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Parinibbana (3)
파리닙바나 (3)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사밧티 근처 젯타 숲에 있는 아나타핀디카[給孤獨長者]의 승원[祇園精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닙바나와 관계된 법담(法談)으로 비구들을 가르치고 … 계셨으며, … 그 비구들은 진리 법에 귀를 기울여 듣는 데에 전념했다. 그 때, 그것의 의미·중요성을 깨달으시고서 세존께서는 바로 그 순간 영감을 주는 이러한 게송을 읊으셨다.
There is, bhikkhus, a not-born, a-not-brought-to-being, a not-made, a not-conditioned. If, bhikkhus, there were no not-born, not-brought-to-being, not-made, not-conditioned, no escape would be discerned from what is born, brought-to-being, made, conditioned. But since there is a not-born, a not-brought-to-being, a not-made, a not-conditioned, therefore an escape is discerned from what is born, brought-to-being, made, conditioned.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생성되지 않은 것, 조건 지어진 것이 아닌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생성되지 않은 것, 조건 지어진 것이 아닌 것이 없다면,
태어난 것, 만들어진 것, 생성된 것, 조건 지어진 것으로부터 벗어남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생성되지 않은 것, 조건 지어진 것이 아닌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난 것, 만들어진 것, 생성된 것, 조건 지어진 것으로부터 벗어남이 드러난다.
첫댓글 우다나 경 8품에서
[열반]으로 분류되어 있는 4개의 게송 중
3번째 게송입니다.
저는 예전에 8.1을 읽고 크게 와 닿아 거의 암송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열반을 설하신 게송을 순차적으로 읽고 있노라니
아~~
불법에 대한 그 많은 논서들이
붓다께서 노래하신 이 게송들의 변주곡들이었구나! 싶습니다.
비록 열반의 자리에 가진 못하지만..
무엇이 '우리의 본래인가'에 대한 이해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해의 바탕에서 불법을 접하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유위법의 실상이 무위법이니 '아'와 '오온'이라는 조건지어진 유위법에 대한 취작가 갈애로부터 벗어남도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할수도 있죠..
설명이 부실한거 같아 보충하자면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무위법이 오온 밖에 따로 있는 것이라면 '유'견이라 조건지어진 유위법이 되죠.
연기에서 환멸문인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연기로 인해 조건지어진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 연기가 실상이고 무위법이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죠.
유위법의 실상이 연기 즉 진제인 있지않음이니 없지않음인 유위법의 상태인 부처님도 열반을 실현하셨다고 선언할 수 있는거죠.
진정한 열반은 현재완료형이지 미래완료형이 아니라는..
있지않음은 유와 무를 떠난 본래 있다 할 것이 없으니 없다 할 것도 없는 연기실상인 공성이지 오온이 있다가 없게 되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온이 있다가 오온이 없는 유에서 무가 된다. 무가 있기에 유는 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견해는 변집견이죠.
그러므로 열반을 유여열반 무여열반으로 구분하는거 오온의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분별함이 유무양변에 떨어지는거죠.
아주 부처님을 가르칠 기세...
있잖아요. 뜻을 챙기면 되는 거구요, 변죽은 울릴 필요 없습니다.
법계유심님 말이 좋은 말이긴 한데요...
법계유심님이 직전에 홀로 있는 식을 주장했는데, 지금 위와 같이 좋은 말을 적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답니까?
제가 볼 때는 그래요.
뭐랄까...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을 부처님께서 설하셨는데요. 그거를 유무양변에 떨어졌다고 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연이어 소개되는 글들의 출발점인 8-1을 소개한 본글에, 법계유심님이 처음 적은 꼬리말도 그래요. 한번 가져와 보께요.
<<
본글의 완전한열반은 무기적적한 무기공과 흡사해 보입니다. 탐진치가 없다는 의미의 진정한 열반은 아니라는...
