠났다. 그는 1984년 LA 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내 생각에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들이 아주 많은데 미디어는 스캔들과 성적 센세이션 같은 것에 물구나무를 선 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941년 2월 10일 태어났다. 모친은 열다섯 살의 스웨덴 말을 하는 소녀였는데 보스턴의 고아원에 갓난 그를 맡기고 달아났다. 몇 년 위탁 가정들을 전전한 칼슨은 매사추세츠주 노르우드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양아버지는 무두질 공장 관리인이었는데 열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른바 불량 청소년으로 체포되는 일이 잦았다. 열일곱 살 때 차를 훔쳐 징역을 살았다. 터커 칼슨의 부고 포스트에 따르면 그는 해병대에 자원했고, 나중에 상선 선원이 됐다가 언론사 문을 두드렸다.
LA 타임스 입사 뒤 칼 브리슨과 친구가 됐다. 브리슨은 여배우 로잘린드 러셀(1907~76)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지낸 조지프 알리오토와 범죄 조직의 결탁을 파헤친 잡지 룩(Look) 보도 등에 협력했다. 이 보도 때문에 결국 알리오토는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이 보도를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인격 살인"이라고 소송을 제기해 법원으로부터 35만 달러의 배상 판결을 얻어냈다. 칼슨의 이름은 피고인 명단에서 빠져 화를 면했다.
1971년 KABC 방송으로 전직한 자동차 광고 사기를 심층 보도해 피바디 상을 수상했다. 4년 뒤 KFMB 기자 겸 앵커로 또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첫 아내와도 이혼하고 홀아비로 터커와 형 버클리를 길렀다. 그는 1979년 동결식품 제조사 상속녀인 패트리샤 스완슨과 재혼했는데 그녀와는 2년 전 사별했다.
방송 일마저 놓은 고인은 샌디에이고를 근거지로 한 대출업체 그레이트 아메리칸 페더럴 에 입사했다. 정치에도 뜻을 둬 1984년 샌디에이고 시장 후보로 위증 혐의로 기소된 현직 시장 로저 헤지콕을 상대로 경선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품었다가 접었다.
이듬해 워싱턴으로 이주해 레이건 행정부를 위해서 일했다. 미국 보수주의 세계관을 전파하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대표로 5년 동안 일하다가 1992년 세이셸 제도 주재 미국 대사로 파견됐다. 이어 공공 미디어들에 기금을 제공하는 코퍼레이션 포 퍼블릭 브로드캐스팅(CPB) 사무국장이 됐다.
1997년에는 '오프라 윈프리 쇼'와 '저퍼디!'와 '휠 오브 포춘' 등을 유통하는 신디케이트 기업 킹 월드에 입사했다. 워싱턴에 근거를 둔 신보수주의 싱크탱크인 민주주의 수호 재단의 부회장으로 일했다.
유족으로 형제와 다섯 손주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