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마 녀 사 냥
마녀사냥은 중세 중기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 행해졌던 마녀나
마법 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에서부터 형벌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마녀사냥'을 '마녀재판'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유럽에서의 마녀재판
마녀는 본래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출산이나 질병치료 같은 의료 기능을 담당하거나
점을 치고 묘약을 만드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한 집단이었다.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던
그들은 어느 날 졸지에 악마와 놀아나면서 신앙을 해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다고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불어닥친 유럽의 ‘마녀사냥’은 17세기까지 대략
20만 명 ~ 50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대에 올렸다.
일찍이 마녀재판이라고 하면, 12세기 이후 기독교의 주도에 의해
행해져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1970년대 이후 마녀재판의 학술적인 연구의 진전 덕분에 수정되어
본래 민중 사회에서 일어났던 마녀재판은
14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쳐 볼 수 있었으며
마빈 해리스는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고 기술한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關東大虐殺)
(조작된 유언비어가 낳은 집단 광기)
지진.화재 등 대혼란 중 "조선인이 방화하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일본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과 경찰을 동원하고, 주민들에게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였다
간토 지역에서 철저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어
공포에 사로잡힌 일본 민중과 일부 관헌에 의해
조선인 수천 명과 중국인 300여 명이 살해되었다
남경 대학살
1937~1938년 남경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포로
일반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
5만 여 일본군이 1937년 12월 중국인 포로와 일반인에게 강간.학살.
약탈.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생매장.화형 등의 방법으로 학살했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의하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살해되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기록에 의한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 이상이
일본군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 731부대의 마루타 생체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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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받지 않은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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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존엄성에 대한 악마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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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기관으로 흑룡강성 하얼빈에 주둔했던 비밀부대
731 부대는 1936년 일제의 만주침공 때 설립, 1945년까지 생체 해부실험과
냉동실험 등 마루타 생체실험을 자행하며 생물.화학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생체실험 대상자를 가리키는 말인 '마루타(통나무)'는
한국, 중국, 몽골, 러시아인, 연합군 등 전쟁포로와
일제에 잡혀 구속된 사람들로 3000명 이상으로 추정.
일제의 패전 이후
이러한 끔찍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731부대 관련자들은 전쟁 범죄자로 기소되지 않았다.
미국이 인체실험 결과(자료)를 넘겨받고 관련자들을 석방한 것이다.
미국의 파렴치한 거래로 731부대의 만행은 묻히게 된다
자유당 정권의 만행
제주 4.3 항쟁 발생 : 1947,3,1
성격 : 지역 주민 대규모 희생 사건
종결 : 1954,9,21일
1947,3,1~1954,9,21 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 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서
없어졌으며 가옥 39,000 동 이상이 소각되었다
1948년 여순 민중항쟁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정부측 진압 군경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1979,10,26일 박정희 사망으로 18년간의 군사 정권이 무너졌다.
이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그해 12,12일
전두환의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로 대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