>>
부처님께서 우쭐하셨는지 어쩌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햐... 이게 알려진다... 그게 괴로움의 종식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법계유심님은 "그거는 무기공이지 진정한 열반이 아니다"라고 말한 거잖아요.
부처님의 스승 스탠스거든요. 그런데 위에 법계유심님이 옮긴 논리, 중관? 용수보살? 나가르주나조차 그런 입장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안그래요?
법계유심님은 위에서 논리를 펼치며 '실상'이라는 말을 많이 적었는데요.
'실상'이 무슨 뜻입니까? '실상'은 '실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모습? 그게 뭡니까? 상온 즉 산냐 곧 파악작용입니다.
반야부는, 중관에서 주로 해설하는 반야부요, 반야부의 반야는, 지혜 즉 판단 즉 파악입니다.
파악이나 판단을 체험한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틀리진 않고, 맞기는 맞아요.
그런데 그거는, 어디까지나 이름 즉 산냐의 체험 즉 발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생긴 거야.
===
중론에서 관십이인연품을 놓치면 안된다고 그리 강조해도, 사람들이 말장난에 빠져가지고는 그 품은 자꾸 빼버리는데요.
관십이인연품을 보면요. 있고 없고 생기고 없어지고 그런다고 되어 있어요.
앞에서는 있지 않고 없지 않니 생기지 않고 없어지지 않니 등의 말을 잔뜩 적어 놓고 거의 끝에 가서는 그렇게 적어요.
마지막의 피날레는 있다고 해도 말이 안되고 없다고 해도 말이 안되고 그 중간이라고 해도 말이 안되고, 그 무엇이든 말이 안된다... 그런 식으로 끝냈을 거예요. 거의 뭐...무슨 말을 하든 아주 조저버릴 기세... 그런데 부처님께 경배해...
반야부는요, 생멸의 체험...그리고 그 체험에서 조건의 유무 파악등... 이런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을 부정하면, 관십이인연품도 없겠지...
누차 적었지만요.
조건의 유무 파악등을 하는데, 그러한 파악등의 발생을 두고 지혜가 생겼다고 이름하는데...
고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대로 지혜라고 하려면 조건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사실에서 연기를 파악하는데, 연기의 의미도 알아야 비로소 사실에서 연기를 파악한 게 된다는 뜻입니다. 연기는 희론 적멸이란 거.
===
반야부나 중관쪽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 문제가 뭐냐 하면요.
반야부나 중관쪽에서 말하는 것을 체험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거 절대로 체험 못합니다. 그거는 그냥 '말'이니까요...
반야부나 중관과 같은 판단이 생기려고 해야지...
반야부나 중관의 판단을 체험하려고 하면...
없는 것을 체험하려는 거예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하면, 허송세월만 합니다.
궤변만 만들구요.
한문 표현 쪽에서 "관하여 이른다"... 관왈(觀曰)... 이거는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치에 비추어) 판단하여 말한다"는 뜻입니다.
이치야, 당연 연기지... 불교에서는요.
그런데 '관(觀)'이라는 말의 뜻도 모르고... '볼 관' 자니까... 보는 거니까 체험이다... 그러는 분들이 무자게 많아요.
그거 그냥 말의 뜻을 모르는 거라구요. 말의 뜻을 모르고 말을 쓰는 거라고...
위에 적었듯, 보통 '관(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연기의 이치에 비추어) 판단함'입니다.
반야부등의 실제 모습... 실상... 실상이 그러니까 그걸 체험한다? 미친 소리예요. 수행에 발도 안담군 사람이나 하는 소리야...
수행? 수행을 논하기 전에, 이해의 문턱조차 못간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차라리 그냥 믿고 싶을 거를 믿는게 나아요...
왜 머리를 써서 굳이 자기를 더 망치나...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 있으면 그나마 훨 나을 텐데...
솔직히 이해가 안됩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 못해도, 그것이 드러났고 드러나니까, 그것이 가능하긴 한 거죠...
