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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불과 진설할 떡
레 24: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3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 그는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 위의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
5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7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레 24:1-9 / [등잔을 잘 보살펴라]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올리브를 잘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써서 등잔불이 항상 꺼지지 않게 하여라. 3) 아론은 매일 저녁 등잔을 잘 보살펴 그 다음날 아침까지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여라. 지성소에 있는 법궤 밖에 쳐놓은 휘장 앞에 이 등잔불을 밝혀 놓아라. 오고오는 세대마다 이 규정을 영원한 규정으로 삼아 꼭 지켜라. 4) 아론은 순금으로 만든 등잔대 위에 이 등잔불을 밝혀 놓고 잘 손질하여 여호와께서 계시는 곳에서 이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살펴보아야 한다. 5) [진설병] 너는 고운 밀가루를 가져다가 떡 12개를 구워라. 떡 한 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밀가루는 4.4리터이다. 6) 이 떡 12개를 순금으로 만든 상 위에 한 줄에 6개씩 두 줄로 가지런히 차려 놓아라. 7) 이 떡을 여호와께 불살라 바친다는 표시로 각 줄마다 깨끗한 향을 올려놓아라. 8) 이 떡은 안식일마다 여호와 앞에 다시 차려 놓아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꼭 지켜야 할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야 한다. 9) 이 떡은 여호와께 살라 바치는 제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룩한 제물이다. 이 떡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몫으로 돌려라. 제사장들은 이 떡을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 이 또한 영원할 규정으로 삼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성막 안에 있는 성소 내에 위치한 진설병 상과 등잔대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등잔불을 켜 둘지며(1-4)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성소에는 분향단과 등잔대 그리고 진설병상이 있습니다. 등잔대(므노라)는 7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그 등잔은 언제나 불이 켜져 있어야 했습니다. 이 등잔대는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사용해야 하는데, 감람유는 제사장이나 왕 그리고 선지자 등을 임명할 때 사용되는 기름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사용되는 관유(레 8:12) 등을 만들 때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순결한 기름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이물질이 전혀 섞이지 않는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나무의 열매와 잎 그리고 가지 등을 함께 사용해서 만들었으나, 성소에서 사용된 기름은 오로지 감람나무 열매만을 가지고 만든 순수한 기름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름을 가지고 제사장은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소를 빛 가운데 보존하며, 또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활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끊이지 말고 불을 켜라는 것은 하루 24시간 온전히 불을 켜라는 것이 아니라 날이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 불을 켠 이후에 다음 해가 뜰 때까지 꺼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편 빛은 영적으로 복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등잔대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밝게 비추어야 할 것입니다(마 5:14-16).
떡 열두 개를 진설하고(5-9) 성막 입구를 지나 성막 안으로 들어오면 먼저 번제단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번제단 뒤로 물두멍이 있고, 물두멍 뒤로 휘장으로 둘러싸인 곳이 나오는데 그 앞이 성소이며, 뒤에 깊숙한 곳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게 되면 안쪽에 있는 분향단을 볼 수가 있고, 왼편으로는 등잔대와 오른편에 진설병 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진설병 상에 매주 열두 덩이의 새로운 떡을 진설했습니다. 이 떡은 하나님이 먹기 위해 진설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눈과 보살핌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제사장들이 이 떡을 먹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진설 된 떡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요 6:32-35).
적용: 하나님은 당신이 소홀히 준비하는 제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잠 15:8; 히 9:26) 당신은 밝은 빛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렘 3:13; 요 3:21; 요일 1:9)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받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성도 중에 주일에 예배드리고 다음 주일에 교회에 올 때 지난 주 받은 은혜를 몇 배로 키워서 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성도가 있습니다. 은혜를 키워온 성도는 ‘은혜의 마중물을 간직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은혜를 키우는 사람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 설 교 >
성전안에 세가지를 놓으라 하십니다
레위기 24:1-8 / 최응희 목사
요즈음 올림픽으로 잠을 설치는 분들이 많은 줄 압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한나라’라는 정체성입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졸이고 가슴뭉클해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같은 나라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얼굴, 같은 말을 쓰고 있어도 우리 선수들이 뛰는 모습에 가슴뭉클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정체성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가끔 음식점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분명히 한국말을 쓰고 얼굴도 한국 사람들인데 중국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연변아줌마들입니다. 평소에는 한국사람인 줄 알았는데 운동경기를 할 때 중국사람을 응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이 아무리 한국사람과 같고, 심지어 피도 한국사람의 피라 해도 그의 내면의 정체성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을 응원하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아무리 똑같아도 그 속사람이 누구냐가 바로 그의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러합니다. 겉이야 어떻든지 속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말씀하는 많은 구절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하나님의 사람’, ‘하나님 백성’, ‘왕같은 제사장’등등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3:16
오늘 말씀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성막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세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등이요, 둘째는 떡이요, 셋째는 유향입니다. 실제로 성막에는 이런 것들이 놓여졌었습니다. 나중에 성전이 지어졌을 때에도 이 세가지가 반드시 그 성전 안에 놓여졌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와 만남의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눈에 보이는 성전도 없어졌고, 눈에 보이는 그런 도구들을 교회에 놓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헛된 것이 된 것일까요? 그래서 바울사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눈에 보이는 도구들은 없어졌지만, 보이지 않는 성전이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 자신들이 성전이면 여전히 우리 심령 속에 이 세가지가 반드시 놓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을 또 다른 점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1. 등잔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24:2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항상 등잔불을 켜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성전에 항상 끊이지 않고 켜 놓아야 하는 이 등잔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에도 성전은 사라졌고, 교회에도 이런 도구들을 놓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이 등잔은 기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을 밝히고, 임재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는 심령은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의 빛이 없고, 감사의 빛이 없고, 생기의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등잔불이 켜진 심령에는 기쁨이 가득 차고, 감사가 넘쳐나고, 생명력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성전인 우리 속에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등불입니다.
