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막절
레 23:33-44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드릴지니
38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제물 외에 또 너희의 모든 자원제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 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 23:33-44 / [초막절]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일곱째 달 십오일은 이레 동안 나 여호와를 기리는 초막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35) 초막절이 시작되는 첫째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거룩한 모임을 가져라. 36) 초막절이 계속되는 이레 동안 날마다 나 여호와께 제물을 불살라 바쳐라. 여드레째 날에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거룩한 모임을 가져라. 이날에도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불살라 바쳐라. 이날 역시 거룩한 모임을 갖는 날이므로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37) [마무리] 지금까지 말한 각 명절은 나 여호와를 기리는 명절이다. 너희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거룩한 모임을 가져라. 해마다 명절이 되면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희생제물과 전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불살라 바쳐라. 38) 이러한 제물은 안식일마다 정규적으로 바치는 제물과 또 일반적으로 바치는 제물과 미리 약속하고 바치는 제물과 또한 속에서 우러나와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제물들과는 별도로 바쳐야 할 제물이다. 39) [초막절에 지켜야 할 규정] 일곱째 달 십오일이 되면 농사지은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다. 이날부터 이레 동안 나 여호와를 기리는 성대한 잔치를 벌여라. 잔치가 시작되는 첫째 날과 잔치가 끝나는 마지막 날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푹 쉬어라. 40 첫째 날에)는 너희가 가꾸는 과일나무에서 딴 가장 좋은 과일 몇 개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가지와 개울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와 이레 동안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기리며 잔치를 벌여라. 41) 너희는 매년 이때에 이레 동안 나 여호와를 기리고 드높이는 명절을 지켜라. 오고오는 세대마다 이 규정을 영원한 규정으로 삼아라. 42) 너희 이스라엘 본토박이는 이 명절이 계속되는 이레 동안 반드시 초막 안에서 지내야 한다. 43) 그 까닭은 나 여호와가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 땅에서 데리고 나올 때 너희가 초막에서 살게 한 것을 너희 자손들이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44)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할 명절들을 일일이 설명하셨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까지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했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33-40) 이스라엘은 7월 15일에 초막절을 지켜야 했고,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34). 37-38절을 보면 번제, 소제, 희생제물, 전제를 각각 그날에 드리라 명하시면서, 안식일 외에, 헌물 외에, 서원제물 외에, 자원제물 외에 드리라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드리고 있던 제물 말고도 초막절만을 위한 제물을 따로 더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안식하고 노동을 금지합니다. 초막절은 가을 추수 곧 각종 과일의 추수를 마치고 저장한 후여서 수장절이라 부르기도 합니다(39). 초막절이 시작되는 날에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버들을 취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하라 말씀합니다. 이렇게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 행사가 됩니다.
초막에 거주할지니(41-44) 초막절은 다른 절기와 마찬가지로 매년 대대에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기간에 이스라엘은 초막에 거주해야 합니다(42).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광야로 인도하셔서 장막에 거주하게 하셨던 사실을 대대로 알게 하여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43).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동안에 장막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장막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은 더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었습니다. 광야는 영원한 정착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장막을 쳐야 했으며, 위험이 닥쳐 피해야 할 때는 장막을 걷고 피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를 때 비로소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의 여정이 생생하지만 가나안 땅에서 출생한 출애굽 2세대, 3세대는 선조들의 광야 장막생활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막절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잠깐 머무르다 영원한 본향으로 행진하여 가는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적용: 초막절에 받은 은혜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초막절에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나그네 인생길을 가면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릴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히 11:13-16; 13:14; 벧전 1:7).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려웠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라는 말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과거가 있었습니다. 광야를 떠돌던 시절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절기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로운 신앙생활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요를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 앞에서 즐기는 감사절
레 23:33-44 / 윤영택 목사
어제 밤 하늘 밝게 비치던 둥근 달을 보셨는지요. 아! 내일이 추석이지 하고 보름달을 다시 한 번 보면 문득 고향 생각이 나지요? 지구 반대편 고국에서 추석을 지내는 가족들도 우리보다 몇 시간 먼저 똑 같은 달을 보면서 고향 떠나 먼 나라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녀들을 생각하며 기도하셨을 겁니다. 가족들을 멀리 떠나 보내고 외로이 남은 사람들이 우리 얼굴 대신 넉넉하게 살진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마음껏 축복할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구요.
오늘이 마침 우리에게는 추수감사주일이고 또 추석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에 저 하늘의 풍성한 보름달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의 지난 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고 합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지나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밤을 지새우며 가족들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는 잔치가 있는 날입니다. 품을 떠난 자식들을 보내놓고 홀로 지내시던 어른들이 이때가 되면 함께 모여 북적대는 식구들 틈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 뿌듯해 하시는 위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혹 오늘 우리 가운데 마음 아픈 일이 있고 피곤하여 지친 영혼이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하늘의 보름달보다 더 넓고 풍성한 위로와 사랑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어루만지심을 느끼는 은혜의 아침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하늘이 맑게 갠다면 식사 후 잠시 집 밖으로 나가 둥실둥실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면서 가족들 서로에게 감사를 전하는 오붓한 시간도 가져보길 바랍니다.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 아침,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레위기 23장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첫 추수감사 제사를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사절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은 그 땅에서 곡식과 열매를 거둔 후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대로 7일간 감사의 축제를 열었습니다.
땅에서 나는 열매를 거두어 창고에 저장하고 드리는 명절이라 하여 수장절이라고(출23:16) 부르기도 하는 이 축제는 오늘 본문에서는 초막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또 장막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여행할 때 광야 들판에 나뭇가지 또는 가죽 조각 등으로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던 시절을 기념하는 뜻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옛 이스라엘의 달력으로 7월15일은 초막절이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7월15일이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칠일 동안 이 명절을 지기라고 하셨습니다. 명절이 시작되는 첫날에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오고, 또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뭇가지와 시냇가의 버들을 꺾어와 주 너의 하나님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움으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절의 첫날에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모여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그날은 아무 다른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날로부터 시작하여 매일 7일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 7일이 마친 다음날 제8일은 또 다시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큰 집회를 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명절 첫날은 안식하는 날이었고 일주일을 마친 제8일 역시 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7월15일부터 22일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감사의 명절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절을 이렇게 지키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봅니다. 아직 메마르고 거친 광야에서 천막 생활을 하고 있는 방랑객들에게 주시는 내일에 대한 기대감과 소망이 담긴 약속의 말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말씀을 주신 시점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온 지 이제 3개월이 지나 시내 광야에 도착했을 때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법도 중에 하신 말씀이며(출16장), 그리고 출애굽 1년이 지나고 제2년 1월 첫날에(출40:17) 하나님을 위하여 성막을 세우게 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성막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제사의 예법을 가르쳐 주시는 자리에서 초막절에 대한 말씀도 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시작된 광야 여행이었습니다. 그들이 걸어야 할 광야의 길은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거친 길이었습니다. 자칫 오늘의 어려움과 고난의 환경으로 인하여 내일에 대한 소망을 놓치기 쉬운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불볕 같은 태양의 열기와 그 태양빛을 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땅의 기운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거친 광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 삶이지만 이제 이 광야를 지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들어갈 것이니 그날을 기대하며 가슴에 희망을 품고 그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가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기 잘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는 법을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주심으로 자기 백성과 끊임없는 교제를 나누시기 원하시는 사랑이 잘 드러나 보입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리기를 잘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 그들의 나그네 여정에서 늘 함께 하시며 그 길의 친절한 안내자가 되십니다. 여기에 우리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있습니다.
광야의 거친 여행 중 힘들고 곤할 때에는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청하고 부르짖고 매달릴 줄 알지만 먹을 양식이 풍족하고 벽돌로 세운 든든한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잊고 자기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이룬 줄 착각하며 살게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예방책으로 이러한 명절 지키는 법을 자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고기와 향기로운 기름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약속으로 맺어진 사랑스런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 사랑의 울타리 안에 사면서 하나님과 끊임 없는 교제를 나누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참 복이었고 참 즐거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이런 사랑의 계약은 오늘 우리와도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넉넉한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풍성한 꼴을 먹으며 건강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들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풍성한 곡식을 거두고 창고에 저장하는 일을 마쳤을 때 즐거운 잔치가 시작됩니다. 낮에는 하나님 앞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향연이 계속됩니다. 저녁에는 가족과 이웃들이 한 자리에 어울려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집니다. 첫 날에도 그리고 제8일에도 안식하는 날이라고 하셨으니 이날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먹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쉼을 누리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이나 종들도 일하던 손을 멈추고 즐거움에 참여합니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있는 나그네들도 청함을 받아 그 마을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되어 즐거움을 나눕니다.
엿새 동안은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제 칠일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도 마음도 쉼을 얻으며 그날에는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섯 해 동안 땅을 갈며 그 밭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게 하시다가 7년 째 되는 해에는 그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안식일과 안식년을 선포하신 하나님은 사람도 땅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며 더 신뢰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깨달아 알도록 하셨습니다. 일하지 않고 쉼을 누리는 동안 그 산업에 손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든든한 보호와 도우심을 더 잘 경험하게 하십니다.
내가 일하지 않고 쉬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 산업과 가정과 장래를 책임지시고 평안 중에 주를 섬기게 하십니다. 사람이 하루도 쉴 틈이 없이 일함으로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는 것으로 생각지만 쉼이 없는 삶은 부지런함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만이고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는 생각 속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배려가 깃들일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땀을 흘리고 잠을 줄여가며 수고를 할지라도 한 순간의 자연재해와 사고는 우리가 쌓은 모든 공력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합니다. 농부들이 들에서 그 많은 수고를 하지만 하늘의 도움이 없이 수고의 열매를 거두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안식하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그 시간에도 자녀들에게 맡기신 그 산업과 가정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과 명절에 하나님 앞에 모인 백성들이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고생하지 않도록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안식일과 명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맡기는지 시험해보시려는 뜻도 있습니다.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제5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을 주신 하나님은 그 해가 되면 그 동안 종으로 묶여 살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이웃에게 팔렸던 땅을 원래의 주인에 돌려주어 잃어버렸던 생활의 기반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본래 그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었고 그 백성은 과거 애굽에서 종 살이 하던 자유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누리는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매인 것을 풀어주고 묶인 것을 자유하게 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고백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이루신 것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행복은 우리보다 앞 선 분들의 씨 뿌리는 수고와 가꿈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쁨으로 거두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를 위하여 아낌 없이 베푸신 그 눈물과 땀이 있었고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함께 빚어온 사랑의 열매로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있고 오늘의 평안과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이 교회를 위하여 눈물 흘려 기도하고 수고한 수 많은 분들의 헌신과 숨결이 오늘의 평안과 행복을 열매로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강력한 팔이 우리를 감싸 안고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신뢰와 감사가 풍성하게 고백되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 감사절의 정신이 있습니다.
초막절을 지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거기서 일주일간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은 모두 그 초막에 들어가 과거 조상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초막생활 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였습니다. 오늘 풍성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과거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어른들 세대의 삶을 체험하기 위하여 잠시 체험학습을 합니다. 6.25 전쟁을 겪지 못한 우리 세대들은 그 어려운 시절 돌덩이 같이 얼어붙은 차가운 주먹밥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던 어른들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주먹밥 먹기 행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어찌 그 어려운 시절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일을 통해서라도 과거를 교훈 삼아 오늘을 올바로 살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초막은 광야를 여행하는 나그네들에게 임시 거처였습니다. 하나님은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집을 짓고 평안히 살게 될 후손들이 과거 조상들이 걸었던 그 고난의 길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절실히 깨닫게 하십니다. 조상들이 초막 또는 장막을 짓고 임시로 살던 때 그 뜨거운 태양과 밤의 추위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세웠다 거두었다 하기를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임시처소의 삶이 힘이 들고 고달프지만 조금만 더 가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든든한 안식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임시거처의 생활은 언젠가 마쳐질 날이 옵니다. 나그네 삶은 잠시 잠깐이고 곧 영원한 안식처가 우릴 기다립니다.
광야에서 세웠던 임시 거처 초막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거처를 소망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 역시 잠시 거쳐가는 곳이었고 그들이 아름답게 짓고 사는 그 집들도 잠시 머물다 가야 할 임시 거처였습니다. 초막에 들어가 일주일간 살게 하신 하나님은 가나안에 살고 있던 그들이 궁극적으로 소망하고 기대하며 들어가기를 힘쓸 영원한 거처는 이 땅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임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동일한 교훈을 주십니다.
오늘 감사절 아침 그리고 추석 명절에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으로 잔치하며 감사합시다. 감사는 지난 일을 생각함으로부터 나옵니다. 오늘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배움의 기회를 주시고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일터를 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8월 한가이만 같아라’ 하지만 사실 우리의 눈을 조금만 밖으로 돌리면 이 풍성한 계절에 슬픔과 탄식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명절이 다가오는 것이 싫다고 한숨 짓는 외롭고 추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에 너무 벌어진 간격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경제위기 속에 재정적인 고민을 견디다 못해 돈보다 더 소중한 목숨,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기막힌 일들이 너무 흔하게 일어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 어느 때부터인가 인사치레하기 버거운 부담스런 행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함께 모여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멀리서 마음으로만 정을 나누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홀로 유학중인 학생들, 자녀를 멀리 떠나 보낸 부모님들, 육신의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분들, 장래의 문제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 우리는 잘 압니다.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정이 흘러 넘치는 우리의 보호자와 인도자와 구원이십니다.