제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무런 기준도 못되요.
'사실' 앞에서 이해는 무력한 거라...
사람들을 보면요... 넷에서 사람들을 보면서요. 정말 많이 배웠고 배웁니다.
이게 가능하구나... 정말 그게 가능하구나...
세상이 참 큽니다.
어쨌든간에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
지겨운 분들도 많겠지만, 한번만 더 적을께요.
우리는 있어요... 그래서 있는 것만 [ 체험 = 사실 ]했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미세한 있음을 능숙하게 강화시키고 약화시키는 조정을 하던 중, 분명 약화시키고 있었는데 느닷 없이 강화되는 [ 체험 = 사실 ]을 합니다.
여러 차례 확인해 봐도, 분명 그래요. 강약 조절에 능숙하니까, 약화시키다가 갑자기 강화시키는 실수를 긍정하기 어렵다는 [ 판단 ]이 생기고, 그래서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 있다는 [ 판단 ]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연기의 이치에 대한 확신 즉 [ 판단 ]이 생깁니다.
결국 우리의 있다는 [ 체험 = 사실 ]은, 조건으로 있음 즉 연기에 따른 있음이었다는 [ 판단 ]이 생깁니다.
상좌부에서 말하는 것은 보통 여기까지...
다음부터는 보통 중관쪽에서 말하는 거...
연기 즉 조건에 따른 있음이 뭔가 이치로 생각해 보니까, 그거를 그냥 있다고 표현하면 곤란하다는 [ 판단 ] 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그 무엇도 없다'는 표현 역시 곤란하다는 [ 판단 ]이 생깁니다.
있다나 없다고 표현한 순간, 이미 조건으로 있다는 판단을 망치게 된다는 [ 판단 ]이 생긴 겁니다.
식이 홀로 있다고 한게 아니라 근경식이 화합할때 나타나는 식이 식을 감지한다는 거죠.
로봇 청소기같은 무정물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마음은 진실로 요지경이라..
중관의 체험이든 반야의 실상이든 그 무엇이든..
그러한 것을 향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런한 드러남을 제공한다..
By 전직 요지경 꿈나무 / 현직 탈주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식이 홀로 있다고 한게 아니라 근경식이 화합할때 나타나는 <식이 식을 감지한다>는 거죠."
법계유심님 위 말씀의 < >에서,
앞의 식을..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거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이치상 그러할 것이라는 뜻인가요?
===
최대한 [ 사실 = 체험 ]과 [ 판단 ]의 구별에 초점을 맞춰 나름 대로 적어봤습니다.
반야부는 모두 [ 판단 ]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 체험 = 사실 ]은 있는 거만 가능해요.
있는 거를 부정하기만 하면, 없다느니 있지 않다느니 없지 않다느니 무시기 무시기하는 [ 판단 ]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양자론의 출발을 흑체복사이론이라고 흔히 배웠잖아요.
현재까지는 양자화하지 않으면 흑체 복사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흑체 복사라는 사실은 양자화된 사실이야...
그런데 처음에 그거를 부정하려고 했는데, 그 사실 즉 실험값을 그냥 받아들인게 양자역학의 출발입니다.
뭐... 다른 이론 구성이 나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사실들에서, 현재로서는 불교의 연기만이 설득력을 갖춘 이치라는 겁니다.
현재로서는, 연기라는 이치만이 사실에 부합한 판단이라는 겁니다.
물론 타인에게 연기만이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요...
연기의 이치를 나름 고민하며 판단한 결과, 연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 연기에 반하게 된다는 판단이 성립했기 때문입니다.
타협하는게 아니라구요...
===
식이 식을 감지하든 말든,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감지되는 쪽은 (감지와 함께 성립하는 쪽은) '상'입니다.
그리고 있는 것도 부정하려고 하면서 무슨 유정 타령입니까?
===
책임 있는 주장, 일관성 있는 주장...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말싸움에서는요.
