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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18세기 유럽의 기독교 부흥운동
18세기 영국을 살려낸 웨슬리 형제와 휫필드 등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말은 그들의 부흥 운동이 단순히 종교-사상적 범주 내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비록 그들의 부흥운동 전체를 꿰뚫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 할지라도 "문화는 종교의 형태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라는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이해는 단편적으로 흐를 여지가 많은 것이다. 마치 18세기 영국교회가 노예제도에 대하여 가졌던 잘못된 관점처럼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것에만 머물게 된다면 이는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고찰함에 있어서 분명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 것이다. 모든 사상운동과 혁명과 종교운동은 반드시 그 사회의 기본 토대들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종교)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18세기의 위대한 부흥운동은 당시의 정황이 이끌어 낸 필연적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는 진보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의 진보라는 그릇 안에 인간의 열정과 믿음과 희망을 담게 한다.
이 글은 그러한 이해를 전제로 사회적 배경 즉 당시의 사회현상을 연구하는데 한정되며 이런 연구에 있어서 견지한 것은 끊임없이 인간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음을 밝힌다. 이를 바탕으로 18세기 부흥운동의 성격이 온전히 규명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정치적인 상황
18세기 중반과 그 이후는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 사상적으로는 이신론, 그리고 메도디스트들에 의한 교회의 개혁과 부흥운동이라는 정치, 경제, 사상의 변화가 급격히 이뤄진 시기였다. 영국은 이런 18세기의 급류 한가운데에서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가 된 것이다.
가. 프랑스혁명
18세기의 영국 상황을 알려면 영국이 속한 대륙의 전체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 상황이 전개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혁명의 갑작스런 발발로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프랑스는 위대한 기회의 땅이었다. 그곳은 기름지고, 성공적이고 부유한 곳이었다. 하지만 교회적 상황에 있어서는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교회에 있어서는 불의와 불평등의 수수께끼가 엄존했다. 따라서, 혁명이 끝났을 때, 교회들은 본질적인 적으로 간주되었고 교회의 영향력과 특권은 급속도로 쇠퇴해갔다. 십일조는 폐지되었고 교회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종교적 요구들은 억압되었고, 감독들과 교구목사들은 그들의 독립성을 잃고 대중적 조류에 휩쓸리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은 영국의 사유에 있어서 나라 전체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하나는 그 혁명적 사상을 기꺼이 받아들인 진영 즉, 자유와 평등과 협동의 가치를 인식한 이들이 사회적 평등을 호소하고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그 안에서 찾으려 한 점이다. 둘째 부류는 혁명이 이뤄지는 현상들에 있어서 공포를 가지는 부류이다. 이들의 우려는 온갖 종류의 폭동과 반란에 대응하여 보수세력의 견해를 결집시켰다. 이리하여 혁명에 대하여 거대한 적대적 입장이 증진되었다. 혁명의 기치에 대한 선언은 훌륭한 것이었음에도 인명에 대한 대량살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영국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의 개혁에 대한 물고를 터놓는 사건이었다. 혁명의 제 문제는 교회의 일각에서 진지한 고려의 대상으로 부각되게 되었다. 또한 계몽주의는 인간 자유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였고 프랑스 혁명의 선언은 대륙을 엄청난 영향력으로 휩쓸었다. 이것들은 영국에 와서 열악한 민중계층의 자각을 이끌어 내었고, 교회 내에서 아직은 소수에 머물고 있는 각성되고 신실한 신앙인들에게 사고와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의 충격이 되었다.
렉키는 18세기 웨슬리 부흥운동을 평가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과격함과 인본주의적 유형을 종교운동, 사회운동으로 전환 시켰다고 주장하였으며, 헤일도 18세기 웨슬리 부흥운동과 사회운동이 중산 계급과 노동 계급 사이의 연계를 맺게 해서 폭동을 막았다고 설명한다.