야곱은 큰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심령은 두려움과 근심으로 짙은 어두움이 깔렸습니다. 야곱은 어두움 속에서 밤새도록 씨름하였습니다. 심령의 어두움을 내어쫓기 위해서 기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밤새 기도한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응답 받고 일어섰을 때 ‘해가 돋았다’고 하였습니다(창세기32:31). 밤새 기도한 후 일어나니 당연히 아침해가 돋을 것은 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뻔한 사실을 그렇게 중요하게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은 이것이 단순히 떠오르는 아침 해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기도한 후에 응답을 받고 일어나니 희망과, 기쁨과 확신의 새 빛이 그 심령에 비추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심령의 등을 항상 켜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있는 영혼에 등불이 밝게 켜집니다. 영혼의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염려와 불신과 불안의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영혼의 등불이 날마다의 삶을 희망으로 가득차게 채워줍니다. 영혼의 등불, 기도가 끊이지 않는 성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떡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 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24:5-6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24:8
성막안에 매 안식일마다 떡을 진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떡을 진설할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 영혼의 전에 진설해야 할 떡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전에 진설해야 할 떡이 무엇입니까? 이 떡은 눈에 보이는 떡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6:35
사람은 몸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5:23). 몸은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혼은 지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이 생명을 얻고 힘을 얻고, 굳굳하게 서기 위해서는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 속에 공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에 떡을 진설하되 매 안식일마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간 떡은 상하고, 딱딱해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전에 새 떡을 진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 떡을 우리 영에 공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가 소홀해지거나 건너뛰거나 하게 되면 그 심령 속에 진설되어야 할 생명의 떡이 상해 버리거나 딱딱해져서 먹을 수 없는 떡이요, 생명을 줄 수 없는 떡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날마다 생명의 떡을 공급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주일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의 심령에 두 줄씩 하나님의 떡을 진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을 살리고, 생명을 공급하고, 능히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되게 할 것입니다.
3. 유향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24:7
유향을 진설한 떡 위에 올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에 상처를 내어서 나온 향기로운 흰색의 송진입니다. 이 향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상처를 내어야 나옵니다. 상처에서 나온 진액이 향기를 내는 것입니다.
나무의 상처에서 나온 유향--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감당하는 헌신을 상징합니다. 이 유향은 작은 금 그릇에 담아 진설한 떡 위에 올려졌습니다. 말씀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듣고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무의 상처에서 진액이 나와 향기를 퍼트리듯이 나의 삶의 헌신을 통해서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헌신은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없는 시간, 금쪽같은 시간을 잘라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늘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지 쓰고 남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같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것이 향기로운 헌신이요, 그것이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헌신된 신앙인을 만나는 것, 한 사람의 헌신된 신앙인이 되는 것, 한 사람의 헌신된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향기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헌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헌신은 때로는 나무의 상처의 진액과 같이 희생과 어려움을 감당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희생과 어려움을 감당하는 헌신 속에 참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하셨습니다. 우리가 성전이라면 이 성전 속에는 반드시 세가지가 놓여있어야 합니다. 등과 떡과 유향입니다.