왜냐? 판단은 전부 말일 뿐이거든... 자신의 판단이 적절한가는 거기서 알 수 있는 거예요.
소위 '미친년 널뛰기'에서는 적절함을 찾을 수 없어요, 물론 그것도 사실로 성립하는 것이기는 해요, 그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자비로 일으키신 불국토라...
===
반야부, 중론이 뭔가 말이 요상꼬리꼬리해서 말이죠, 뭔가 있는 거 같고 그렇지만요, 폼도 나는 거 같고...
그거 전혀 그런게 아닙니다.
발바닥 감촉을 알아차리면서 걷는다고 합시다.
집중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다른 거는 안보여... 그냥 타박 타박 발걸음 감촉만 선명해요.
그게 뭐예요. 발바닥 감촉이라는 법 즉 사실을 선명하게 붙잡은 거, 선명하게 알려진 거죠.
그 발바닥 감촉이 어디로부터 왔어요? 어디로 가나? 아니라고... 엄밀히 말해 그 법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게 아니라구요.
우리가 법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것이, 말 그대로 법을 고찰하는 거야...
불교에서 법을 가지고 판단하고 살핀다는게, 언어적 생각으로 이러니 저러니 하는게 아니라구요.
말 그대로, 법을 고찰하는 거야...
아함이나 니까야에서도 그 발바닥 감촉이라는 법이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안해요. 단지 생멸 내지 있고 없다고 이야기하기는 해요.
반야부는, 그 법이 어디로 부터 오고 가는 것도 아닐 뿐더러, 생기고 소멸하거나 있거나 없어지는 거도 아니라고 판단함이 연기의 이치에 부합하다는 주장이라...
별 거는 아닙니다. 전부 그래요. 별 거 있나?
전부 다 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라고...
법이 뭐냐... 어떻게 있고 없냐... 그 '어떻게'의 의미가 뭔가?
그게 전부라...
엄청나게 오묘한 거에서만 그런게 아니라구요.
그런데 누구나 다 평상심? 흔해 빠진 거? 그거 폼이 안나잖아... 뭔가 좀 더 오묘한 거.... 그런게 있어야 할 거 같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멸진정까지도 나오고 하는 거라구요...
그냥 드러난 법, 누구나 알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 고찰해도... 불교를 이해하기 시작해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니까...
그런데 그걸 안하고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해요.
어쩌자는 거예요.
그냥 믿고 싶고, 자기가 바라는 거... 그거 해도 부처님 불국토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부처님 불국토는 차별해서 받아들이는 불국토가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솔직히 어려워요. 무자게 어려워... 그런데 기초는요.
정말 기초는 어렵지 않아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고, 뻔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라...
다만 우리가 잘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
와 이런 식으로도 생각하고 사실을 파악하네... 천잰데?
감탄한다고...
어떻게 이런 발상을... 우와...
===
아함부나 니까야의 설명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보세요... 사람은 다 죽어.
또 태어나...
발바닥 감촉조차 어디로부터 와서 어딘가로 가는게 아닌데...
내가 죽어서 어디 가는가를 생각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걸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걷다 보니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로 가는 것도 아닌 사실들의 향연인데...
의도에 따라 법은 생멸한다고... 조건의 한계 속에서...
내가 걷는 것... 그게 내가 죽고 감이야... 그렇지 않아요?
안심이잖아...
내가 지금 가는 길, 내가 걷는 거... 그거 대로 법이 있을 거야... 조건의 한계 속에서이기는 하겠지만...
발걸음에서도요, 맨날 걷지만요. 그 발걸음에서도 알 수 있는 거라고... 안그래요?
단 한번이라도 법을 보라고... 사실을 보라고... 부처님 가르침에 비춰 사실을 고찰해 보라고...
어려운게 아니잖아요.
어려운 용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저는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말 감탄합니다.
이거는 사람의 작품이 아니야...
감탄을 넘어 승복해요.