오늘도 매년처럼 ‘날 구원하신 주 감사’ 찬송을 함께 부르며 말씀을 마치도록 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여호와를 위하여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레 23:33-44 / 김성광 목사
A. 추수감사절에 대하여
1. 추수감사절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고, 깨달음을 받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15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 켐피스(Tomas á kempis ; 1379~1471)는 “하나님은 항상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회학자 스탠디 박사는 “현대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감사불감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가정의 자녀들도 부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사회에 대해서도 감사가 점점 없어집니다. 잃어가고 있는 감사를 추수감사절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달아 위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땅에서는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감사한다면, 그 감사를 통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중 누가 더 많이 감사할 것 같습니까? 감사를 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감사하는 사람들은 건강하지만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잔병을 많이 앓습니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선생님께 감사하는 학생들은 성적도 좋고 모범생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고, 선생님께 감사하지도 않는 학생들은 대부분 성적도 좋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학생들도 감사를 잘 하는 학생들이 우등생이 되고, 모범생이 되고, 장래가 보장되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출세합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의 생활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감사불감증에 걸려 불평과 원망과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건강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유명한 시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 1861~1941)는 동양의 뛰어난 인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많이 하면 행복이 점점 많아지지만 감사를 적게 하면 행복도 적어집니다. 감사를 크게 하면 행복이 커지지만 감사를 작게 하면 행복도 작아집니다.
누가 성공적인 삶을 살고, 행복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누가 얼마나 감사하며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감사하는 사람이 장수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생리학적으로 볼 때 감사하는 사람들이 혈액순환이 잘 되고 소화흡수도 좋아집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혈액순환도 안 되고 소화불량이 됩니다. 모든 질병의 근원이 원망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많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되찾아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신앙생활을 할 때도 감사를 많이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50편 23절 말씀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치 않는 사람은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 예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한국 교회에서도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립니다. 한국에서 어떻게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추수감사절의 근원을 보면 1620년 박해 받던 청교도 교인들 102명이 하나님을 믿고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90여일의 험한 항해 끝에 12월 21일 메사추세츠주 플리머드 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과 병으로 44명이 죽고 58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봄이 되자 농토를 가꾸어서 1621년 가을 첫 수확을 했습니다. 새 땅에서 첫 열매를 거두자 그들은 그 수확물을 재단에 바치고 생명을 지켜주시고 농사를 짓게 해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준 주변의 인디언들도 초청해서 3일 동안 축제를 벌이고 이것이 바로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1789년 헌법 제정을 축하하면서 그 해 11월 26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하였고,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미국의 국경일로 공포했으며, 1941년 미의회에서 추수감사절을 휴일로 공포하면서 추수감사절이 미국의 명절로 정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추수감사절은 1914년 미국 선교사가 교회를 세우면서 추수감사절을 지킬 것을 가르쳤고, 선교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한 날을 기념하여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어떻게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굶주림과 어려움으로 죽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기초는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회사는 성공적인 회사가 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감사하느냐, 감사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과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감사, 깨닫지 못하는 감사를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신앙과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가 되는 초막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초막절을 지키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7대 절기, 즉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을 지킵니다. 이 모든 절기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바라는 절기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이것들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성회를 열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예물을 바치는 즐거운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 중에서 추수가 끝난 다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여 주셔서 추수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초막절은 일 년 중에서 가장 크게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고 감사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성경말씀을 보니 네 가지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풍성한 결실을 얻어서 부요케 됩니다. 두 번째는 대적과 싸워서 승리하고, 세 번째는 창대케 하시고, 네 번째로 평화로운 삶의 축복을 주신다고 레위기 26장 3~13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맞아,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고난, 질병,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심을 감사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 주셔서 농사나, 사업,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심을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내년에는 더욱 큰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위하여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여호와를 위하여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여호와께 헌물과 예물을 드려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여호와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줄을 대대로 알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B. 여호와를 위하여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 여호와를 위하여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 절기, 예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동안 지킬 것이라”(레 23:33~34)
레위기 23장 34절 말씀을 보면, 초막절을 ‘여호와를 위하여’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초막절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칠일동안 매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자녀들과 노비,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를 초청해서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또 각 가정은 초막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감사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자녀들이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 중에서 아주 큰 죄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2절 말씀에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사의 절기를 지키는 자에게는 모든 열방에서 적군을 다 쫓아내고 지경을 넓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업도, 직장도 확장되게 만들어 주시고, 또 아무사람도 그의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15절 말씀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복 받을 것을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여 주십니다.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현재에도 역사하시고 미래에도 역사하시고 축복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감사절이 없다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을 하겠습니까? 감사절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감사절을 통해서 다시 한번 잃어버린 감사를 되찾고 우리 삶에 감사를 통한 풍족함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하버드대학의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미국의 이혼율이 점점 증가해서 세 가정 당 한 가정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두 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천 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가지 않는 가정은 세 가정, 혹은 두 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을 하는데,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가정은 천 가정 중에 한 가정이 이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을 통해서 평강과 안전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과 은혜인 줄 모릅니다.
미국의 샌디에고에서 ‘노조미’라고 하는 큰 식당을 운영하고 계시는 한덕무 집사님은 많은 축복을 받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14년 전에 미국에 처음 이민을 갔을 때부터 식당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과 자동차 판매업을 하였는데,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에 집사임에도 불구하고 주일도 지키지 않고 일을 했고,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까워서 모두 저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저축이 늘지 않고 빚만 늘어가고, 적자에 허덕이다가 부도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민을 하다가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일날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십일조도 안 드리고 저축을 하는데, 그러면 더 잘돼야 하는데 망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얘기를 들은 목사님께서는 공장을 팔아서 빚을 갚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은 모두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씀대로 하던 사업을 다 정리하여 빚을 갚았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형님 댁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축복을 주시면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주일에는 가게를 열지 않고 꼭 주일을 지키고,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
그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6개월 후에, 6개월째 장사가 안 되어 비어있는 가게를 믿음으로 계약을 하고, 돈이 없어서 실내 장식을 손수 꾸며 식당을 시작했습니다. 당장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는 매일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에 충성하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술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식당이 맛이 좋고, 친절하고, 예수 진짜 잘 믿는 집사가 경영을 한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이 모여들자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드리는 축복받은 신앙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혹시 미국의 샌디에고에 가게 되면 ‘노조미’라는 식당에 가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는 사람, 충성하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재물의 축복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형통케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께 헌물과 예물을 드려라 - 예물, 감사헌금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레 23:37~38)
하나님께서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번제는 짐승을 태워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고, 소제는 곡식예물을 드려서 희생적인 봉사를 나타내는 것이고, 희생은 동물의 피를 흘려서 속죄를 나타내는 것이고, 전제는 포도주를 부어서 순교와 죽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레위기 23장 38절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헌물 외에,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모든 낙헌 예물 외에,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평소에 드리는 네 가지 예물 말고 별도로 특별히 추수감사절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일년 동안 지키고 보호하시고 함께 해 주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별도로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신명기 16장 17절 말씀에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축복 받은 것에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신앙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18~19절 말씀에도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채워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써야 할 일들이 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늘나라의 적금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세금이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보험금이 됩니다. 하나님께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축복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물을 드린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축복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손을 번창케 하십니다.(창 22:13, 17) 다른 일이 잘 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출 20:24) 재앙이 그칩니다.(삼하 24:25) 형통하게 됩니다.(대하 31:10) 차고 넘치도록 축복하시고(말 3:10),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고후 9:7)
순종하는 자와 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순종치 않고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말만으로 감사하는 것은 온전한 감사가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몸과 마음과 물질까지 바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사님 존 웨슬리(John Wesley ; 1703~1791)는 “감사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표시”라고 말했습니다. 몸과 마음과 예물까지 바쳐서 하나님께 감사할 때 진정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는 것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안면몰수형은 감사한다고 하면서 전혀 예물을 드리지 않는 성도를 가리킨 말입니다. 체면유지형 성도는 적당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대통감사형은 무조건 미리 믿고 감사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 감사가 진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크게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는 동기가 됩니다.
■ 이영숙(여, 54세)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먹는 욕심이 많았던 그는 너무 욕심이 많아 숨이 찰 때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5세가 되었을 때, 혈압이 오르고 몸에 기운이 빠져 병원에 갔더니 ‘당뇨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뇨병을 고치기 위해 식이요법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당뇨병은 낫지를 않고 수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당뇨병 때문에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혈압이 올랐습니다. 어지럽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눈도 점점 침침해져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병원에 찾아가 조사해보니 당뇨병 합병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년 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직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짐을 챙겨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주사와 약을 모두 버리고 3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 3일 동안 하루 다섯 번 있는 예배에 모두 참석하고 예배드릴 때마다 약과 주사의 가격을 계산하여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눈물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3일 금식이 끝나고 보호식을 하려고 식당에 앉아있는데 그의 눈에 예수님의 사진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예수님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깜짝 놀라자, “네가 눈물을 흘릴 때 나는 피눈물을 흘린단다.”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앞이 보이지 않던 눈이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보호식을 하였더니 소화도 잘 되고 혈압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어지러운 것도 없어지고 몸이 편안해졌습니다.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니 당뇨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는 이제 한 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까지 바쳐서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응답과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 둥 마는 둥 하며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겉으로만 감사하는 척하는 것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헌물과 예물을 드려서 물질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몸을 드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드려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호와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줄을 대대로 알게 하라
-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은혜를 대대로 기억하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레 23:42~4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칠일동안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생활하며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고생했던 일을 직접 체험하고 후손에게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추수감사절 하루만 예배를 드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주일 동안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아 재무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23장 43절 말씀을 보면,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자손 대대로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대대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하고 체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까지 초막에 거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역사를 깨닫게 하고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구원과 역사를 기억해서 기념하게 하고 영적인 신앙과 유산을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즘 부모들은 재산만 물려주면 그들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산보다 더 큰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 앞에 축복받은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하는데, 자녀들은 부모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그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하고 감사치 않습니다. 그럼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추수감사절을 가르쳐주는 부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4장 9절 말씀을 보면 아들들과 손자들에게도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뿐 아니라 손자들에게까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쳐주고(출 10:2),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쳐주고(출 12:26,27),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주고(신 4:10),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고(신 6:6~9),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올바로 행하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잠 22:6)
미국은 큰 사고를 당할 때마다 조상들의 신앙을 깨달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작년 테러사건 이후 미국의 교회는 두 배 이상 부흥했다고 합니다. 모두들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도 자주 나오고 성경도 많이 읽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여러분, 은혜와 축복 받은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으면 그것은 건망증입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의사가 건망증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보다 건망증이 3~6배가량 더 심하다고 합니다.
어떤 여자는 남편이 중요한 서류를 집에 놓고 왔다고 가져다 달라고 하니까 택시까지 타고 얼른 달려 왔는데 깜빡 잊고 서류는 집에 놓고 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여자는 고3 수험생 아들에게 도시락을 싸주려고 맛있는 반찬을 많이 만들었는데, 아들이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어보니 그 안이 텅 비어있더랍니다. 깜빡 잊고 도시락을 싸지 않고 빈 도시락으로 보낸 것입니다. 또 어떤 여자는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쇼핑을 한 후에 그 사실을 잊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더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축복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건망증으로 그것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편의 도움, 아내의 도움,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를 망각하는 사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망각하고 감사치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확실히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많이 키웁니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도 있고,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와 고양이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하다가도 한 가지를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주는 것 때문에 주인을 잘 따르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반면 고양이는 열 가지 잘해주다가 한 가지를 잘못하면 열 번 잘해준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 한번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을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강아지 교인과 고양이 교인이 있습니다. 고양이 교인은 하나님께서 열 가지 축복을 주셨는데도 하나가 맘에 안들면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아지 교인은 열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한 가지 축복을 주시면 그것에 감사해서 교회에 충성합니다.
여러분은 강아지 교인입니까? 고양이 교인입니까?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에 감사하면 큰 일을 주시고,큰 일에 감사하면 더 큰 것을 주십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감사치 못하는 감사불감증으로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감사하지 못해서 가정이 불행해지고 사업이 안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까? 이번 추수감사절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물질을 통해 크게 감사하여 크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이상업 치안감의 간증입니다. 그는 친가로는 4대, 외가로는 5대째 신앙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늘 교회 마당을 쓸고 잡초도 뽑고 마룻바닥에 걸레질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새벽예배에 나가 새벽 종도 치면서 자랐습니다.
그는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력자원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정으로 임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경찰 생활을 하면서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는커녕 주일에도 나가지 않고, 술, 담배를 하면서 교회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1남 2녀 중 막내인 아들인 생후 20개월 만에 ‘선천성 대사 이상’으로 ‘페닐켈톤뇨증’이라는 불치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이 질병은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해서 뇌 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는 병입니다.
그는 기가 막혔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나 싶었지만 하나님께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잊고 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새벽기도를 드린 지 세 달 만에 아들이 건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은 깨끗이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다면서 계속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동료들에게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며 한국 경찰기독신우연합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장으로 경찰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 훈장과 포장을 30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기지방경찰청 치안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한국 경찰이 국민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민중의 지팡이가 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새벽기도 나가서 교회 종을 치던 소년이 장성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으로 갔다가 회개하고 돌아와 불치병 걸린 아들이 고침 받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C. 추수감사절을 맞아 절기를 지키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여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잃어버린 감사를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바쳐서 감사의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 정성껏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자손이 번창하는 축복을 주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아 주십니다.
