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우리 외것집은 외할머니와 어머니 기준으로 볼때 외삼촌 2분 아래로는 이모 2분 막내 외삼촌 즉 7분이 계셨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1살 때 돌아가셨다,
큰외삼촌은 일찍 결혼 하시어 직장이 서울인지라 서울서 사셨으며 때로는 외할머니 뵈러 대전에 자주 내려 오셨고 외숙모는 맏며느리 역할을 충실히 하셨다.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 둘째외삼촌 막내외삼촌 막내 이모가 계셨다. 그러나 큰 이모는 보이지 않았으며 존재 자채를 몰랐다. 그런데 둘째 외숙모는 기억에 없었다. 뵌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6학년때 우리집에 오시어 내 얼굴을 어루만졌던 아주머니가 둘째 외숙모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큰외삼촌은 내가 태어나기전에 결혼 하셨으며 돌째외삼촌 큰이모는 유아시절에 결혼하였기에 예식장에 간다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본다
그러나 막내외삼촌과 막내이모는 다르다. 초등학교 시절 2분을 자주 뵈었으며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집에서 우연히도 막내이모 결혼사진을 보았다. 양가 집안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는데 어머니도 계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없었으며 나와 내 동생들도 없었다. 사진에서 만 보았던 이모부는 중학생때 처음 뵈었다. 막내외삼촌과 외숙모가 중학교 2학년때 우리집에 오셨고 처음 뵙게 되었으며 갓난아기가 있었다. 막내외삼촌이 결혼 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그러나 단 한번 보았다고서 얼굴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막내 외숙모의 경우 군대가기직전 외할머니와 함께 막내외삼촌 댁에 갔는데 먼저 도착했고 막내외숙모가 나중에 들어오셨는데 서로 몰랐으며 외할머니가 소개해주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촌들도 알게 되었다.
다른 외사촌과 이종사촌들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외삼촌의 아들 딸들은 언제 만나는지 기억에 없다. 확실이 기억난 것은 8살 때 작은고모 결혼식때 둘째외삼촌의 첫째딸 외사촌누이를 보았다 큰 이모는 수년 지나 만났다. 우리집에 왔는데 이모인줄도 몰랐고 이종사촌 얼굴도 몰랐다.
큰외삼촌네 외사촌들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직전 큰외삼촌댁에서 만났다 큰이모부와 큰이모 경우는 초등학교인가 중학교때 알게 되었고 이종사촌들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사촌들도 비숫했다. 왜 이렇게 됬을까
나는 자라면서 친사촌과 고종사촌들과 어울렸으며 고모댁에도 자주갔었고 고모들도 자주오셨다. 작은고모와 막내삼촌 결혼식에는 참석하였다. 할머니가살아계시기에 가능 하였다. 할머니는 외할머니를 좋아하질 않했으며 같이 사시는 어머니를 싫어했으며 아무리 잘해주어도 소용 없었다. 그러나 작은어머니들에게는 잘해주었다. 할머니는 6.25전쟁때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맏아들인 아버지를 끔직히 위해주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아버지를 의지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할머니라면 끔직하게 대해주는 효자였다. 할머니 입장에선 괜히 며느리가 싫어진 것이다. 아버지의 직업은 사회에서 알아주지 못하는 직업이었고 벌이가 좋질 않했으니 잘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자주 싸웠으며 할머니와도 자주 싸웠다. 처남들의 직업이 공무원과 공사직원이니 더 더욱 가기가 싫으신 모양이었고 더 큰 이유는 돈으로 인해 갈등 있었다. 그래서 외갓집에 잘 안가셨고 외할머니가 오셨지만 외면하였고 어떤날은 외할머니가 아버지를 피하였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외사촌들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이름도 몰랐으며 와도 반가워 하질 않했다. 어머니도 추한 꼴을 생질들에게 보여주기 싫은것도 있었다. 요즘 여자들이라면 도저히 용납 못하며 이혼하고 만다.
외갓집에서 나를 볼 때 맏딸의 맏아들로 큰 외손자요 큰 생질조카이건만 오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어머니가 설령 나를 데리고 간다고 하더라도 할머니가 반대했으리라 본다. 여담이지만 내가 태어난 후 외할아버지가 나를 안아 보고 싶으셨다고 하셨지만 할머니가 허락을 해주질 않했다고 한다.
아버지 돌아기시고 난 후 부터 못간 이유를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어머니에게 외삼촌 이모 결혼식때 아버지 가셨나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셨다고 대답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년전 직원에게 이모 외삼촌 결혼식에 한번도 못갔다고 말했더니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응수했다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서서히 감정이 풀어지셨다. 아버지의 동생들이 여러 사유로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어 갈라졌다. 큰이모가 어머니 일에 잘 도와주시고 막내외삼촌은 누이동생이 같은 공사 직장인이며 인성 좋은 남자를 소개하여 시집 갈 수 있도록 중매를 잘해주셨고, 나를 위해 힘써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외삼촌은 살던집을 어머니께 싼 가격으로 넘겨주어 넉넉하게 사시도록 해주셨으며, 큰 외삼촌 환갑잔치에도 부모님이 함께 가셨다. 할머니 돌아가신후 마음이 적적하신지 외할머니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구순 넘으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원만하게 치르도록 해주셨다.
지금 막내 외삼촌만 살아 계신다. 그러나 외숙모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 외삼촌께 결혼사진 보여 달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젊었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때 일을 못잊어하며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 받는다.
아무리 처가가 싫고 사돈이 싫다고 해서 대소사에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다. 손자와 아들은 같은 혈육이 아닌가. 지금은 친가만 가족이 아니며 외가도 엄연한 가족이라 본다. 시집간 딸이 출가외인이라지만 외가에서 볼 때 친가가 되는 셈이다.
어머니의 선조들도 나의 선조나 다를바 없으며 우리 외갓집 족보도 알고 싶다. 몇 대조 직계 할아버지 2분이 국사책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이 계신다. 물론 내 족보도 완전 꿰고 있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똑같이 50% 유전자를 균등하게 물려받으며 모계 유전자 영향도 무시 못한다. 호인이신 우리 외할머니는 대문이 깨끗해야 찾아오는 손님들이 기분이 좋아진다며 자주 청소하였다. 당신을 싫어하는 사돈이 치매와 풍으로 쓰러졌을 때 찾아가보았으며 장례때도 외서 조문 하셨다. 며느리들을 차별없이 잘 대해주셨고 친손자 외손자 구분없이 똑같이 대해주셨다. 큰딸 갓난아기 시절 옷 1벌을 사주셨다.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며 장례때 정성껏 거들어 주었다. 외할머니는 외삼촌들을 통하여 장례 끝나는 날 저녁 친손자 외손자 골구루 똑같이 5만원 용돈을 주셨다. 내가 노년이 되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삶의 본보기로 삼고싶다.
첫댓글
청우우표 님의 가족사도
대 가족이 십니다
외갓집이 정이 넉넉하시네요
청우우표 님께 선요
저의 집엔 외갓집의 좀 가족들이 많지 않으셔서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니요
이젠 나 본인의 삶의 마무리가 중요하기도 합니다
가족사의 글에서
우리 외갓집 엄마의 모습도 그려봅니다
그리운 엄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엄마...
청우우표 님