이거는 사람의 영역이 아니야...
일찌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영역이야...
그래서 결국 불자를 자처하게 된 겁니다.
수상행식에서 식을 심왕이라고 하는데 식이 체고 수상행이 용으로 식을 강조하고 일심을 심진여문 심생멸문으로 구분할때도 무분별의 진식과 분별의 망식을 구분하죠. 망식은 수상행의 판단분별과 함께하지만 진식 본각은 판단분별이 있기전의 감지죠.
판단분별할때도 핀단분별을 감지하니 진식과 망식이 둘이 아닌 일심이라고 하고 일상에선 감지를 말하는 거죠. 황벽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말이죠.
그러니까 법계유심님에게는, "이미 너는 깨달아 있다"가 중요한 거네요. 그게 님이 바라는 거고...
그러니 그냥 불교등 어려운 말을 쓰지 말구요. "어떻든간에 나는 이미 깨달아 있다"고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망식은 수상행의 판단분별과 함께하지만 진식 본각은 판단분별이 있기전의 감지죠.
ㅡㅡㅡ
여기서 진식, 본각이란 게 사람에게 알려지는 무엇이라면 <그게 사실인가, 가능한가> 라는 논의가 성립될 수 있겠는데
추론과 판단이라면, 어차피 결론이 안 나는 문제라
가타부타할 꺼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성의가 없는 듯 해서 첨언하면...
판단분별의 감지가 성립하는데,
판단분별은 망식의 요소이지만 '감지 자체'는 (망식의 요소가 아닌) 진식이므로, (망과 진의) 일심이고...
그런즉 감지하면 곧 깨달음이 되는데요.
위와 같은 구조에서 탐 진 치를 뭐하러 손보려 하고, 사실을 바르게 파악하는게 왜 필요합니까?
그런 옥상옥을 만들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불교 용어를 사용했지만, 불교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식에 깨달음이 있든 없든 식이라는 전제 하에서 부처의 식과 중생의 식은 다르지 않다는 뜻에서 식의 성품을 아는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견성 후에 생겨난 지혜인 유식에선 무분별지혜 이후의 후득지혜와 함께하는 걸 전식득지라고 하죠.
이러한 앎과 지행합일은 또 별개라는게 문제죠..
아니, 지행합일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법계유심님의 주장 대로라면... 감지하는 매 찰나, 그냥 이미 깨달은 건데요?
무슨 견성요?
"부처님도 감지하고 중생도 감지한다, 감지한다는 점에선 평등하다"고 아는게 견성이라구요? 그거 이미 다 알잖아요.
이미 다 아는 거고, 이미 다 견성한 거죠. 부처와 중생을 구별하지만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중생은 중생이라고 생각하니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라 생각해서 부처이다.
그런즉 그 둘이 다른 것이 아닌 줄 알고, 둘을 구별하지 마라. 이것이 견성이다.
그런 주장이잖아요.
Exactly...
승속 막론하고..요즘 인터넷상 선불교 선생들 가르침의 대세가
"감지 자체"를 보는 것을 견성으로 삼거던여..
그래서 그 귀결로, 이것저것 조작하는 뭔가를 다 퇴행 혹은 중생놀음으로 보게됩니다.
그러면 방님이 언급한
ㅡ탐진치는 어카냐ㅡ는 도전에 대해서
응하기는 해야 되서..
"감지 자체" 를 지키고, 득력하고..이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번뇌는 해결된다.
이름하며, 본성에 의지하여 닦는 것이다
ㅡ라고 함다.
ㅡㅡㅡ
감자든 고구마든 어떤 곳에 힘을 실어주고
그것을 나로 삼으니,
당연히 그 외 번뇌들은 점차 줄어들겠죠..
(거기에 먹이를 안 주니깐..)
제가 보기에..
탈동일시ㅡ주시자 모드는 가오가 안 서기 때매..
포장을 좀 한 것 뿐이지, 같은 결로 보입니다
제가요...