나. 영국의 정치적 부패상
브래디에 의하면 18세기의 처음 60년 동안은 실로 뇌물, 부패, 사기, 속임수가 정치라는 기계의 톱니바퀴와 지렛대였다. 이 정치적 부패구조의 핵심인물은 월폴(Robert Walpole)이었다. 그는 조오지 1세와 2세 두 왕 밑에서 1721년부터 1742년까지 영국의 정치를 주도했다. 조오지 1세는 독일에서 태어나 양육되었기에 영국 사람들에게 이방인이요 영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등 영국의 업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떠맡기에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월폴이 중대한 권력을 쥐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는 월폴의 시대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비록 그의 시대에 군주의 전제정치가 와해되고 수상과 내각에 의한 의원내각제가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치세 하에서의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부패는 하원을 비대표적인 집단으로 만들었고, 그의 치세가 끝났을 때에는 반세기 동안 영국의 정치를 지배해 온 오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싸우기를 좋아하는 휘그당(Whig)의 독재정치는 이미 뼈 속까지 부패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월폴은 뇌물과 부패를 국가의 지속적이고 철저한 정책으로 만든 오명과 책임을 피할 수 없는데, 그에 의하면 정부는 부패 아니면 폭력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전자를 그의 정책적 원칙으로 택하였다. 그는 잠자는 개들을 계속 누워 있게 했고, 그들이 깨어서 짖어대며 사나운 이를 드러내면 항상 뇌물이라는 고기덩이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는 거금을 왕과 여왕에게 뇌물로 헌납하기를 곧잘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치세 동안에 대부분의 의회의원들이 그의 기밀비를 받았으며, 심지어 교회 감독들까지도 이러한 방법으로 그에게 매수되어 있었다. 그의 성격으로 말하면 고의적이건 아니건 간에 마키아벨리적 사고방식이었고, 그의 습성은 그의 정신과 마음이 교활하고 야비한 것처럼 천하고 육욕적이었다. 그는 술주정꾼이었고 대식가였으며 공공연히 간통을 행하는 자였다고 한다.
이런 정치적 부패의 와중에 공개적으로 런던 타임지(The Times of London)에 의원직 판매가 광고되기도 했으며, 의원직의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체스터필드(Chesterfield) 경은 자기 아들을 위해 2,500 파운드라는 저가로 하원 의원직을 사려다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올드 살룸(Old Sarum) 같은 몇몇 선거구들은 집이나 거주자가 없는데도 2명의 의원을 의회에 보냈고, 맨체스터(Manchester)처럼 산업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큰 중심지들은 의원이 전혀 없었다.
또한 국민들은 소수 집권자들의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군주의 친척이거나 부패 선거구의 투표권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는 대개 군주로부터 한직 형태의 직위(sinecure post)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보통 국민들의 정치활동이라는 것은 고안된 법에 순종하고 소수 지배자들이 그들에게 부과한 세금, 십일조, 사용료와 의무들을 불평 없이 지불하고 이행하며 강제 징모대, 노상 강도, 차꼬(stocks), 채무 교도소, 그리고 교수형을 피할 수 있기를 열심히 간원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 이런 정치가들이 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국교는 그들의 영향력 확대와 그들의 후원자들에게 보상을 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브레디(Bready)는 이 시대 정치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의 측면에서 접근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은 무정한 개인 이기주의였고, 그것은 정치에서 보다 더 무자비하게 표현되었으며 영혼이사라진 이신론은 자연종교와 그것의 이교적인 도덕과 함께 이상하게도 날카로운 발톱, 피에 절은 이, 그리고 완력에 친숙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2. 사회 경제적인 상황
가. 농업혁명
18세기 영국은 식량 생산의 증대가 요청되자 광대한 농토를 이용하는 것이 큰 이득이 되었고, 이에 더 큰 자본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공유지의 사유화법령이 제정되자 농토는 정치적 배경을 가진 소수의 대지주들 손에 넘어갔다. 가난한 농민들은 대부분 농노의 지위로 신분이 격하되었고, 한편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 산업혁명
18세기 영국의 대 변혁은 1760년 제임스 하그리브스(James Hargreaves)의 방직기계 발명, 1708-9년의 에이브라함 다비(Abraham Darby)에 의한 철제련을 위한 석탄연료 사용, 1775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의 발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산업의 발달과 대량생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특히 1770년은 근대와 중세를 가르는 구분점이기도 하다. 1770년을 전후한 급격한 사회변화는 노동자들의 요구 증대와 사람들을 주로 석탄 광산과 혹은 그 주변인 새로운 산업 지대로 구름처럼 몰려들게 하였다. 지나친 인구 집중은 주변에 빈민가를 형성하였고 그곳은 높은 유아 사망률, 공중 위생의 불량, 콜레라의 만연으로 피폐되어 있었다.
