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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 2016년 2월 21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게 된 과정을 알립니다. 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말은 구약성서에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본, 그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교감(交感)을 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오늘 복음이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것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알아듣는 데에 그분들의 역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으로 발족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 함께 계시는 양식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세상에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인류역사 안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계약을 맺었다고 구약성서는 말합니다. 모세의 가르침이 있어 이스라엘사람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계약은 두 당사자가 앞으로 할 행동 양식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실천하지 못했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왕이나 사제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할 때, 예언자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 기득권자들로부터 박해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살아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가르치거나 당신의 권위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간질 환자나 정신 분열환자들을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연장한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일부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그분을 “나자렛 출신 예언자”(마태 21,11)라고 환호하였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모세로부터 시작된 믿음,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삶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삶의 공간이 하느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 생명을 잃었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의 일에 충실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말하고자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산에서 그분과 교감(交感)하는 예수님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들과 말이 통하는 분입니다. 그분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구약신앙의 전승(傳承)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엉뚱한 제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혼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서 들렸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알려면,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깨달은 바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었습니다. 하늘나라의 호적을 보았거나, 유전자 감식으로 친자(親子) 확인을 하였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병을 고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구실만 있으면,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며 사람들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인에게는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종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나는 여러분을 친구라 불렀습니다.”(요한,15,1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이 되어 미성숙하게 살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친구는 친구로부터 정보를 받아 자유롭게 그것을 활용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정보를 당신으로부터 받은 우리도 자유롭게 실천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있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분의 죽음이 그분을 결정적으로 알아듣는 계기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삽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빌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합니다.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늘의 선언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신앙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1. 남루한 옷차림에 초췌한 모습으로 산에 오르신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요즘 한국에서 등산객을 보면 마치 신발과 등산복이 에베레스트 산에 오를 것처럼 완벽한 준비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발이며 옷이며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힘많이 들겠지요? 땀에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은 꽤나 초췌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 흙수저의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들도 얼굴은 인생살이가 가난에 찌든 표정이고 옷차림과 말투와 태도도 꾀죄죄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곤 합니다. 2. 갑자기 바뀐 얼굴과 번쩍거리며 빛나는 옷차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베드로와 동료들은 피곤했던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기도하시던 예수님 모습이 갑자기 전혀 달리 뵈는군요. 얼굴에서도 빛이 나고, 남루했던 옷은 하얗게 번쩍거렸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황홀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합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께서 이야기도 나누고 계시는군요. 우리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기도 합니다. 자주 세속적인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형외과에 가서 자꾸 얼굴을 뜯어고치기도 합니다. 아마 한국이 성형외과 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일 겁니다. 마치 잠을 자는 듯이 사람들을 제대로 볼 줄 모릅니다. 그런 눈으로 가족들도 바라봅니다. 공부, 재산, 용모, 건강 등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실제로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그것들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 살아갑니다. 헛된 가치에 휘둘려서 만족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참 한심하기만 한데 말이지요. 우리 모두 눈을 떠야지요. 참된 가치를 지닌 인생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우선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께서 가시는 인생길, 우리도 뒤따라 가야 하는 인생길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습이 변하면서 보여 주신 것은 종착지가 ‘영광’이라는 것이군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고향인 변두리 나자렛에서 자라나시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시면서 가시는 길,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인생길은 영광을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때로는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뒤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길은 마침내 예수님처럼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설악산 대청봉을 등반할 때,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산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청봉 정상에서 아름다운 내설악을 바라보고 동해를 바라보는 장관을 기대하고 기꺼이 인내하면서 등산을 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고통 속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세상에 초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마침내 그 영광에 우리도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 ▲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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