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
오늘 본문은 한 절입니다. 그러나 결코 간단하지마는 않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와 발신자 그리고 먼저 썼던 누가복음서에 대한 언급입니다. 내용상으로는 아주 간단합니다.
내용 전개상 먼저 발신자부터 언급합니다.
여기 ‘내가’라는 말은 발신자, 누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누가의 신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누가는 두 권의 성경을 쓰면서 자기 신원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누가의 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의 이력서
1) 이방인으로서 비 이스라엘인이요 비사도 2) 의사로서 당시 지식(인)분자 3) 비사도였지만, 복음서를 기록할 정도로 예수의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신앙인 4) 초대교회의 역사를 쓸 정도로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역사가 <보충설명> |
다음은 편지의 수신자는 ‘데오빌로’입니다.
‘데오빌로’
사도행전의 수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인물일까?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누구이기에 누가는 두 번의 장문을 써서 보냈을까? 누가는 이 수신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며 서신을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초의 정보는 누가의 두 번의 서신서에서 동일한 수신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데오빌로’에 대한 이 외에 별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데오빌로’의 신원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누가의 기록을 토대로 다음 두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각하’라는 호칭으로부터의 추론입니다.
누가는 첫 번째 서신인 누가복음서에서는 ‘데오빌로’에게 ‘각하’라는 존칭어를 사용했으나 사도행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마 누가복음서를 보내는 과정에서 서로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며, 복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어떠하든 간에 두 사람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처음보다는 관계가 훨씬 좋아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기 ‘각하(阁下)’는 정치적인 용어로서 최고의 통치자에게 붙여진 경칭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하’는 최고 통치자에게 호칭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최고의 통치자인 주석(主席)과 제 2인자인 총리(总理)가 함께 동석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총리에게 ‘각하’라고 불렀다면, 주석보다 총리를 더 높이는 격이 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결례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각하'는 통치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 성경에는 ‘각하’라는 말이 빠져 있으나 ‘각하’라는 말은 이런 개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데오빌로’는 정치적인 통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로마 황제나 로마에서 파송한 유대 총독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둘째는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으로의 추론입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혹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누가는 첫 번째 서신인 누가복음서에서 수신자를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첫 번째 서신을 보내기 전에 ‘데오빌로’는 이미 복음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이 이름은 이방인의 이름이 아니라 유대적, 즉 복음적인 이름입니다. 데오빌로는 이방인 정치인으로서 최소한 총독의 이상의 직함으로 통치하고 있는 관료입니다. 이런 이방인이 하나님과 연관된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습니다. 2) 이름이 누가복음서 중간이나 후면(10장, 20장 이후)에 나오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누가복음에는 아예 나오지 않고 사도행전에만 나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서신 초두(눅1:3)부터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데오빌로’의 신분에 관한 중요한 진술로서, ‘데오빌로’는 누가의 서신을 받아보기 전에 이미 복음을 접했으며, 이름도 유대(복음)적인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수신자를 복음적인 이름인 데오빌로로 호칭한 것입니다. 그리고 데오빌로는 원래 자기 이름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드린 후에 새로운 애칭(예명)으로 가진 이름입니다. 예컨대 야곱이 이스라엘로, 게바가 베드로로 다른 이름을 가졌던 것 같이 말입니다.
당시 정치적인 통치자들은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적인 이름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로마 황제 중에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본명이나 예명으로 가진 황제는 없습니다. 유대에서 통치했던 이방인 유대 총독들마저도 마찬 가지로 유대(복음)적 이름이나 예명을 가진 통치자도 없습니다.
본 주제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질문을 합니다.
