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그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그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그만한 나무 한 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 2004
사진 〈Bing Image〉
세상의 불빛 한점
김 태 정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멩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 2004
쇠물푸레나무꽃 / 사진 〈Bing Image〉
물푸레나무
김 태 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기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며 찬찬히
가난한 여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 2004
사진 〈Bing Image〉
겨 울 산
김 태 정
한시절 붉고 노란 단풍으로
내 마음 끝없이 일렁이게 하더니
내 마음 일렁여 솔미치광이버섯처럼
내가 네 속을 헤매며
네가 내 속을 할퀴며 피
흘리게 하더니
이제 산은 겨울산이다
너는 먼빛으로도 겨울산이다
어느 결에 소스라치게 단풍 들어
네 피에 내가 취해 가을이 가고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
이제 우린 겨울산이다
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
추운 애인아
누더기라도 벗어주랴
목도리라도 둘러주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 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 2004
해남 미황사 / 사진 〈Bing Image〉
미 황 사
김 태 정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 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얼....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 2004
〈김태정 시인〉
△ 서울 출생
△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雨水'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 2011년 9월 지병으로 미황사에서 작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