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 쯤에 67년생인 친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건강하세요"
"반갑네. 아우"
'경자년' 세밑에 받았던 동생의 전화라서 더욱 반갑고 고마웠다.
전주에 사는 동생의 용건은 '토지매각'에 대한 것이었다.
13년 전인 2008년 여름에 내 아버지는 소천하셨다.
소천하시기 직전에 어머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을 불러 모으셨다.
경향각지에서 삼남이녀와 각각의 배우자들까지 총 11명이 아버지 곁에 모였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최후의 말씀을 남기셨다.
생생한 육성으로 구술하신 마지막 '유언'이었다.
의식은 또렸하셨다.
판단력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예리하고 정확하셨다.
그때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세 명의 자식은 '전답'을 상속 받았고, 두 명의 여식은 적지 않은 '현금'을 상속받았다.
자신이 평생동안 일구셨던 소중한 가산을 전부 자식들에게 건네시면서 어머님의 '후일'을 당부하셨다.
자신의 배우자인 어머님께는 단돈 10원도 건네지 않으셨다.
그 대신 어머님 소천시까지 각 형제들이 극진하게 어머님을 케어해 드릴 것을 당부하셨다.
아주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하나 하나 짚어주셨다.
끝까지 대단한 모습이셨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더 이상의 '케어 솔루션'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현명한 방법이었다.
'교회'와 몇 군데 '공동체'에도 적잖은 헌금과 후원을 말씀하셨다.
엄중한 당부였다.
어머니를 비롯한 10명의 자식들은 그 속깊은 지혜와 판단에 더욱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형님, 이제는 아버님이 물려주신 논을 매각하려합니다. 아버님이 떠나신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어차피 논은 '경작자'가 소유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현업에서 은퇴한다고 해도 직접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고요."
나는 그 전답에 대해 아무 생각없이 13년을 살아 왔다.
그런데 동생의 뜬금없는 전화를 받고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았다.
그 '농지'는 내가 노력해서 매입한 것이 아니므로 '내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당연히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훗날 내 자식들에게 재상속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동생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동생과 통화가 끝나고 그 이튿날엔 '홍길동'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홍길동'은 나와 동생의 논을 경작하고 있는 '고향친구'였다.
동생이 그 친구에게도 이미 전화를 했던 모양이었다.
"친구야. 잘 지내지? 신축년엔 더욱 건강하고."
"자네도 새해 복 많이 받어. 반갑네."
"어제 전주에 사는 동생의 전화를 받았지?"
"그럼, 받았지."
"나에게 동생이 전화했는데 내가 현재 경작하고 있는 그 토지를 나에게 매각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게 당연하지. 자네가 지금까지 그 논을 耕作하고 있었으니까. '耕者有田'이란 말도 있잖은가?
"내가 동생의 전화를 받고 밤새도록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동생 논만을 매입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네. 자네 것까지 함께 매입하여 농지를 한덩어리로 만들어야 차후에 농삿일이 수월하고, 훨씬 효율적이지. 어치피 두 논이 붙어 있으니까 경계선을 허물고 기계가 한번 들어가면 한방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시간과 경비를 줄일 수 있거든. 그러니 이번 참에 자네도 매각을 한번 신중하게 검토해 보게."
고향에서 6만평 정도의 어마어마한 땅을 경작하고 있는 친구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이니까 그야말로 '죽마고우'였다.
나와 그 친구의 두 아버님들도 연세도 같으셨고 매우 가까운 절친이셨다.
또한 두 어머님들도 서로 친자매처럼 왕래하셨고 둘도 없는 벗처럼 지내셨다.
내게 '홍길동'이란 친구는 그런 존재였다.
"알았네. 친구. 나도 갑자기 동생과 자네로부터 전화를 받은 만큼 생각할 시간을 주게. 내 아내와도 긴밀하게 상의해 보고 연락할게."
삼사일 정도 신중하게 생각했다.
당근 아내와도 깊게 토의했다.
결론은 아우와 함께 내 농지도 '동시매각'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긴급하게 현금이 필요한 싯점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의 의견과 친구의 의견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게 '當然之事'라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논을 경작해 주었던 친구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배려라고 믿었다.
형님의 농지는 다른 마을에 있었으므로 동시에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해당 논을 경작하는 사람도 달랐다.
나는 결론을 내렸고 친구와 동생에게 내 최종 의견을 전달했다.
1월 13일날 만나서 계약서류를 작성하자고 했다.
바로 오늘이었다.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고향으로 향했다.
농협에서 법무사 입회하에, 우리형제와 친구가 반갑게 해후했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고 인감도장을 날인했다.
'이전등기'는 내일 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땀이 깃든 목돈이 내 계좌로 들어왔다.
십원도 쓰지 않고 그대로 투자해 두었다가 가문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예정이다.
내가 고향에 왔다는 소식에 절친 세 명이 식당으로 달려왔다.
반가운 얼굴들.
모두가 두 테이블에 나눠앉아 맛있게 식사했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참동안 웃고 떠들었다.
모두가 각 기관의 책임자들이어서 시간활용에 약간은 자유로움이 있었다.
정말로 유쾌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동생도 전주로 가고, 친구들도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우리부부는 부모님이 계시는 납골공원으로 갔다.
'승화원'이었다.
상속받았던 전답과 그의 처리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드리고 싶었다.
꼭 그리 하고 싶었다.
그것이 부모님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토지처분뿐만 아니라 자금사용에 대한 향후계획도 소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부모님의 3세인 내 두 자식들에 대한 근황과 미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보고드렸다.
그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승화원'에서 함참을 머물렀다.
이것저것 디테일하게 말씀드렸고 마음을 모아 기도했다.
또한 부모님께 깊은 감사를 고백했다.
빛나는 가문의 '정신'과 '철학'을 위해 더욱 진중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상경하는 길에 '군산항'에 들러 요즘 제철인 '말린조기'를 구입했다.
엄청나게 큰 스티로폼 박스에 무려 280여 마리가 포장된 상품인데 도매가격으로 17만원이라고 했다.
매력이 확 느껴졌다.
아내는 소매가격이라면 최소 25만원은 넘을 거라고 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바로 구입했다.
아무튼 갑자기 '조기부자'가 된 듯했다.
'건조박대(서대)'는 봄이 제격이라 그때 다시 구입하기로 했다.
작은 것 하나라도 형제들, 이웃들,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들과 조금씩이라도 나눌 생선이었기에 따지고 보면 그리 많은 양도 아니었다.
집에 도착해 '생선구이'로 석식을 마쳤다.
바다내음이 입안에 가득했다.
싱싱하고 부드럽고 식감도 일품이었다.
부모님은 진작에 떠나셨고 나도 어느새 '이순'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내 자식들도 이젠 '서른'이 되었다.
한 세대가 가고 다른 한 세대가 이 사회의 중심부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해 가고 있는 형국이다.
비호같은 세월 속에서 가문의 계승과 성장 그리고 고유한 우리의 아이덴터티에 대해 다양한 사유를 이어가고 있다.
'퇴보'나 '답보'가 아닌 '전진'과 '발전'을 위해 나도 내가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만 하는 미더운 노력들을 조금이라도 해태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야만 우리 가문의 시조인 1대 '현담윤' 할아버지로부터 28세인 나, 29세인 내 딸과 아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30세인 손주까지, 그 나름대로의 혈통과 맥에 대해 부끄럽지 않는 후손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가능한 한 말은 줄이고, 서원하고 기도한대로 '실천과 행동'에 집중하는 2021년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삶'은 '앎'이 아니라 '행'이기 때문이다.
그리운 부모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