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 외 4편 〈2022년 시작문학상 수상작〉
정연희
자작나무 숲에
숨겨 놓은 하늘 우물이 있다
천년을 햇살로 빚은 샘이 거기 있다
누가 중세의 무거운 우물 뚜껑을 열었을까
유라시아의 여름 바다를 건너온 새
우물 언저리에서 맴돌고
오후 3시에
어린 순록이 다가와 등을 내밀 것 같은 그곳
우물을 내내 올려 보다 비밀의 숲으로 건너갔을까
푸른빛이 금빛으로 다시 색색으로 숲의 눈동자가 얼비치다 사
라졌다
지하도 환한 등불 아래 손을 내밀던 아이
아무런 표정 없는 눈
목마른 그를 어디서 본 듯한데
우물 뚜껑처럼 눈꺼풀이 순간 닫쳤다
생은 곧은 길만 있는 게 아니어서
미로를 헤매는 시간이 있다
닫힌 우물
돌아서는 가슴 얼마나 적막했을까
내 발등으로 하얗게 쏟아지는
거기,
반짝거리는 나뭇잎으로 두레박을 엮는 이가 있다
네 이름은 안개
새벽 3시 희미한 종소리 들린다 사찰의 은하수에 얼굴 씻고 등뼈 한 마디씩 곧추세운다 숨죽인 고양이 발걸음 솜털보다 보드라운 뭉치들 누군가 밤새 옷감을 짰을까 열두 광주리 옷감을 펼쳐 대지로 끌고 간다
가닥가닥 땋은 머릿결 비단뱀이 미끄러진 다리 안쪽 선뜩하다 별들 빛을 잃고 관능의 고양이 긴 꼬리 나무둥치 감는다 안개가 자작나무 껍데기에 부딪치는 소리 수화를 나누는 손가락의 소리 손가락 사이사이 흘러내리는 유령 나무를 감추고 새처럼 몸을 숨긴 너
잡풀 우거진 옛집을 삼키고 마당을 지키는 백 년 향나무 지운다 가물거리는 기억의 꿈들 모호하다 슬픈 묘비명을 감추고 너를 잠재운다 모든 물체 하얗게 지우고 천천히 다리 건너간다 세상의 사물은 공空이었으므로
탄생
상현달이 섬강에 얼굴을 씻는군요
씨앗을 품은 미완의 덩이
두 손으로 받아도 미어질 것 같군요
새 생명이 이 별에서 완성되는 내밀한 시간
월견초 따스한 기운이 밤의 한가운데로 모여들어
강변 풀섶이 온통 노란 붓 칠 소용돌이군요
당신은 허리 굽혀 미지의 세계를 기다리고 있군요
풀벌레들의 장엄 돌림노래 가까워졌다 멀어지는데
수도원 담장 너머 들리는 저녁 찬송과 어우러진 칸타타
밤 깊도록 이어지는군요
내 허물을 대신 깁는 기도일까요
맑은 종소리처럼 헝클어진 내 정수리를 오래도록 씻어 내는군요
당신이 달의 몸으로 내게 건너와
서로에게 물들어 천천히 번진 첫 마음처럼
조금씩 부풀어 오른 구월의 달이 곧 강물에 몸을 풀겠군요
푸른귀벌새
누가 잘 벼린 낫을 휘둘렀을까
감국이 수풀에 쓰러져 있다
뭇별들이 날마다 얼굴을 씻겨 주는지
노란 나비 색色을 입혀 주었다
꽃술이 소름처럼 촘촘히 돋아났다 나는
시든 꽃을 유리병에 가만히 놓아 주었다
의식이 없는 너처럼
부르튼 입술이 뒤집혔다
유리병에 달라붙은 기포들 숨을 쉬고 있는 것
중환자실 유리방에서 산소호흡기 달고 있는 너
접힌 날개 어둠의 터널 건너가고 있다
꼭 감은 속눈썹 떨렸던가
가녀린 손은 구름 솜처럼 따스했던가
한 계단씩 발 디딜 때마다 심박수 떨어지고 있다
안데스 푸른귀벌새는
밤마다 저체온의 혼수상태로 잠들었다
눈썹 사이 샛별이 내걸리면
대궁에 매달린 고열의 시간 날개 젓는데
옷 한 꺼풀씩 벗어 두고 날아올랐다
생은 옷 한 겹 한 겹 덜어 내는 순롓길일까
지친 네가 벌새처럼
시든 날개 펼쳐 나에게 건너오고 있다
오월의 전언
천변에 분홍 엽서들 흩어졌다
벚나무 수많은 주머니에는
전하고 싶은 말들이 일렁거렸다
구름과 달이 받아쓴
미처 전하지 못한 안부와 끊어진 소식
오월의 배달부가 흘렸을까
무거운 이야기가 많아 잠시 잊었을까
자음 모음 글자들 무심한 발자국에 지워져
모호한 말들이 수취인 불명으로 쓸려 다니거나
개천의 물거품으로 떠돈다
안개 너머
또 한차례 건너오는 후드득 소리
네가 보낸 소식인가 두 손 모아 받으려는데
단발머리 계집애가 모둠발로 뛰어오른다
잡으려다 스친 손 바람이었다
돌아온 꽃들의 전언에 귀 밝히는데
아이를 놓친 손
엽서는 그만 내 품을 떠났다
― 계간 《시작》 (2022 / 겨울호) , 2022년 시작문학상 수상작.
정연희
충남 홍성 출생.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호랑거미 역사책』 『불의 정원』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