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의 김해 | 일제의 헌병통치 | 1910년 8월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김해군은 대한제국 때 23개 면이었으나, 1918년 7월에 13개 면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각 면(面)에는 면장·면서기·회계원이 실무를 담당하고, 동(洞)·리(里)에는 무보수의 구장이 임명되었습니다.
김해군의 치안은 경찰을 대신해 진주헌병대 마산분대가 맡았다가, 1914년 4월에 부산분대로 넘어갔고, 좌부면(부원동)에 헌병대김해분견소와 활천·칠산·가락·주촌·녹산·명지 등의 15개소에 헌병파견소가 설치되어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로 불리는 일제의 철권통치에 억눌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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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는 1912년 8월 13일 토지조사령을 공포한다. 근대적 소유권과 토지제도의 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의 경제적 기반을 빼앗는 것이었다.
8년 간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총독부는 많은 논밭과 임야를 차지하고, 국책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민간의 일본토지회사,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무상이나 싼값으로 불하하였다.
동양척식회사의 김해농장이 회현리에 설치되었고, 무라이농장(村井農場 후에 하자마농장)이 진영과 창원일대에 만들어졌다.
김해의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높은 세율의 소작료에 시달리는 영세소작민으로 착취당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김해(1912년)·대저(1916년)· 하동(대동, 1920년)·낙동강(1936년)의 수리조합을 조직해 제방을 쌓고 수문을 만드는 수리공사로 농토를 경영하였다. 김해인 노동력은 무상에 가깝게 착취되었다. 1914년에 김해금융조합을 시작으로 진영과 장유에 금융조합을 설립하여 김해의 금융권을 장악하고 합법적인 고리대금업도 하고, 1915년 6월에 일본인 우지모토(氏本太市)는 녹산광산을 파기 시작하였고, 1926년 9월에 기하라(木原竹一)는 생림의 아연광산을 채굴하였다.
현재 김해지역에서 바위들이 흘러내린 산비탈은 일제가 광물자원을 수탈하던 흔적이라는 증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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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총독부는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공포합니다. 3.1운동 이후 1922년에 2차 조선교육령,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8년에 3차 조선교육령이 추가로 공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일제가 조선인의 문화적 정신적 독립성을 말살하고 영원히 식민지인으로 고착시키기 위한 일제의 교육방침과 교육법이었다.
교육령에 따라 진영(1919), 대저·장유(1922), 가락·명지·생림(1923), 하동(1924), 녹산(1927)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학교의 난립을 방지하겠다는 사립학교령에 따라 1908년 녹명학교(녹산), 1911년 동명학교(명지), 1919년 중화학교(진영) 등이 세워졌고,
거류일본인을 위해 낙동·김해·진영·대사·덕두·가락·신문 등에 소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육기관들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동쪽의 천황에게 허리 굽혀 가장 정중하게 경례케 하고, 황국신민선서를 암송시키며, 단발령과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한국어교육을 금지하는 식민교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의 실현도구로 김해의 교육기관들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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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1일 억눌려왔던 조선민중의 만세시위가 전국을 뒤덮었다. 전국적 만세의 물결은 김해에도 전해졌다.
3월 30일 밤 김해읍내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31일과 4월 5일에 하계면(진영시장), 4월 11일에 명지면(명호시장)을 휩쓸었고, 4월 12일에 장유면 무계리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4월 16일에 칠산 이동리의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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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읍 출신 배동석(裴東奭)은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 2월 26일 마산에 내려와 박순천(朴順天)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삼일운동의 학생대표로 활약한 뒤, 선언문을 가지고 김해로 내려와 임학찬(林學瓚)·배덕수(裴德秀) 등과 은밀히 의논하여, 3월 30일 밤 10시 읍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김해 최초의 만세시위였으나 미리 부산에서 파견되어있던 5명의 일본군에게 배동석·임학찬·배덕수·박덕수 등이 검거되었다.
가락면 대사리의 허병(許炳)은 최덕관(崔德瓘, 대사) 최계우(崔桂禹, 활천) 조병중(曺秉重, 삼방) 김석암(金石岩, 부원) 송세탁(宋世卓, 진례) 송세희(宋世禧, 진례) 등과 4월 2일 김해장날 거사를 은밀히 모의하고,
자신의 집에서 나무판에 태극기를 새겨 광목에 수십 장을 찍어내었다. 4월 2일 장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4시경에 시장 십자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싸전에서 고기전으로 달려가자, 60여의 군중이 호응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최계우는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었고, 만세시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헌병은 재향군인과 불량배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에 나섰고, 송세희와 송세탁이 크게 다치고, 허병 등이 헌병대김해분견소로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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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계 면서기 김우현(金禹鉉)은 신문을 통해 전국의 만세운동을 알고, 3월 29일 김성도(金成濤) 김정태(金廷泰) 김용환(金容煥)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각자 돈을 털어 포목상 김정태에게 재료를 사오게 해, 여래리 골짜기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장날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장날 오후 1시경 많은 장꾼 속에서 5명의 청년이 광목 태극기를 들고, 종이 태극기를 나눠주며, 독립만세라 쓴 삐라를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군중들이 호응했지만 김성도 등이 헌병에 잡히는 바람에 확대되지는 못했다. 다시 다음 장날인 4월 5일 하계리 서당에 다니던 안기호(安騏鎬)와 김종만(金鍾萬)이 독립군대장 안기호라 쓴 깃발을 들고 학생 30여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으로 돌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수백 명의 장꾼들도 일제히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시위군중은 일본헌병과 충돌하였고, 헌병이 쏜 총에 2명이 부상하고, 거꾸로 군중은 헌병을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안기호와 김종만도 붙잡혔으나 당시 17세의 소년이었으므로 구속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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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립 동명학교 교사 이진석(李鎭奭)은 동창생 김연복(金淵輹, 경성약학전문학교)에게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이진석은 동창생 양왕석(梁旺錫)·이규회(李圭恢)·지봉구(池鳳九) 등과 의거를 논의하고, 4월 9일 밤에 양왕석과 철야로 등잔불을 가리고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베꼈다.