초막에서 드리는 감사
레 23:33-44 / 한대근 목사
벌써 2002년을 마무리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짓던 날도 어제의 일이 되고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계절을 맞이한 것입니다. [테이스트 베리(Taste-berry)]라는 열매가 있는데 그 열매를 먹으면 몇 시간 동안은 어떤 음식을 먹든지 달고 맛있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심지어 떫고 신 열매를 먹어도 달고 맛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항상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하는 좋은 열매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라고 하는 열매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자신에게나 남들에게 항상 좋은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주를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한 해의 막바지에서 '추수감사절'을 통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마무리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본래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에 정착하여 인디언으로부터 배운 농사기술로 첫 열매를 거둔 후에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에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추수감사절이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이 만들어진 미국인들만의 절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미 추수감사절을 지킬 것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이 비록 미국에 정착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시작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근본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지켜졌는데,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나아서 올리브가지나, 종려가지 등을 잘라 다가 초막을 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수카]라고 부르는데, 초막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일주일동안 온 식구들이 [수카]에 들어가 생활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초막에서 추수감사절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에서 드리는 감사'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고통의 한 복판에서 내 삶을 지휘하시는 하나님
첫째로, 초막절은 고통의 한 복판에서 내 삶을 지휘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40년간을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생활을 했던 것을 되돌아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42,4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세월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시편 107:4-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그들의 광야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웠던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애굽을 나오기만 하면 천국이 될 줄 알았는데, 그들 앞에 펼쳐진 황량한 사막을 보면서 그들은 갈길 몰라 방황하였고, 거할 성을 찾지 못해 애를 쓰고, 주리고 목마르고, 근심 중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광야의 생활이 괴롭고 힘겹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기둥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였으며,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가야 할 목표와 방향을 알려주어서 걸음마다 안전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 주셔서 배고프지 않게 하셨고 반석에서 샘물을 솟게 하셔서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이 광야의 많은 대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에 그들을 대신하여 싸워 주심으로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즉 광야라고 하는 고통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지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모질고 아픈 기억이었지만, 바로 그 고통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을 책임지고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들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었지만, 일년에 한 차례씩 초막을 짓고 그 곳에서 광야를 회상하며서, 자신들의 삶을 친히 지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과 과거를 감사하며 기억하고 싶은 좋은 일과 마지못해 받아들이거나 잊어버려야 할 아픈 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기억 속에서 좋은 일들은 감사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하고 드러내고 자랑하려 하지만, 나쁜 기억들은 아예 잊어버림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서 지워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꽤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이런 사고는 미래의 삶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 전체를 끌어안고 계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좋을 때만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좋지 않은 상황속에서도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감사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을 선물로 여기고 고맙게 산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모든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임재가 있음을 믿기 때문에,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일과 아픈 일, 거룩한 부분과 거룩하지 않은 부분을 가리지 않고 삶 전체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들 가운데서 광야를 지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가 걸어온 광야의 시간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광야와 같은 위기와 역경들, 그리고 위험한 순간들을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게 하셨습니까?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손길이, 고통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휘하시고 인도하셨기에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지나온 광야의 시간들이 만들어낸 축복의 자리인 것이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초막에서 드리는 감사란 고통의 한 복판에서 내 삶을 지휘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
두 번째로, 초막절은 그 동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을 생활합니다. 모래바람, 뱀과 전갈, 한낮의 뜨거운 태양 볕과 한밤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있는 황량한 사막에서 초막을 짓고 불편하게 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풍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광야 40년간의 모진 고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숨결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조상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들이 잘 구비된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의 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도꼭지를 돌리면 곧바로 물이 나옵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곧바로 전등불이 방안을 환하게 비춥니다. 벨브를 누르면 가스렌지에 불이 켜집니다. 쌀통을 열면 쌀이 준비되어 있고, 냉장고를 열면 각종 먹거리가 가득합니다. 참으로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감사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수도꼭지를 돌리자마자 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어두워지는 저녁에 전등불을 키면서 감사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가스렌지에 밥솥을 올려놓고 불을 키면서 감사하다고 말해본 적이 있습니까? 시장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고르면서 이것저것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찬송해본 적 있습니까? 많이 없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들은 우리가 그 동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은혜를 당연히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구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았다고 해봅시다. 그때, 선물을 받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내가 평소에 당신에게 잘 해 주었고, 당신은 나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내가 당신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선물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에 대해서 깊은 감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적에 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들이 자식들 낳아서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놓고 나면, 이제 생애를 마쳐야 하는 시기에 다다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장해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또 성도님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부모란 결국 자식을 위해 다 쏟고 죽는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모의 헌신과 희생과 사랑은 절대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부모의 희생이나 헌신과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자신들의 요구대로 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막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이 있는 곳을 생각하면서 여행 코스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각 가정마다 상수도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물을 구하는 것은 별로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특히 매일 먹는 밥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식탁에 오르는 밥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의 이면에는 수많은 이들의 숨겨진 수고가 있습니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나오기까지 샘을 판 이들의 수고가 있습니다.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밤낮으로 터빈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스렌지의 불은 저 심해의 가스 유전으로부터 뽑아 올린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공급해주는 사람들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고가 있습니까? 우리의 식탁에 매일 오르는 밥 한끼에는 쌀을 만들기 위해수고한 농민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배어 있습니다. 결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희생이 있고, 또한 그들을 움직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앞둔 한 주간을 그 동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여기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여기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눈물을 흘린 신진들의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여기에는 부모님들의 진액을 쏟은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선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한다면 어찌 그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천국, 하나님 나라
끝으로 초막절은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을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집을 떠나서 사막 한 가운데서 야영을 합니다. 일주일간이라는 일시적인 시간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정과 욕망과 안정의 중심이었던 집을 잠시 떠나 그 동안 애착을 가지고 있던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집을 떠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이 육체의 집을 떠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랑하며 살던 가족들을 떠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입니다. 하늘의 섭리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모두가 다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으로 이사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나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아름다운 천국에 영원한 집을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찬송 222장 4절] 할렐루야! 우리가 이 시대 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의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곤고해지고 피폐해집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집착하느라 감사는커녕, 주어진 축복마저 근심으로 바꾸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초막을 짓고 그곳으로 이사가서 내가 그 동안 붙잡고 집착하던 것들과 떨어져서 영원한 천국 바라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가 집착하던 삶의 욕심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추수감사절이 되시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절기의 헌신
레위기 23:33-44 / 이철신 목사
논지 : 절기에는 하나님께 헌신하여 예배 드리고, 사람에게 헌신하여 나누고, 함께 즐거워 하는 일을 합니다.
가. 초막절 성회 – 하나님께 헌신(33-38)
1. 추석에는 어느 집이든 송편을 만들어서 먹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송편을 먹을 때 가장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송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였습니다. 송편 안에는 깨가 들은 것도 있고, 밤이 들어간 것도 있고, 콩이 들어간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뭐가 제일 좋습니까? 뭐니뭐니해도 깨죠?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송편을 딱 깨물었을 때에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집니다. 어쩌다 콩을 씹게 되면 기분이 나쁘고, 깨를 씹으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일년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명절이 추석입니다. 오늘 성경에 유대인들의 명절 가운데 초막절이 나오는 데 이 초막절은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명절입니다. 초막절은 곡식과 과일을 수확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이 끝나고 나면 우기가 옵니다. 우기가 오면 농사도 짓지 못하고 활동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수확한 모든 것들을 저장하는 명절이 초막절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또 초막절은 일년 농사의 절기가 순환되는 농사력 중에서 새로운 농사력이 시작되는 절기였습니다. 풍성한 수확물이 있는 풍요의 계절이면서, 일년의 농사절기의 마지막을 보내고 새로운 농사력이 시작되는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풍성하게 모든 농사지은 것을 수확하는 풍요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농사력이 새로 시작되는 전환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요한 명절이고 계절이 순환되는 명절이라 사람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절이었습니다.
2. 이 명절은 성회를 여는 것으로 시작하고 성회를 여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성회를 열고 7일 동안 명절을 지낸 다음에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8일째에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노동을 안하고 성회를 엽니다(36). 이 성회를 여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성회만 했습니다. 피곤에 지치도록 힘들게 일하던 것을 쉬고, 육체의 휴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 동안에는 나를 위해서만 시간을 사용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만 시간을 사용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내 존재와 내 생명과 내 소유를 모두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8일 째 되는 날은 거룩한 대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6). 대회라는 것은 매우 큰 성회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 대회 때에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두 참여합니다. 모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날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매주일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1년 52주 성수주일합니다만, 또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해서 가끔 교회에 나오는데 성탄절이나 부활절과 같은 중요한 절기 때에는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합니다. 제가 그런 분들을 볼 때에 마치 일년에 한 번 하나님께 문안 삼아 나오시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중요한 절기 때에는 빠짐없이 다 모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3.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이렇게 3대 명절이 있었는데, 이 명절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기 위해서 먼 거리를 순례했습니다. 이 일은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시간을 완전히 드리고 내 삶 전체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또 초막절 성회 때에는 각종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속죄제, 화목제, 서원제를 드린다든지 여러 가지 명목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절기의 성회 때에는 일상적인 제물 외에도 특별한 제물을 드렸습니다(38). 율법에 규정된 데에 따라서 번제, 소제, 전제 등 특별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명절 절기 성회에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더 많은 제물을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요를 주셨기 때문에, 더 많이 하나님께 감사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나. 초막절 잔치 – 사람에게 헌신(39-41)
1. 초막절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에게도 헌신하는 명절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추수 감사 절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농작물을 수확하여 풍요를 누리는 절기입니다. 이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도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풍성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이웃들이 모두 모여서 잔치하며 즐거워합니다. 풍성한 음식을 먹고 즐기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기며 함께 웃고 대화하면서 즐기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 가운데 하나가 함께 모여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잘 합니다. 혼자서 TV나 컴퓨터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요즘엔 손바닥만한 휴대폰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혼자서는 즐거워하는데, 가족이나 친구들이 함께 모여서 즐거워하는 것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하는 놀이도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윷놀이나 널뛰기, 투호 같은 건전한 민속놀이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모이기만 하면 화투만 맨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화투가 사행심과 도박성이 강한 불건전한 놀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만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점점 가족과 이웃사이의 공동체성이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초막절은 모두가 함께 모여서 한 공동체로서 잔치하고 즐거워하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풍요를 누리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풍요를 누릴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어서 함께 누리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신명기 16:14은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고아와 과부, 외롭고 쓸쓸한 나그네, 농토를 기업으로 분배 받지 못해서 수확물이 없는 레위인, 천하게 무시되고 소외되는 노예 등, 잔치를 벌일 수 없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같이 음식을 나누어 주고, 즐거움을 함께 누리라는 것입니다. 나의 풍요와 즐거움에 도취되어서, 혼자만 즐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 가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즐거울 때에 더더욱 우울하고 쓸쓸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도 풍요와 즐거움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추석을 앞두고 태풍과 수재가 있어서 그만 추석의 기쁨과 즐거움이 반감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수재를 당한 분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한해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쓸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돌이나 모래, 자갈들이 농토에 잔뜩 들어가 박혀서 다시 농토를 되살리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추수할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이 무너져서 잘 곳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또 가족들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풍요해야 할 계절에 쓸쓸하고 우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에서 총회를 열 때에 이번 수해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강원동노회 목사님, 장로님들을 초청하여 우리 교회에서 점심을 대접하면서 위로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그 분들에게 들었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무너지거나 혹은 일부 무너진 교회, 사택이 완전히 무너지거나 혹은 일부 무너진 교회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사택이 산사태로 인해 완전히 무너졌는데, 방안에 목사님 가족 4명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황급히 뛰어나갔지만 목사님과 사모님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태가 나서 벽이 점점 무너져 오는데 갑자기 냉장고가 구석으로 확 쓸려가다 멈춰 섰는데, 다행히도 그 틈에 공간이 생겨서 다치기는 했지만, 생명을 건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수재를 돕는 일들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무너진 교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조금 더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금 조사하는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명절에 오늘 성경은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헌신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초막절의 의미
1. 그 다음 세 번째로 초막절의 특별한 의미를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은 다른 절기와 달리 색다른 풍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집에서 나와서 들에 다가 종려나무 가지 등을 꺾어서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만들어 거기서 7일 동안을 지내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편안한 집에서 나와서 불편한 오두막에서 7일 동안 지내는 것입니다(40,42).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꿔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43절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유리방황하면서 고생하던 것을 기억하고 7일 동안 살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역사를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면서 유리방황하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그 어려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초막에서 살던 때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금 초막에 들어가 살면서 과거를 다시 체험해 보는 것입니다.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들판에 나가서 오두막을 짓고 거기서 불편하고 힘들고 험하게 생활해 나갈 때에 아마 과거의 역사를 결코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의 큰 약점이 하나 있는데, 그 약점은 과거의 역사를 쉽게 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잊어버리다 보니까 과거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그러한 실수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는데, 잊어버리니까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또 다시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이공원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북적댑니까? 그런데 독립기념관과 같은 역사의 현장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유지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약점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여러 부서별로 국내성지순례라고 해서 용인 순교자 기념관이나 제암리 교회, 여수 애양원과 같은 여러 가지 역사의 현장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아서 순교를 당한 분들의 유적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기까지 한 선배들의 신앙을 배워보는 것입니다.
2. 초막 절기 7일 동안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서 나와서 초막에서 살 때, 빈부귀천이 모두 사라지고 사람들이 모두 평등해 지는 것입니다. 큰 집을 짓고 부유하게 살던 사람들도 7일 동안은 오두막을 짓고 삽니다. 어려운 가정인 사람도 7일 동안 오두막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급과 소유의 격차가 일시적으로 정지되고,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기간이 바로 이 기간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빈부귀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빈부귀천의 격차가 너무 현격하게 커져 버리면 민족의 동질성이나 사회의 유대감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민족, 그 사회에 있어서 굉장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빈부의 격차를 줄여서 민족의 동질성이나 사회의 유대감을 늘 유지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초막절 같은 명절은 그런 것에 기여하는 명절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동질성과 유대감이 확인되고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한 백성이고, 한 민족이라는 것이 확인되는 기간인 것입니다.