인구집중으로 인해 값싼 노동력을 얻기가 용이해진 것은 상대적으로 노동자와 그 가족의 복지 및 노동의 대가에는 크게 못 미치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많은 경우 노동력은 남성들 뿐 아니라 어린이들과 여성들에게서 충당되었다. 심지어 5세 전후의 어린이들조차 고용되었고 가족의 수입은 고작 몇 페니 정도가 전부였다. 몇 년 안에 영국에는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산업화 지대'(industrial area)에서의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산업화 지대'는 급속하게 '낙후지역'(depressed area)으로 변모되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결과는 필연코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빈익빈 부익부를 초래하였다. 대량생산은 일부 부유한 층에는 소비와 향락의 만연을 가져왔고 상대적으로 빈곤층은 더욱 열악한 사회-경제적 환경으로 빠져들었다. 고용주들은 인구집중으로 인해 값싼 노동력의 확보가 용이해졌으나 빈곤층들에게는 실직의 위협이 증가하였고 실제로 실직한 많은 사람들은 도시 속의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면 이제 노동자 계급과 빈민들이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과 실제 환경은 어떠했는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다. 노동자 계급과 빈민
18세기 초 영국은 점점 더 빈곤해지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와 매우 부유한 소수로 계층이 갈라지는 양극화 과정을 겪고 있었는데, 소작인들과 빈곤한 사람들이 백성의 가장 큰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구호의 혜택도 교회의 구조도 받지 못하였으며 의사의 진료조차 받지 못하여 사망률은 날로 더해 갔다.
이들의 빈곤화의 원인은 공공기관의 땅의 구별, 휴경지의 소유화 및 토지와 장원의 통합으로 인한 농민들의 토지 박탈과 국가기관의 경직된 태도 및 소유주들의 전통적인 입장, 산업화가 주원인이었다. 자본가들의 강한 투자력과 현대화된 농업방법은 소농민들과 부업적인 농민들로 하여금 경쟁력에 뒤져 삶의 터전을 잃게 했다. 게다가 산업화로 인해 증기기관과 면직산업의 기계적인 작업 도구들이 발명되어 무수한 가내공장들의 손노동이 기계노동으로 대체되면서 실업자의 숫자는 더욱 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더욱 낮아지게 되었다. 당국과 부유한 층들의 무관심, 그리고 가난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으며 신적인 형벌의 표식이라는 영국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는 빈곤한 자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렇게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굶주림에 못 이겨 거리에 구걸을 나섰고 그러다가 굶주림과 추위에 거리에서 그대로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시기에 실업은 영국 사회의 큰 문제였는데 노동자 계층들은 이러한 잦은 실업과 노동력 착취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했다. 당시 광부들은 하루에 약 1실링(shilling)을 받으며 하루도 쉬는 날 없이 1주일 내내 하루에 16내지 17시간씩 노예처럼 일했다. 그리고 늙거나 그 일에 적합하지 않게 되면 가차없이 해고되어 가난과 질병의 비참함에 내던져졌다.
여성들도 광부로 일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탄광에서 일하게 되었다. 완전 나체의 남자 광부들을 옆에서 도왔는데, 6세에서 21세의 여성 노동자들이 상반신 나체로 네발 가진 동물처럼 석탄 바스켓을 운반하였다. 한 여인은 갱 안에서 두 아기들을 낳기도 했다. 200여명의 여자 노동자들이 1845년까지 일하였다. 4세에서 13세 이하의 남녀 아동들이 석탄 광부일에 고용되어 하루 11시간 이상 14시간까지 아니 그 이상도 노동을 강요당했다. 소년 소녀들이 도제(apprentice)라는 구실 아래 고용주들에게 노예처럼 팔려가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산업노동자들의 3분의 1이 5세에서 8세의 소년과 소녀들이었으며 맨체스터의 전체 노동인구의 8분의 1인 1만 5천명이 지하실에 살았다.
지하실에 살았던 노동자들 중, 1,500가구가 세 명이 하나의 침대에서, 738가구가 네 명이 하나의 침대에서, 218가구가 다섯 명이
하나의 침대에서, 94가구가 여섯 명이 하나의 침대에서, 두 가구가 여덟 명이 하나의 침대에서, 31가구가 아예 침대없이 살았다. 그들의 주거환경은 어둡고 답답하고 병들기 쉬운 환경이어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리버풀(Liverpool)은 15세, 맨체스터는 17세, 볼튼(Bolton)은 18세였고 리즈(Leeds)에서는 극빈자들의 평균 수명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22세보다 훨씬 더 많은 49세였다.
