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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 25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 고전 11: 27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
고전 11: 25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
성찬의 잔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주께서는 그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와 맺으신 언약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죄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찬은 새 언약의 표와 확증이다.
1]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1) 식후에
본 절은 만찬이 다 끝난 후가 아니라 떡을 다 먹은 후를 의미한다.
(2) 그와 같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로 성만찬의 두번째 의식을 언급한다.
* 마 26: 27 -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 막 14: 23 -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그러나 누가복음과 본서에서는 '그와 같이'라는 어구로 그와 같은 축사의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2]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1) 이 잔은
혹자는 잔이 없이는 포도주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본문 '잔'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Grosheide).
그러나 본문에서의 '잔'은 잔에 담겨진 '포도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 절에서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진술함으로 포도주 마시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2)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본 절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동일하다(눅 22: 20). 단지 누가복음에는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가 부가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 28. 막 14: 24)고 되어 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혹자는 바울이 원시 사도 교회(Primitive ApostolicalChurch)에서 사용되었던 원형(原形)을 말한다고 주장한다(Holsten).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표현은 유대계 기독 교회에서 사용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Godet).
본 절의 '새 언약'은 '모세의 언약'과 대조된다.
* 출 24: 8 -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의 언약에서는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이 다섯 단계이다.
* 출 24: 3-11 –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1) 언약 체결을 위한 준비 작업.
(2) 여호와의 언약서 낭독.
(3) 백성들의 준행 서원.
(4) 언약의 피를 뿌림.
(5) 70인 장로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체결 완료를 의미하는 공동 식사를 나눔.
이런 과정을 거친 옛 언약은 희생의 피를 필요로 하며 피를 뿌림으로 언약 당사자들간의 책임을 인식하게 하였고, 이런 언약 의식은 매년 유월절 만찬 때 상기(想起)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세의 옛 언약은 애레미야에 의하여 선포된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다.
* 렘 31: 31-34 –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는 모세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괴하였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계를 맺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죄를 기억지 않게 하겠다는 내용임을 소개한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예수의 '새 언약'에 대한 예표로서, 더 이상 동물의 희생의 피로 맺는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영원히, 단번에 이룬 새 언약임을 암시한다.
본 절의 '새 언약'은 바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성만찬을 통해 이를 기념한다.
3]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따로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행할 때마다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여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 딤후 4: 2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전 11: 26 그가 오실 때까지 -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개역 성경에는 '가르'(*, '왜냐 하면')가 생략되어 있으나 헬라어 사본에는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가르'를 보존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1) 본 절이 예수의 강화(講話, discourse)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Ewald).
(2) 22절의 '칭찬하지 아니하노라'의 이유로 생각한다(Hofmann).
(3) 앞 절의 '나를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Godet, Hodge).
이런 견해들 중 마지막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성만찬을 행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1]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속죄의 진리를 나타낸다.
속죄란 속죄제물이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속죄도, 죄씻음도, 구원도, 영생도 없었을 것이다. 성찬은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한다.
2]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1) '오실 때까지'(*, 아크리스 후 엘데)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기념하는 행위'는 주가 재림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처럼 본 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지칭하는 것이나, 그것은 단순히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대한 확신이다(Edwards, Godet).
(2) 전하는 것이니라.
'전하는 것이니라'(*, 카탕겔레테)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한다(Edwards).
'말'로 알리는 것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바울이 역설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② '카탕겔레테'가 '알리다' 혹은 '선포하다'라는 뜻으로, '말'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두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인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고백과 대중적인 선포는 물론 성만찬 의식을 통해서 증거하고 대대로 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Godet).
요한복음 6장 53-58을 보면 성찬의 3대 축복이 나온다.
* 요 6: 53-58 –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① 영생의 복(54, 58)
② 부활의 복(57)
③ 주와 하나 됨의 복(56)
이런 복을 받아 누리는 주님의 신부가 되시기 바란다.
고전 11: 27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 -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바울의 관심은 성만찬의 규례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는 성만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23-25절)과 자신의 견해(26절)를 밝히고, 이런 규례를 고린도 교인이 처했던 상황에 적용시켜 고린도 교인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Grosheide).
1] 그러므로(*, 호스테)
이것은 이제까지 말한 성만찬의 규례를 적용시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나타낸다.
2]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
(1) 이나
이나'(*, 에)는 '그리고'(and)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or)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Meyer).
그것은 떡을 먹거나 잔을 마시는 두 가지 행위 중에 어느 하나라도 합당치 않게 행하면 범죄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당시의 성만찬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식사 동안에 떡을 먹고 그 후에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떡을 합당하게 먹는다고 할지라도 잔을 합당치 않게 마실 경우도 있다.
반면에 카톨릭은 본 절의 '에'를 근거로 해서 둘 중의 하나만을 행하고도 성만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Godet).
(2) 합당하지 않게
'합당하지 않게'(*, 아낙시오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① 회개하지 않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Olshausen, Theodoret).
②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참여하는 것이다(Billroth, Chrysostom).
③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Luther).
④ 자기 성찰(self-examination))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Bengel).
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다(Flatt).
⑥ 죄인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Godet).
이런 견해들 중 ⑤와 ⑥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들간의 교제로 생각지 않고 단지 헬라인의 관습처럼 즐거운 연회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3]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했을 때 범죄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그래서 카톨릭과 루터교는 본 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 임재를 의미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상징'에 대한 범죄는 곧 상징이 나타내는 대상에 대한 영적(靈的) 범죄이기에(Godet, Meyer) 그들의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성찬의 떡과 잔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물론 떡이나 포도즙 안에 그의 몸과 피가 있다거나 그것들이 그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살핀 후 이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