또한 자기 집에서의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을 떠나서 초막에서의 거칠고 불편한 삶을 살 때,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너무 안일한 삶에 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 깨닫게 되고, 근신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려분, 이것은 일종의 신앙수련회와 비슷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름에 산상기도회를 하지 않습니까? 산상기도회를 하면, 우리 기도원이 4-500명 밖에 수용할 수 없는 시설인데 한 2000여명이 사용하니까 잠자리도 비좁고 식당도 좁아서 길게 늘어진 줄을 서서 밥을 타고는 나무 밑에 쭈그려 앉아서 먹어야 하고 씻을 데도 없고 화장실도 적으니 여러 가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편안한 집을 떠나 며칠동안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신앙훈련을 받을 때, 그것은 일종의 내 삶을 훈련하는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안일하게 안주했던 삶을 돌이켜 보고 근신하며 절제하는 삶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삶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힘든 환경 속에서 사는 이 경험을 통해서 현재 나의 삶이 너무 편안하지 않았는가를 깨닫게 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삶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또한 초막에서 7일 동안 지내다가, 명절이 끝나게 되면 지내던 오두막을 모두 헐어 없애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일시적이고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 땅에 우리가 집착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가운데 바라보는 신앙훈련을 하게 됩니다. 초막절에 자기가 살던 집에서 나와서 들에서 7일 동안 생활하는 동안에 생활방식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편안한 생활을 희생하고 거칠고 험한 생활을 체험함으로써 내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막절이란 명절은 이렇게 농사한 것을 다 수확하여 풍요를 누리는 명절이지만, 동시에 세가지 방면에서 헌신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풍요의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제물을 드리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명절이었습니다. 또 이 절기에는 풍요의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소외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풍성한 소유를 나누고 베풀어서 함께 즐기는,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명절입니다. 또 이 명절은 편안하게 살던 내 집에서 나와서 초막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광야 생활의 어려움 중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기억하는, 그래서 내 생활 전체를 헌신하는 명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풍요를 즐기는 이 추석 명절에 풍요를 즐기면서도 헌신하는 명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초막절
레 23:33-44
본문은 초막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초막절은 3대 명절 중의 하나로 모든 남자들이 참예할 수 있는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의 기본적인 성격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초막절의 영적 교훈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초막절의 규례 초막절은 7월 15일에 거행되는 행사입니다. 그것은 칠일 동안 계속되어 지켜져야 합니다(34절). 이것은 속죄일이 지난지 5일만에 거행되는 행사로 깊은 반성과 슬픔을 지난 후 기쁨의 자리에 참예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 입니다. 초막절 첫 날과 끝 날은 안식일로 지키며 거룩하고 성스러운 날로 지켜졌습니다. 이 절기의 7일 동안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곧 여인이나 어린이들도 집을 떠나 울창한 나무, 특히 증려나무 가지로 엮어 만든 초막에서 지내야 했습니다(40-42절).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했습니다(4절). 그들은 춤을 추고 하나님께 찬양 하는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사용하여 그 날의 즐거움을 표현했습니다.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중의 현자와 장로들도 성소의 들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2. 초막절의 의의 본문 4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 이니라” 즉 광야에서 천막 생활을 했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초막절을 지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초는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심한 노역과 괴로움을 당하여야만 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출 1:8-11)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은 자유의 사건이요, 해방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여정 중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시고 인도 하셨습니다. 초막절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데 그 근본적인 의의가 있는 것 입니다. 사람들은 망각을 잘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받을 때만 감사하지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 대한 감사도 없고 잊혀지기 조차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복음서에서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눅 17:11-19에 고침받은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다가 한 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였습니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예수님께서 는 가서 제사장에게 나은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그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다가 자신들이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뻤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에 대해 사례를 표시한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열 명 중 한 사람만이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흡은 어디 있느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데서 증진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신앙의 소멸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일수록 어려운 일을 당할 때나, 좋은 일을 당할 때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초막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 하면서 기뻐하는 과정이 초막절 절기 동안 계속 진행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이러한 초막절이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초막절의 영적 의미 초막절은 장막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 하고 감사하는 절기 입니다. 영적인 의민에서 볼 때 이 초막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스가랴서 11장 16절에는 하나님의 예배가 이 초막절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의미에서 초막절은 무엇입니까 (1) 첫째, 그것은 우리가 살 곳은 이 세상이 아니고 오히려 이 세상과 단절하고 영원한 도성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장막에 거함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목표는 장막 자체가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의 궁극적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장막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마치 영원한 집인양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초막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장막이며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천국에 인도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마음속에 두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초막절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회상하면서 우리의 진정한 처소는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기억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기뻐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어떠한 환경이든지 그의 기쁨을 뺏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깊은 감옥 속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기뻐하라고 권할 정도였습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빌 3:1) 무엇이 이토록 바울을 기뻐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그렇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초막절은 속죄일이 있은 후 5일 후에 거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죄를 속하심을 입었다면 초막절은 기쁨절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값없이 사하신 은혜입니다. 참다운 속죄, 완전한 속죄를 주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기쁨에 다 동참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초막절
레 23:33-44
1) 초막절의 문자적 의미
초막절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그 하숰코트'( )는 '하그'( )와 '하숰코트'( )의 합성어이다. 먼저 '하그'( )는 '축제일', '경축일'을 뜻하는 것으로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기념하는 날'을 뜻하며, '하숰코트'( )는 '그'(the)를 뜻하는 정관사 '하'( )에 '덮는다', '보호한다', '덮는 것을 둔다'를 뜻하는 '사카크'( )라는 어근에서 파생된 '숰코트'( )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그 오두막' 또는 '그 초막'을 뜻한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그 하숰코트'( )는 '초막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의미이다.
2) 초막절의 기원
초막절은 그 기원을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둔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 생활 40 년 동안 장막에서 거하였는데 그 때 장막 위에 사용한 나뭇가지와 장막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절기였던 것이다. 이 초막절의 절기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도 시행되었으며(겔45:25,호12:9), 포로 후에도 지켜졌고(느8:13-18,슥14:16-19), 신약 시대에도 예수님에 의해 행해졌다(요7:2,8). 그러므로 초막절은 광야 시대 때부터 중단되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져 내려온 전통적인 절기이다.
3) 초막절의 시행 규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추수의 절기는 모두 둘이다. 하나는 보리와 밀의 추수인 '맥추절' 즉 '오순절'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해의 최종 추수 절기 즉 모든 곡식과 과일을 거둬들이는 '초막절'(장막절,수장절)이었다. 초막절은 7 월 15 일부터 시작되어 칠 일간 계속되었는데(출23:16,17,34:22) 첫 날과 칠 일이 지난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름다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했으며(레23:40),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기록한 바를 따라 지붕 위나 성막 뜰 혹은 수문 광장이나 에브라임 광장에 장막을 짓고 거했다. 이 기간동안에는 매일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했으며 매일 화제를 드려야 했는데(민29:12-40) 이 때 드려진 매일의 제물이 각각 달랐다.
4) 초막절에 대한 영적 의미
초막절은 농산물의 최종 수확기인 7 월 15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초막절은 보리 추수의 맥추절처럼 '추수'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초막절은 '모든 수확을 거두어 창고에 저장하는 가을 추수처럼 복음의 전파와 그로 인해 열매 맺는 영적인 과실들이 하늘나라의 천국 곳간에 쌓이는 것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요4:36)고 증거 하셨고, 계 14:14-20절에서도 심판을 추수로 비유한 후 천사가 땅 위의 사람들 즉 곡식을 수확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초막절의 추수와 오순절의 추수는 그 의미가 다르다.
즉, 오순절의 추수가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복음 전파의 시작, 즉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면, 초막절의 추수는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와 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서 초막절이 맨 마지막에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합리적이며 적당한 배치이다. 한편 초막절의 또다른 의미는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 대한 상징'인데 이스라엘이 40 년 동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것처럼 '이 땅의 생활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닌 나그네 생활일 뿐임을 묵시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특징
1. 초막(23:34, 42-44) / 속죄일 다음에 따르는 절기로 7월 15일부터 22일 까지 7일간 지켰다. 이기간 동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에서 거하였다. 그래서 초막절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부러 나무조각을 만들어 야외에서 뜰이나 밭에서 추수하며 살았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던 때를 기념하는 것임으로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부른다.
2. 감사절(23:39-40) / 포도수확과 모든 곡식을 창고에 거두어 드리고 난 다음이라 온갖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3. 즐거운 절기(23:39-40) / 초막절에는 종려나무와 버드나무가지를 흔드는데 이것은 즐거움을 뜻한다. 추수의 기쁨과 하나님이 초막에 함께 하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즐겁게 지냈던 절기였다.
4, 제사 (23:34-37) / 초막절에는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5, 상징 /초 막절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어디가나 영원히 살 곳은 없다. 안주할 휴식처나 안식처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도상일 뿐이다. 우리의 일시적인 처소는 초막이며 영원한 고향은 하늘나라이다.
초막절과 성도의 관계
레위기 23:39-44 / 박성복 목사
오늘 성경에 보면 절기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절기는 3대 절기밖에 없지요?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인데 이 3대 절기를 대대로 지키되 자식들까지 온 식구가 몽땅 한자리에 와서 지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다른 교회에서는 오늘을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뭐가 없는지 오늘 새벽 예배 때에 말씀드렸는데 첫 열매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됩니까? 3대 절기중에 유월절에도 첫 열매가 나오는데 부활의 첫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월절은 3대 절기 중에 제일 먼저 드리는데 봄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다음에는 칠칠절로 신약엔 오순절인데 역시 첫 열매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첫열매로 나옵니다. 그다음의 절기가 초막절인데 이 때는 추수를 해서 다 저장해서 들여놓았다고 해서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신약에서 이뤄지지 않았고 첫 열매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가면서 광야에서 농사를 안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얼마만큼 중요한 절기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요? 붕어빵에 붕어가 없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첫 열매가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새벽 예배때에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세상에, 오늘 새벽에는 외국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실시간 예배 방송을 들었습니다. 제가 오늘 새벽에도 말했습니다마는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청교도들이 ‘오월의 꽃’이라는 이름의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이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간 곳이 아메리카 신대륙입니다. 여러분, 그것도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기분 나쁘면 예수 안 믿고 기분 좋으면 교회 나오고 한다면 이는 바른 신앙인이 해야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들어오게 된데에는 그와같은 많은 생명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신앙을 마무리 짓는 이 마당에서 그들에게 보답하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왜 추수감사절을 강조하지 아니하고 초막절을 강조하느냐면 오늘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초막절의 첫 열매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오늘 설교 제목이 새벽에 바뀌어버렸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바꿔서 ‘초막절과 성도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라고 하면 초막절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은 그냥 한해의 축복에 대하여 고맙고 감사해서 예물을 드리고 합니다. 그러나 초막절이라고 하면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3대 절기를 약속해주었는데 신약에 와서 안 이루어진 절기가 이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루어졌고 첫 열매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 가 보세요. 절기의 첫 열매를 모릅니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하면서 유월절의 부활의 첫열매 밖에 모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 물어보면 모릅니다. 이미 로마서 8장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된 우리까지라도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의 첫 열매된 사도들이 뭐가 답답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겠습니까? 기독교 육천년 역사에서 최고의 큰 역사와 그 아름다움이 몸의 구속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3절기를 말씀하신 구약 성경에서는 절기를 정해주었고 신약에서는 그 절기가 이루어지는데 유월절과 오순절은 이루어졌는데 하나가 딱 남았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이 남은 한 절기는 반드시 나와 관계되어야 됩니다. 제가 집회에 나가서도 늘 얘기하지만 우리 동인교회 교인은 말씀 사상이 꽉 들어와야 됩니다. 말씀 사상이라야 세상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좌경 사상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내 마음이 요동이 안 됩니다”라고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좌경이 내 속에 들어가면 안 빠져나갑니다. 하나님의 불의 역사가 아니고는 그거 안 빠져나갑니다. 왜 제가 이런 소리를 다른 교회보다 더 강조 하냐면 고향 가는 데는 순수해야 돼요. 말씀을 꽉 붙들어야 돼요. 그러기 때문에 제가 언제나 이 절기 설교 때마다 말씀을 드리지만 부활절도 나와 관계가 됩니다. 첫 열매는 주님이지마는 그 부활하신 주님과 나와 관계를 안 맺으면 그 나라 가는데 문제가 됩니다. 또한 칠칠절인 오순절도 나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가 나와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초막절은 늦은 비 성령으로서 열매가 열려야 됩니다. 그러면 봐 보십시오.
유월절 역사를 봐도 구약의 유월절에 양을 잡았는데 그것이 어린양으로서 예수가 이 땅 위에 내려왔습니다. 주님이 유월절 양으로 온 것입니다. 그 유월절 양은 예수 외에 다른 양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유월절 날 주님이 선택해서 죽는 것은 구약 유월절은 모형이고 신약의 유월절이 실제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얘기하지 않습니까? 예수의 피는 어느 날 돌아가셔도 죄 사하는 데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유월절을 택하여 돌아가셨냐면 구약의 유월절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이 얼마나 오묘한 진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허락한 영생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귀가 자꾸 그 말씀을 못 받도록 채트립니다. 그리고 진리가 아닌 것은 믿게 하고 진리인 것은 못 믿게 합니다. 이것의 시작이 에덴동산입니다. 이 말씀도 지금 내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핑핑핑 지나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믿어야 되는데, 옛 뱀인 마귀가 들어와서는 못 믿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믿게 합니다. 즉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미혹하는데 그게 믿어집니다. 여러분, 마귀는 못 믿을 것을 믿게 하고 믿을 것을 못 믿게 합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이 말씀이 믿어져야 되는데 안 믿어지게 하는 것은 뭐가 접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됩니까? 말씀을 안 믿어지게 하는 것은 뭐가 접촉이 되기 때문에 안 믿어집니다. 믿어지게 하는 것도 무엇이 접촉하기 때문에 믿어지게 하는데, 성령님의 접촉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첫 열매가 돼야 됩니다. 그래서 계시록14장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들 가운데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 속한자라”고 했는데 여기 첫 열매가 나옵니다. 우리 동인교회에 오늘 이 예배 참석하신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3대 절기를 지키라고 했는데, 구약에는 그들이 지켰지만 신약에는 두 절기만 이루어지고 한 절기가 안 이루어졌는데 왜냐면 초막절이라고 하는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 들어가서 지키는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지키는 절기요, 잔치요, 명절이 초막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절기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그 절기의 첫 열매가 되셔야만 합니다. 제가 또 얘기합니다. 붕어 빵에는 뭐가 없다? 붕어가 없듯이 추수감사절엔 뭐가 없냐면 첫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막절엔 반드시 첫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 좀 하시길 바랍니다.
