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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6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하바 쿡1,2-3;2,2-4 2티모1,6-8.13-14 루카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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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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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보다 큰 보물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위대합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히브11,13)
평범한 한 구절도 큰 위로를 줍니다.
믿음 있으면 사랑의 충만 이지만 믿음 없으면 허무의 심연입니다.
정말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은 좋은 믿음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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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겨자씨 할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 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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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게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몇 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0월 첫 날 새벽에 써놓고 하늘을 바라볼 때 마다 애송하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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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배고프고/목마르고/답답할 때
바라보는 하늘
아무리/먹고/마시고/숨 쉬어도
늘 그대로인 하늘
오,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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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가리키는바 하느님입니다.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는
부유와 행복의 원천인
이런 하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이 진정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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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자매님이
고백성사 차 방문하면서 품위 있는 큰 종이봉투에 선물을 담아왔습니다.
자매님이 떠난 후
기대감을 가지고 들었을 때 너무 가벼워 실망스런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 이처럼 가벼울 수 있는가?’ 생각하던 중
‘김’임을 직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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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람도 풍채와 외모는 그럴듯해도
하느님이 들어보시면 믿음도 이처럼 가벼울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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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깨달음이 전광석화처럼 스쳤습니다.
사람의 무게는, 인격의 무게는 바로 믿음의 무게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내 믿음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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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가벼우면 주변이 시끄럽다’ 두고두고 생각나는 잠언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인 장상의 믿음이, 내 삶의 중심인 믿음이 가벼우면
주변이 늘 불안하고 불화합니다.
오늘은 ‘믿음 예찬’을 강론 주제로 세 측면에 걸쳐 믿음에 대해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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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믿음은 항구한 기다림의 인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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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믿음의 열매가 지혜입니다.
아니 이미 기다림의 인내가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1독서 하바쿡에서 착안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하느님의 때가 될 때까지 무한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다 죽더라도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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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규칙에서
형제들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말씀하십니다.
경거망동, 부화뇌동은 결코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직할 정도고 끝까지 참아 견디는 이가 결국은 이깁니다.
자기 성깔을 못 이겨 분노하면 무조건 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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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하바쿡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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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하느님 향한 탄원의 기도입니다.
곤경 중에서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한 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탄원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하며 내 안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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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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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것 같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바쿡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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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위한 하느님의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때가 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지닐 것을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끝까지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성실함으로 사는 이가 의인입니다.
사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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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믿음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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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믿음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바로 오늘 2독서,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에서 착안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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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든 것은 삶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
바로 이게 우리 믿는 이들의 고난의 의미입니다.
누구나 지고 가는 제 십자가 역시 주님을 따름이 바로 그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하여 우리의 전 삶이
주님을 위한, 복음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요
이런 삶을 피해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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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주님을,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추호도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주님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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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이 믿음을 북돋아
고난 중에도 품위 있고 당당하게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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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복음의 위한, 주님을 위한 고난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삶일 때,
바로 그 믿음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값싼 평화가 아니라 고난 중에 익은 값비싼 참 평화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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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믿음은 주님의 종으로 제 직분을 충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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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믿음의 열매가 초연한 자유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착안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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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입니다.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종입니다.
바로 종의 섬김 안에는 순종과 겸손 모두가 내포되어 있지만
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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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비유가 참으로 적절합니다.
주인이신 주님과 종인 우리의 관계가 선명하게 들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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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을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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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런 종처럼 주님의 종이 되어 사는 신자들은 몇이나 되겠는지요.
온전히 주님이 전부인 자기가 없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게 진정 믿음의 진수입니다.
주님의 반응에, 이웃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주님의 종으로서 그 직분을 충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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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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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복음이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정말 자기가 없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믿음의 참사람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바보 같은 믿음입니다.
추호도 자기자랑이나 자기과시가 없고,
불평이나 불만도 없으며, 비굴하거나 자기비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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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님의 종으로 섬기며 산다면 문제는 다 해소될 것입니다.
세상 누구도 이런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못합니다.
새삼 모든 문제는 내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주인이신 주님께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가 있기에 이런 종의 믿음입니다.
이런 종 같은 믿음으로 살 때
삶의 짐은 절로 가벼워질 것이며
누구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초연한 자유를 누리며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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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청해야 할 은총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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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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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하느님의 때를 끝까지, 항구히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믿음입니다.