"발바닥 감촉이라는 사실만 있는 그대로 잘 살피려고 노력해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불교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법계유심님처럼 판단만 있는 거로는 불교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법계유심님이 이해하는 바로는, 그냥 번뇌를 줄일 필요가 없습니다. 감지하지 않는 적이 없으므로, 이미 깨달아 있습니다.
앞에선 감지자체를 보면 견성이라고 해놓고
ㅡ더 할 것이 없다고 해놓고
뒤에선 꾸준히 힘을 길러 득력해야 된다고 하고..
앞뒤가 안맞죠
ㅡ라고 하면
"니가 수준이 낮아서 모른다"
"닦지 않음을 통해 닦아나가는 심심미묘법"
요러니깐.. 할 말이 없슴다..
불자인게 좋으시면요, 불자이고 싶다면요.
위에 제가 적은 발바닥 감촉과 같은 사실을 가지고, 중론의 내용도 대응시켜보고, 무상유식이든 유상유식이든 여래장계열 일심이든 뭐든... 아함이든 니까야든, 뭐든... 시설된 것을 이해하려고 해 보세요.
알아차림이든 집중이든, 주의력이 얕든 깊든, 어떻든 사실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 보세요.
사실을 가지고 접근하면, 구체적 이해가 성립합니다.
법은 오고 감이 없다... 그 말만 가지고 생각하면요, 제 자리 걸음입니다. 궤변에 빠지거나...
단 한번만이라도, 발바닥 감촉이든 뭐든 그 사실의 오고 감이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눈꼽만큼일지언정 분명 나아감이 있습니다.
물론 꼭 불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든 행복하고 평안하면 좋은 겁니다.
밑 게시글 법집과 무생법인(유마경) 댓글에 달린 유심님 글 내용 인데요
"색즉시공이니 유위법을 여의려 하지않고 공즉시색이니 무위법에 머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뜻"...
유심님 글을 보면 대개 이런 식으로 표현을 많이 하는것 같습니다...표현 경향성이라고나 할까요
근데요.과연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을 이렇게 표현 하는게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기서 꼭 유/무위법이라는 상대적 관점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즉 이라는 표현이 나왔으면 동시에 성립 한다는 의미이고...
각각을 놓고 보면 표리 관계라고 볼수 있는데요
글 만 놓고 보면 공이 곧 무위법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말이 이상하게 꼬이죠
색즉시공이라는 말도 성립이 될수 없을거구요
글쎄요...표현의 문제인지...판단의 문제인지...
이해, 판단의 문제에서요.
식체, 연기의 체... 이런 표현들요.
오온의 성립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모습)이고...멸진정 즉 없음이란,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연기(의 모습)이다.
그러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모습)과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연기(의 모습)은 서로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모습이니까... 모습은 다른데, 연기라는 이치에서는 같다...
그러니 연기의 '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둘은 '즉'이다.
위와 같이 이해하는 방식이 간명한 방식 중 하나입니다.
'식'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이 있으니 (연기의 이치에 의해) 상응한 식이 있음을 안다. 즉 '식'이라는 것이 이미 연기의 이치를 함유하고 있다.
대상이 천변만화하여 상응한 식도 천변만화하지만, 식의 체를 상정하고 생각해 본다면 어떤가...
망분별의 대상이 있어 망분별의 식이 있지만, 망분별이 없다면 망분별의 식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위에서 식이 이미 연기의 이치를 함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즉 식의 체, 연기의 체는 모습에 물들지 않는다...
전부 관념이고 판단입니다. 방편을 세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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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꿈, 꿈들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방편은 우열이 없구요, 더 적절한가의 문제는 있습니다. 더 수승한가의 문제는 있습니다. 더 깊은가의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방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방편일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 '일미(하나의 맛)'라고 할 수 있는가를 내세우곤 합니다.
우리가 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과 사실에 붙은 판단에 붙은 맛은 변형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