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지막 번 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모양이 만들어지기 까지 무슨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여기 솔직하게 쓴 그 기록 하나가 나왔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지장왕보살의 난중일기도 그 솔직성에
삶을 연구하는 이들에겐 큰 가르침이 되고 있죠.
당신이 일반인이 아니셨기에 그런 이상한 기록을 남기신 것입니다..
처음 성중님으로부터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
지장왕보살님의 화신이란 답을 듣고 놀랬습니다만..
여러가지를 살피니 맞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지장왕보살님은 점찰경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일심-용맹심-심심'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다르게 풀이하면
'변하지 않는 한마음-용맹하게 전진-배려하고 살피는 깊은 마음'입니다.
이걸 당신의 삶, 난중일기에 대입하면..
-무패의 대장군(지장왕보살님의 다른 이름은 '시바'신. 우주 최강 무패.)
-효행(충무공은 엄청난 효자. 지장경 효행사상.)
-종교성이 매우 강하시고(종교를 표방하시지는 않았지만 난중일기에 강한 종교성)
-충성(일심)
-무자살(자살을 넘는 극악 고통 겪으셔도 단 한 차례도 자살언급 무)
-무서움(가차 없이 목을 벰. 냉정. 용맹심)
-따뜻함(구름 같이 사람이 모임. 심심)
-공동체 정신(술병이 나서 괴로움을 겪으시면서도 대중에게 맞춰주심)
-부자(당신이 개입하면 무조건 부자됨)
-점치기(중요한 일 앞두시고 점을 치심. 점찰법)
-허트로 사신 적이 없슴
-의승군(스님들 의병)들로부터 존경
이렇게 나오죠.
솔직함... 이게 우리에게 그렇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아래 글에도 그런 솔직함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여러분 힘드시죠??
포장된 겉의 끝모습을 보지마시고..
진실을 보세요..
이글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적은글이지만..
성중님께서 현재도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원리는 동일..
용맹정진..
더 나아가서는
불법홍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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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4101900453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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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입장하고 계십니다!”강성곤 KBS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2024. 10. 19. 00:45
[아무튼, 주말] [강성곤의 뭉근한 관찰] 투박하지만 따스했던 C선배를 추모하며 1980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C 아나운서가 중계를 맡았다. /국가기록원얼마 전 아나운서 왕고참 C 선배의 부고를 접했다. 20여 년 전 명퇴 때 잠깐 뵙고, 어쭙잖게 나는 독일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다. 세월 지나 신문에서 별세 기사로 마주할 줄이야…. 1980년대 후반 조(組) 근무 때 그는 조장, 난 말번이었다. 어느 날 함께 숙직을 마치고 퇴근용 타각기(打刻器) 앞에서 그가 말했다. “괜찮으면 집까지 좀 태워다 주게.” 서민풍인 C 선배는 버스로 출퇴근했고, 나는 신참 주제에 르망을 월부로 뽑아 몰고 다녔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그냥 가기 뭣하다며 감자탕 집에 들렀다. 새로 알게 된 두 가지. 첫째, 감자탕은 감자와 관계없고 감저탕(甘猪湯)이 변한 말이며 감저는 단맛 나는 돼지등뼈를 의미한다고. 둘째, 대조(大棗)는 ‘큰 대추’라는 뜻. 그래서 동네에 대추나무가 많다고 했다.