어떤 교회가 은혜스러운 교회입니까? 기도소리가 웅성웅성 나는 교회입니다. 말씀의 생명수가 강같이 흐르는 교회입니다. 헌신의 향기가 퍼져나가는 교회입니다. 은혜스러운 교회는 은혜스러운 교인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교인들이 있을 때 기도소리 나는 교회가 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교인들이 있을 때 생명수가 줄기차게 흐르는 교회가 됩니다. 제각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는 교인이 있을 때 헌신의 향기가 퍼져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디옥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디옥 성도들이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참된 기독교의 네 가지 순결한 것
레위기 24:1-9 / 피영민 목사
서론
레위기 24장을 읽다보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순금등대, 진설병, 유향과 같은 것들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말씀인데 왜 레위기에 또 기록되어 있는가?”입니다. 레위기 2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7대 절기가 기록되어 있고, 25장에는 거룩한 해, 희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레위기 24장에 ‘거룩한 예배’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니,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24장의 예배는 제사장들의 예배를 가리킵니다. 제사장들은 두 가지 종류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막 뜰에서 드리는 5대 제사는 ‘공적인 예배’(Public Worship)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공적인 예배만 드리지 않습니다. 성소에 들어가서 매일, 매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예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적인 예배’(Private Worship)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4장에 기록된 말씀은 바로 사적인 예배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Ⅰ. 사적인 예배를 드릴 ‘자격자’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예배할 수 있을까요? 예배할 수 있는 자격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성소에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적이거나 공적이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예표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자, 거룩한 나라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5장 10절에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를 예표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위대한 책 세 권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520년에 쓴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입니다. 여기에는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이었던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만인제사장설’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제사장 직분을 갖는다는 데 초점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이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 직분을 갖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특권’에 관한 것입니다. 제사장은 사제들이나 신부, 마리아나 천사와 같은 존재들의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보통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깨닫고 적용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직접 응답해 주시는 엄청난 은혜를 누리는 특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강남구청장이나 대통령을 만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특권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특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의무도 있습니다.
둘째는 ‘의무’에 관한 것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홍보부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홍보해야 할 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즘은 어느 기업이든 홍보를 잘해야 합니다. 작은 음식점을 하나 하더라도 홍보 활동을 잘 하면 그 음식점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써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홍보부장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목사, 장로, 권사와 같은 직분 자체도 필요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지만 목사, 장로, 권사와 같은 항존 직분을 통해서 교회는 질서를 유지하고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 직분이 없다면 어떻게 질서가 유지되며 사명을 잘 감당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국민이 주권자라고 해서 국가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없어도 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공적인 예배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홀로 사적인 예배도 잘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소에 들어가 사적인 예배를 잘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공적인 예배를 폐하면 안 되고, 사적인 예배도 게을리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Ⅱ. 제사장은 매일, 매주 해야 할 예배가 있다.
제사장이 매일, 매주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반복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4절은 제사장이 매일 반복해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 들어갑니다. ‘성막본체’(Tabernacle Proper)는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성소 앞의 성소는 제사장이 매일 들어갑니다.
성소의 문은 동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 내부로 들어가면 선선한 오른편(북쪽)에 떡상이 있고, 비교적 따뜻한 왼편(남쪽)에는 순금등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저녁에 들어가서 순금등대에 감람유를 채워 불을 붙이고, 아침에 들어가 불을 끕니다. 이 일을 매일 반복합니다.
역대하 13장 11절에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불을 켜고, 매일 아침마다 불을 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등대를 ‘금촛대’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초’가 아니라 ‘등대’입니다. 그래서 ‘순금등대’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리고 5~9절에는 제사장이 안식일마다 매주 반복해야 할 일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레 24:8). 제사장은 4.4리터 분량의 밀가루로 떡을 만드는데, 열두 개를 만듭니다. 떡상 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세우고 그 위에 유향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에 새로 만든 떡을 갈아 넣고 유향은 분향단에 태운 후 묵은 떡은 그 곳에서 제사장들이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향의 향기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7대 절기를 다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매일 가서 순금등대에 불을 켜고 끄거나, 매주 떡상의 떡을 갈아 넣는 반복되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계속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지루할 수 있는 일입니다. 대부분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일들은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반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레위기 24장은 성도들의 예배생활 가운데 반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중요한 일들은 모두 반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반복의 중요성은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특징은 반복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계속 반복합니다. 단어 노트를 끊임없이 쳐다보면서 암기를 확인하는 반복을 통해 영어 실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잘 하는 학생들을 보면 단어 노트를 꼭 소지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탁구를 잘 하고 싶으면 매일 하면 됩니다. 경기에서 지면 짜장면도 사고, 커피도 사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수영 선수들은 매일 열 시간씩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지겨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시간들을 통해 기량이 올라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복되는 일을 지루해 하고 싫어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빠도 매일하는 똑같은 일이 지겨워서 파업하고, 엄마도 매일하는 설거지, 청소, 빨래가 지겨워서 파업하고, 자녀들도 매일하는 똑같은 공부가 지겨워서 파업한다면 그 집안은 오래가지 못하고 패가망신하고 말 것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일은 반복으로 이뤄집니다. 반복하게 되면 어떤 일이든지 진보와 발전이 생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같은 환경에서 예배하고, 동일한 기도를 하고, 동일한 말씀을 듣는 것같지만 이런 반복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조금씩 발전하고 진보해 나아가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고, 치료될 것은 치료되고, 복 받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돈을 버는 것도 일확천금을 얻는 것보다 조금씩이라도 저축해야 남는 것이 많습니다. 저는 복권에 당첨됐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잘 사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씩이지만 저축해서 사는 사람들은 나중에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왜냐하면 벌은 돈을 함부로 낭비하거나 방탕한데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설령 당첨 되어도 그런 재물은 날개가 있어서 금방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종철 장로님 모친의 발인예배가 있었는데, 이 분이 50대에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38년 동안을 집에 누워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누워 계시는데도 자녀들을 절대 신앙으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래서 3남 3녀가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았는지, 장례식장 중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 왔던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약한 중에도 신앙훈련을 지속적으로 반복했더니, 신앙으로 바로 선 자녀들이 잘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매주 반복되는 일에 매진해서,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좋은 신앙의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Ⅲ. 성도들이 날마다 경험해야 할 네 가지 순결한 것