추수감사절로는 첫열매가 없지만 초막절에는 첫 열매가 있는데 이 첫열매는 내가 될 수 있다? 없다? 내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될 줄 압니다. 그래서 3대 절기 중에 제일 풍성한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풍성하다면 뭐가 풍성합니까? 먹을 것이 많습니다.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농사지은 것을 추수하기 때문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딱 가나안 땅 들어가서 농사를 짓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제일 첫 열매를 가져와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래서 여기 성경에 뭐라 그랬습니까? “너희 토지의 소산을 거두기를 마치거든”이라고 하면서 칠월이 나오는데 여기 칠월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칠월입니다. 그럼 이 칠월이 어느 칠월일까요? 이것은 유월절 연대의 칠월입니다. 이해됩니까? 오늘날의 달력이 아닙니다. 유월절 연대의 칠월이기 때문에 여기서 3개월을 플러스 더 해줘야 오늘 우리가 쓰는 달력이 되는데 그러면 10월이 됩니다. 때로는 11월이 되기도 하고 10월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후세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광야 들판에 다 나가서 일주일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고 광야에 나와서 어떻게 도와줬고 어떻게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보고 반성하며, 고마워하고, 보답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져야 한다”고 알려주면서 절기로 지내는 주간이 이 주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다가 해방이 되어 광야에 나왔는데, 농사도 안 짓습니다. 장사도 안합니다. 우물도 안 팠습니다. 우물 팔 시간이 없어요. 먼 여행길을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가나안 땅까지 왔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지난날에 대하며 감사를 합니다. 이 초막절 절기에는 감사를 잘해야 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감사를 해야 하는데 현재의 감사는 뭐냐면 금년에 농사도 잘되고, 금년에 과일과 각종 곡물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저희 식구들이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 베풀어 주심에 정말로 감사를 해야 합니다. 현재의 수확한 것으로 가을에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농촌 들녘에 가보십시오. 지금은 거의 기계로 하니까 옛날만큼 구수한 맛이 없어요. 제가 충청남도 보령에 와서 농사질 때를 보면, 가만히 집에 있어도 “목사님, 지금 밭섬을 했기 때문에 식사하러 오십시요”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안스러워 하지만 사람이 훈련되면 안 미안하더라고요. 오히려 ‘안 부르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아이고 됐습니다. 안갑니다’라고 하지만 자꾸 도와주면 ‘왜 나를 안 도와주냐?’하고 오히려 도움 받는 사람이 큰 소리를 쳐버립니다. 제가 충청도에 와 있어보니까요 아주 추수할 때는 풍성해요. 먹거리도 많고요 내 집에 지나가는 길손도 와서 먹고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추수를 하면 아예 점심도 안 먹고 기다려요. 그러다가 공칠 때도 있어요. 공칠 때는 ‘오라고 그러면 내가 갈 텐데’라면서 기다려집니다. 왜? 습관이 되면 그래요. 그런데 어쨌든 간에 추수 때는 풍성합니다. 과일도 풍성하고, 대접도 풍성하고,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으면 마음도 풍성하고, 가을 추수는 농부의 즐거움이 있거든요.
그래서 3대절기 중에 제일 풍성한 절기가 이 초막절입니다. 그래서 수장절, 장막절로 표현을 하고 있지요. 자, 그러면 칠칠절을 맥추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하지만, 초막절을 장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이 때는 들에 나가서 초막을 짓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을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광야 40년을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가나안 땅 들어와서 첫째로 땅을 분배받습니다. 열두지파가 분배를 받아서 또 농사를 짓습니다. 또 과일을 재배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얼마나 잘됐는지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감사합니까? 미래에 대한 감사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감사는 뭡니까? 애굽에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고맙고, 현재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고마워하며 “내년에도 축복해 주시옵소서”하고 미래에 대한 감사를 합니다. 오늘 여러분도 추수감사절이라는 마음으로 헌금 하는 마음을 가지지 마시고, 내 마음을 묶어서 헌금해야 합니다. 절대로 이 날은 빈손으로 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주신 축복대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는데, 금년에 절기에서 인정을 받으면 내년에 축복이 됩니다. 오늘 예물을 드릴 때에도 “하나님 내 마음 아시죠? 오늘 이 날까지 나를 있게 하시고, 나를 이끌어주신 하나님, 내년에 나에게 주실 축복이 뭡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속삭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 초막절에 들에 나가서 한 주간 지날 때에 필요한 준비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애굽에서 나와서 드리는 초막절이지만 오늘 새벽에 느혜미아서에 나오는 초막절은 어떤 초막절이었냐면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했다가 나와서 지키는 초막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형편 따라서 지붕에나, 뜰에나, 성전 뜰에나 수문 앞에 광장에나 드렸는데 오늘 여기는 일절 광야로 다 나가서 지켜야 됩니다. 본문 40절을 보세요. 첫 날에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를 가지고 오지요? 과일을 가져 와야 됩니다. 그 다음에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물의 제사 드리는 재료가 있는가 하면, 초막을 짓는데 재료가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면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것은 “주님, 우리 동인교회 3대 절기를 다 지키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호수아 갈렙만이 이 3대 절기를 다 지켰거든요. 나머지는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다 못 지켰고, 또 나이가 어려서 못 지킨 사람들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나이가 든 사람은 광야에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못 지키고 안 죽은 여호수아 갈렙만이 다 지켰거든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광야기 때문에 우리는 이 광야서 안 쓰러져야 됩니다. 즉 안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겨야 되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게 초막절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 재료가 뭐냐면 먼저 종려나무가 나옵니다. 여러분, 아무 나무나 그저 갖다가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재료를 지시해주십니다. 자, 모세가 누구로부터 명령받은 것을 지시합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명령합니다. 여러분,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대화자가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양식을 알려줍니다. 종려나무를 가져다가 지으라고 하는데 여러분, 요한복음 12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면서 뭘 들고 흔들었습니까? 종려나무입니다. 즉 ‘당신은 평화의 왕입니다. 우리를 평화롭게 할 왕입니다’라는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다가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 왔을 때에 뭐가 열둘이 있고, 칠십이 있습니다. 뭡니까? 우물이 열두 우물이 있고, 종려나무가 칠십 주가 있습니다. 열둘은 뭘 상징합니까?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데 그들이 마실 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야곱의 12지파가 신약시대에 예수그리스도의 12사도가 됩니다. 그런데 물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도 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게 오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내게 준다고 그랬죠? 엘림에 오니까 우물이 12개가 있어요. 이상하죠? 또 종려나무가 70주가 있어요. 7은 완전수지요? 70주는 뭐냐? 완전한 평화를 상징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뭐가 있어야 됩니까? 평화가 있어야 되고, 뭐가 있어야 되냐면 진리의 물이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딱 예비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을 지을 때 뭐가 반드시 필요합니까? 종려나무를 가지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무성한 나무라고 했는데 낙엽수는 안 됩니다. 항상 상록수 나무를 가지고 와야 됩니다. 또 여러분, 실제 나무로 지으려면 잎이 커야 됩니다. 그 대신 상록수라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나무든지 간에 상록수 무성한 나무를 가져 오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이 초막절에 참석하는 자는 번성하고 자녀들이 무성하게 축복을 받아야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 나가는 장로님들, 권사님들에게 이것을 물어보면 모릅니다.
이제 여러분, 주님나라 가는데는 예수 피에다가 말씀을 얹어야 됩니다. 그래서 세계가 우리 동인교회 말씀을 듣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세계가 실시간 방송으로 이 말씀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게 될텐데 이건 무슨 폭발이냐면 핵무기 폭발이 아니라 말씀 폭발입니다. 이 말씀이 폭발되면 준비된 자가 하루아침에 세계에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9장에 말씀한 것은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가서 추수할 일군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여러분, 물어봅시다. 예수님 당시가 뿌릴 때입니까? 추수할 때입니까? 뿌릴 때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그 때를 추수 때라 했습니까? 우리 때를 놓고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추수할 것은 많지만 거두어들이는 일꾼이 없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에 말씀은 십자가 피를 뿌리는 시대지 추수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박히기를 바랍니다. 박혀야 되고 은혜가 되면 아멘을 하십시요. 이것은 내가 하나님이 보실 현장에서 아멘을 해준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나갑니다. 뭐하러 나갑니까? 추수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입니까? 모형입니까? 모형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가는 추수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들은 사방팔방에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러 갔었잖습니까? 그럼 이것이 뭐냐면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이스라엘 땅은 지구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찾아오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무성한 나무 가지는 번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과 아브라함에게 축복하기를 “이 땅을 너희들에게 주겠다”고 한 다음에 자손의 축복을 줍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하는 축복을 줍니다. 하나님이 안 지켜주고 보호해주지 아니하면 내가 둔 것도 못 찾습니다. 엊그제 어떤 집사가 좋은 옷을 하나 사가지고 너무 좋아서 동생한테 주려고 전화하고 돌아섰더니 누가 그걸 가져가 버렸다지요. 동생한테 자랑하고 주겠다 해놓고는 돌아서보니까 금방 가지고 가버렸다고 해요. 그 준다고 한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오늘 여러분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종려나무 역사가 있기 바랍니다. 무성한 나무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병들고 늙어서 치매가 있고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엊그제 보니까 29살짜리라도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으면 치매가 시작된 거래요. 20대 후반에서 30대까지의 34%가 치매가 있대요. 왜 그러냐면 먹는 것이 그렇고 자꾸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고 하는데 기계에서 방사능이 나와서 신경을 마비시킨대요. 뭐 X-ray 찍는다던지 CT등 찍는 기계가 오래돼서 방사능이 엄청 나온답니다. 그걸 들어보니까, 대학교 큰 병원의 70%가 다 노후된 기계라 X-ray 찍으면 방사능이 40배, 50배가 나온답니다. 이건 발표한 거예요. 그래서 “주여 그런 병원에 안 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는데 안 가는 것이 제일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무성한 나뭇가지라고 하는 것은 건강한 축복의 번성이에요. 오늘 여러분, 오늘 초막절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정말로 질병 없이, 걱정 없이 평화로운 가정이 되시고 무성한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나무 재료가 뭐냐면 시내버들입니다. 시냇가의 버들은 물과 관계를 맺고 사는 나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리와 관계를 맺고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부다 이유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시냇가의 버드나무는 물과 관계를 맺고 사는 나무인데 오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와 관계를 맺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초막절의 재료입니다. 그 다음에 뭐냐? 제사의 재료가 나옵니다. 여기 원래는 23절부터 쭉 초막절이 나옵니다. 37절에 보면은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의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섞어서 절대 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주일이라고 해서 절기 헌금과 주일 헌금을 함께 넣어서 드리지 마세요. 절대 이 절기는 첫 열매가 되기 위해서 정성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되요. 거기 성경에 “무엇 외에, 외에”라고 한 것은 주일헌금과 초막절헌금과 섞지 말고, 십일조 헌금과 다른 것을 섞지 말고 따로따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를 드리라는 것은 그 제사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충성하고 헌신하겠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것이고 여기의 소제는 동물 제사가 아닌 식물 제사인데 하나님께 충성과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곡물이나 밀가루나 향료로 드리는 제사가 바로 소제입니다. 그 다음에 전제가 있는데 이는 기름이나 포도주를 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 이 제사가 얼마나 성대한가를 보십시요. 그러나 이것은 다 모형이죠? 이제 우리에게는 첫 열매가 나오는 제사이기 때문에 모든 예물도 분명히 구별을 지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한데 묶어서 드리지 마시고 따로 따로 드리기 바랍니다. 제가 알려준것을 여러분이 하든지 안 하든지 축복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대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민수기 29장 12절로 38절을 보면은 초막절이 몇 일 동안 거행이 됩니까? 칠일인데 팔일까지 갑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뭐냐면 상번제인데 이 상번제에는 양을 몇 마리 드려야하냐면 아침에 한 마리 드리고 저녁에 한 마리 드리니까 하루에 두 마리입니다. 이것이 무슨 제사냐면 상번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초막절 제사에 섞어야 되요? 안 섞어야 되요? 안 섞어야 됩니다. 그러면 팔일동안 상번제 제사에 양이 열여섯 마리 들어갑니다. 이것이 따로 입니다. 절대 섞으면 안 됩니다. 상번제 따로 드려야 되고, 민수기 29장 12절 38절까지 보시면 수 송아지가 칠십한마리, 수양이 열다섯 마리, 그 다음에 어린양이 백다섯 마리를 드립니다. 그럼 합이 몇 마리냐면 이백열다섯 마리가 이 초막절 절기에 드리는 재물입니다.