4월 10일 이진석은 동지들과 함께 동명학교 학생 김청천 서갑순 등을 명호장으로 부르고 장꾼이 가장 많이 모인 오후 2시경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200여 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헌병들이 출동하자 이진석 등은 재기를 위해 재빨리 피신하였다.
다시 4월 11일 밤 10시 진목리에서 양왕석·이규회·박두성(朴斗成)·정소목(鄭小穆) 등이 50여명의 학생·농민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진석 등은 검거되어 6개월∼2년의 징역이 선고되어 부산과 대구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 장유면의 만세시위 | 오산학교 출신 김종환(金鍾 )은 삼일운동 후 독립선언문을 옷깃에 숨겨 고향에 돌아와 지방유지 김승태(金升泰)와 모의하고, 이강석(李康奭) 김용주(金鎔鑄) 조용우(趙鏞宇) 조항래(趙恒來) 등 십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였습니다. 4월 11일 신문리 범동포 이학도(李學道)의 주막에서 지역별로 동원 책임을 분담하고, 갈대밭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여 각 대표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4월 12일 연락 받은 장유면민들이 사방에서 무계리 시장 터로 모여들고, 내덕리에서는 이강석이 새벽부터 모임을 외치고, 김승태는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섰으며, 동민들은 북치고 나팔 불면서 무계리 시장으로 모여들었는데, 12시경에는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김승태와 김종환의 선도로 천지가 진동할 만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무계리 중심을 행진하고, 헌병파견소를 포위하였습니다. 헌병대가 총을 난사하자 군중들은 일단 흩어졌습니다. 다시 군중들이 모여들어 독립만세를 외치자, 헌병대는 총을 쏘았고, 총을 빼앗으려 맞서던 손명조(孫明祚) 김용이(金龍伊) 김선오(金善五)가 절명하였습니다. 가족과 시위대는 파견소로 몰려가 건물 등을 파괴하였으나, 김해분견대에서 나온 기마대와 충돌하여 김승태 김종환 등 10여 명이 검거되고 군중들은 날이 저물어 해산하였습니다. 김해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삼일운동이었습니다. | 김해의 독립투사들 | 조정환(曺正煥, 녹산)은 만주에 가서 독립단의 자의부장이 되었고,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강원석(姜元錫, 진영)은 의열단사건에 연루되어 2년 간 옥살이를 했으며, 노석호(盧奭鎬, 생림)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습니다. 징역3년을 선고받고 신경(新京)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습니다. 배치문(裴致文, 한림)은 삼일운동 때 목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3년 임시정부의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고,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 다시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신간회 목포지회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1942년 5월에 옥사하였습니다. 1983년 한림면사무소 앞에 공로를 적은 비가 세워졌습니다.
| | 이윤재(李允宰, 김해읍)는 영변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하여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924년 북경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7년 조선어학회『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어 1943년 12월에 옥사하였습니다.
1991년 봉황동 김해도서관 앞뜰에 흉상과 비가 세워졌다.
허윤송(許潤松, 삼정)은 16세 되던 1934년에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입단해 봉천 길림에서 활동하다,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제1지대에 예속되어 일본군의 병참선을 공략하였으며, 광복군대장으로 노하구 남양지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김구의 밀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관동군헌병사령관이었던 아오키(靑木)를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오사카형무소에 복역하다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노백용(盧百容, 생림)은 통의부사건에 관련되어 징역2년을 선고받고 부산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안효구(安孝駒, 진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 삼일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의사개업을 버리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송기송(宋基松)은 국내에 파견되어 김해 등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붙잡혀 징역2년을 선고받았다.