레위기 24장에는 네 가지 순결한 것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에 ‘순결한 기름’, 4절에 ‘순결한 등대’, 6절에 ‘순결한 상’, 7절에는 ‘정결한 유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빌에서 목회하다 은퇴하신 ‘알란 케언스’(Alan Cairns)라는 훌륭한 개혁주의 설교가가 있습니다. 그는 이 본문 속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경험해야 할 네 가지 순결한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순결한 기름입니다. 이것은 감람유입니다. 제사장은 이 기름을 넣어 매일 저녁마다 불을 피워야 합니다. 순결한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날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이 무엇일까요? 성령 충만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교해서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알콜 충만’입니다.
사람이 알콜 충만하게 되면 생각과 말, 행동이 알콜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평소 점잖은 사람도 갑자기 말이 많아지고, 겁이 많던 사람도 대범한 행동을 합니다. 모두 알콜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독에 빠졌다 나온 쥐는 고양이에게 대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알콜로 충만하게 되면 모든 것이 알콜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삶의 모든 면면에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의 구분 없이 매일 성령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지난 주중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이 자기 딸을 때려 죽였는데, 그 딸을 집에 1년 가까이 그대로 방치해 둔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것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신 나간 짓입니다. 목사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그 지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 충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아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그렇게 때려죽일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자녀 학대의 문제를 직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 악한 영들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크게 네 가지 사역을 하십니다. 첫째는 조명 사역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깨닫게 하셔서 인격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하십니다. 둘째는 인도 사역입니다. 성도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사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셋째는 열매 사역입니다. 주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에게 능력을 부어 주셔서 열매 맺게 하십니다. 넷째는 은사 사역입니다. 주의 일을 할 때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경험케 하십니다.
기도에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있는 분이 계십니다. 기도는 국어 선생님이라고 해서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달변가라고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30년 동안 설교를 해왔는데, 아직도 할 때 마다 배가 살살 아픕니다. 내용을 거의 다 외웠는데도 긴장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 역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성령 하나님과 교제하면 네 가지 부분이 크게 강화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순결한 기름이 아니라 더러운 가짜 기름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악한 영이 성령 하나님인척 하고 가짜 기적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짜 기름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데나 가서 안수기도 받고 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성령 충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나아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절대로 가짜기름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순결한 등대입니다. 이 등대는 금 한 달란트(34kg)를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을 녹여서 주물에 넣어 손쉽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금을 때려서 모양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 보통기술이 아닌 것입니다. 가운데 줄기와 양 옆으로 세 개씩 가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거기에 일곱 등잔을 만들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가운데 줄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가지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과 그와 연합되어 날마다 순결한 기름으로 빛을 비춰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들도 날마다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이번 명절에도 가족들을 만나면 가만히 있지 마시고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 받습니다. 죽어도 부활합니다. 영생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큰 기쁨과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복음의 빛을 비추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이는 믿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단이 그 사람의 마음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결한 기름으로 성령 충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순결한 상입니다. 상은 떡상으로, 제사장이 묵은 떡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떡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떡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떡을 먹는다고 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육신의 떡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넷째, 정결한 유향입니다. 이것은 두 줄의 떡 위에 올려놓은 유향을 가리키는데, 제사장은 이 유향을 분향단에 태워 향기로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유향은 성도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시편 141편 2절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결한 유향을 반복적으로 태우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결 론
우리는 큰 절기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일상생활에서 반복되는 삶의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하고, 반복해서 빛을 비추고,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반복해서 기도하는 삶이 참된 기독교의 네 가지 요소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단순한 진리 체계가 아니라, 이 진리에 근거한 매일의 경험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경험이라고 해서 꼭 방언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에도 이상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방언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그런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성령 충만을 받고 빛을 비추는 삶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참된 영적 체험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개인적인 예배를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 이런 네 가지 영적인 경험이 충만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리를 비추는 등대
레 24:1-4 / 이성희 목사
어느 랍비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되는지 알 수 있겠느냐?” 한 제자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양과 개를 구분할 때입니까?” “아니다”. 다른 제자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와 올리브 나무를 구분할 때입니까?” “아니다”. “그러면 언제입니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전에 한번도 못 본 얼굴을 보고 그 낯선 사람이 형제자매인 것을 인식할 때이다. 그때까지는 낮이 아무리 밝을지라도 여전히 밤인 것이다”.
