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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 21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 고전 11: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고전 11: 21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
이것은 그 교회의 큰 흠이었다.
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이는'(*, 가르)은 앞 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행한 만찬을 부정한 이유를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함께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먹고 마심으로' 만찬을 통해 참된 교제를 나누지 못했다. 이것은 결국 거룩한 주의 만찬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바울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이 나눈 만찬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책망한 것이다.
2]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런 애찬 후에 성만찬이 행해졌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에서부터 교제를 나누지 않고 먼저 먹고 취함으로(21절) 애찬과 성만찬을 일반 식사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만찬이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고전 11: 22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이었다.
그것은 고쳐져야 했다.
1]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서 행한 모습들은 마치 집에서 먹는 일반 식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 그런 식으로 참여할려면 집에 가서 하라고 책망한다.
2]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 고전 15: 9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 빌 3: 6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 모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육신적인 만족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 있어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3]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빈궁한 자'는 단순히 '가난한 자'의 차원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부자들은 보이는 것에만 치중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백성을 분리하고 구별지어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열등감과 굴욕감에 빠지게 하였다.
4]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들을 칭찬만 할 수 없었다.
5] 칭찬받는 교회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17절 상반절에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쓰고 있으며 22절 하반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너희를 칭찬하랴?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합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파당 때문입니다. 무슨 파당입니까? 이번에는 성만찬을 둘러싼 파당입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행하기에 앞서 교인들이 함께 친교의 식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공동식사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 신자들의 모임은 대부분 교인 중 부유한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큰 방이 있는 집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사이에는 가진 자들도 있었고 갖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집의 주인은 의례히 부자였을 것이고 자연히 친한 지인들도 대부분 가진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보다 가까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로 따로 모여 각각 다른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큰 저택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식사 공간이 있었습니다. 삼 면의 벽이 모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긴 안락의자가 달린 식탁이 차려진 식당(triclinium)이 있는가 하면 그저 똑바로 앉아서 먹어야 하는 마당을 향해 열린 식당(atrium)도 있었습니다.
물론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하는 방이 더 고급스럽고 편안한 식당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이들 사이에 나뉨이 생긴 것입니다. 가진 자들은 일찍이 와서 비스듬히 누워서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곤 했던 것입니다. 일하느라고 일찍 오지 못한 가난한 이들은 그저 앉아서 먹는 식당에서 먹여야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의 공동식사는 각자가 싸온 것을 풀어놓고 먹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가진 자들은 좋은 음식을 많이 싸가지고 와서 좋은 방에서 여유 있게 먹곤 했습니다. 게다가 거나하게 취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자연히 일하다가 늦게 와서 다른 방에 모여서 먹어야 하고 남아있는 것도 별로 없어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과 사이에 차별이 나타나고 그것이 파당이 되며 분쟁의 씨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만찬은 각자가 가져온 음식물을 한 자리에 풀어놓고 다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3절에서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 배가 고파서 다들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할 사람은 아예 자기 집에서 미리 먹고 올 것이지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먹음으로써 시험 드는 사람 생기게 할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이 본문 34절 상반절의 말입니다:“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교회라고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성찬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신의 살과 피를 다 내놓으셨음을 기념하며 그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그와 연합하는 은혜의 예식 아닙니까?
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같은 믿음으로 함께 나눔으로써 다 같은 한 지체임을 확인하는 예식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찬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이에 대한 믿음이며,그 목적과 결과는 주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다른 지체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며 모두 하나가 될 때 진정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 없이 남들이 먹기 전에 아니 다른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혼자 배고프다고 먼저 식사를 끝내버리는 등의 이기적인 행동을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한쪽으로 소외감, 박탈감, 열등감 등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전해주신 성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칭찬을 받을 교회이기는 커녕 아예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쓴 것이 본문20-22절의 말입니다:“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너희를 칭찬하랴?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사도 바울은 오늘의 두 본문 사이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되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님의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끼워 넣었습니다(고전11:23-25).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는 말 속에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성찬식은 지금 너희가 행하는 그런 성찬식하고는 다른 것이라”는 뜻이 무겁게 실려 있습니다.
26절에서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합니다. 주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입니까? 우리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는 죽으심이며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 없이 먹고 마시는 일이나 그래서 파당이 생기게 하는 행실들 가지고 주의 죽으심의 참 뜻을 어떻게 세상에 전하겠다는 것이냐고 힐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한 말이27-29절의 말입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겠습니까? 우선 떡과 잔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믿음을 고백하며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깨우치려고 한 것은 신학적 의미 이전에 윤리적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과 그것을 통해 이루려고 하신 하나 됨을 실천하며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이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랑 가운데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모두가 한 지체가 되는 것이 주님의 만찬이지 그런 사랑의 배려 없이 자기 배부터 채우려는 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니며 그저 자기들의 죄 즉 이기적인 탐욕의 죄와 분열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고 모든 지체를 사랑으로 대하며 그러기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성도들의 모임이 칭찬받을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교회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성만찬에 대한 교훈 ( 11 : 23-34 )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전 11: 23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
성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성찬의 떡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그것은 양손과 양발이 못에 찢어지고 머리가 가시면류관으로 찢기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상한 몸이셨다.