이러한 사업가들의 노동력의 착취, 늘어나는 실업, 노동자들- 특히 광산과 여성과 어린이들-의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및 저임금 등이 특별히 잔악해지거나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일어날 때면 국지적인 데모가 발생했고 이 때 군중들의 흥분이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관리들은 이러한 정당한 항거를 유발한 원인을 제거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이러한 행동을 공공질서 파괴와 동시에 전통적인 특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 대개 군대를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고 주도자들은 중벌로 다스렸다.
이런 열악한 노동 상황은 노동조합의 결성을 촉진하였는 바 이 노동조합의 조직 및 핵심인물들은 메도디스트 운동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속회'의 조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이 '속회'의 지도자들이 후일 노동조합의 중요한 인물들이 되기도 하였다.
라. 사법 및 행형(行刑)제도
18세기의 사법제도를 간단히 표현하면 형법은 지나치게 엄했으며 소송절차와 집행은 불분명했고 집행은 참혹했으며 교도소의 내부 상태는 열악하였다.
국회는 사형죄에 해당되는 범죄 목록을 18세기 동안 무려 200개 이상으로 확대시켰다. 집 토끼를 쏜 자, 교량을 훼손한 자, 묘목을 뽑아 내버린 자나 5실링을 훔친 자 등의 경미한 죄인들도 교수형에 처할 수 있었다. 이런 법률은 가난한 자에게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곤경과 굶주림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러한 행위들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고소당하거나 체포되었을 때에는 사형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무원칙적이고 무차별적인 법 집행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타락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많은 미결수들이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재판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 반해 명망 있는 변호사를 고용할 만큼 충분한 돈이 있는 사람은 고소나 재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경우 절차상의 허점을 이용하여 처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이런 허점들은 간수들의 횡포를 초래한 바, 확실한 봉급을 받지 못했던 간수들은 다른 식으로 수입을 챙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인들을 윽박지르거나 상응하는 돈을 받고 수인들에게 특별한 조치(예를 들면 쇠사슬을 일시적으로 풀어주는)를 취했다. 그들은 알코올과 마약을 팔았으며 매춘행위를 허용하기도 했다. 유명한 수인들은 돈을 받고 관중들에게
구경을 시키기도 했다. 비용을 지불하지 못한 수인들은 간수들에 의해서 살해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무죄선고를 받거나 형기를 마친 후에도 담당자에게 빚을 진 이유로 감옥을 떠날 수 없었다.
교도소에는 보통 남, 녀, 어린이들이 구별되지 않고 수감되었으며 간수들의 잔인성과 아울러 열악한 식생활과 위생상태는 비참한 교도소 내의 상황을 더하게 하였다. 이런 환경은 중병과 사망 사고를 초래하기도 했다.
사형 집행에 있어서의 잔혹함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한 죄수를 형장까지 동행해 주었던 메도디스트 설교자인 테일러(Thomas Taylor)의 목격담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최종적인 형 집행이 행해지기에 앞서 마치 푸주간 주인이 큰 식칼로 갈비 조각들을 잘라 내듯이 형 집행인들이 큰 도끼로 사형수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고 한다. 특히 반역죄를 지은 자에게는 형 집행인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최대한 죽음을 지연시켜 온갖 고초 속에 서서히 죽게 하여 고통의 무게를 더하게 했다. 어떤 경우에는 발가벗겨 어두운 방에 가두고 그의 가슴에 무거운 돌이나 쇠덩이를 올려놓아 죽게 하기도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남편을 살해한 여인들과 반역죄를 지은 여인들이 법에 의해 화형을 당한 일도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형법과 교도소 체계에 내포되어 있는 잔인성에 대해 교회와 국가는 아무런 반대의 소리를 내거나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있었다.