그런데 따로 따로 드려 지켜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2절24절에 보면 이 초막절 절기를 하나님 앞에 잘 지키는 자들은 원수가 여러분의 가정이나 교회에 들어오지 않게 막아주겠다고 했고, 열방의 세력을 막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엊그제 보니깐요, 어느 집에 강도가 들어와 주인을 묶으고 돈을 빼앗아 가면서 묶어 놓고 불을 질러버렸어요. 그러니깐 주인이 묶여가지고 불타서 나중에 소방관이 와서 불을 끄고 보니깐 묶여 있었다고 합니다. 도둑질만 하고 간 것이 아니고 사람까지 묶어서 타 죽으라고 불 질러버렸어요. 그러면 우리가 초막절을 바로 잘 지키면 이런 것을 없애주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그 나라 가는 첫 열매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출애굽기 34장보면 원수를 막아주겠다고 그랬고 그 다음에 “네 지경을 넓혀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초막절의 축복입니다. 지경을 넓혀주겠다는 것은 뭐냐면 부자 되게 해 주겠다는 말 아닙니까? 내 지경을 넓혀주겠고 아무나 내 재산을 빼앗아 가지 못 하도록 막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막절의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일주일동안 지킬 모든 것을 몽땅 오늘 하루로 지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마음을 묶어서 이 예배에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제사에 성공하면 반드시 축복이 옵니다. 그 대신 제사에 실패하면 반드시 시련이 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봐보십시오. 큰 역사는 이 절기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열왕기상8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드릴 성전을 솔로몬이 짓고 성전 준공식을 언제 하냐면 초막절 때 준공식을 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나와야지고 예루살렘에 스룹바벨 성전을 짓고 성곽을 짓고 성곽 준공식을 초막절에 합니다. 그럼 여기도 무슨 의미가 있겠죠?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그 나라에 가서 초막절 절기를 성대히 지키려면 여러분이 반드시 이 초막절의 첫 열매가 되어야합니다. 오늘 이 방송을 듣는 지방의 성도들과 각 나라에서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초막절의 첫 열매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막절의 감사
레위기 23:39-44 / 이동원 목사
`본래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Day 라는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 미 국에 도착한 그 전통에서부터 유래 한 것이죠. 그러나 성경에서 이 추 수감사주일과 가장 비슷한, 유사한 절기를 찾는 다면 그것이 바로 초막 절입니다. 초막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초막절이라고 불리워 집니다. 해마다 이 명절이 되면 이 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가서 본 래 옛날에는 그랬어요. 광야에 나가 서 빈 들에다가 초막을 짓습니다. 요즈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 옆에다가 붙여서 초막 하나를 만 듭니다. 네 개의 그 프레임에다가 캔버스나 혹은 팬널 같은 것으로 사 방을 만들어서 벽을 만든 다음에 그 위에다가는 감람나무 혹은 종려나무 혹은 버들가지들을 얹어서 지붕을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호텔 같 은 데도 전번에 우리가 초막절 때 성지 순례를 한번 한 적이 있었는데 호텔 옆에다가도 이 초막을 만드는 것을 봤습니다. 호텔 식당 옆에다가 만들어 갖고 그 식당에 들어가서 먹 는 사람도 있지만 식당 옆의 간이 초막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식사를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리 고 성경도 읽고 예배를 드립니다. 특별히 시편을 읽기도 합니다. 이것 을 가리켜서 이런 초막을 가리켜서 히브리 사람들은 수코트 이렇게 부 릅니다. 수코트. 제가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 보니까 이 사람들 은 이것을 영어로 수카 이렇게 부르 더라구요. 수카. 그런데 히브리 사람 들은 수코트 이렇게 부릅니다. 그들 은 자기의 수코트를 잘 만들 뿐만 아니라 남의 집의 수코트도 돌아가 면서 방문하면서 서로 어울려서 파 티를 열고 한 주간 동안 일 주일 내 내 즐거워 하는 명절 가운데서도 아 주 기쁨의 절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 다.
요컨대 이 초막절은 지나간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 와서 광야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 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을 감사 하는 절깁니다. 그 광야를 행진할 때 낮에 구름 기둥 인도했죠 열사의 사막에서는 그 사막에서 태양을 견 딘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 니다. 그러나 이 구름 기둥이 일종 의 천막 역할을 해 줍니다. 피난처 가 되고 보호막이 되고 또한 그 구 름 기둥이 가면서 계속 이 백성들을 인도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가야할 목표와 방향을 알려 주어서 그들은 걸음 걸음마다 하나님의 인 도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배 고팠을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 기를 내려 주시고 마실 것이 없었을 때 반석을 깨어서 거기서 샘물을 솟 게 하신 그 하나님의 공급의 은혜를 그들은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그 절기 초 막절에 맞춰서 이제 추수가 다 끝납 니다. 그러니까 농사 짓고 수확을 거두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 는 절기죠. 그러나 그것 말고 이 초 막절은 특별히 세 가지의 감사의 초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 정에 대한 감사, 둘째는 믿음의 공 동체에 대한 감사 또 하나는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첫째는 가정에 대한 감삽니다. 이 수코트 라는 것은 이 초막, 천막 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만드는 것입 니다. 그래서 수코트는 가족에 의하 여 혹은 가족들을 위하여 만들어 지 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시련이 있었 지만은 그들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에너지가 가족 때문에 가능 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 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 들, 가족 사이에서 나누어 지는 그 사랑의 힘이, 사랑의 에너지가 그 광야의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이길 수가 있는 그런 힘의, 용기의 근원 이 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 현대를 가리켜서 소위 핵가족화의 시대 라고 불리워 집니다. 편리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는 이제는 식구들이 많아 지 는 것이 부담스러운 시대가 되었습 니다. 조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 부 담스럽다고 생각하죠? 심지어는 부 모님조차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자 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녀를 하나 늘어날 때마다 부담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확실히 많습니다. 가족을 이제는 짐 이라고 burden 이라고 생각하는 사 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런데 제가 탈무드에 읽어 보니까 아 주 재미나는 얘기가 있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족들은 새의 날개 와 같다. 새는 날개를 부담으로 여 기지 않는다. 새는 날개 때문에 오 히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비상할 수가 있다.
제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커플들 을 꼭 한번씩 만나서 상담을 한 다 음에 주례를 합니다. 그냥 주례하지 않습니다. 꼭 한번 대화를 나눕니다. 그때 제가 어김없이 묻는 질문 가운 데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애를 몇 명이나 낳을 계획이십니까? 혹은 언 제 낳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요즈음 대부분의 그 커플들은 빨리 낳겠다 고 그러는 사람이 없어요. 3년 후에, 4년 후에 어떤 사람들은 5년 후에 낳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래요 하고 물어보면 좀 더 안정이 된 다음에 하는 것이 제일 대답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제가 반드시 탈무드의 이 말을 인용합니다. 가족들은 부담이 아니예요. 자녀 하나 생긴다고 해서 부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를 보 면 얼마나 기쁨이 있습니까? 삶의 용기, 에너지, 영감, 힘을 얻고 살아 야 할 그 의지를 확인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 지 말고 닥치는 대로 나요. 빨리 나 요. 제가 이렇게 웃으면서 늘 권면 을 해 주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 가족들의 존재,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됩니까? 가족 때문에 어려움도 있죠. 그러나 어려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축복, 훨씬 더 많은 사랑, 훨씬 더 많은 격려가 우리의 가정에서 나누어 지 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수콧 이라 는 것은 가족들의 shelter 사랑의 보금자리 그리고 안식의 피난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수코트를 만들어 놓고 이 수코트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고백 하고 축제를 벌이고 그리고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고통 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IMF시대 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가족마저 없었더라 면 우리의 홈이 없었더라면 나를 격 려해 주고 나와 함께 하는 내 남편 의 존재, 아내의 존재, 그리고 자녀 들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얼 마나 더 무력해지고 얼마나 우리는 더 낙심했었을까요? 이 시대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 다. 이게 첫번째 감사예요.
두 번째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수콧, 자기 가정을 위한 수코트를 만들지만 또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수코트를 방문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옛날에는 아주 광야 에 나가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거할 수 있는 굉장히 큰 천막, 수코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시나 고개, 회당 같은 데 방문을 해 갖고 또 시나고개에서 큰 천막을 만들기 도 하구요. 또 그렇지 못한 형편의 시나고개 회당에서는 회당 안에 들 어가서 종려나무 가지 혹은 감람나 무 혹은 버들가지들을 취해서 회당 안에다가 여러 가지 장식을 해 놓습 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 들의 광야의 행진이 비단 나의 가족 의 행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 이 함께 모여진, 더 큰 가족, 공동체 의 행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수코 트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수코트, 우리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커다란 공동체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더불어 광야길을 행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가족이 내게 위로가 된 것 못지않게 또한 주변에 같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 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 들어서 더불어 나눌 수 있었던 격려 와 위로 때문에 광야의 길을 우리가 걸어갈 수가 있었다. 이것을 회고하 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약적인 시각, 신 약성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바로 이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어 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교회. 교 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서 사회를 향 해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저는 그 비판이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 각하고 그리고 참 부끄러움을 동시 에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 랑하시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땅에 단 하나의 교회마저 완 전히 사라져 버린 세상, 한번 상상 해 보세요. 교회가 부끄러운 요소도 많지만 교회가 줄 수 있었던 축복,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마다 드린 예 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영감과 그리 고 삶에 대한 감동과 그리고 하나님 을 찬양하면서 내 속에 회복된 기쁨 과 평화와 안식의 체험들 또 교회 생활하면서 얻어진 수많은 행복한 메모리, 그 추억과 감동의 순간 순 간들,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 면서 함께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 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따뜻한 교제 속에 누릴 수 있었던 그런 안식의 의미. 그런데 그 교회가 하나도 없 이 사라진다. 교회가 사라진 세상. 한번 상상해 보세요. 교회가 없이 내가 지금 인생을 산다. 상상이 되 십니까?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노 후에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 습니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다. 교회를 무시했 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 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교 회로 다시 돌아온다.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가족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지만 그 못 지않게 또한 우리의 가족들이 모여 서 형성하고 있는 커다란 가족, 하 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교회. 교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찬양과 감사를 드 리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의 감사가 있어요. 그것 은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삽니다. 초막절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집을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요즈음 편리 한 시대가 되서 이스라엘에 가도 초 막절을 지킬 때 먼 광야나 사막까지 나가지 않고 자기 집 옆에다가 그냥 초막을 만들고 그렇게 편리하게 지 냅니다 만은 그러나 본래 옛날 초막 절을 지키던 방식은 들에 나갑니다. 빈 들에 나가요. 그 동안 한 주간동 안 나가서 야영camp를 하는 것입니 다. 집을 떠나는 것 이예요. 집을 떠 난다. 일시적이지만 집을 떠난다. 우 리의 정, 우리의 욕망, 우리의 안정 의 중심이었던 집을 잠시 떠나갈 때 그들은 집을 떠나는 연습을 excise 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느 한 순 간 우리는 집을 떠나는 날이 옵니 다. 내 영혼이 육체의 집도 떠나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 며 메모리를 축적해 왔던, 행복한 기억을 축적해 왔던 우리의 사랑하 는 식구들, 가족들을 잠시 떠나서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께서 예비하신 집이 있다. 예비하신 집이 있다. 그렇습니다. 옛날 애굽 땅의 안일한 집들을 버리고 광야로 놓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광야에서도 집을 예 비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 가나 안 땅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구 한 집의 소망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 던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저 는 이 영원한 소망이야말로 천국의 소망의 그림자라고 믿습니다. 바울 은 고린도후서5장1절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있는 이 장 막집이 무너지면 육체를 가리키는 것 이예요.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라 그 랬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크리스 챤 가정의 행복은 이런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그 행복은 뭐냐 하면 우 리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나갈 때 사 랑하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우리는 이렇게 인사할 수가 있습니다. 여보 내가 먼저 떠나서 미안해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요. 그 영원 한 만남, 그 영원한 재회 그리고 영 원한 소망 그리고 영원한 처소에 대 한 소망.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 랑하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면서 내 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 처소 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로 하여금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많은 것을 잃어 버렸 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견고한 아니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 할 소망, 하 나님 나라의 소망 그리고 천국의 소 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 니다. 그렇다면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 절을 지킬 때 초막절 바로 직전에 또 지키는 절기 하나가 있어요. 7대 명절이 있습니다. 여섯 번째 명절이 뭐냐 하면 속죄절이예요. 속죄절. 속 죄절 다음에 초막절이 옵니다. 속죄 절은 고통의 절기예요. 초막절은 최 고로 기뻐하는 절기, 버들가지를 취 하고 종려나무 가지와 그리고 감람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하나님의 그 인도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기쁨의 절기 노래의 절기라면 이 속 죄절은 고통의 절깁니다. 속죄절에 그들은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 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제 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위 해서 드려지는 제물 피 흘린 제물.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들은 용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 하면서 그 다음 절기 초막절로 나아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약적으로 적용 하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이 애굽 땅을 이스 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떠나가게 하 시고 떠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유 월절이란 또 의식을 지나가게 하셨 죠. 어린 양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흘려진 어린 양의 피, 대신 제물이 되어서 죽은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 백성을 보호하시 고 구원하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그 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나 갔습니다. 광야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었고 가나안의 소망을 갖고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적으 로 적용하면 무슨 의미예요? 십자가 가 있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 그 십자가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아니 이 십 자가 때문에 오늘 내가 하나님의 백 성이 되어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나는 오늘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합 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죽음 저 건너편에 견고한 소망 그리고 영 원한 소망을 붙들고 있는 것을 인해 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초막절이 있 기 전에 있었던 속죄의 절기, 그들 이 피 흘리는 제물을 주 앞에 바치 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절기, 그 절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축제 의 절기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 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인도를 받 을 수가 있다는 것, 어려움도 많지 만 여전히 내 마음 속에 기쁨과 소 망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는 것, 구 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다는 것. 이 감사의 중요한 원인은 하나 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된 주일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 념하는 성찬을 이 마무리 시간에 갖 고자 합니다. 이제 조용히 기도하시 겠습니다. 기도하시면서 마음을 준 비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 생을 기념하는, 그의 몸을 기념하는 떡, 그의 흘리신 보혈을 기념하는 잔을 이제 받으실 마음의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함께 기도 하시면서 오 하나님 이 떡을 받고 이 잔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함께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날 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한 테이블 에 앉아 떡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 희를 위해서 내가 희생할 나의 몸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찢 기고 깨어진 그의 희생의 몸을 기념 하는 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은 이 주의 만찬 혹은 성찬의 자리 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 의 사람들에게 이 테이블에 나오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 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알 지 못하는 분들, 교회는 나와 있지 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정말 하나 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다 면 이 떡을 받는 것이 아무런 의미 가 없습니다. 그 분들은 이 떡을 사 양해 주십시오. 그냥 옆으로 패스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여 러분도 속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 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주님이 나 를 위해 희생을 한 그 사실 때문에 새로운 삶이 나에게 가능할 수 있었 다는 것을 주 앞에 감사하게 되시기 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 도인 이지만 내 삶 속에 해결하지 못하는 죄, 포기하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제가 단절되어 있다면 이 사람도 이 떡을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더러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러므로 성경은 이 성찬에 나오는 사 람들에게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하십 니다. 깊은 통회 자신을 살피는 회 개 속에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 다 죄를 포기하고 십자가의 피 흘리 심을 통해서 주께서 나를 용서하신 다는 확신을 갖고 감사와 감격과 결 심으로 이 떡과 이 잔을 받아 주시 기 바랍니다.