1]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본 절의 선언을 통해서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성만찬에 대해서 이미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성만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그런 죄를 범하였다고 변명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2)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께 받았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성만찬의 규례가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본 절에서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인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이 있어 왔다. 반대의 이유는 본 절의 '주께'(*, 아포 투 퀴리우)에서 직접적인 전달을 의미하는 전치사 '파라'(*)를 사용하지 않고 간접적인 전달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사도 전통(傳統)이나 사도들에게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Beza, Hofmann).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아포'가 단순히 간접적인 전달의 경우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저에게서 듣고'(*, 앞 아우투)라는 말을 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
* 요일 1: 5 -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또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아포칼립세오스) 것이라고 말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
* 갈 1: 12 -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로 보아 성만찬의 규례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으로서(Bengel, Calvin, Meyer, Olshausen), 바울이 전한 성만찬 규례의 권위의 확고성(確固性)을 내포한다.
2]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잡히시던'(*, 파레디데토)은 예수께서 유다에 의해 배반당한 것을 의미한다. ‘
파레디데토'는 '파라디도미'(*, '내어주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그 배반이 갑작스런 충동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계획의 성취임을 시사한다.
예수는 배반 당하시던 그날 밤에 유다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성만찬 규례를 제정하셨다.
3] 떡을 가지사
'떡'은 성만찬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 식사 과정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무교병이었을 것이다(Godet, W.H.Mare).
* 마 26: 17-19 –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 눅 22: 7-20 –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날이 이른지라. 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만찬의 의미는 '떡'이나 '포도주'가 어떤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Grosheide).
고전 11: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성만찬 규례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본서에 나타난다(23-25절. 마 26: 26-29. 막 14: 22-25. 눅 22: 17-20).
본서에 나타난 성만찬 규례는 세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예를 들면, '기념하라'(24절; 눅 22: 19), '새 언약'(25절; 눅 22: 20)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마도 누가가 바울의 추종자였으며,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였던 때문일 것이다(Edwards).
1] 축사하시고(*, 유카리스 테사스)
본 절에서는 누가복음의 경우와 같이(눅 22: 19) '사례하다'(to give thanks)의 뜻을 가진 '유카리스테오'(*)가 사용되었으나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사용된 것은 '축복하다' 혹은 '찬양하다'의 뜻을 가진 '율로게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양자가 구분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본 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 관습의 일부인 봉헌(奉獻) 의식을 반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서 일반적인 떡을 성만찬의 떡으로 바꾸셨다(Grosheide).
2] 떼어(*, 에클라센) 이르시되
이는 '떡을 쪼갠다'의 의미로 공동 식사의 한 모습이다.
떡을 떼는 행위는 유월절 식사의 경우 애굽에서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의 규례에서는 고난을 당해서 찢길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상징한다.
개역 성경에는 '찢긴'(*,클로메논)이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사본상의 문제이다. 고대 사본(*, A,B,C)에는 이것이 빠져 있기때문에 혹자는 이것을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Hort, Lachmann, Tischendorf).
혹자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이나 비잔틴 사본에 기록 되어 있음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삽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De Wette, Hofmann, Reiche).
문맥상 그것은 '떼어'와 연관되는데 이유는 그리스도의 '찢긴 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찢긴'을 삽입하는 것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3]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너희를 위하는'은 성만찬의 목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직접 행한 것임을 시사한다.
4]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1) 이것을 행하여
'이것을 행하여'는 성만찬이 영구한 제도로서 사도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까지도 영원히 행하여야 할 규례임을 시사한다.
(2) 나를 기념하라
'나를 기념하라'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며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다.
* 눅 22: 19 -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기념하라'는 '상기시켜 기억하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유월절 규례를 기념하라'신 명령을 상기시킨다.
* 출 12: 14 -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런 그리스도의 명령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규례를 계속 지켜왔던 것처럼 성만찬 규례를 기억하고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신 명령은 새로운 성만찬 규례를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은 아마도 "너희가 성만찬을 기념할 때, 어린양의 피로 조상을 구원한 것을 기억하지 말고 너희를 구원할 나와 내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Godet, 눅22:1-23 주제 강해 '성만찬과 성찬식' 참조).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