셋째, 주님의 종으로서 제 직분에 충실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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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시어
우리 모두 믿음 충실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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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바라는 이에게,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애가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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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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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하바 1,2-3; 2,2-4
제2독서 2티모 1,6-8.13-14
복음 루카 17,5-10
언젠가 신자들과의 모임에서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시작하면서 기도를 하더군요. 평소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쓰는 말이었는데, 이 두 분의 기도를 들으면서 이상한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즉, 믿는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저 역시 제 아버님께서 지난 5월에 수술을 하실 때, 기도할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자주 말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을 굳게 믿으니까 아버지의 건강을 허락해달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기도할 때에는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즉, 이제까지 주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받았으니, 이제는 제가 드리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믿는다면서 청하는 신앙인과 사랑한다면서 감사하는 신앙인 중에 누가 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으뜸 제자였던 베드로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굳게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했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본 뒤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께 사랑 고백을 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감히 예수님과 똑같은 십자가형을 당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지요. 사랑의 고백 이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만 사용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란 사랑에 기초해야지만 됩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향해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사랑의 또 다른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 안에서 좋아하는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적인 계산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 계산법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계산은 받는데 더 익숙하지만, 주님의 사랑 계산법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익숙한, 많이 주어도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요하다는 기억하면서,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데 믿음을 이야기보다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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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일>(2013. 10. 6.)(루카 17,5-10)
<믿음과 기적>
사도들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데(루카 17,5),
사도들의 말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이 말씀은, "믿음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다."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도 해내시는 하느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
("기적을 행하려고 하지 말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느님을 믿어라.") 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분은 하느님(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 하느님(예수님)을 믿고 청할 뿐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말은
'믿음이 있으면'을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겨자씨 한 알'은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있든지 없든지'입니다.
('믿거나 안 믿거나' 두 가지뿐입니다.)
반신반의는 안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돌무화과나무가 바다에 심어진다는 말은,
'하느님은 불가능한 일도 해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는 말은,
기적의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일 뿐이고,
글자 그대로 나무가 제자들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종하더라도 제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시는 하느님을 믿은 분 가운데
모범이 되시는 분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응답했습니다(루카 1,37-38).
하느님은(예수님은)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가 직접 기적을 행하려고 욕심내지도 말고,
기적을 행하라고 주님께 요구하지도 말고, 기적만 바라지도 말고...)
가브리엘 천사는 아들 요한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을 믿지 못한
즈카르야를 꾸짖었는데,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루카 1,20)."
라는 천사의 말에서 '때'는 주님께서 정하신 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그 '때'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우리가 흔히 잊고 지나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은 모두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드시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기적인데,
잉태만 하느님의 기적이었고,
잉태 후의 임신 기간, 출산, 성장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잉태 첫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과정에서는
다른 어머니들과 똑같은 고생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 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적이 필요 없습니다.
기적이 필요 없으니까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을 하셔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직접 해 주시는 일이 기적입니다.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적 같은 일, 또는 진짜 기적을 체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믿고 기도했더니 기도한 대로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믿음과 기도가 기적을 일으켰다." 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주님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기적을 행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런 기적들도 모두 사도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사도들이 행한 기적만 보고
사도들을 신으로 섬기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때 사도들이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서 교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리스트라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기들을 신으로 섬기려고 하는 군중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사도 14,15)."
이 말에는 "사람인 우리는 기적을 행할 수 없고,
기적은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믿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해서 기적 같은 일이(또는 기적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이렇게 찬미해야 합니다.
"인간이(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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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은망덕하지 않기 위해 >
정신분석 전문의 이무석 교수에게 J군이 찾아왔습니다. 25세의 J군은 키가 크고 잘 생긴 대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정신분석을 받았던 이유는 ‘노래 강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우연히 어떤 노래가 떠오르면 절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공부도 할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습니다. 한 번은 도서관에 앉아서 머리에 떠오른 노래와 10시간을 싸웠지만, 나중에는 식은땀만 나고 기진맥진해 진 채 공부는 하나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의 원인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어린 아들을 마당에 발가벗겨 놓고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놀면서 어머니를 종처럼 부렸고, 아들도 노는 꼴을 못 보았습니다. J군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온 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칼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J군은 아버지가 두렵기도 하고, 두려움을 주는 아버지를 증오했습니다.
노래 강박관념은 이런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반항이었던 것입니다. 노래강박증상은 J군의 자아가 노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에게 좌절을 안겨주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었습니다. J군의 자아는 이렇게 자기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저항하고 있었고, 이것을 J군은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은 분석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6층까지 걸어 올라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J군이 6층을 눌렀고 한 의사 가운을 걸친 사람이 7층을 눌렀습니다. J군은 자신이 6층을 눌렀기 때문에 7층까지 한 번에 가지 못하는 의사 선생이 자신 때문에 매우 불편해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남의 시간을 빼앗은 자신에게 그 의사 선생이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며 미안해했기에, 그 이후로는 의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으면 자신을 계단을 선택하는 것이 편했던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그의 무서운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투영되어 두려움 속에서 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이무석 교수도 아버지처럼 두려움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들어올 때 노크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안방 문을 함부로 열었다가 아버지가 방에 깔아놓은 부속품을 밟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며 크게 화를 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또한 J군을 무시했었는데 한 번은 J에게 드라이버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성격이 급한 것을 잘 알고 있는 그가 당황하여 아무리 찾아도 드라이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달려와 드라이버를 찾았고 “눈앞에 두고도 못 찼냐? 이 병신아, 도대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하며 J를 무시한 적이 많았습니다.