반양환(潘良煥, 가락)은 징병으로 끌려 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으로 활약하였고, 이윤희(李允熙, 주촌)는 홋카이도(北海道)로 징용되어 와니시(輪西)제철소에서 노동자 2천명의 폭동을 주동하다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다.
| 경제활동 - 김해지역의 소작쟁의 | 1925년 9월 진영소작인회는 무라이농장(村井農場)의 소작인대회를 열고 일본인 소작인과의 차별철폐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1928년 5월 오사카 상인 하자마(迫間房太郞)가 농장을 매수하여 소작료를 올리자, 천명의 소작인이 1931년까지 연중행사처럼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1931년 11월 소작인 200여명이 갈어서 부산 하자마본점과 경남도청까지 몰려가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1932년 1월에는 소작인 간부 11명에게 소작계약만료가 통고되자, 소작인 373명이 재계약을 요구하였다. 다시 대표 20명이 소작권을 박탈당하자, 군청에 몰려가 항의했으나 듣지 않아, 250여명이 농장에서 시위하고, 200여명은 비료대금의 지주와의 반씩 부담 등을 요구하기 위해 밤에 배를 타고 부산까지 진출하였다.
2월 들어 김해·진영·마산의 경찰이 비상경계를 펴고, 농장 측은 소작인의 위협과 회유에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쟁의간부 13명이 구속되고, 김해농민조합의 정기총회가 금지되었으며,
4월에는 배종철(裴鍾哲) 등 농민조합의 간부들이 체포되기 시작합니다. 1931년 하자마농장(迫間農場)의 소작쟁의는 남한에서 가장 치열했던 운동으로 1934년 3월 총독부가 소작계약기간 최저 3년, 도지사 임명의 소작위원회 구성을 골자로 하는 조선농지령을 공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12월에도 도요타농장(豊田農場)에서 60여명의 소작인이 가락면사무소에 소작료 부당 인상의 시정을 요구하였습니다.
| 김해평야의 개간 | 1930년대에 여러 갈래 낙동강을 하나로 하는 일천식공사(一川式工事)가 추진되어 하동(대동)면 월당(월촌)∼명지면 진목리 간의 본류 제방이 완공되었다.
1934년 4월에 녹산수문이 완성되어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 김해는 영남의 곡창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해 7월의 대홍수로 곳곳의 낙동강제방이 붕괴되고 무려 1,230호의 농가가 전멸하자,
2천 여의 농민들은 공사가 대홍수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보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936년 8월에도 대홍수가 일어났으나 이 때의 개량공사로 대저와 가락은 수해를 면할 수 있었다.
| 신작로의 개설과 교통
| 1933년 3월 17일 김해∼구포를 잇는 낙동대교가 개설되어 부산과 김해가 처음으로 육로로 연결되었다.
1937년 김해군 내의 교통은 경남자동차주식회사의 버스에 의존하였는데, 김해에서 구포, 진영(장유경유, 이북경유), 유림정, 조만포, 월촌의 노선, 진영∼일동(대산), 구포∼울만의 노선이 운행하였다.
부산∼마산 간의 국도가 개설되어 김해읍내의 구간이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구지봉과 허왕후릉 사이를 관통하게 되어 김해군민은 거북이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이 잘렸다고 애통하게 여겼다 한다. 이후 김해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1980년대에 구름다리로 지맥을 연결하여 큰 인물이 많이 나게 되었다 합니다.
1942년에는 대저면에 비행장이 설치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저항의 하나로 설치된 것이지만, 현 부산 김해공항의 모체가 되었다.
| 진영단감 | 김해가 자랑하는 전국적인 명물의 하나가 진영단감이다. 1927년 진영역장(1923∼25)이었던 하세가와(長谷川)가 한국여성과 결혼하여 진영 중부에서 첫 재배를 시작하였고, 일본인 식물학자 요시다(吉田)·사토우(佐藤)·히가미(氷上) 3인이 전국에서 진영이 단감재배의 최적지로 판단하여 신룡리에 100주 가량을 시험재배 한 것이 진영단감의 기원이다.
1934년에는 조합이 결성되었고, 1937년에는 27,656주에서 181.4톤의 단감이 수확되었다.
광복 후 확대되어 2002년 현재 진영에서는 재배면적 1,936ha, 재배농가 1,683호, 연간생산량 24,293톤, 총 매출액 400억에 달하고 있다.
1985년부터 진영단감의 홍보와 판로개척을 위한 지역축제로 진영단감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 광복을 맞이한 김해 |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감격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초대 군수 한봉섭(韓奉燮)이 부임하였고, 9월에 일제의 소학교는 한국의 국민학교로 다시 열렸다.
그러나 새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주장들도 있었다. 1948년 5·10선거의 후유증으로 1949년 11월 대동면 평촌에서 76호가 모두 타는 대화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김해는 전화(戰火)를 입지 않았으나, 피난민 수용과 국민방위군의 설치 등으로 복잡하였고, 학교는 노천에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 등 불행한 사건도 있었다. 1952년 4월 지방자치의 실시로 도·읍·면 의회가 구성되었고, 7월에는 김해교육구청이 신설되었다.
1972년 대저와 진영, 1977년 장유, 1979년 녹산, 1981년 가락의 도시기반 조성사업이 전개되었고, 1973년 11월 4일에 남해고속국도가 개통되었으며, 1976년 9월에는 김해공항이 개설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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