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할 사람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은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일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깔때기가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 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 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서 다리 긴 귀뚜라미처럼 살았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 달에 오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 초본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은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 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을 하지는 않겠다.
*김태정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서 오백만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았다. 그의 넋은 미황사가 거두어주었다.
창으로 빛이 들면
눈동자는 굴광성 식물처럼 감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희미해져갈 때마다
숨소리는 견딜 수 없이 가빠졌다
삶의 수면 위로 뻐끔거리는 입,
병실에는 그녀가 광합성으로 토해놓은 산소들이
투명한 공기방울이 되어 떠다녔다
식물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공기방울에서는 수레국화 비슷한 냄새가 났다
천천히 시들어가던 그녀가
침대 시트의 문양처럼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빛을 향해 열렸던 눈과 귀가 닫힌 문처럼 고요해졌을 때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도 사물도 아닌,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 떨기 죽음으로 완성된 그녀
죽음이 투명해질 때까지
죽음을 길들이느라 남은 힘을 다 써버린 사람
모든 발걸음이 멈추고
멀리서 수레국화 한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해남 간다
손잡으면 전생 어미가 뭉클 잡히는 김태정 시인 보러 간다
마음 곯은 자가 몸 곯은 이에게 가는 길은 멀다
가기 싫은 길 억지로 가는 길이다
울지 말자 이 악물고 가는 길이다
- 누님 여기 정 떼지 말고 조금 더 살아주시우
- 죽으면 또 멱살 잡혀 이 세상 다시 올 테지… 다음 생엔 건강한 몸으로 나고 싶어… 후생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때…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지금은… 내가 숨이… 숨이 너무 차서…
턱밑까지 차오른 이승 바다
그 너머엔 숨이 편한 나라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누님은 한숨 돌리고
가기 싫은 길 억지로 떠날 것이다
널린 게 슬픔뿐인 이 개똥밭에
눈물 안 보태겠다고 어금니 악물고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