밤 같은 낮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어둡습니다. 정말 춥습니다. 정말 눈이 침침합니다. 정말 무겁습니다. 사람의 인정도 사라져갑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도 식어갑니다. 이런 때에 교회는 뜨거운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등대가 필요한 것은 밤만은 아닙니다. 낮이라도 어두우면 등대가 필요합니다. 낮이라도 안개가 짙으면 등대가 필요합니다. 낮이라도 어두운 밤처럼 깜깜하고, 절망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등대가 필요합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고, 도덕성이 상실되고, 삶의 기준이 모호할 때 향할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등대와 같은 푯대를 교회는 제시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14에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그런데 푯대가 있어야 푯대를 향하여 갈 수 있습니다. 푯대를 보이게 하는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등대가 그 역할을 합니다. 푯대를 보이게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바르게 가게 합니다. 암초에 부딪히지 않게 합니다. 항해에서 등대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등대는 항로표지의 하나입니다. 선박이 육지나 중요 변경점 또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때 표지로 삼거나, 항만의 소재, 항구 등을 표시하기 위해 설치한 탑 모양의 구조물입니다. 등대는 독특한 형태의 색을 띕니다. 등대는 낮에는 물론, 특히 밤에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등대의 기원은 야간항해를 시작한 때에 생겼다고 봅니다.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리비아인이 탑을 세워 불을 붙인 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등대입니다. 세계의 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할로스’라 불린 등대는 BC 3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높이가 약 61미터에 달하는 등대입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등대는 1903년에 경기도 옹진군 팔미도의 유인등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는 1000기 이상의 등대가 있습니다.
등대가 필요한 때는 낮이 아니라 밤입니다. 맑은 날씨가 아니라 안개 낀 날씨입니다. 평탄한 지형이 아니라 험한 지형에서입니다. 요즘 같은 불확실한 시대, 어두운 시대에 교회의 본질은 빛입니다. 빛인 교회는 그러므로 험한 바다와 같은 세상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곳곳에 암초와 같은 어려움이 있는 이 세상을 비춰주는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등대인 교회는 무엇을 하므로 진리의 수호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위험을 경고하고 알려줘야 합니다.
등대의 주 임무는 위험을 경고하는 일입니다. 생소한 바다의 지형과 보이지 않는 바다 속을 제대로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구룡포에 가서 고래잡이배를 타보고 등대에 가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 잘 아는 장로님께서 포경선을 여러 척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배를 타고 고래 잡는 것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보항에 있는 등대에 가서 등대를 자세히 보고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경험은 너무 신기했습니다. 고래 잡는 것도 신기했지만 등대로 참 신기했습니다.
등대의 ‘등질’은 등대의 불빛의 발사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등질은 6가지가 있는데 색깔, 속도, 회수 등을 통하여 상황을 알리는 것입니다. 등대의 색깔은 흰색과 붉은 색입니다. 색깔의 특별한 의미는 없고, 지형 조건에 따라서 잘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우선 등대는 잘 보여야 합니다. 등대가 잘 보여야 위험을 경고할 수 있습니다. 등대가 잘 보이지 않으면 위험을 경고해도 선박들이 보지 못할 것입니다. 등대는 모든 항해자가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은 5:14에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라고 합니다. 왜 등불을 등경 위에 둡니까? 숨겨지지 않고 모두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등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미국 해양연구 회보라는 잡지에 난 프랭크 콕의 ‘등대의 법칙’이란 이야기입니다. 훈련 함대 두 척이 악천후에 기동훈련을 떠났습니다. 어둠 속을 항해하고 있던 보초병이 우현에 불빛이 반짝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장은 “제자리에 있는가 움직이는가?”라고 물어봅니다. “제자리에 있습니다” 병사의 말을 듣고 선장은 다시 “저 배에 무전을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충돌할 수 있으니 20도 각도로 경로를 변경하라”. 무전을 받은 상대방이 “당신네 배가 20도 각도로 변경하라”고 합니다. 다시 이 쪽에서 “나는 선장이다 속히 바꿔라”고 합니다. 상대방은 “나는 2등 항해사이다. 빨리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선장이 화가 나서 “여기는 군함이다. 빨리 바꿔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상대의 응답이 왔습니다. “여기는 등대다”. 그제 서야 코스를 바꿨습니다.