마. 노예제도
18세기의 사회적 문제들 중에서 노예문제가 최악의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문제였으며 또 그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노예매매는 파생적인 가증한 악들을 수반했다는데 심각성이 있었다. 노예매매는 영국에 온갖 미혹, 유괴, 사기, 그리고 책략을 조장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활동 후기(1770이후)부터 노예제도에 대하여 뚜렷이 반대하며 공개적인 저항을 하게 되는데, 일찌기 죠지아 사역중에 본 'white slavery'라고 불리는 식민지 인디언 노예매매는 웨슬리의 영혼에 대단히 증오스런 것이었다. 그는 이같은 일에 대해 타협없이 반대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웨슬리는 1760년에 노예 소유주와 두 명의 노예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노예 소유주는 서인도제도(west indies)에서의 최초 감리교도가 되었으며 웨슬레의 사역과 부흥운동이 확산되는데 효율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영국이 노예매매에 개입한 것은 1500년 경 포르투갈인들이 이 사업을 시작한 이래 16세기 중엽부터였는데, 영국인들에게 흑인 노예매매 사업의 독점권을 보장해 주었던 유트레히트 조약(The Treaty of Utrecht)에 속하는 1713년의 아시엔토(Asiento) 특허를 획득하자 영국은 이 노예무역 사업에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80년과 1688년 사이에만도 영국의 아프리카 군단과 무허가 상인들에 의해 수송된 흑인 노예는 200,000명이 넘었으며 1783년과 1793년 사이에 리버플에서만 출발한 배에 의해서 미국으로 수송된 노예가 약 300,000명 정도였다. 이 사업으로 영국은 엄청난 부를 얻었다. 그리하여 이 사업의 보호와 발전이 정치적 활동의 목표가 될 정도로 국가적인 관심이 고조되었다.
노예선원을 조달하기 위해 유괴와 유인, 사기와 계략을 통한 인신매매가 횡행했으며, 런던에서는 이러한 악질적인 앞잡이들이 조를 이루어 건장한 젊은이들을 유인해 함정의 덫에 걸리게 하여 자물쇠가 잠긴 집이나 다른 은밀한 구류소로 납치했다가 벵겔선 선장에게 팔아 넘겼다.
브래디는 그의 책에서 월폴(Horace Walpole)이 1750년 2월 25일에 만(Horace Mann) 경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의 식민지에만 매년 46,000 명의 노예들이 팔려 나갔습니다"라는 말은 당시 노예매매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근대 무역이 시작될 때 노예무역자들은 흑인 노예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영향에 접하게 되어 곧 그들의 운명을 향상시키게 된다는 주장을 폈지만 이는 순전히 위선이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종교적인 교육을 아무 것도 받지 못했고 세례를 받게 된 사람은 극소수이며 거의가 결혼의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쇠사슬과 수갑을 채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면 이러한 해악에 대해 당시의 교회는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 기독교인이 된 노예들은 그들의 기독교인 소유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런던의 식민지 담당 감독은 1727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앙이 주는 자유는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나 이들의 외적인 지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런 상태에 있었듯이 그렇게 전혀 변화가 없다. 그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외적인 지위에 변화가 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들의 생각은 노예제도를 신적인 세계질서의 한 요소로 본 것이었다.
몇몇 영국 국교인들은 회심한 노예들을 해방하였다가 감독으로부터 책망을 받기까지 했다. 신약성서 특히 바울서신을 근거한 영국 국교회의 이런 입장은 18세기 중엽까지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비록 와버튼 감독과 몇몇 목사들이 반대했지만 국교회의 공식적인 견해는 노예제도를 문제삼지 않는 것이었다.
바. 교육환경
브레디는 18세기 초를 가리켜“희망이 소멸하던 시기”로 평가했다. 대부흥이 도래하기 직전 모든 계층에서 출생한 어린이 4명 중 3명이 15세 이전에 죽었다. 74.5%의 사망률이었다.
교육에 있어서 귀족이나 부유한 자들은 가정교사를 둘 수 있었지만 교육비를 지불할 수 없었던 서민의 자녀들 대다수는 어떠한 정규적인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한 집 자녀들이 교육에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대중교육을 위한 설비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가능하면 빨리 돈을 벌어야지 학교에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요소 이외에 모든 어린이들의 기본교육을 위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된 주요 원인은 그러한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사. 사회현상 - 음주, 도박, 스포츠
18세기 영국사회는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었다. 그들은 퇴폐, 방종 그리고 낭비의 부도덕한 삶의 표상이 되었다. 부유층은 교외 호화 주택에서 사치스럽게 살았으나, 공장, 광산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삶은 어렵고 고통스러웠으며 안전이나 보상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삶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여기로부터의 탈출은 도박, 음주, 폭력 등을 통한 무질서, 무규범, 방탕의 생활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낮은 생활 수준에 높은 정도의 불안전이 가해졌고, 그들 사이에서는 렉키가 '끝없는 불안, 혁명의 가장 위험한 징후'라고 불렀던 상황이 도래되었다.