‘데오빌로’라는 사람은 누구이기에 누가는 두 번의 장문을 써서 보냈을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누가가 이방인 통치자에게 무대포식으로 서신을 써서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서는 복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복음서의 내용은 복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오빌로’는 복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보면 데오빌로의 신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이방인 정치인으로서, 그의 직함은 헬라 어느 지방 총독으로서 ‘각하’라고 호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오빌로의 신원이나 정치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추론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관직에 있으면서 복음을 접하여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자기의 이름까지도 복음적인 이름으로 바꾸어 애칭으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름은 개명보다는 원래 이방인의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복음 안에서 애칭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서신을 보내면서 처음부터 아예 복음적인 이름인 ‘데오빌로’를 수신자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각하’라는 호칭을 통해 데오빌로라는 인물과 신분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으로 데오빌로의 신앙과 지금 다루고 있는,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왜 서신을 써서 보내게 되었는가? 기본적인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핵심적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데오빌로’는 복음은 접했지만, 깊이와 넓이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오빌로’는 복음(말씀)에 대해 더 듣고 싶어 했을 것이며, 더 깊이 알고 싶은 열망은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데오빌로’는 정치인 동시에 지식인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데오빌로’ 수준에 걸 맞는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데오빌로’에게 깊이 있는 복음을 전해줄 적합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 열두 사도는 대부분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데오빌로’를 상대하기는 버겁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지식인은 바울이었으나 바울은 아직 개종하지 않았습니다(행9장).
그래서 당시에 ‘데오빌로’의 눈높이에서 상대하기는 의사이며, 당시에 지식이 있었던 누가가 가장 적합하며 필요했던 것입니다. ‘데오빌로’의 이름의 뜻과 누가의 전체 서신(누가복음, 사도행전)내용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사도인 누가를 준비했다가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중심이 된 역사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상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사도인 누가가 쓴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배경 때문에 사도들은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론에서 여섯 번째 전제를 말하면서 사도행전은 비사도인 누가가 썼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심도 있게 다룰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비사도인 누가가 사도들의 역사를 쓰게 된 배경을 이제 이해가십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필요한 지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무릎 꿇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가겠습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영적인 삶입니다.
병고치는 일, 기적이 마치 영적 능력이 대단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은사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성경 말씀으로 영적인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답답해서 일시적인 현상으로 기적 등의 체험을 통해 깨닫도록 알려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으로 쉽게 깨닫지 못하니까 쉽게 깨닫도록 능력을 체험하도록 한 것입니다. 실상은 이런 사람이 영적인 수준이 가장 낮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가장 영적으로 수준이 높은 것처럼 되어버린 신앙의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준비된 자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먼저 쓴 글에는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본문의 세 번째 구성입니다. 첫 번째 구성은 발신자 누가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 구성은 수신자 데오빌로에 대한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누가복음에 대한 언급입니다.
‘먼저 쓴 글에는’라는 말은 지금 쓰고 있는 글보다 먼저 쓴 글이 있다는 것으로서 ‘누가복음서’를 말합니다. 그래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권을 썼습니다.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작’이라는 말은 짧게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부터 이지만, 길게는 아기 예수의 탄생부터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마태와 더불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복음)의 근원부터 알고 있다는 것을 두 번째 서신에서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습니다(눅1:1-3).
설교 준비를 거의 마치려 하면서 약 20년 전에 누가복음을 감동적으로 가르쳤던 김경진 교수님의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교수님은 한국 신학계에서 누가복음에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분 중에 한분입니다. 비록 20년이 지나 강의 원고는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강의가 생각나서 설교 준비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마치고, 교수님은 지금 곁에 없지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기도했습니다. “교수님의 감동적인 가르침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귀한 가르침의 배반하는 제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잘하는 선교사보다는 복음을 전파하며 방어하는 정직한 선교사로서 가르침에 보답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어디에 쓰시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내가 쓰임 받을 가장 적합한 곳은 어디일까요? 이 질문을 일단 던졌다면 사역의 장소와 사역의 방향을 먼저 찾으려고 헤매지 말고 먼저 준비하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데오빌로처럼 지식인에게 복음을 전할 누가가 필요 하듯이, 중국 지식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장 필요로 하실 때 준비된 사람을 쓰실 것입니다. 선교를 준비했더니 저 같은 놈도 이렇게 쓰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자기 달란트에 맞게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필요 적소에 쓰실 것입니다.
<결 론>
‘데오빌로여’
단순한 이름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가 편지를 쓰면서 수신자로 호칭한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리고 매주 주보에서 흔히 보는 설교 제목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데오빌로여’라는 이름 속에는 이런 깊은 뜻과 그 관계성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비 이스라엘이요, 비 사도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절묘한 타이밍(timing)에 맞추어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혹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이방인의 이름이 아닙니다. 유대적(복음적)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데오빌로’는 누가가 서신을 보내기 전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이것은 데오빌로가 누가의 서신을 통해 복음을 받아드렸다는 설을 받아드릴 수 없는 근거가 됩니다. ‘데오빌로’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유대적(복음적)인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총독을 지낼만한 정치인으로서는 더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복음을 접하고 이름까지도 복음적인 이름의 애칭을 갖고 있었던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렇지만 ‘데오빌로’는 복음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열망했을 것입니다.