먼저 떡을 받으시겠습니다. 예수 께서 이 떡을 나누시면서 이렇게 말 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라 이것을 받을 때마다 나 를 기념하라 하나님 이제 이 떡을 받고자 합니다. 이 떡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 를 깊이 기억하며 감사와 감격과 결 단 속에 주님의 몸이신 그 몸을 기 념하는 이 떡을, 그의 깨어진 몸을 기념하는 떡을 받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조 용한 기도 계속되는 기도 속에서 이 떡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받으시고 옆의 사람에게 바로 패스하시고 준 비가 안 된 사람은 그냥 옆으로 패 스해 주시면 됩니다. 떡을 받으시고 바로 옆으로 이렇게 패스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드시기 바랍니다. 떡 을 받으신 분들은 기도하시면서 드 시기 바랍니다. 드시고 성찬기를 옆 의 사람에게 계속 패스해 주시기 바 랍니다. 맨 가장자리에 있는 분은 뒤 쪽으로, 자기가 떡을 드신 다음 에 자기 뒷편으로 패스해 주십시오. 이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그 의 죽으심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구 원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계 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아 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 음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이 가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 리는 감사함으로 그리고 감격함으로 이 떡을 받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받을 때마다 나를, 십자가에서 희생 한 나를 기억하라 기념하라. 드십시 오. 떡을 받기를 원하는데 혹시 못 받으신 분 있으시면 손을 들어 표해 주십시오. 떡을 받기를 원하는데 못 받으신 분 있으면 손을 들어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 지시고 사례하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의 죄를 위해서 흘리는 나의 언 약의 피니라 이 잔을 받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이제 떡을 받으셨다 면 떡을 받으신 분들은 잔을 받으시 기 바랍니다. 이 잔은 예수 그리스 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흘 리신 그의 보배로운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잔을 받으실 때 역시 똑같은 감사와 감격과 결단 속에서 이 잔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잔 을 드신 다음에 바로 그 자리에다가 드시고 원위치 시켜 주시기 바랍니 다. 기다리지 마시고 미리 기도하신 다음에 잔을 받는 즉시 드시고 그리 고 그 자리에다 잔을 원위치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기도하 시면서 잔을 받아 주십시오. 바로 드시고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들어 주시고 옆의 사람이 드시고 바로 그 잔 위에다 놓으시고 또 옆의 사람에 게 패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진노와 그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었던 나, 내 삶을 파괴하고 그리고 나로 하나님과 단절시켰던 죄, 그러나 주께서는 나의 죄를 짊 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성경은 말합 니다. 이 포도 잔의 붉은 포도, 이것 은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붉은 피, 그 피가 흘려짐으로 여러분과 저는 우리 죄 대신하여 심판과 진노 를 대신 감당하신 그리스도의 은혜 를 힘입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 감사 합니다. 내가 주님 흘리신 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오 늘을 살아 갑니다. 감사함으로 이 잔을 받습니다.
바로 잔을 드시고 옆의 사람에게 패스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 사해야 할 많은 조건과 이유가 있지 만 가장 중요한 감사는 십자가에 대 한 감삽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 총에 대한 감사, 바로 예수 그리스 도의 희생에 대한 감사, 그가 나 위 해 대신 죽으심으로 그리고 그 분이 나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 셨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니 이 보다 더 한 감사의 조건과 이유가 어디 있을 까요! 주님 이제 제가 주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감사에 합당한 삶 을 주 앞에 드리기를 원합니다. 이 런 결심을 주 앞에 드리십시오. 떡 을 받으신 분으로서 잔을 받기를 원 하는데 못 받으신 분 혹시 계시면 손을 들어 표시해 주십시오. 떡을 들으신 분으로 잔을 받기를 원하는 데 못 들으신 분 손을 들어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찬 위원들도 다 잔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잔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직도 자격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늘 우리 는 주 앞에 부끄러운 자요 그리고 주의 이름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 는 우리의 삶을 인해서 부끄러워 합 니다. 그래서 회개하며 다시 한번 주 앞에 나옵니다. 주님 그러나 은 혜로 저희들을 구원하셨듯 다시 한 번 당신의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 시고 우리로 이 잔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살도록 도우시옵소서. 흘리신 피, 그 피가 나를 속하셨사오니 오 늘도 그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 고 주 앞에 순전한 자로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여생 살아 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피의 권세로 어둠의 세력을 정복하고 삶의 고난 을 이기고 당당히 승리로운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옵소서. 감 사하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 도 드립니다. 아멘.
추수감사절의 의미
레 23:39-44 / 김근중 목사
구약시대에 절기는 산술역법(算術曆法)에 다른 절기와 사건(事件)에 따른 절기와 농경역법(農耕曆法)에 따른 절기가 있습니다. 농경역법에 따른 절기에는 초실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 있습니다. 본문은 수장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1년째 되는 해다음 7월 15일(태양력으로는 10월에 해당함)부터 1주일 동안 절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이 절기는 1년 동안 지은 곡식을 거두어 저장한 다음에 지키게 했기 때문에 수장절(收藏節, fest of ingathering)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노동을 쉬고 가족별로 광야에 나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버들 가지 등 풀과 나무로 초막을 짓고 1주일 동안 그 곳에 거하면서 제사를 드리며 절기를 지켰기 때문에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절기는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의미와 같은 절기였습니다 (출23:16, 34:22, 레23:33-24, 민29:12-28, 신16;13-17, 슥14:16-19).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수장절은 종교력으로 7월 15일에 있습니다. 태양력으로는 10월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11월 셋째 주일에 지켰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날짜 개념보다 그들의 환경에서 곡식을 다 거두어 저장한 시기를 택하여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키는 의미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미국의 추수감사주일을 그대로 채택하여 11월 셋째 주일에 지켰습니다. 그러다 최근에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추어 추수하여 저장한 다음 시기에 맞추어 자유롭게 지키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앞당기어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날짜는 변경했지만 절기를 지키는 의미와 정신은 그대로 가져야 합니다.
1. 육체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수장절(收藏節, fest of ingathering)은 가나안 땅에서 1년 동안 지은 곡식을 거두어 저장한 다음에 지켰습니다. 39절에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라고 했습니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정착한 다음 하나님이 농사가 잘되게 하여 곡식을 거두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절기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40-42절에 보면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에 칠 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종교력으로 7월 15일이 되면 온 식구가 모든 노동을 그치고 각종 나무 가지들을 꺾어 광야로 나가 초막을 짓고 그 곳에서 일주일간 기뻐하며 지내게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43절에 보면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해방되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가나안 땅에서의 1년 농사를 거둔 다음에 곡식을 얼마나 수확했든지 과거에 광야생활을 할 때를 기억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힘들 때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여 체험하면 하나님께서 오늘에 얼마나 복을 풍성히 주셨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신명기16:15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한 말씀을 보면 미래에 더욱 복 주실 것을 바라보고 기뻐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농사를 지은 분들은 1년 동안 농사하여 저장할 것이 있게 된 것 감사하고 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1년 동안 수입이 있게 하신 것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느끼려면 과거를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힘들게 살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아무리 없다고 해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것은 있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겨울이면 따뜻한 물이 없어서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도 안하고 다녔고 머리도 못 감았고 빨래도 못했습니다. 불과 일이십년 전만 생각해 보아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힘든 상황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 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2. 영혼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수장절은 장막절 혹은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이라고도 한다고 했습니다. 40-42절에 보면 종교력으로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모든 노동을 그치고 온 식구가 가족별로 각종 나무 가지를 꺾어 광야에 나가 초막(장막)을 짓고 그 곳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43절에 보면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해방되어 광야로 나왔는데 그 때에 그들이 초막에 거했기 때문에 그 때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잊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고 (시136:10-15),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보호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고 (시136:16),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136:17-22).
하나님의 구원사적 관점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30년 동안 우상 섬기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제사장적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 모세를 통해 해방시켰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동안 40년 동안 신광야, 수르광야, 바란광야를 통과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기골이 장대한 7족속이 버티고 있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 곳에서 땅을 분배받아 농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언약한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의 땅에서 제사장적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연단시켜 가나안에서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열방에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그와 같은 언약적 목적을 가지고 민족적으로 선택하고 인도하신 것을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미래에도 인도해주실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사적으로 은혜 베푸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단을 따르던 자들이며 우상을 따르던 자들이며 세상을 따르던 자들이며 육체와 물질에만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이며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죄와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어 불가항력적 은혜로 완악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죄 용서함를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고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천국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영이 자라고 거룩해지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고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쓰임 받게 하려고 여러 환란과 고난 가운데서 연단시켰습니다. 때때로 가난, 질병, 사고, 근심, 번민 등을 통해 낮추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연약성을 가진 우리가 아주 낙심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매달릴 때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엡2:1-8, 롬5:6-8, 고전10:13). 지내 놓고 보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이 되었습니다 (롬8:28). 또한 미래에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로마서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느끼느냐 달려 있습니다. 큰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난관에 부딪히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고 현재의 어려움을 인내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디모데전서6:8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불확실성 시대속에서의 기쁨
레 23:42-43 / 이익환 목사
로봇이 커피를 만들어 파는 시대가 되었다. 분명 이렇게 파는 커피를 사먹는 것이 더 편하고 가격도 싸서 좋을텐데, 마음 한켠에 이상한 불안감이 밀려 온다. 사람이 하던 일자리를 로봇이 대신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로봇 때문에 누군가는 커피 판매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것이다. 이제 평생직장이란 말은 사라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초중고 아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 뭐냐 물으면 ‘건물주’라고 답을 한다. 청년들에게도 ‘공무원’이 이상적인 직업이 되었다. 기술혁신이 이루어져서 로봇을 통해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그만큼 생산성은 높아지고 부의 크기는 커진다. 그런데 기술 혁신자들이 광고하는 것만큼 우리의 사회의 미래는 테크노피아의 신세계가 펼쳐질까? 그럴 것이라고 대답이 잘 안나온다. 오히려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뒤따른다. 왜일까? 그것은 기술혁명으로 커진 부의 크기가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먹던 파이까지 로봇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가 불어닥쳤다. 불안과 불확실성 지수가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었다. 코로나가 힘든 것은 우리의 생존과 안정감의 기초가 되는 ‘관계와 돈,’ 둘 다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야말로 우리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지수가 가장 높은 때가 아닐까 한다. 다행이 한국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코로나가 진정되는 분위기다. 코로나가 끝나면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전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리라 예상된다. 특히 기술혁명의 파도가 몰아치고, 5G 초연결사회가 신속하게 펼쳐지리라 예상된다. 지금 미국과 중국, 우리나라도 이 5G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로봇, 자율주행차 등이 5G 통신을 통해 연결되면서 앞으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새로운 미래가 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한다. 정신 단단히 차리고 마음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는다면 사회의 변화하는 속도에 우리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이처럼 불안과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높아질 때 가장 빼앗기기 쉬운 감정이 있다. 기쁨이다. 여러분은 요즘 기뻐한 날이 얼마나 되는가? 혹시 상황적인 요인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토라포션에는 기쁨의 절기가 나온다. 초막절이다. 왜 이 절기가 기쁨의 절기인지 살펴보면서, 우리 현재의 삶에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레 23: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이 말씀에서초막절에 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하라는 명령이 나온다.레위기서 23장에는 여호와의 일곱 절기들이 다 소개된다. 그런데 다른 절기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없다. 오직 초막절에만 기뻐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래서 초막절은 ‘즈만 심핫테누(שמחתנו זמן),’ ‘우리 기쁨의 절기’란 별칭이 있다.
초막절에는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거기서 살라는 명령이 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살았던 것처럼 일주일 동안 그곳에 지내면서 그 경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동하며 살았다. 그들이 통과했던 광야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루라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미리 알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펼쳐지는 현실은 메마른 광야뿐이었다. 그들은 지속되는 불안정의 시기를 매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절기가 ‘우리 기쁨의 절기’라고 불리웠던 것일까?
유월절은 애굽에서 해방된 날이다. 기쁨의 절기라 불릴만 하다.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날이다. 이 역시 기쁨의 절기라 불릴만 하다. 그런데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고생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어째서 유대인들은 ‘우리 기쁨의 절기’라고 부를까? 왜 그들은 초막 안에서 즐거워해야 했을까?
초막이 상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측불가능한 현실과 함께 사는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그냥 초막 하나 치고 살다가 구름이 이동하면 그것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름을 따라가는 것은 분명 믿음의 행위였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초막절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믿음은 확실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상황과 환경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여정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불평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끝까지 그들이 알 수 없는 내일의 여정을 따라갔다. 광야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정은 너무도 길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 상황을 끝까지 견딜 용기를 주셨다.
초막절에 유대인들이 초막 속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힘들게 했던 환경이 아니다.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막에서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의 동행을 기뻐하는 법을 배웠다.
사실 초막은 아무런 자랑거리가 아니다. 많은 민족들은 자신들이 강성했던 때를 자랑할 것이다. 튼튼한 성과 화려한 궁전을 자랑할 것이다. 사람들이 큰 집을 사고, 안정된 직업을 갖기 원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불안한 내일을 맞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집과 안정된 수입을 확보할 때까지 자신이 오늘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사를 유보한 채 정신 없이 사는 것이다.