18세기 사회 상황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음주와 도박 그리고 잔인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마샬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8세기 동안의 레크레이션은 모두가 인간 본성의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저열한 측면에 호소하는 것들이었다. 상 하층을 불문하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 음주와 도박이 만연되어 있었고 닭싸움이 애호 스포츠였다."
브레디에 의하면 의회의원들이 술에 취해 국정 업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에 의회가 일찍 휴회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은 가능하면 계약 당사자들이 맑은 정신으로 엄숙히 식을 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침에 행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체스터(Chester)의 감독에게 꾸지람을 들은 한 국교회 목사는 교회 예배의무 중에는 결코 술취한 일이 없다는 주장으로 자신을 변호했다고 한다.
브래디가 기술한 바, 당시의 음주량의 증가는 가히 놀랄만하다. 상대적으로 알콜 도수가 낮은 맥주를 대신하여 독주인 위스키가 점차로 영국인들의 일상음료처럼 되어갔다. 브래디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1684년도에 527,000 갤론이었던 영국의 위스키 류 생산량이 1714년에 이르러서는 2,000,000 갤론으로, 1727년에 이르러서는 3,601,000 갤론으로, 1735년에 와서는 5,394,000 갤론으로, 1742년에는 7,000,000 갤론으로, 그리고 1750년에는 11,000,000 갤론이라는 극대의 수치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음주로 인한 술취함의 만연은 브레디에 의하면 사회적 퇴행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 결과로서 그 시대의 타락된 시대정신의 표현이다. 이에 대해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독주 매매를 금지시키기 위해 1736년과 1743년에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효력이 없었다.
18세기 영국 사회는 도박이 만연하였던 사회악의 터전이었다. 도박은 전국적인 광증이 되어 상하 양원은 도박가들로 가득 찼고 런던의 클럽들은 거의가 도박 소굴이었다. 마운트포드(Mountford) 경처럼 도박에서 막대한 돈을 잃고 자살한 사람도 생겨났고 여자들도 거기에 빠져들었다. 수상의 딸인 펠햄(Pelham)은 도박 중독자로 소문난 대표자였다.도박은 18세기 초반 정부에 의해 조장되기도 했는데 국가 복권추첨을 통해 웨스터민스터 다리 건설(1736)이나 영국 박물관 건립(1753)의 재원을 마련키도 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스포츠는 공격적이고, 격정적이며 위험했고, 잔인하고, 도박성이 현저했다. 사람들은 곰과 황소 그리고 오소리 괴롭히기와 투계를 즐겼다. 그러한 것들은 생명이 있는 짐승들에게 너무 잔인한 행위들로서, 생명이 있는 동물들을 괴롭히는 것을 오락으로 삼는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가장 끔찍한 잔인성의 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곤봉 경기와 권투 역시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곤봉경기는 곤봉으로 상대방의 머리에서 먼저 피를 흘리게 한 경기자가 그 한 판 승부의 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복싱경기는 노골적인 살육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권투장갑도 끼지 않은 채 보호장치도 없이 시합에 임했던 것이다.
18세기의 사회 상황에 대하여 강근환 박사는 [신학과 선교] 제3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W. H. Fitchett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묘사하고 있다.
"참으로 영국 사회는 어두웠고 , 그 어두움은 날로 더욱 짙어만 갔다. 영국의 사회는 모든 면에 있어서 질병으로 만연되어 있었다. 사상성은 고상하지 못하였고, 스포츠는 잔인하였으며, 공중생활은 부패하였고,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었다. 정치인 법관 종교인, 민중 할 것 없이 모두 부패하였고 잔인무도 하였다. 이 때야말로 채찍과 태형의 시대요 술주정뱅이의 시대였다. 간음은 일종의 스포츠처럼 되어 심지어는 부정을 행한 아내보다도 배반당한 남편이 오히려 창피를 당하는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