등대는 움직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바꾸이지 않고, 견고해야 합니다. 등대가 경고하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등대는 자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견고해야 합니다. 등대가 움직이면 어떻게 경고하겠습니까?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아야 경고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면 경고 받을 대상이지 경고할 주체는 아닙니다.
성경은 많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경성하라”, “일어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 성경에는 이 외에도 많은 경고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14에는 마지막 재난의 징조를 경고합니다. 자칭 그리스도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9:4에는 “밤이 속히 오리니”라고 경고합니다.
우리 주위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험을 경고해야 합니다. 복음서 말씀의 6분의 1이 돈과 그 위험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은 돈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거짓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담배에는 경고 구절이 있습니다. 담배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담배는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변호사를 잘 선임하여 잘 우기면 승소합니다.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가 담배를 피워놓고 죽으면 회사에 책임을 돌려 엄청난 돈을 타냅니다.
축구에서도 경고 제도가 있습니다. ‘옐로우 카드’라는 것입니다. 교통법규에도 ‘삼진 아웃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퇴장당하고, 면허 취소가 됩니다. 누구나 쓰러지기 전에 수차례 경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경고를 무시하다가 쓰러지고 몰락합니다.
안전은 위험 없음(risk free)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 가운데 위험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 가운데 위험하지 않는 식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 가운데 위험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경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경고를 들으면 됩니까? 교회가 경고를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세상의 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교회가 경고해야 합니다.
둘째, 폭풍에 견딜 수 있게 강해야 합니다.
여러분, 등대가 무너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말도 안 되지요. 등대는 폭풍보다 강해야 합니다. 등대를 만들면서 바다의 바람, 폭풍, 파도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다는 항상 폭풍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등대는 폭풍을 잘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왜 일어났습니까? 바다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 탄 배가 왜 유라굴로를 만났습니까? 바다니까 그렇습니다. 바다는 할 줄 아는 게 그것 밖에 없습니다. 바다가 주는 풍랑이나 폭풍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거기에 대비하지 못 한게 이상한 일입니다.
왜 배가 파선 당합니까? 바람보다 약하니까 그렇습니다. 왜 바닷가 집이 무너집니까? 파도보다 약하니까 그렇습니다. 왜 등대가 무너집니까? 폭풍보다 약하니까 그렇습니다. 바람과 폭풍과 파도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배가, 집이, 등대가 더 견고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견고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나온 말 가운데 ‘낙바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려우니까 별 희한한 말이 다 만들어져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듯 취업문을 뚫은 재학생이란 말이랍니다. 이 시대의 폭풍입니다. 이런 시대에 폭풍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폭풍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한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고집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나무는 연약한 가지를 폭풍 속에서도 지킵니다. 나무가 바람에 저항하면 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말 것입니다. 열대 나무 가운데 야자수 같은 나무는 약해 보이고 흔들흔들 하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습니다. 부러지는 것은 자기 손해입니다. 폭풍에도 견딜 수 있는 유연성을 교회는 가져야 합니다.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권력은 없습니다. 그런 권력은 반드시 망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미워해도, 교회는 세상을 종래 이깁니다. 지금 세상은 참된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설득할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폭풍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폭풍에 넘어집니다.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외풍이 아니라 사실은 내풍입니다. 배가 침몰하는 것은 배 밖의 물이 아니라 배 안의 물 때문입니다. 시편 37:26에는 말합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이 견고함이 우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손 때문인줄 믿습니다.
셋째, 안개와 어두움에도 빛나야 합니다.
등대의 역할은 안개와 어두움 때문입니다. 안개와 어두움은 바다에 항해하는 배들에게 가장 악재입니다. 등대의 진가를 발휘할 때는 바로 이때입니다. 안개와 어두움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등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입니다. 어떻게 빛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빛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그런데 세상이 어둡고 안개가 많이 끼어있으므로 작은 빛도 빛납니다.
