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11시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피곤한 몸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돌아오는 생활 2년이 되어간다. 이런 칸트적인 생활을 계속하기에 항상 도서관이 끝날 때 쯤 만나는 분들이 있다. 도서관을 청소하시는 분들이다.
나이가 지긋하시고,삶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하신 분들이이시다. 그분들은 항상 아직까지 남아있는 학생들 발 사이로 쓰레기를 치우시면서 도서관을 청소하신다.
그 분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에서 답답함과 함께 뭉클해짐을 느낀다.
나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의 암울한 정치 현실과 경제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한국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해서거니와 소박하지만 소중한 삶을 살아가시면서 묵묵히 자신에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인 것 같다.
오늘 읽었던 문창극의 중앙일보 컬럼은 나의 답답함을 더욱 답답하다 못해 분노하게 만들었다. 조중동의 언론의 횡포는 이미 익숙할데로 익숙하여 이제는 한겨레 손석춘 부장의 말처럼 희화화거리로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청소하시는 분들을 비롯한 많은 성실한 노동자 분들과 대비되는 수구보수세력들의 여전한 논리와 글들이 신문지상에 가득한 것을 바라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문창극! 오늘은 너의 논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뻔한 탐욕인지 논하고자 한다.
원문을 인용한다. (쓸데없는 글들이 많아 중략을 몇 군데 하되,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를 비롯하여 많은 논단의 글들을 제멋데로 편집하여 왜곡하듯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의 틀, 毛澤東의 틀]
-->제목에서 부터 유추할 수 있듯이 이 글은 박정희의 성공한 경제발전의 틀과 실패한 모택동의 틀을 대조하면서 성공한 박정희의 틀을 유지해야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지금의 개혁에 대한 반대의 글이라는 거다.
<<과거 청산 한다고 허물기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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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몇년 살았던 경험으로 보면 미국인들이 우리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보다 3배 이상 소득이 높으니 당연히 3배 이상 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우리보다 잘 살까. 반면 후진국의 근로자들은 우리보다 더 고생을 하는데 왜 못 사는 것일까. 우리 역사만 보더라도 "동창이 밝았느냐.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며 근면을 제일 큰 덕으로 가르쳤는데 왜 조선은 망하고 말았는가>>
---->> 대부분의 꼴보수주의자들의 글이 그러하듯 처음은 이렇게 당연한 원론적이며, 사실들을 쓴다. 처음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글로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자면 문제가 있다. 샤뮤엘 헌팅텅이 Foreign Affair지에 <문명의 충돌>을 썼을 때 독일 프랑크 푸르트의 대표적인 학자인 하랄트 뮐러는 <문명의 공존>을 쓰면서 그의 주장에 반박을 했다. 헌팅턴과 같은 보수 주의자들의 지나치게 단순화된 젼제를 가진 이론의 틀을 스콜라의 대표적인 학자인 오컴을 빗대어 <오컴의 면도날>을 잘못 휘둘렀다고 비판했다. 문창극의 서론 역시 뒤에 전개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미국과 한국의 발전의 원인을 단순한 틀로써 획일화하고, 국제정치 국가자원 국제사 인구수 국제 경제적 측면 등 많은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 결국 발전이라는 것은 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고 박정희가 만든 틀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좋은 틀이고 그것을 허물고 있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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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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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좋은 틀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산맥을 만들어 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지금 우리는 틀을 만들기보다는 틀을 부수기에, 산맥을 쌓기보다는 그나마 조금 높여놓은 산맥까지도 허무느라 정신이 없다. 과거청산이라는 말을 들은 지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는 60년 전의 친일을 청산하자고 나서고 있다. 친일을 용납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과거 허물기가 우리의 미래와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느냐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과거청산이 좋은 틀을 짜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를 의식하며 해야 한다.>>
---->>결국 문창극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여기이다. 다른 부분들은 지극히 일반론적이고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부분이 글의 핵심이며 문창극의 주장이다. 문창극의 글의 전제는 지금 쌓아 놓은 박정희의 군사문화의 잔재들과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의 문제 ,현대사회에는 맞지 않은 재벌이라는 경제적 체제가 옳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들을 허무는 것에 반대하고, 오히려 이것을 지금은 높힐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창극의 말이 논리적이며, 근거가 있고, 타당한가? 과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의미있는, 필요한 발언인가?
나의 대답은 분명 '아니다' 이다.
한국 근대사의 비극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역사라는 것이 제대로 쓰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일기가 아니라, 그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조명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좋은 지침서이다. E.H. Carr 가 그의 저서 < What is A History>에서 지적했듯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인간은 기껏 살아야 100년 이기에 역사를 공부하고 그것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더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인문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사의 역사는 어떠한가? 한국 역사의 비극은 사회에 악을 행하고도 떳떳하게, 아니 오히려 사회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시대 친일적 행각을 자행했던 대부분의 일제노동부역자들은 이승만이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반민족처벌자를 위한 특별법을 없애면서 살아났으며, 오히려 처벌을 주장했던 민족주의자들은 빨갱이로 몰려 납치되어 고문받고 조용히 죽어야만 했다. 다카기 마사오 일본 관동군 장교였던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친일에서 친북 세력으로 변신하여 이 사건을 주도했고, 결국 잡혔지만, 운좋게 담당관이 자신의 일본 사관학교 1기 선배였기에, 자신의 동료들을 모두 자백하여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놓고 남한의 사관학교에 다시 입사하는 세계역사상 유래 없는 역사적 희극을 쓰면서, 결국 쿠테타로 정권을 잡아 18년간의 장기집권을 하였고, 자신의 후예인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긴 장막을 펼쳤다.