물론 이무석 교수는 친절함과 인내로 한 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차차 J군도 세상 사람이 모두 아버지와 같지는 않다는 것을 느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처럼 두렵게 여겼던 교수와 사이가 편해졌습니다. 물론 아버지와도 그만큼 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무석 교수가 일을 마무리 하다가 상담실에 1~2분 늦게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는 태연한 척 했지만 이내 기다리던 동안에 너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부숴버릴 것 같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가구 모서리에 찧고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는 자기 조절을 잃어버릴까봐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이런 공격적인 말을 듣고도 태연하게 그렇게 억압되었던 공격성이 이제는 표현의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억압해 왔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현했지만 그 분노가 보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심했습니다. 용서받았고 그래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아버지에게도 연민이 생겨 아르바이트 해서 목돈을 드리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취직시험도 두려움 때문에 몇 번이고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당당히 붙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풀리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풀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머리에서 울리는 노랫소리도 어느 샌가 멈춰 있었습니다.
[참조: 이무석, 친밀함, 비전과 리더십 2013, 88-99]
이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 때문에 강박증이 생겨 온 삶이 엉망이 되어버릴 뻔 했던 한 청년이 스스로 노력하여 이전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참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J군의 노력으로만 그렇게 된 것일까요? 물론 J군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무섭고 증오스러운 아버지로 바라보는 J군을 끝까지 참아주고 이해해주고 증오심을 사랑으로 되갚아준 이 교수가 없었다면 J군이 이런 변화를 겪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사랑으로만 치유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렇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절대 자신 혼자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 혼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내 주위의 모든 이에게 감사해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내가 더 주는 게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일본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하던 어떤 청년이 매번 입사에 떨어지자 무작정 회장 앞에 무릎을 꿇고 “저는 노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반드시 취직을 해야 합니다.”라고 사정했습니다. 예상 외로 회장은 “오늘 어머니의 발을 씻어드리고 내일 다시 오세요.”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어머니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두텁고 갈라진 굳은살과 뭉툭하고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발가락을 만지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감사보다는 불평을 많이 할 때도 있습니다. 받은 것 보다는 덜 받은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을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 부르나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배은망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록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와서 주인에게 시중들었다고 하더라도 “저는 아무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라고 합니다. 이는 ‘네가 한 것보다는, 받은 것을 더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람을 하인으로 들여 배불리 먹여주는 주인의 사랑은 그 무엇을 주고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 가끔, 혹은 자주 배은망덕합니다.
저를 처음에 사제로 불러주셨을 때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그분께 드린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많은 것을 하느님을 위해 포기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한 대가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밥을 굶고 성체를 영하면서 교만한 자아가 크게 한 방 먹었습니다. 저는 배를 채우기 위해 성체를 영했지만, 그 성체는 제 입속에서 녹으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느냐? 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저에게 성체로 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저를 살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언가 해 드리고 있었다고 착각한 것은 교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크면 내가 무언가를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결국 사제로 살게 되면 사제로서 봉사한 삶에 대한 영광은 제가 다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하느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에 대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었어도 내가 무언가를 해 드렸다고 착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다면 그 사람 안에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믿음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그것이 감사와 행복의 기초가 되게 됩니다.
80대 침해 끼가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범아, 저 새가 무슨 새냐?”
“까치에요, 아버지.”
조금 있다고 또 묻습니다.
“아범아, 저 새가 무슨 새라고 했지?”
“까치라니까요, 아버지.”
당신 앞에 날아온 까치를 보며 아버지는 또 묻습니다.
“아범아, 이 새가 무슨 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아버지. 까지라니까요, 까지!”
이 대화를 듣던 어머니가 조용히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범아, 네가 어렸을 때는 네 아버지에게 저 새가 무슨 새냐고 수백 번도 더 물었다. 그 때마다 네 아버지는 ‘까치란다. 까치란다...’라며 일일이 대답해 주었지. 그래서 네가 말을 배울 수 있었던 거란다. 그리고 그렇게 호기심 많은 너를 쓰다듬어 주셨지.”