C 선배는 먼저 발동을 거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술자리는 즐겼다. 고달팠던 4교대 야근⸱숙직은 뉴스를 1인당 7~8건씩 소화해야 해 입에서 단내가 났다. 위안이 필요할 터. 소주가 있어야 했다. 자정 뉴스를 마치면 조장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준다. 포장마차서 사온 두꺼비 서너 병과 그의 애호 안주 오징어숙회. 신문지를 포개 탁자 위에 펴면 간이 술상이 차려진다. ‘취약 시간대 음주 절대 금지’라는 윗선의 강력 경고는 무시되기 일쑤. 특히 두 부류가 우리의 성토 대상 안줏거리였다. 우선 아나운서 중 소위 TV 스타급들. TV프로그램을 3~4편 하면 생방송과 녹화 시간이 많기에 열외가 된다. 그리고 한국어 연구 멤버들이었다. 국어국문학 전공 아나운서 중심으로 당시 KBS 한국어 이론 무장과 그 연장선에서 논문⸱책자 발간 등 이유로 숙직을 빼주었다. 아나운서실을 대외적으로 빛내주는 명분도 있었고. C 선배는 유독 두 그룹에 질색했다. “아나운서의 본령은 라디오예요. 티브이는 요망한 것. 다 일장춘몽이라고. 뭣이라? 국어 공부한다고 숙직 면제?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어이구 학자들 납셨네.” 얄궂은 운명이라 했던가? 티브이는 차치하고, 공적(公敵)이던 방송 언어, 표준어, 외래어 연구와 교육은 30년 이상 내 밥줄이 되었다. C 선배는 간부들과 불화했다. 특유의 야인 기질로 자주 뻗대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있었다. 축구⸱농구 중계가 주특기.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4강의 위업을 기억하는가. 박종환 감독의 카리스마에 더해 C 선배의 애국 중계(?)가 단연 빛났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한국 축구가 세계 4강에 올랐습니다.” 아나운서의 전설 이광재 선배가 원조였으나 그에게 외려 잘 어울렸다. 자못 어두운 톤, 애조 띤 음색에 울음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치닫는 절규에 가까운 코멘트가 극적 효과를 내곤 했다.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외치며 4강 진출의 기쁨을 전한 C 아나운서의 애국 중계(?)가 빛났다. /연합뉴스마라톤 현장 중계는 ‘죽음의 중계’라고들 했다. 아나운서는 중계차 위 의자에 올라 난간에 끈으로 몸을 묶는다. 낙상 방지가 목적. 그러곤 선수들을 역방향으로 내내 바라보며 중계해야 했다. 어느 춥고 스산했던 날, 과업을 마치고 돌아온 C 선배. 남극 탐험 원정대의 아문센이 그러했으리라. 그 애틋하고 기괴한 복장을 본 선후배들은 시쳇말로 모두 웃픈 표정이 되었다. 흑회색 사파리 차림에 털모자 쓰고 장갑⸱망원경⸱물통에다 주머니에선 자양강장제⸱지사제(止瀉劑)까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우직한 준비성을 웅변하는 대목이다. 큰 시련도 있었다. 1980년 서울 장충체육관. 주지하다시피 전두환씨가 무도하게도 이 나라 대통령이 된다. 그 취임식 때 C 선배가 의식 중계를 맡은 것. 국가 행사 방송은 잘하면 본전이요 못하면 쪽박이다. 그는 잔뜩 긴장했다. 중계 배당받은 날부터 어색한 새 대통령 이름 ‘전두환’을 줄기차게 읊조렸다. 열여덟 해 입에 붙은 ‘박정희’라는 이름과 마침내 작별하는 날 아닌가. ‘박정희가 아니라 전두환’, 연신 주문을 걸고, ‘대한민국 제11대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입에 붙게끔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행사 당일, 중계석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단상을 바라본 C 선배. 그런데 아뿔싸! 전두환씨는 영부인과 함께 등장했던 것. 불행히도 부부 동반 입장이라는 상황은 뇌리에 없었기에 ‘이순자’라는 이름은 아득하기만 했다. 결과는 최악 실수. “지금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입장하고 계십니다!” C 선배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1주일여 만에 나왔다. 이후 아무리 만취해도, 대선배들이 무섭게 채근해도, 절대로 남산에서 겪은 일을 발설하지 않았다. 시대의 아픔이 빚은 촌극이었노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선명한 2대8 가르마, 불그스레한 낯빛의 상남자 C 선배. 여느 땐 순박하지만, 울혈을 건드리면 마치 사자 같았던 의협(義俠)의 충청인. 공활한 가을 하늘 바라보며 그를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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