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한림읍 한림리 1118번지
이익우(1910∼1996)의 본관은 전주. 구한말 정의군수를 역임한 이언길(李彦吉)의 증손이며 이한구(李漢九)의 아들이다. 애월리 출신 의사 장한규의 딸 장경렬과 혼인하였다. 그는 서울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하고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법정(法政)대학을 졸업, 일찍부터 한림보통학교 학동들을 중심으로 ‘한수풀소년단’을 조직 지도했다.
제주도 공산당 야체이카의 계보를 살펴보면 먼저 송종현(宋鐘炫: 신촌, 27)이 귀향하여 제주청년연합의 핵심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여 몰래 공산당 입당을 권유, 다수의 청년들을 정식 당원으로 입당시켰다. 우선 1927년 8월 초순에 한상호(韓相鎬 27), 김택수(金澤銖 27). 강창보(姜昌輔 26) 등을 자신의 집에 불러서 가입시켰다. 조선공산당(제3차)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 송종현을 책임자로 하여 동년 10월 초순경 제주도 건입리 해안가에 모여서 야체이카회를 개최하였다. 또 송종현의 권유로 7월에 윤석원(尹錫元 21), 이어 11월에 한상호의 권유로 김정로(金正魯 21)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들 외로 구좌면 우도(牛島)의 신재홍(申才弘 28), 구우면의 이익우(李益雨 17), 대정면의 오대진(吳大進 30) 등이 입당하였다. 이 때 이익우는 외종형이며 4년 연상의 김정로의 권유에 의해 비밀히 입당하였는데 야체이카 회원중 가장 어린 17세의 소년이었다. 1931년 5월 제3차 조공(朝共) 제주도 야체이카 결성에 참여하여 농민부를 담당하였다. 1931년 독서회 유형의 비밀결사는 이 시기에 상당히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931년 4월 구우면 한림리에서는 이익우, 김경봉, 양창권, 윤평석, 장한호 등이 실정을 파악하고, 다시 이 독서회의 회원인 김경봉(金京奉)이 같은해 6월에 김진섭, 고경희, 양석찬, 장한호 등을 규합하여 또 다른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이들 독서회에서 사회주의 개론, 자본주의의 음모, 프롤레타리아 경제학, 맑스 엥겔스 전집 등 사회주의 서적을 연구하여 의식화에 주력하였다. 이들 독서회는 지역의 청년 가운데 주로 학력이 뛰어난 계층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5월 5일 한림보통학교 재학생 4백여 명이 1일 간 맹휴(盟休)를 결행했는데 이 동맹휴학은 그가 뒤에서 실제 지도하였다. 제주야체이카는 1931년 9월 세금불납운동, 강제묘목배포반대투쟁을 지도했으며 1932년 1월 해녀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에 앞서 동지 강창보, 신재홍 등과 5명이 모여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자 비밀 간담회를 개최, 급진적인 변혁을 위해서 제주의 조선청년동맹 및 신간회(新幹會)를 해산하기로 하고 1931년 5월 16일 애월 김원희(金元熙) 집에서 강창보, 오대진, 김한정, 신재홍 등 5명이 모여 강창보 제의에 따라 조선공산당 제주 야체이카 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구우면 지역은 이익우의 역할 담당 지대였다. 이익우는 1931년 12월중에 김태안(金泰安), 고운선(高雲善) 등을 동지로 하여 구좌(舊左) 일대에서 해녀항일투쟁의 배후 인물로서 1932년초 체포되었다. 동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6년을 선고하자 항소,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 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4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전국노동조합협의회(全協)와 일본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光州)지부 선전부장으로 뽑히고 또 동년 9월 광주인민위원회 서기국장으로 선임되었다. 조공(朝共) 전남도당 준비위원회에 참여, 동년 12월 조선인민당 전남도당 결성준비회에서 임시 준비위원으로 선출되고 1946년 6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재정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미군정에 의해서 체포령이 내려지자 광주에서 피신, 경찰서에 구금 중이었는데 경찰서 소속 현직 경찰관(이대지의 사위)을 매수하여 가짜로 포승을 채운 체하고 지리산(智異山)을 넘었다. 경남 하동(河東)을 거쳐 부산에 은신하던 중 경찰관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도착하였다.
1989년 9월에 일본에서 고향을 찾았던 그는 오래 잊혔던 제주도를 돌아보며 감격에 젖 어 당시를 되새기며 “기존의 유교사상이나 계몽운동은 한계에 부딪혔고 반봉건·반제국주의 사회주의 사상이 독립운동의 유일한 힘이 되었다. 해녀항일운동의 경우도 단순히 자연 발생적인 생존권 싸움이 아니라 야체이카들의 지도에 의해 조직적으로 전개한 항일 정치 투쟁이다. 해녀 항쟁의 주동자들도 조직원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또 정색을 하면서 의미 있는 애기를 던졌으니 “제주 야체이카 사건은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다는 이유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실은 1996년 제주도에서 발행한 「제주항일독립운동사』에는 이 분야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다만 당시 실형을 받았던 22명 중에서 세화리 김시곤(金時坤)만이 독립 유공자로 공훈록에 등재되고 나머지는 미등재(未登載)된 상태이다. 탈이념적(脫理念的)이고 비냉전적(非冷戰的)인 사고 전환이 요구되는 이 때에 이들에 대한 항일 투쟁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후 줄곧 일본에서 살다가 1996년 7월 암으로 사망하였다. 이듬해 9월 2일 독립투사의 유해(遺骸)는 며느리의 품에 안겨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외아들 이성혜(李成蹊)는 마중 나온 외숙 장시우(張時禹. 90, 애월), 이익우의 고향 후배 고경흡(高景洽. 84 한림), 또 독립운동가 고영호(高濃豪. 한림) 등에게 인사를 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원로 혁명투사가 그렇게도 독립을 갈구하며 찾았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유해에 꽃다발 한 아름 바치는 이 없어 쓸쓸했다. 처남 장시우는 당시 “이익우는 홍양명(洪陽明), 고경흠(髙景欽)과 더불어 세인들에 의해 '제주 후기 삼재(三才)'라고 불리어졌다. 전기 삼재란 김명식(金明植), 김문준(金文準), 고순흠(高順欽)을 일컫는다. 또 나의 여동생 장경렬(張璟烈)도 항일동지 관계로 깊게 맺어져 투쟁했었다.”고 밝혔다. 산북 서북 지역에서 가장 큰 항일업적을 남겨 존경을 받았던 그는 1997년 9월 유해(遺骸)를 제주 운구, 한림읍 귀덕리 멀왓 지경 어머니 묘 옆에 안장되었다.(제주항일인사실기) 미서훈
《작성 202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