초막절은 집이 없어도, 안정된 수입이 없어도 광야를 통과해 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다. 유대인만큼 집을 잃고 쫒겨난 경험을 많이 해 본 민족이 없다. 나라를 잃고 거친 광야로 내몰려본 경험을 이처럼 많이 해 본 민족이 없다. 그럼에도 이 민족이 사라지지 않았던 비결이 뭘까? 그것은 그들이 매년 초막절을 지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초막에 살아보면서 우리 조상들도 이 초막으로 40년을 버텼는데 나도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초막이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길들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거친 광야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문제는 초막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놓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상황때문에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막에 살면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할 수 있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언제 광야가 펼져질 지 모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퍼질지 누구가 상상했겠는가? 불안은 예고없이 우리 삶에 들이닥칠 수 있다. 우리의 건강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생계가 다음 달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몇 달 뒤에 또 이 세상에 어떤 충격적인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무도 위기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통계나 확률로도 그것을 예측하거나 막을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러한 때 초막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상황이 불확실해도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비록 우리에게 광야가 펼쳐진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결국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지점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코로나가 처음 발발했을 때,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수시로 새로운 뉴스를 확인하고, 유튜브에서도 돌고 있는 이야기도 열심히 찾아 들었다. 그 원인을 정확이 알고 싶었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고 싶었다. 그래서 불안을 줄이고 싶었다. 그런데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많은 뉴스를 들으면 들을수록 예측은 더 힘들었다. 그러던 중 지금 이 세상의 불안과 불확실성은 예측을 통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처럼 초막 속에서 내일의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지켜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스트레스와 불안장애를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통제를 잃었다는 두려움,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우리는 이전 우리의 일상에서 누리던 샬롬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면 우리는 물론 이전의 평안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안’과 ‘불확실성’이란 단어는 코로나 이후에도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될 것 같다. 과학의 진보와 기술혁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불안을 가져다 주고 있다.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환경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우리가 저항한다고 그 속도가 늦춰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아야 할까? 나는 우리들이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그 변화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 변화가 주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그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을 이야기하는 제사장으로 살아야 하는 게 이 시대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따르는 사람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과 옳지 않다고 하신 것을 구별해내는 사람이다. 지금은 점점 인공지능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는 시대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많은 사람들이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따르고 있다.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신 스마트폰을 열어 구글에게 물어본다. 물건을 사는 것, 식당에 가는 것도 인공지능에게 물어본다. 그렇게 하라고 강요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편리하고 우리가 그것을 원하도록 철처히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 앞에,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던져지는 정보와 뉴스들을 접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그러한 정보와 뉴스들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기준에 옳은 것인지 걸러내야 한다. 그리고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 삶의 패턴과 욕구까지 바꾸는 지금의 트렌드가 정말 성경적인 것인지 구별해내야 한다.
2001년 하버드 대학의 교수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이란 책을 썼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공동체의 참여가 감소하는 현상을 분석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집단에 참여하는 대신 혼자 활동하는 편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은 점점 나 혼자 볼링 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나 다른 모든 공동체에 다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원자화는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즉, 사회적 신뢰가 감소하고, 사람들은 더욱 고립되고, 정치에 덜 참여하며, 이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가 오락의 과잉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들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대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 또는 게임을 하는 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코로나는 이러한 경향을 더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는 편하게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것 대신 교회 오는 게 더 힘들게 느껴질지 모른다. 혼자 네플릭스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시간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피곤하게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집안에 갇혀서 기술 혁신자들이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연결되고, 가상현실에서 게임을 하는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소비하며 살게 될 지 모른다. 그러한 오락과 가상의 현실에 휩싸여 우리는 공동체를 상실하고, 공동체에 현명한 헌신을 할 의지조차 없는 신인류로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해야만 한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과학 기술 혁신이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 할수록 평범한 우리 대중들의 불안지수는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예측 가능한 통계에 있지 않다. 우리의 안전은 큰 집과 안정된 직장에도 있지 않다. 우리의 희망은 초막 속에서도 우리와 여전히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은 비록 초라할지라도 그 가운데 감사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가득한 이 때에도 우리는 오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기쁨을 회복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돌파가 있어야 한다. 초막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으려면 그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 끝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붙들어야 한다. 이것이 광야와 같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바라기는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고, 광야와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호와의 절기에 나타난 복음
레위기 23:44 / 피영민 목사
서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미 다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언적으로, 예표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일치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6절에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모든 기록, 즉 율법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24장 44절에도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 선지서, 시편도 모두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것입니다.
레위기가 여러 가지 규례들로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5대 제사’와 ‘7대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들은 죄인 된 인간이 주제넘게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인은 함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한 제물이 피를 흘려야 하고, 그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믿고 의지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죽어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5대 제사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7대 절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인 7대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입니다. 앞 글자로 따면 ‘유무초오나속장’이 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를 암송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는 시제로 보면 과거・현재・미래시제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과거에 해 주신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복을 주실 것인 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은 7대 절기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절기나 안식일들은 모두 그림자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 16절에 기록된 ‘안식일’을 새국제역(NIV)으로 보면 단수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복수인 ‘싸바톤’(σαββάτων)으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안식일들’입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안식일이 한 가지 종류의 안식일만 있는 것이 아님을 가리킵니다. 7대 절기에 속한 안식일은 날짜 상으로 토요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무조건 토요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에 기록된 토요일 이외의 안식일에 대한 사실을 일부러 외면합니다. 그러나 7대 절기 속에 들어 있는 안식일 역시 구약의 안식일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것은 ‘쉰다’는 의미이지, 제7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절기와 안식일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7대 절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Ⅰ. 이미 나타난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
7대 절기 중 앞에 나오는 4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신 일들을 예표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헛되이 믿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그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시는 재림, 이 모든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이 모든 일들을 헛되이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7대 절기의 시작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예표합니다. 레위기 23장 5절에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 유월절입니다. 유대력으로 1월은 ‘니산월’이라고 부르는데, 태양력으로 3~4월경이 됩니다.
출애굽기 12장 1~14절에 유월절 규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가정마다 1월이 되면 1년 된 수양 한 마리를 준비했다가 14일에 해가 지면 그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고기는 그 날 밤에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누룩이 없는 무교병과 쓴 나물을 반찬으로 먹는 것이 유월절에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어린 양의 죽음과 그 피를 바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재앙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애굽의 바로를 혼내주기 위해 애굽 사람들의 장자를 모조리 죽일 그 때,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은 넘어갔습니다. 그 절기가 바로 유월절(逾越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사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붙잡고 있었다면 어찌 해방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바로는 항복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의 사역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 대한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고, 지옥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고, 바람 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욕을 합니다. 자기들은 마귀와 귀신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지성이나 재물, 또는 권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믿음으로 마귀와 귀신들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예표합니다.
두 번째 절기는 무교절입니다. 무교절은 정월 14일 저녁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지내는 절기입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14일이 아니라 15일부터 7일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해서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와 날짜를 계산하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4일 해질 무렵부터 15일 해질 때까지가 하루입니다. 결국 21일 저녁까지 7일 동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룩은 어떤 성경적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는 ‘죄’(Sin)을 상징하고, 둘째는 ‘부패’(Corruption)를 의미합니다. 무교절을 지킨다는 것을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죄를 벗어나서 거룩한 삶을 산다는 의미이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패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어 우리를 위해 죽으시지만, 썩거나 부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에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윗의 말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도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으시고 육신이 썩지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교절의 의미입니다.
세 번째 절기는 초실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썩지 않으셨을까요? 부활하시려고 썩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3장 10~11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 이튿날, 즉 주일에 흔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0월과 11월에 보리와 밀을 심습니다. 12~1월에 비가 오면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4월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곧 추수하게 됩니다. 보리와 밀 가운데 보리가 먼저 결실을 맺습니다. 그래서 초실절에 드리는 첫 이삭은 항상 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리의 첫 열매를 거두면 자기가 취하지 않고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요제로 제사를 드립니다. 요제는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장이 보리 첫 열매를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안식 후 다음 날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서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나중 열매로서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영생과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사회봉사나 구조활동, 사회구원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마디로 기독교의 주변 사역입니다.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과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되는 이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는 나중 열매가 되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때는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바로 주일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월요일이나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에 예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절기는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가 승천하심으로 성도들에게 보내주실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성령을 보내주시는 절기입니다. 레위기 23장 15~17절에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실절 이후로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나면 49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50일째가 되면 오순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여호와께 소제를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안식일 7번 지난 다음 날이 되면 50일이 되어 ‘오순’(五旬)이라고 합니다. 오순절이 되면 여호와께 소제를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라고 했습니다.
에바는 밀가루 22리터가 들어가는 큰 광주리를 의미하고, 그 중 십분 이는 4.4리터가 됩니다. 4.4리터의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떡 두 개를 만들어 하나님께 소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신약의 성령 강림하신 날을 예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셨기 때문에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주신 날을 가리킵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가짜 성령 사역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 역사를 가장한 귀신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았다고 해도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고, 깨끗한 인격으로 살도록 하시지, 기독교를 무당의 종교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요즘은 한국이나 미국 교회 할 것 없이 이상한 운동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신약교회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시고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 성령이 임하시고, 내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자들은 자신만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매일 방탕한 짓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지도 않고 매일 술을 마시고 방탕한 삶을 살던 제가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기도하는 목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성령의 역사는 거룩한 삶을 좇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은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고는 스스로 신령한 척하며, 자기 해석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악령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이적과 기사를 많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순절에 드리는 두 개의 떡에는 누룩을 넣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교회에는 누룩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이 아닙니다. 목사도 죄성이 있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이 모여서 성령을 받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사를 전공하였는데, 2000년 교회 역사 상 완벽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허물이 보이고 죄악이 보일지라도 우리가 서로 극복하며 이겨나가야지 그것을 가지고 비판하고 정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룩 있는 떡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 오순절이었음을 기억하시고, 설령 허물과 부족함이 있어도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사람, 허물이 있는 사람, 죄인들이 모여 있어도 성령이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교회인 것입니다.
또 두 개의 떡이라고 했을 때, 숫자 ‘2’는 ‘증인’의 숫자를 뜻합니다. 교회는 복음의 증거자, 즉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 살펴 본 네 개의 절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하심과 성령 보내주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세상 어떤 사람이 아무리 탁월한 글을 쓰고, 책을 출판했다 할지라도 수천 년 후에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맞춰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며, 그래서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오늘날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
다섯 번째 절기는 나팔절입니다. 나팔절은 7월 1일입니다. 이 날은 피리나 다른 악기를 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팔만 불어야 합니다. 민수기 10장 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은 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 나팔 두 개를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아침부터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나팔이 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구속’, ‘속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 13절에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 반 세겔은 근로자의 이틀 치 임금에 해당합니다. 1년에 2일치 임금은 성전에 속전으로 낼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생명의 속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내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이것을 가지고 성전을 수리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속전이 되어 구원하신다는 복음을 교회가 전파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은 나팔 두 개가 필요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구약과 신약은 두 개의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같은 말씀입니다.
2세기에 활동했던 로마교회의 장로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를 만들어 많은 돈을 벌여 들여 로마교회를 장악한 후 자기가 공부한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상의 핵심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하고 신약의 하나님은 우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지 않다는 매우 악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시고, 구약과 신약은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두 개의 은 나팔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복음이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기도 하지만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 사함 받아 영생 얻는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죄 용서를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나팔은 은혜의 메시지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팔절은 하나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구원을 온 세상을 향해 증거하라는 것을 예표합니다.
여섯 번째 절기는 속죄일입니다. 레위기 23장 27절에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장 설교에서 면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만, 대제사장은 염소 두 마리를 취해 그 중 한 마리를 죽인 후 지성소에 들어가 그 피를 뿌립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1년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안수한 후 광야로 내 보내서 죽게 합니다. 이를 ‘아사셀 염소’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두 마리의 염소를 드리는 날이 바로 ‘대속죄일’(욤 키푸르)입니다.
이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금식하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죄를 고백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가운데 있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을 받아 지옥에 가기 다 틀린 사람들이 분명하지만, 더러워진 발을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여 죄를 씻어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속죄일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Ⅲ. 성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미래 사역
마지막 일곱 번째 절기는 장막절인데,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7월 15일부터 시작해서 7일간 지키는 것입니다. 레위기 23장 34~36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동안 지킬 것이라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칠 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막절이 되면 집 앞에 나뭇가지로 일종의 텐트(초막)를 만듭니다. 통풍이 잘 되도록 시원하게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 과일을 먹습니다. 이때가 되면 보리나 밀 추수가 다 끝났기 때문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과일을 먹고 쉬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면 생명수 강가가 있고, 생명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매달 다른 과일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사과, 귤, 배, 감 등 일 년 열두 달 다른 과일이 맺히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만 해도 각종 과일을 다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장막절은 천국의 복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죽어 천국에 들어가면 누리게 될 안식과 복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독교는 즐거움과 기쁨과 영광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반드시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세의 삶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후일에는 반드시 영광이 나타날 것임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지나가면 영광이 오는 것입니다. 현재 지금 이 세상에 살아가며 십자가 같은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막절이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결 론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림처럼 보여주는데, 먼저 우리는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행해주신 일을 알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항상 죄를 벗어나 하나님과 화목하고 동행하며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 명절에도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생과 부활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호주 시드니에 ‘아더 스테이스’(Arthur Stace)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인생의 깊은 절망 가운데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한 모든 말들이 기억에 남지는 않았는데, 딱 한 단어 ‘Eternity’(영원)라는 것은 뇌리에 박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거기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이 진짜 있구나! 인생을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세계가 있구나!
그리고 이 사람은 시드니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벽, 전봇대 할 것없이 보이는 곳마다 “영원이 있다”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평생 영원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 별명이 ‘Mr. Eternity’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일생이 연극과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영원과 구원과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할 증인입니다. 미래에 다가올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늘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