초등학교 때 저의 아버지께 배운 몇 가지 영어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작은 나의 빛, 비치게 할테야, 이 작은 나의 빛 비치게 할테야, 빛내리 빛내리 빛내리”하는 노래입니다. 정말 작은 빛이지만 빛내야 합니다. 빛내야 하는 책임이 있고, 빛내리라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김광규님의 ‘안개의 나라’라는 시가 있습니다.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정말 안개가 짙게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모호합니다. 아무 것도 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안개나라 같지 않습니까? 이 때 우리는 “빛내리”를 불러야 합니다.
키엘케고르의 ‘마차에 탄 부자’의 예화가 있습니다. 부자는 불 켜진 마차 안에 앉아 있고, 마부는 차가운 바깥바람을 쐬며 말을 몰고 있습니다. 부자는 불빛 아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바깥에 펼쳐진 전경, 마부가 놓칠래야 놓칠 수 없었던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과학이 피조 세계에 더 많은 빛을 비추고 있는 현대에는 그 빛으로 인해 오히려 보이지 않는 저편의 세계가 더더욱 흐려진 것 같습니다.
성경은 진짜 불과 가짜 불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불과 다른 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인 진짜 불을 주시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드립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실패하고 멸망합니다. 하나님은 불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불을 드린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는 그 불 때문에 죽었습니다. 우리교회가 참 빛을 비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비춰야 합니다. 과학의 빛, 이성의 빛, 문화의 빛, 물질의 빛은 아무리 밝아도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빛이 이 세상을 비춰야 비로소 세상은 밝아집니다.
이사야 60:1-3에는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어둠이 땅을 덮을 때, 캄캄함이 가릴 때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라들이 우리 빛으로, 왕들은 우리 광명으로 나아올 것입니다. 어느 교회 청년부 홈페이지에 “일어나 빛을 발하라”를 네 자로 무엇이라고 하겠느냐는 글이 올라왔어요. “기립발광”이래요. 어두움이 땅을 덮고 있을 때, 캄캄함이 만민을 가릴 때 “기립발광” 하세요.
결 론
플로렌스 채드윅(Chadwick)이란 수영선수가 캘리포니아의 카탈리나 섬을 육지에서 수영으로 건너려고 하였습니다. 영국 해협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 차가운 물을 가르고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거친 파도가 밀려와서 시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15시간 55분의 수영 후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자들이 질문했습니다. “포기할 당시 도착 예정이던 해안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까?” “나는 목표 지점을 볼 수 없었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해안만 보였더라도 끝까지 해냈을 겁니다”. 목표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목표가 보여야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는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괴테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보다는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21세기는 방향성(direction)의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정확한 목표가 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목표를 향하여 간다면 방향을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방향성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성경이, 교회가 이 일 해야 합니다. 방향성의 핵심은 정체성(identity)입니다. 등대는 바로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등대의 정체성은 바뀔 수 없습니다. 등대는 그때그때 장소를 바꿔 아무데나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뀔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어야 등대의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등대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분명히 밝히는 등대가 될 때에 세상의 소망입니다. 교회는 어디가 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여기가 길이라고 일러줄 수 있는 세상의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어둠과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세상의 길잡이가 되는 등대 같은 교회, 등대 같은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늘 켜 두어야 할 등불
레위기 24:1-9 / 이진수 목사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그들을 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시내산 아래로 인도하셔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율법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의 모양과 지을 때 필요한 물품과 그 안에 넣어야 할 것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섬겨야 할 제사와 제물, 행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과 명령들에 대해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론을 시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쳐 있는 휘장 바깥에 그 등불을 켜 두어,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 계속 켜 두게 하여라.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과 9절에도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다. 이것은 그들이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만이 아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할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날 날 까지 지켜야 할 말씀이요 명령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대대로, 쉼 없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을 늘 켜 두어라. 아론을 시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쳐 있는 휘장 바깥에 그 등불을 켜 두어,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 계속 켜 두게 하여라.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아론은 주 앞에서, 순금 등잔대 위에 그 등불을 늘 켜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금 등잔대 위에 등불을 늘 켜 두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늘 준비하여 성소 안에 불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명하신 명령 가운데 성소에서 꺼트려서는 안되는 불이 바로 번제단의 불입니다. 번제단의 불과 성소 안에 불을 꺼트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우리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그 성전 안에 거룩한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의 기름이 끊이지 않고 공급되어 불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더럽고 추한 어둠의 영, 죄된 생각들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빛 되신 예수님의 말씀과 뜻이 내 삶을 밝히 인도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의 삶에 힘써야 합니다. 