이러한 박정희의 군사정권에 기생하면서 살던 군사독재의 수구 세력들은 문민정권이 들어서고, 심지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회의석을 대부분 점거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친일진상조사법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한국 근대사 어디에서 사회적 악에 대한 처벌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쓰여지는 역사들을 보면서 우리의 자식들과 후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리 사회에 정의를 깨고,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해서 산다 해도 벌을 받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역사가 제대로 쓰여지지 않는한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비극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이러한 단순하고, 쉬운 명제를 왜 문창극은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가?
틀이 무너지고 있다고? 도대체 무슨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인가? 친일파를 청산하는 일이 우리 사회와 경제를 흔들기나 한다는 것인가?
이번 반민족진상조사법은 처벌법도 아닐 뿐 아니라 단지 사실을 밝히자는 것에 불과 함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이 법을 심사하는 법사위원회의 의장을 비롯한 몇몇 의원의 아버지들이 친일파였기에, 그리고 한나라 민주당에게 가장 가까운 동반자인 조중동의 사주가 다 친일파였다는 사실들이 이 법을 얼마나 가로막았단 말인가.
친일을 용납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고? 도대체 그럼 어떠한 방식으로 친일을 처벌해야하나. 이러한 단순한 조사만으로도 이렇게 크게 반대를 하는데, 도대체 방법이 무엇인가. 결국 하지 말자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문창극의 글은 언뜻보기엔 친일 청산에 동의하는 것 같지만, 바로 앞에 적었던 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글을 통해서 지금의 일제청산 바로 박정희가 잘 만들어 놓은 우리에게 유익한 틀을 깨는 것이며 그러기에 이것은 시기 상조라는 자신의 주장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왜곡하는 뻔한 논조를 쓰고 있다. 기만적 수사학이다.
도대체 무슨 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인가? 여전희 60%이상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생계유지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빚더미에 시달려 심지어 어떤 노동자들은 자기몸에 석유나 신나를 껴안고 분신자살을 하고 있는 데, 그들의 처우가 개선되었단 말인가?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법제도들이 벽을 허무는 것으로 밖에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는가? 그들이 정신이상자인가? 왜 우리는 한 가정의 소중한 아버지이고 남편인 분들이 몸에 기름을 붓고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신문구독의 80%를 점거하고 있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신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단 말인가. 어떻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외면하고 안타까워하기는 커녕 그들을 2만불 경제로가는 길을 가로막는 범죄자로 밖에 신문에서는 기술하지 않는 것인가?
문창극의 글은 또한 지금 현대에 수구기득권들을 위한 것 외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박정희가 경제를 성장 시켰다면, 지금처럼 비대한 공룡같은 재벌을 위주로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때의 토탈리즘의 부활로 노동자들을 예전처럼 세계 최장기 노동시간에 시달리게 하면서도 최저임금의 10분의 1도 안줘야 한다는 것인가? 공룡은 기후에 변하지 못했기에 자연히 사라졌는데, 언제까지 이런 공룡들을 방도 좁은 온실안에 모셔놔야 하는가?
박정희 시절 당시 조금만 참으면 나누어 주겠다며 떡을 만들면서 노동자들은 콩고물만 만지작 거리는 걸로 만족하게 했던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이제는 그나마 배는 곪지 않으니 배가 아파서 그 조그만 떡조각 마져 뺏어가려고 하는건가?
이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위한 노무현 정권의 친노적인 정책들은 노정권을 견제하여 한나라당의 의석수를 채우기 위한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정치적 공세속에 묻혀 비난 받아야만 하는가.
진정으로 무너져야할 틀은 여전히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개혁에 대한 안티 아닌 안티를 하고 있다. 근거 없는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이를 조중동은 그것이 사실인양 그대로 글을 쓰고, 모든 책임을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몰아가고 있다.
젠장할 언론이다. 결국 가장 큰 걸림돌은 언론이다. 한나라당의 800억의 천문학적인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문제는 어느덧 노무현의 10분의 1 발언으로 흘러갔고, 신문지상은 결국 노무현의 문제로 도배를 하고 있다.
한국에 헌법이 들어선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한번도 빠짐없이 했던, 아니 심지어 안기부를 통해 명령까지 했던 여당에 대한 총선에 대한 지원의 기록들은 사라진채, 기자회견에 했던 여당에 대한 노무현의 지지발언이 탄핵이라는 허무맹랑한 결과까지 가져오며, 조중동은 결국 이것을 또 노무현이 풀어야 한다는 결론의 사설로 도배를 한다.
개혁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이라는 근대에 있어서 개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 역사의 진정한 비극은 비극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반성되고 해결되지 못한 채 계속 되는 것이다.
언론은 제 3의 권력이며, 푸코가 이야기한 미시 권력망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오늘날 민주주의의 확산과 함께, 가장 강력한 권력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언론이 여전히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썼던 진정한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첫댓글 조중동중엔 그래도 가장 치우치지 않은 논점을 가진 거 같아 중앙일보를 즐겨보는데..유독 문창극씨의 글은 저도 항상 눈에 거슬리더군요... 신경쓰지 마세요...수구언론이 아무리 사회의 변화를 붙잡아보려 해도 국민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우민이 아닙니다..
'' )잘 안되더군요..그냥 공부만 하고 있으려니, 그런 제 자신이 너무 싫기도 하고..어쩌면 이런 문창극과 전혀 다를바 없이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 그런 저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드는 군요.관심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치적인 몽상은 나의 수험생활을 연장시킬 듯 하다... 생각하고 싶어 미치겠지만 조금만 참자... (3월 20일 일기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