사제로 지내는 지금도 가끔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매달린 그분만큼 힘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하지 말고 항상 이렇게 말씀드리며 하루를 마감합시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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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오합니다. “어미가 어찌 젖먹이를 잊으랴. 어미는 혹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신 사랑입니다. 이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아무리 작아보여도 살아있는 믿음에는 그만한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되게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믿으면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지 말고 먼저 그냥 믿으십시오. 믿으면 이해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공로와 바람보다 훨씬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제가 가평 꽃동네에 있을 때 한 신자분이 남편을 위해 기도하러 오셨습니다. 그 남편은 방지거 형제인데 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셨습니다. 병원에서 이제 90% 이상 퍼졌기 때문에 임종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리를 듣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하필이면 저는 미사지향의 권고와 강론에서 고통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하였습니다. ‘고통도 은총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면 분명 은총입니다. 따라서 나의 고통을 없이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나의 가족과 친척을 위해 먼저 기도하기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대신하겠다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기도하십시오.’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방지거씨 아내는 마음의 갈등을 느꼈습니다. “나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러 왔는데 신부님은 왜 나의 가족보다 남을 위해 먼저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나의 남편이 일어서는 것인데 그 기도에 함께하시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가? 그러나 신부님의 말씀이니 오늘 만큼은 다른 사람을 먼저 기억하자.”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기도의 우선순위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가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을 위해 온전히 봉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사 안에서 신부님의 말씀대로 따랐으니 주님께서 이런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겠지 하고 위로를 삼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배에 가득 찼던 물이 빠지고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퇴원하여 저에게 왔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남편을 비롯해서 시부모님, 자녀들 다 왔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정말 큰 은총을 입으셨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용서 청할 것이 있으면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 있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화해하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가족 전체가 고해성사를 보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잊고 살았는데 어느날 기도회에 미사를 봉헌하고 제의실에 있는데 한 여인이 쫓아와서는 덥석 껴안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저 아세요? 알긴 뭘 알아! 갑자기 놀라게 해 놓고는. 실은 좋으면서… 아! 남편은요? ‘예, 2년 만에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저는 얼마나 기쁜 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알고 떠났습니다. 이웃과 화해하고 가정 안에 화목함을 만끽하다가 갔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입니다. 불노초를 찾고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어도 언제가 하느님 앞에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태로 그분 앞에 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하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면 천상복락을 누릴 수 없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명이 따릅니다. 방지거씨 부인은 미사 안에서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이들을 기억하기로 기도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낳는 법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 주십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희망하며 기뻐해야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합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쳐다봐라 했을 때 그냥 보는 것입니다. 두말없이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과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롯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그가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는 소돔땅이 곧 파멸될 것이니 롯의 아들 딸, 가족과 사위 될 사람들을 데리고 그 성읍을 빠져나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딸을 데려갈 사위에게 말하였습니다. “자, 이곳을 빠져 나가게. 주님께서 곧 성읍을 파멸시키실 것이네.” 그러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롯과 아내, 두 딸을 데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부탁을 하였습니다. 롯이 초아르(작은지역)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오르고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이 모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된다” 했는데 돌아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위들도 장인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우스갯소리로 지나쳐 버린 것이 죽음을 자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순명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믿음에 따르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백살, 그리고 아내가 91살에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했을 때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이라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땅에 대고 픽 웃었습니다. ‘나이 백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웃다)으로 약속 받았습니다. 마침내 아이를 낳고 사라가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 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주겠지.”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리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었으랴? 그렇지만 내가 늙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창세21,1-7) 이렇게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으면 믿는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을 체험한 사람은 그에 따르는 믿음의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늦게 얻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모리야 땅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번제물을 사를 장작과 불과 칼을 들고 가는데 아들 이사악이 묻습니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22,7-8)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얻어놓고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천사가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네가 너의 아들,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어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야훼이레” 주님께서 마련하신다” 입니다. 믿음은 자식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는 순명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순명하게 되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흘러 넘치도록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역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머리로 아는 믿음인지 아니면 삶으로 행하는 믿음인지 살펴보고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단순하게 전적으로 따르는 순명의 믿음,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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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하느님께서 이에 응답해 주신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이를 하바쿡 예언자도 경험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그가 외칩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첫 번째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마약 중독자가 “주님, 저는 마약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마약을 주소서.” 하고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그 기도에 침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기도 지향부터 곰곰이 성찰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제1독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돌)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말씀을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돌 판에 새길 정도의 정성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분께서 침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래판에 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도의 응답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곧, 우리가 바라는 응답의 때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때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한 알이 큰 나무가 되도록 성장시키시면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니 그 응답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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