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 쉬지 않고 주 안에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 거하고 분별하여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에 등불, 눈에 등불을 항상 밝혀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는 거룩한 빛 가운데, 예수 안에 거하며 따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예수 안에 거하는 삶, 내 마음에 성령의, 말씀의 빛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둠의 빛이 되는 말과 행동과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빛 가운데 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너는 고운 밀가루를 가져다가 과자 한 개당 밀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들여 과자 열두 개를 구워 한 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주의 앞, 순금 상 위에 차려 놓아라” 성막 안에는 불을 밝히는 금 촛대와 떡을 놓는 순금 떡상이 있었습니다. 그 떡상에 12개의 떡, 과자를 구어 놓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8절에 다시한번 “안식일이 올 때마다,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이 음식을 주 앞에 늘 차려 놓아야 한다.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다” 라고 명하십니다. 이 떡은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위한 떡이라는 것입니다. 떡을 준비하여 떡상에 차려 놓으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다른 영혼들을 위한, 특별히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을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떡을 만들 때 고운 밀가루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어 드리라고 하십니다. 곡식 알갱이가 으깨어져서 부드러운 고운 가루가 되듯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가루가 되어 부서지라는 것입니다. 반죽이 되어 떡상에 드려지기 위해서 낮아지고, 깨어지고, 내 자아, 내 고집, 내 뜻이 완전히 사라지는 고운 가루가 되어질 때 누군가를 위해 섬기고 하나됨을 이루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떡이 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안에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교만함, 의로움, 욕심, 성격, 모난 성격들이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방망이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내어놓고, 부서질 수 있기를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다른 영혼들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이 시대의 떡이 되기를 원합니다.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
레 24:1-9
오늘의 본문은 출애굽기 27장 20-21절의 기록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했던 당시의 성막은 두 개의 방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안쪽은 지성소라하여 법궤가 놓여 있었다. 바깥쪽은 그냥 성소라고 불렀으며, 그곳에 향을 피우는 제단을 비롯하여 순금으로 만들어진 등잔과 진설병을 차려놓은 진설대가 있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 명령이 주어졌다. 하나는 순금 등잔에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넣고 거기에 불을 켜 지성소의 불이 지속되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또 하나는 진설병에 대한 규례로, 고운 밀가루를 가져다가 열두 개의 과자를 만들어 두줄로 차려놓고 향을 얹으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아론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그 불이 밤이나 낮이나 어느 때나 꺼지지 않도록 관리했고 명령대로 진설병을 차렸다.
1. 꺼지지 않은 빛이 건재한 등잔불.
하나님을 예배한 성소가 어두움에 잠겨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창조때부터 흑암과 혼돈을 물리치고 빛을 주셨던 하나님이시기에 빛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불빛을 잠시라도 대하지 않았을 때 죄악의 어두움이 지체없이 쳐들어왔던 것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 생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 순간, 바알 종교의 우상들을 만들면서 어둠의 세계에서 춤을 추고 살던 민족이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리의 빛을 보면서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꺼짐이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불빛만 주시하자. 하나님의 진리의 불이 타오르는 곳으로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옮기자. 이것만이 우리가 방향을 따라 걷는 길이다.
2. 등잔불은 기름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캄캄한 암흑에 머물던 인류는 십자가 위에서 타오른 밝은 빛을 보는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암흙의 세계와는 높은 담을 쌓았다. 그리고 진리에 의해 자유자가 됨을 만끽하면서 오늘을 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된 우리들에게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이 빛을 계속 꺼지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가 스스로 기름을 공급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름이 메마를 때 등불은 그대로 사라진다. 지속적으로 진리를 공급받기 위해 우리는 예배드리기와 성경 읽기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성소의 그 빛이 자신들을 지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올리브 기름을 만들어 제사장에게 바쳤다.
3. 살아 있는 진설병이 되라.
고운 가루를 취하여 열두 개의 떡을 만들어 여호와 앞에 진설하여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기하라는 명령이 오늘 본문에서 주어졌다. 열두 지파의 정성이 모아진 진설병이 제단 위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고운 가루처럼 부서져 하나님께 헌신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제단에 놓일 수 있는 나의 정성, 믿음, 희생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값진 것이다.
순수한 기름과 고운 가루는 순수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오늘도 주님의 제단에 우리의 순수성이 필요한데도 응답의 소리는 너무 희미하다.
적 용.
1) 도시의 밤은 어둡지 않다. 많은 불빛이 이곳 저곳에서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날로 어두워간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자.
2) 하나님의 제단에서 타올라야 할 불빛과 진설병은 우리가 한 방울의 기름과 고운 밀가루로 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3) 한국의 밤하늘에는 십자가의 불빛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어두운 세력의 확산은 날로 더해간다. 왜 교회의 불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지 못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