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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오늘 아침 공기가 시립니다. '아하 가을이구나.' 그렇게도 질기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바람결에
실려 살결에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문득 얼마 전 친구가 보내준 카톡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아이유'라는 어린 가수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입니다. 이제 스무 살을 갓 지난 아이유가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가
뭐 그리 들을만할까 싶어 열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찬 공기 속에 가을을 만나고 나니
문득 '낭만'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날아다니다가 드디어 그 카톡까지 이른 것입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는 음악 프로에 나와 아이유가 대담도 하고, 노래를 부른 것을 녹화한
유튜브를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뮤지션이세요. 그래서 아빠가 항상 부르시는 레퍼토리가 있어요. 그중에 가장 첫 번째 곡이 <낭만에 대하여>이거든요. 저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 <낭만에 대하여>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곡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콘서트로 전국 투어를 할 때 항상 그 무대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어요."
아이유의 이 사연이 흘러 흘러 <낭만에 대하여>의
원가수인 최백호 씨에게 전달되었고 이번에 두 사람이 같이 음반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사회자 유희열은 아이유가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는 어떤 느낌일지 들어보자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아이유는 "좋죠"라고 대답했습니다. 저에게 아이유의 "좋죠"는
그냥 "좋죠"가 아니라 아버님이 늘 즐겨
부르던 노래 <낭만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고 만나기를 원하였던 가수 최백호를 만나게 해준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TV 무대에서 부른다는 사실이 너무 "좋죠"라고 들렸습니다.
아이유의 <낭만에 대하여>가 "궂은 비 내리는 날"로 시작하였습니다. 아이유는 선배 가수가 부른 노래를 TV프로에 나와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아이돌 가수가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빠가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부르기를 수 백번 아니 천 번 이상. 그 세월 속에 <낭만에 대하여>는 이미 아이유의 것으로 변해 있었고 아이유는 그 노래에 스무 살 새내기의 낭만을 새겨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유는 20대답지 않게 농염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을
알리 없는 세대이지만 그의 감성에는 아이유의 감성이 아닌 그녀 아버지의 감성이 묻어 있었습니다. 홀린
듯 시간이 금방 흘렀습니다. 역시 아이유였습니다. 1절의
마지막 가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를
부를 때는 원 곡보다 훨씬 길게 "대하여" 부분을
허공에 긴 창을 던지듯 내뿜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간주. 관객의 박수가 터지고 나란히 앉아서 노래 부르고 사회 보던 아이유와
유희열도 간주에 맞추어 몸을 흔듭니다. 그 순간 무대 뒤편에서
"밤늦은 항구에서"를 묵직한 음색으로 던지며 최백호가 모습을 드러내며
서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옵니다.
오랜만에 보는 최백호의 모습은 반백의 초로의 신사입니다. 1950년생. 66세인 그, "낭만"이라는
단어가 어찌 그리 잘 어울릴까 할 정도의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밤늦은 항구에서 /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 가에서 / 돌아올 사랑은 없을지라도 /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진 /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 보렴"
귀에 익은 2절 가사가 이어지는 동안 가슴 저 아래에서 묵직한 것이 가벼운 단상들을 밀치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느낌은 분명했습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느냐마는" 이 대목에서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가슴
깊이 켜켜이 묻혀 있던 청춘의 추억들이 최백호의 목소리에 깨어나 흔들리며 가슴 밑바닥에서 비상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 낭만에~ 대하여~"
늘 그랬습니다. <낭만에 대하여>는
늘 이 대목에서 가슴을 휘저어 버립니다. 가슴이 울컥합니다. 오늘
아침, 최백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감정을 흔들어 놓습니다.
노래가 끝났습니다. 저는 제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제 <낭만에 대하여>가
실감 나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청춘'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청춘의 추억'이 그리웠고, '낭만'이라는
단어보다는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더 심금을
울렸습니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의 가슴속에는 홀로 존재하지 못 합니다. 반드시 <낭만에
대하여>로만 존재합니다.
얼마 전 96세이신 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님의 명강의가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유인경 선임기자가 그분을 뵙고 인터뷰한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90여 년을 살아보시니 나이별로 특징이 있던가요."
"저는 김태길, 안병욱 교수와는 셋 다 동갑이고 전공도 같아서 친분이 깊었습니다. 이젠 두 사람 다 고인이 되었지만 90세까지는 살았죠. 어느 날 우리끼리 ‘달걀에 노른자가 있어서 병아리도 나오는데 우리 인생에서 노른자의 시기는 언제일까’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65세에서 75세까지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시절’이라고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인간적이나 학문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였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더군요."
계절을 다 지내고 보면 봄은 봄대로 아름답지만 그 봄은 아직 어리고 풋풋해 깊이가 적고, 풍성한
가을이 더 깊고 화려함을 잘 알면서도 유독 인생을 이야기할 때면 청춘만 이야기하고 만추는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이제 <낭만에 대하여>를 지나간 20대 청춘을 추억하며 부르지 않으렵니다. 김형석 교수님이 말씀하신
인생의 노른자 65세부터 75세 까지를 기다리며 아직 겪어보지
않은, 그러나 너무나 기대되는 그 10년 '만추'에 만나게 될 화려한 낭만을 꿈꾸며 부르렵니다.
"왠지 설레고 흥분되는 내 가슴이~ / 다가올 만추에 대하여~ / 낭만에~ 대하여~"
이 가을의 초엽에서, 제 인생의 가을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해 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5.8.31.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