‘데오빌로’가 복음에 대해 열망하고 있을 때에, 마치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알리는 88888 타이밍처럼(2008년 8월 8일. 8시 8분, 아마 이런 타이밍을 맞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님. 2007년이나 2009년은 이런 타이밍을 맞출 수 없음),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를 소개받고 붓을 들어 첫 번째 서신인 누가복음을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 누가는 성령의 감동, 충만으로 이글을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가 전혀 모른 데오빌로 총독 각하에게 복음서를 써서 보냈겠습니까? 누가는 그렇게 무지한 사람이 아닙니다. 반면에 데오빌로가 복음의 무지했다면 누가가 이렇게 장문의 글을 써서 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데오빌로는 누가의 첫 번째 서신을 받아보고, 옛날(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누가의 서신은 약 25년 이상 차이)에 유대 땅에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었던 예순의 이야기를 누가 감히 나에게 편지로 보낸거야, 즉 데오빌로는 누가의 서신을 괴문서로 오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복음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더 깊이를 알고 싶었던 때에, 어디서 모르게 날아온 한편의 서신에서 그동안 그토록 열망했던 더 깊은 복음을 접하게 되면서, 바로 이것이야, 이것이야 말로 가장 고귀한 생명이야! 감격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마치 늙은 선지자 시므온이 포대기에 싸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이 아이가 메시아다. 내 눈으로 구원을 보았다. 만민 앞에 예비된 빛이요”이라고 감격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데오빌로에게도 누가의 서신을 바라보면서 이런 감격이 없었다면 누가의 서신은 장문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괴문서로 오해받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서신은 바로 단절되었을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누가의 서신을 보면서 복음이 전해질 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제반사항을 누가에게 질문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누가는 누가복음서와 성격이 완전히 다른 교회의 역사인 사도행전을 후편으로 써서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교회의 역사는 서두, 1장 다음인 2장의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오빌로여’
두 번째 서신인 사도행전에서 시작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이름으로서 ‘데오빌로’, 정치인으로서 ‘데오빌로’, 누가의 서신의 단순한 수신자로서 ‘데오빌로’로만 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름 안에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오묘한 진수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부릅니다. (000 이여)
네 이름 안에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에서 내 이름이 어떻게 시작하여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기대하며 열심히 준비하여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이 열매는 철에 따라 맺는 열매가 아니라 나의 인생의 열매요, 삶속에서 신앙의 열매요, 사역의 열매입니다.
묵상합니다. 묵상 후에 제가 마무리 기도하겠습니다.
첫댓글 오늘 설교에 등장한 김경진 교수님이 설교후 월요일 새벽 기도시간에 문득 떠오르면서 20여년 전 신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화가 뇌리에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져 소개하려고 합니다.
김경진 교수는 신약학 박사입니다. 신약 중에서도 누가복음을 전공한 분입니다.
누가복음서 강의를 하면서 교수님이 쓰신 누가복음 중에서 한 권을 읽고 report 하는 것이
학기 시험이었습니다. 학점을 따기 위해 열심히 읽고 레포트를 제출했습니다.
우리 때만 해도 한클라스에 100여명이 되었습니다. 레포트는 학기말 시험이기 때문에 제출 기일까지 반드시 내야 했습니다.
레포트를 다 받으시고 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100여명 중에 책을 비평한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말을 직접하시기에, 잘 하면 C학점 그저 D 학점 정도 생각하며 당시 체념을 했습니다. 그러나 학점 통지서를 받아보니, A학점도 아닌 A+ 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쓴 책을 학생(제자)이 그것도 학기말 시험 레포트에서 비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은 아닙니다. 또한 이런 제자에게 점수를 주려는 교수(선생님)도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김경진 교수님은 최고의 점수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휼륭한 분이며,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제가 20년 동안 현장애서 가르친 사역을 감내한 것은 바로 이런 교수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좋은 주일되세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